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그 후의 일상 15
커피향에 묻은 편지
생일 턱이라고 신경 깨나 쓴 모양이지.
가경이 빠지는 경우 둘이라면 종종 어울려 다니던 노포나 고깃집, 혹은 상차림이 알차게 구성된 한식 내지는 횟집 같은 곳이 아닌 양식당, 그것도 파인 레스토랑에서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하고 온 길이 노곤노곤 했다. 직접 주고 싶었는데, 부피가 커서 집으로 배송시켰다던 생일선물이 말마따라 문 앞에서 제법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보니, 그 문을 붙들고 ‘취급주의’ 딱지가 붙은 상자를 이리저리 밀어 넣느라 이미 적당히 올라온 취기를 재촉한 탓도 있었다.
가경의 빈자릴 메꿔주고 싶었던건지, 묘한대서 다정한 차현이 자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와인을 꽤 능숙하게 페어링하며 권하는 탓에 어색할까 염려했던 기우는 빠르게 무마되고 오랜만에 ‘바로’ 시절 추억팔이에 열을 올렸다. 실검 사건도, 한민규의 자살소동도, 이제서야 입 밖으로 꺼내볼만한 무게로 줄어든 그 주제들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있다는게 새삼 그렇게 다행스러웠다. 지나고보니 좋았지 그때. 차현이 진심이라, 그만큼 진심일 수 있었다. 그땐 그게 돌연 서운하고 어떤 날엔 밉기까지 했는데, 이제사 생각하니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가보다.
대충 거실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에어컨 바람을 좀 쐬다가, 어질어질하고 기분좋은 몽롱함이 슬슬 가실 때쯤 상체를 일으킨 타미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자기 몸통만한 박스를 휘이 한바퀴 돌려보았다. 안에 든 무게감이나, 덜그럭대는 소리는 가전 같은데. 집에서 밥해먹는 일이 손에 꼽는걸 뻔히 아는 처지에 그놈의 건강 타령을 또 한수저 보탤 맘으로 굳이 에어프라이어라도 보냈는가 싶어, 읏차- 몸을 구겨가며 상자를 들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엥. 뭐야.
얘가 진짜 송가경이랑 사귀다 못해 송가경이 될 작정인가. 큰 박스 안, 가장 덩치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차례차례 낑낑대고 꺼내놓은 것들은 그 종류도 크기도 다양했으나, 목적은 하나로 귀결됐다. 아마 애지간한 바리스타도 자기 집에 이렇게까지 풀세트로 챙겨놓긴 어려울듯한 홈카페 용품들. 아무래도 가경이 출국 전에 같이 고르고 갔을까? 갸우뚱 아리송해하며, 이리저리 포장을 풀고, 콘센트를 꼽고, 번쩍이는 용품을 물에 헹구고, 부산을 떨던 타미는 문득 식사자리에서 받은 편지에 생각이 미쳤다.
받자마자 펼쳐보려는 타미에게, 현은 민망하니까 집에 가서 읽으라며 손을 내저었다. 놀리고 싶은 맘에 당장에라도 열어보려는 타미에게, 넌 진짜 한살을 더 먹고도 계속 그렇게 유치하게 굴거냐며 실갱일 벌였던 현은 지금 읽을거면 확 찢어버릴거니까 당장 가방에 넣어라 으름장을 놨었다. 이럴때 보면 가경이 현을 그렇게 귀여워하는 포인트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뭐 별거라고 그렇게 귀까지 빨개져가면서 민망하대. 누가보면 고백이라도 했는줄 알겠어.
[타미.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요. 우리가 이제 같이 일한지도 벌써...]
이봐. 세상 평범하게 시작하는 편지 도입부에 콧방귀를 뀐 타미는 젖은 손을 마저 셔츠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잠시 식탁의자에 앉아 조명을 켰다. 글씨체가 생각보다 이쁜게 이 와중에 조금 웃겼다. 왠지 되게 날려쓸거 같았는데.
제대로 자릴 잡고 앉아 읽은지 한단락도 되지 않아 자세를 바꾼 타미는, 와락 휴대폰을 집어들었던 손을 머뭇대다가 끝내는 편지의 끄트머릴 매만졌다. 더디게 읽힌 나머지, 길지 않은 한 페이지의 편지를 내려 놓기도 전에 손 안에서는 생일 문자가 울리고 있었다. 지인들의 발랄하고 시끄러운 메시지와 이모티콘들이 화면 전면에서 윙- 윙- 난무하는 가운데서 타미는 다시 그 편지지의 꼭대기를 눈으로 더듬었다.
