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13

KU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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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생각보다 길어졌고, 집에서 마시다보니 차라리 자고 가라는걸 거절하기도 뭣해서 그렇게 되었단 설명을 현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허점이 가득한 변명일텐데 으레 돌아왔어야 마땅할 의문들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소한것부터 시작해, 이 관계 전체가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것도 있었으니 불안은 침묵을 재생산했다. 안그래도 요근래 영 피상적인 것들로만 맴돌던 대화의 주제는 더 줄어들어 대체로 아주 근시안적인 것에 머물렀다. 출장 준비나 정해지지 않은 일정 같은 것들. 심지어는 그 일정의 대부분을 동행할 민대표의 마지막 점검차 있었던 방문 때도 현은 거의 입을 떼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잘 땐 같이 자자고, 화를 내더라도 자길 모른체는 하지 말아달라던 현의 설움 가득한 요청을 정확히 체감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현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어보이면서 마치 떠날 사람처럼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것이 본인의 출장 채비인걸 알면서도, 언뜻 예기치 못한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돌면 가경은 테라스로 도망쳐 숨을 골랐다. 

-

- 선배, 거기-

- 응? 

들고나는 사람들로 번잡하고 들썩이는 공항에서, 저를 부르는줄 알고 대답을 서두른 가경은 의도치 않게 현의 말을 끊는 바람에 아예 그쪽을 향해 돌아섰다. 아 미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고개를 흔들어 넘겼던 가경은, 팔을 좌우로 벌리고 장난스레 눈썹을 올린 현이 내려둔 가방을 피해 그 품을 마주 끌어당겼다. 우습게도 체취보다도, 손 끝으로 느껴지는 익숙한 강도(?)가, 그 부드럽고 단단한 품이 머잖아 꽤나 떨어져 있을 일을 실감하게 했다. 

- 생일을 거기서 선배 혼자 보낼거라는게 걱정돼요.

- 혼자는. 민대표도 있고 동행한다는 법무팀이랑 다들,

- 그런거 말구요. 

알아. 안은 팔에 힘을 주는 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꽤 오랜만의 스킨쉽인 것 같았다. 밀려드는 오만가지 잡생각이 캔버스 위의 물감처럼 섞여들어 미안함의 형태로 번져나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 입술을 달싹이다, 살며시 몸을 떨어뜨리곤 눈을 마주치는 현에게 시선을 맞췄다. 

- 제가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으니까, 기다려주세요

- 알았어

- 선배 우리.

- 응

- 선배 돌아오면요.

- 어

우물쭈물 말을 고르고 있는 현의 투명한 몸짓이 저와 다를바가 없었다. 발 끝에 힘을 꼭 주고 멋대로 넘실대는 감정을 누르자, 반동같이 움직인 팔이 현을 도로 끌어다 껴안았다. 다녀올게. 빨리올게. 다녀와서 보자. 미안해. 대답없이 어깨에 턱을 올렸던 현이 그대로 이마까지 얼굴을 내리며 뜨듯해진 숨을 뱉었다. 끄덕이는 탓에 함께 흔들리는 어깨를 추스르며 드러난 현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 어….저 먼저 들어갈까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멋적은 표정을 하고 서서 등 뒤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민대표 때문에 별 수 없이 스르륵 물러난 두 사람은 각자 취향껏 고갤 젓고 얼렁뚱땅 인사를 나눴다. 팔을 내려 손을 한 번 쥐었다가,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브라이언. 세상 비장하게 그쪽을 향해 내밀며 자길 인도하는 현 때문에 너무나 당황한 민대표의 얼굴은 좀 재밌었지만. 딸래미 식장 들여보내기도 전에 이런 연습을 다해본다는 헛소릴 했다가, 무슨 대답을 해보기도 전에 현의 눈길을 받은 민대표는 흐흐 어색하게 웃으며 가경의 짐가방을 자연스레 넘겨 받았다. 

- 제가 가져가면 되는데..

- 예에. 알죠. 잠깐 하는 척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쪼기, 입국심사까지만이라도. 그 저기가. 예. 쳐다보구 있어가지구. 

