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그 후의 일상 14
빈자리의 법칙
라운지를 지나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넓은 사무실 중 왼편. 넓직하고 듬성듬성, 빈책상을 두고 여유롭게 원하는 자리를 골라 앉던 프로덕트실은, 이젠 사람이 자꾸자꾸 늘어 꽤나 빽빽했다. 구성원들이 개인적인 선호나 친분, 기타 등등의 이유에 따라 방랑자 마냥 자리를 옮겨다니던 때는 젊은 애들은 원래 저러는가 싶었는데 이젠 찾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 굳이 눈을 들지 않아도 알았다. 그러는 동안 내내, 제일 안쪽 깊숙한 곳 작은 회의실 바로 앞에 자릴 잡은 타미의 자린 바뀐적이 없어 더욱 그랬다.
왼쪽으로 고갤 돌리면 통창 두개를 건너 현의 자리가 보일듯 말듯한 자리. 커다란 화이트보드 한가득 붙어있는 일정, 레퍼런스, 아이디어, 연락처며 업데이트되는 현황판 숫자까지, 자리의 통창까지를 침범한 것들로 인해 언뜻보면 혼란스럽고 본인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곳에 그 주인은 지금 부재였다. 요즘 애들 마냥 사무실 곳곳을 노트북 하나 덜렁 들고 떠도는 애니까 뭐. 읽고 있던 주간보고 문서창을 닫으며 자꾸만 시선이 분산되던 곳엘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던 타미는 잠시 눈을 감고 뒷통수를 기댔다. 어디에, 누구랑 있을까. 전여친 마냥 자꾸만 집착하게 되는 빈자리의 주인공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럴리 없지만 자기를 피해 자꾸만 자릴 비우는 것 같단 못생긴 피해의식 탓에 어디냐 묻기는 괜히 좀 자존심이 상했다.
-
..
…
- 어떻게 생각해
- 하- 나 진짜. 뭐? 식성? 노친네가 노망이 났나.. 사람이 가진게 많아도 곱게 늙는게 중요하구나. 그렇게 생각해
- 너의 노후에 대한 질문이 아니잖아요 스칼렛
- 그럼, 뭐. 지금 저런 말같지도 않은 소릴 듣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됩니까 타미? 생각하는게 의미가 있기는 합니까
-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KU가 움직인다는거 자체가.
- 움직이긴 뭘 움직여. 괜히 선배 하는 일에 훼방 놓고 싶어서 그러는거 아니야. 됐어요. 나 귀 씻으러 갈거야. 타미도 못 들은 걸로 해
- 저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일이 어떻게 될줄알고. 일단 오늘 북미시간 맞춰서 미팅부터 잡자
- 북미? 선배랑? 배타미. 선배 지금 브라이언이랑 있어. 그것도 지금 인수 합병할 회사 실사와 투자금 조건 검토를 목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 마요
하다못해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는 부정의 기회라도 주려면 아예 말을 마는게 낫다는 현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거나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식으로 조건이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면, 계약도 함께 뒤집어질 수 있는거니까. 하지만 그 그럴듯한 이유 뒤엔, 이 이야기가 가경의 귀로 들어갈 경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싶을 차현의 개인적인 감정이 우선할 것이라 타미는 미루어 짐작했다. 그 입장을 공감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겠어서 빙글빙글맴돌던 주제는 과녁을 찌르는 화살이 되지 못하고 번번히 변죽만 울려대다 영점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른 깝깝한 이 마음조차도, 잠재적 위협에 대해 최대한 빨리 가경에게 전달하고 대비책을 만들고 싶은 타미에겐 한스푼 듬뿍 퍼얹은 무게추와도 같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했었던가. 분명히 반반 잘 쪼개서 실어뒀다 생각한 계란 바구니는 지들 멋대로 이쪽 한 쪽으로 우수수 자릴 옮겼다가, 저쪽으로 또 다 같이 우수수 자리를 이동하곤 했다. 주인의 의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마치 계란이 아니라 삐약대는 병아리새끼들 마냥. 그리고 심지어 지금은 그 계란, 아니 병아리 바구니는 비행길 타고 날아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이 미쳐버린듯한 적립식 투자는 복리의 마법이 아니라 상폐를 앞둔 코인 쪽에 더 가까워보였다.