시선을 털어내듯이 탁탁 손을 휘저은 홍주가 성큼성큼 딛는 걸음을 쫓아보니, 입구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았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현에게 고갤 끄덕였다. 들어가. 밥 잘 챙기구. 무리하지말구. 청자가 저쪽이 맞느냔 듯이 몇 번을 번갈아가며 현과 자길 건너보는 홍주의 시선은 적당히 무시했다. 안녕. 문을 넘어설때까지 그대로 들려있는 손이 여전히 양옆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 나라고 알겠냐. 송가경 자리 비운건 어떻게 알고..

- 알고 그런건 맞아?

- 다시 말하지만, 나라고 알겠나요 스칼렛?

여태까지 둘 사이의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양상은 모두 잊은듯, 바로 곁에 붙어서 똑같은 자세로 팔짱을 끼고 통창을 등진 두 사람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이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이 사무실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어울릴 수 없는 분위기인 백발의 포니테일이 안쪽 사무실 한켠, 주로 외부 인사의 미팅에서 쓰이는 포근한 분위기의 회의실 [Summer]에서 미동도 없었다. 캘린더에 잡혀있는 ‘투자사 오퍼에 대한 세션 요청’ 블럭의 그 짧은 한줄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사태가 황당했다. 신규 투자사 같은거야 뭐, 핏이 맞아 받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여유로운 입장이 만든 참사는 오로지 타미와 현만이 초조할 뿐, 나머지 직원들은 그저 저 정도 입지전적 인물이 직접 온 일에 신기하고 놀라워하며 들뜬 웅성임을 뭉게뭉게 퍼뜨렸다. 

- 어떡할까. 

- 타미는 그래도 구면 아니에요?

- 야 내가 유니콘 출신이지 KU 며느리 협동조합에라도 있었던것 같냐? 해고청탁만 당해봤지 본인은 처음봐요 나도. 

- 그럼 뭐. 같이 들어가죠 타미. 오랜만에 부탁 하나 하자.

- 브레이크? 

- 어 브레이크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뜨린 손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강하게 한 번 맞잡고 눈빛을 교환했다. 역설적이게도 서로의 눈에 서린 긴장감이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을 조금쯤 누그러뜨렸다.

- 가요 타미.

- 어.

문을 박차고 - 말그대로 발로 걷어차듯이 밀어재끼고 - 들어서는 현과,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면서 빙 돌아 맞은편 자리에 앉아 마실것을 권하는 타미의 서로 다른 온도차이에도, 지루한듯 손톱 끝을 들여다보던 장회장은 그대로 시선만 조금 올려보일 뿐이었다. 조소같이 비뚜름한 미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가 생겼던 것만큼 느릿하게 도로 사라졌다. 내가 니들이랑 얘기할 체급은 아니지? 꼬고 있던 다리의 무릎 위로 손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는 느긋하고 한편으론 유약해보이기 마저 하는 몸짓과는 달리 또렷한 목소리엔 날카롭게 벼려진 분노와 같잖음이 뒤섞여 있었다.

- 투자건으로 오셨다구요

- 너, 그 얼빠진 애구나. 청문회.

- 먼 걸음 하셨는데. 지금 렙유가 투자 라운드를 적극적으로 진행중인 상황이 아니라서요 회장님.

- 회장님은 얼어죽을..

질문 아닌 질문은 먹금하고 지 할말만 하는 애나, 대놓고 분위기 흉흉하게 혼잣말을 지나가던 개미새끼도 들리게 하는 애나, 딱 떨어지는 흰색의 정장차림인 장회장에겐 손톱 만큼도 닿지 않는듯 했다. 하- 우습다는듯이 한숨인지 비웃음인지를 섞어 뱉으며 하나로 묶인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희은은 곧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등받침에 기대며 좌우로 의자를 미끌어뜨렸다.