3년 전이었음, 아니 5년전, 10년 전이었다면. 정해져있는 답을 자꾸자꾸 머릿속에서 그렸다가 또 번복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미 우회상장 이슈로 거리감이 생긴 현과 당장에 직접적 충돌을 좀 피하든 미루든 했음 좋겠단 현실적 문제도 섞여 있는지 몰랐다. 여태껏 별의별 이유로 치고박고 싸워봤다지만, 둘 중 하나가 이탈할 가능성 같은게 도마 위로 오른건 근 5년 만이니까. 그러니 백번, 이백번 양보해서 현에게도 그리고 현과 자기 관계에도 어찌럭 저찌럭 시간을 좀 만들어주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다만, 장회장이 쏘아올린 머리통만한 쇠공이 가경에게 채 닿기도 전에 이미 온회사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사방에 구멍을 내고 있으니...
- 자냐
- 엌- 씨 깜짝이야..!
헤드에 기대 몸을 한껏 기울이고 있던 타미는 이마 위롤 가볍게 톡톡 두드린 손가락에 놀라 늘어진 의자 위를 조금 허우적댔다. 여러가지하네. 퉁명스런 말투에 반해 무릎께를 다리로 슬그머니 누르며 팔뚝을 가볍게 쥔 현의 입술 끝이 움찔거렸다.
- 좋은 꿈 꿨습니까 타미?
- 안잤어
- 코골던데
- ..뭐?
일순 당황해 되묻자마자 함정임을 깨달았으나, 그보다 반의 반 템포쯤 빠르게 잤네. 재수없는 목소리가 아주 확신에 차있었다. 저 싸가지.
- 안 잤다고. 아 왜. 왜 왔는데. 넌 근데 뭐하고 싸돌아다니느라 내내 자릴 비우냐
- 내가 내내 자리를 비운건 왜 추적하는데?
- 추적은 누가 추적을 했다 그래!! 눈만 돌리면 니 자리니까-
피식 웃으면서 손을 들어 나불대는 제스처를 취하는 얄미운 애의 정강이를 걷어차려 했으나, 여유롭게 다리를 빼내며 잡았던 팔을 훽 돌리는 바람에 의자에 앉은채로 360도를 돌았다. 죽을래. 반사.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손바닥을 쳐내자, 나오라는듯 턱짓을 하는 현이 먼저 큰걸음으로 휘적휘적 사무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전에, 노트북을 챙기는척 한바퀴 돌아본 사무실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둘이 좀 티격태격한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이거나, 한두마디씩 이죽이던 참견들이 자취를 감췄으니, 그 대화들이 다 어디로 갔을진 빤했다.
- 바빠?
- 아니. 맘만 불안하지 뭐. 피드팀, 엔진팀 할거없이 지금 다 스탑이잖아요. 결제팀만 지금 간편결제 붙일 준비한다고 개발자들 다 머리 빠개지지. 그로쓰는요
- 알잖아요
- 뭘
- 뭔지 모르면 됐구요-
심드렁하게 한숨을 뱉는 현의 말투엔 옅은 짜증이 묻어났다. 노트북을 밀어 올리면서 동시에 다리도 죽 뻗어 미끌어지는 현에게선 뭔가 명확하게 원하는 대화주제가 있는듯한 초조함과, 가능하다면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듯한 껄끄러움이 함께 느껴졌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차현에게선 보기드문 불확실성은, 그와는 반대로 주로 기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상태의 어떤 선을 따라가는 타미마저 심란케 했다.
- 장회-
- 밥먹을래?
- 언제
- 지금. 너 내일 생일이잖아. 맛있는거 사줄게
- 내가 내일 생일인데 오늘 저녁약속도 없을것 같은가보지?
- 어
- 잘 아네. 니가 사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어색하게 고갤 끄덕인 가경은, 살풋 웃으며 그럼 10분 아니 15분 내로 얼른 씻고 나오겠다는 아라에게 천천히 하세요..들리지도 않을 대꾸를 욕실 문 뒷편으로 굴려보냈다. 홍주의 자연스러운 소개로 시작해 인사를 나누던 중에 발견한 낯익은 얼굴이, 타미가 ‘바로’로 넘어가면서 데려갔다던 그 사내카페 알바라는건 솔직히 금새 알아차렸다. 모르는척을 해주어야 할지를 조금 고민하다가, 우리 구면이죠. 조심스럽게 건넨 인삿말에 싱긋, 젊고 쾌활한 미소로 화답하는 그에게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이렇게 한 방을 쓰게 될 줄은.
출장지의 낯선 공기와 시간축이 휘어진대서 오는 지끈대는 피로감에도 슬슬 익숙해진 즈음. 그러니까 도착해서 거의 열흘이 다 지나갈 무렵, 가경을 비롯해 ‘바로’의 출장인원들이 묵고 있던 호텔에서는 작은 불이 났었다. 지나가고서야 별거 아닌 소소한 화재라 칭하지, 새벽 2시가 지나갈 무렵 적막한 복도의 공기를 갈라놓는 화재경보음에 온통 엉망진창으로 뛰쳐나가는 대열 속에서 가경은 현을 생각했다. 차라리 혼자 오길 다행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바로 밑에 층의 화재라 자욱한 연기속에 푸르스름한 비상구 불빛을 가늠할 때엔, 여권도 없이 나온 주제에 뒷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 화면을 쓰다듬어 보긴 했더랬다. 그래도 보고싶어서.
뭐 그런 센티멘탈하고, 시끌벅적했다가, 아주 피곤하고 지리한 밤을 보내고 난 뒤. 화재가 난 층 전체는 물론이고 그을음 제거를 위해 일주일은 위아래 층까지를 모두 비워줘야 겠다는 호텔측의 요구는 어이가 없지만 합당한 수준이라 생각했다. 전액을 환불하겠다 했으니까. 근데 이제 하필 여름 극성수기, 안그래도 인구밀도 터져나가는 베이 근처엔 하다못해 2-3일 단위로도 남는 방 따윈 없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달까. 자기가 조금 먼 곳에 방을 구하고 사무실로 출퇴근을 해보겠다는 가경의 제안은 사실 본인을 위함이었으나, ‘저 방 혼자쓰고 있어요!’ 번쩍 손을 드는 아라의 배려심 넘치는 초대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타미의 부사수였다더니. 아무래도 사수에게 그 눈치코치는 딱히 전수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내내 붙어다니며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독특한 종류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간직했던 타미처럼.
- 이사- 아 아니지 참. 대표님 씻으세요! 제가 안에 가운 걸어뒀어요
- 편하게 불러주세요. 바로에서도 영어이름 쓰시잖아요 엘리
- 아~ 네 그쵸. 근데 대표님도 저한테 말씀 편하게 안하시면서.
마른 몸 위로 가운 하나를 덜렁 걸친채 입술이 시옷자로 올라가며 웃는 아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궁색한 대답을 고민하다가, 들려주는 수건을 받아들고 어영부영 욕실로 쫓기듯 들어섰다. 타미를 닮은 점이 있는 것도 같았다. 덥혀진 욕실의 공기 속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색하게 굳어진 표정을 바라보다 바라보는 사람도 없는데 느릿하게 고갤 저었다. 배타미가 있었음 이걸 얼마나 놀려댔을거야. 킥 웃음이 나오는걸 감추려 수전을 잔뜩 돌려놓고 쏟아지는 차가운 물 아래 손을 넣었다. 가볍게 훔친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이 사태를 현이 알았음 또 얼마나 길길이 날뛸거야.. 어우. 치약의 맵고 상쾌한 향이 입안으로 퍼지는 동시에 자꾸만 웃음이 번져, 뚜껑을 닫은 변기에 걸터앉아 밖에서 들리는 헤어드라이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의 여성인원이 홀수라 가위바위보로 혼자 방을 쓰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던 아라의 호텔 방 화장실.
그리고 침대는 더블베드.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천천히 칫솔질을 하는 가경의 난감한 밤, 친절하게도 화장실까지 걸어둔 시계가 고작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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