- 지루하다 니들. 얘, 송가경이 니들보고 나가보라디? 왜. 시시하게 그까짓 위자료 몇푼 떼어갔다고 이제 꼬리 말고 숨어버렸나-

- 이 사람이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아마도 쥐어 터뜨릴게 필요했던지, 한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탁자 위로 텅- 소리가 나게 내려둔 현의 달려들듯한 기세를, 목 근처를 긁적이며 강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보던 장회장은 여전히 일말의 관심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 장희은씨. 이 회사에 당신네 자본에 침흘릴 사람은 없구요. 있더라도 없어질거니까 꿈 깨시기 바랍니다. 그쪽이야말로 그 더러운 돈 몇푼에 사람들이 다 당신한테 굽실댈거란 근거없는 망상에서도 이 기회에 좀 벗어나시구요.

- 차현? 브레이크~

옆자리에 어쩐지 온도가 좀 오른듯해 돌아본 타미는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붉어진 현의 허벅지를 도닥였다. 목소리는 북극 바다 한복판에서 퍼올린 빙하 같은데, 이마 옆에 돋은 핏줄은 곧 터질듯이 불거져 나온게 영 불안했다. 아니 씨- 브레이크고 나발이고- 이를 악물며 짜증이 섞인 목소릴 씹듯이 뱉는 눈꼬리가 꼭 송가경 마냥 날카롭게 휘어져 올라가있었다. 아니 지가 브레이크 해달라더니. 부라리는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타미의 그 무언의 메시지를 받은건지 만건지, 새빨간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놓는 현을 바라보는 희은의 눈이 처음으로 흥미로 반짝였다.

- 아-

- 뭐

- 그래. 가경이 걔가 이쁘장한걸 좋아했지? 내가 걔랑 같이 산 세월이 10년인데, 그 애 식성은 그대론가 보구나?

- ..이게 진짜 미쳤나..?

- 아이, 시시해. 유니콘은 지꺼라고 그렇게 눈을 부라리고 나대더니 고작 이런거나 끼고 있으려고. 차-함 웃기지.

단전에서 올라오는듯한 현의 이글대는 분노 같은건 코웃음을 치는 희은의 이어지는 읊조림에 뚝, 갈 곳을 잃고 튕겨 나갔다. 마찬가지로 당장에라도 튀어나가려던 몸짓이 멎은 현도. 가경이 인생을 바쳤던 것과 그 상실의 과정. 새로운 목표. 꿈. 성장과 합병. 바로의 투자. KU.

송가경. 송가경. 송가경. 선배..

복잡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희은을 응시하는 현이 당장에라도 인생은 실전임을 굳이 이 자리에서 알려주려는 모양새를 멈추는 것을 확인한 타미는, 서둘러 더이상의 미친 소릴 차단하기 위해 머릴 굴렸다.

- 아무튼 회장님? 당사는 현재 투자처를 적극적으로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송대표는 해외 출장중이라 부재구요. 아마 저희 대외쪽 직원이 다른 가망 투자사중 하나로 생각해서 브리핑 일정 잡아준 모양이네요. 원하시면 IR 자료는 메일로 공유드리겠습니다.

- 송대표가 해외출장을 갔으면, 소문이 사실인가보네?

- 나가는길 안내드릴까요.

- 니들이, 비지니스할 생각이 있음. 송대표한테 전해. 그 계열사 합병이 아니라 인수할 매수금의 두배. KU에서 투자하겠다고.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장회장님? 이 회의실에서 2시 반부터 다음 미팅이 있어서요.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고 등을 기댄 타미의 발뺌에 희은은 재밌다는듯 빙글대며 블레이저 끄트머리를 가볍게 잡아당겨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고분히 문을 나섰다. 여전히 자리에 앉은채 나가든 말든 이쪽을 돌아볼 생각조차 없는 현의 옆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흥미롭다는듯 장난끼가 묻어나는 미소로 타미의 애간장을 좀 태웠으나 그뿐. 나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더니, 희은이 나가자마자 도로 문을 닫고 통유리 건너편에서 싱긋 웃어 보인 타미가 그 시선을 차단하자 그대로 시야에서 영영, 사라졌다. 그 파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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