‘타미.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요.’
…
‘타미랑 일할 수 있어서, 아니 그보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어서 고마웠어요’
‘오래 걸리라고, 일부러 엄청 복잡한 모델로 샀으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배워서 내릴 때 마다 내 생각 꼭 하구요’
…
담담한듯 차분한 편지속의 현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면 넘겨짚는 것일까. [과거의 어느날을 떠올릴 때 마이홈피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타미는 그때의 그 서비스 중지 공지문이 예약 발행된 그날의 ‘바로’ 사무실 한켠을 떠올렸다. 전날 폭음의 여파로 인해 피로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앉아 위로의 인사를 건내는 사람들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미소짓던 현. 공지문을 쓰고 나오던 쓸쓸한 표정도, 고단하고 힘에 부치단 전날 밤의 투정도, 어느 하나 내비치지 않던 스칼렛이 그때는 센척을 하는줄로만 알았다. 대각선 뒤에서 그 뒷통수를 보며 티 좀 내지 싶은 맘에 앉은 자리에서 들썩이며 안색을 살피기도 했고. 다만 그게 안으로 깊고 단단한 차현에게 있어, 정리가 끝난 일이라는걸. 온 마음으로 열정을 쏟았던 만큼 온 마음을 다해 속상해한 뒤의 결과라는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서야 어렴풋이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이구나, 겉으로 보이기만큼 속알맹이도 진짜 강하구나 쟤는, 싶은 것을.
‘길이 갈리더라도,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서로 다른 신념을 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하지 못하더라도 타미. 항상 응원할게요. 이건 진심이에요. 타미도 응원해줘. 그땐 친구로 생일축하 해줄게’ - Hyun -
그러니 스칼렛은 지금의 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그 속에선 치열한 고민 끝에 어떤 결정이 나버렸던걸까. 그럼 이미 끝나버렸나. 속상한건 속상한거고, 받아들일건 받아들여야 한다던 스칼렛의 편지가 오래도록 타미의 손 안에서 바스락댔다. 잘 정돈된 현의 문장들을 재차 눈으로 훑을 때마다, 타미의 불확실한 불안감이 부엌을 떠도는 커피향처럼 제어를 잃고 흘러나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있어, 아라는 -이런식의 구분을 스스로 딱히 좋아하거나, 그걸 빌미로 어떤 방식으로든 비벼볼 생각은 전혀 없다고는 하더라도- 본인을 타미의 사람이라 여겼다. 그 말인즉슨, 유니콘의 ‘사내’ 카페에서 하루하루가 고달픈 비정규직의 위태로운 삶을 이어갈 때, 그 위치와 명칭과는 역설적이게도 소속감이라곤 일말의 가망이 없던 그 시절조차 타미에게선 어떤 류의 동료의식을 가졌으며, 그 연대감은 ‘바로’에서도 당연히 변치 않았다. 스칼렛은 좋은 선임 팀원이자 동료였고, 후에는 상사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타미냐 현이냐의 기로에 놓인다면 아라의 픽은 백이면 백 타미. 그러니 타미이냐 가경이냐를 두고 따진다면 그 눈금은 이미 측정할 수 있는 한계치를 한창 넘겨 타미에게 기울어져 있는게 당연했다. 우리가 구면이지 않으냐 묻는 가경이 자길 기억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보면 아라에게 가경이란 : 자기에겐 까마득하게 멀고 모든게 완벽한, 그저 빛과 같은 롤모델을 유니콘에서 내친 모진 사람. 심지어 과거의 일은 정확히 모르겠다지만 그렇게 둘이 친했다면서. 그보다 더 전엔, 똑부러지고 유연하면서도 강철 같은 멘탈인 타미를, 사내카페까지 도망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끝판왕이자 대마왕. 뭐 그런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갈데가 없어진 가경을 선뜻 방으로 들인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섞여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사람이 진짜 얼마나 상종 못할 사람인지 못내 궁금해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미를, 심지어는 스칼렛까지 본인들의 커리어를 -그것도 탄탄대로이다 못해 철근 박힌 시멘트 만큼 안정적인- 내팽겨치고 따라갈 정도로 매력적인 지점이 알고 싶어서.
- 미안해요 엘리. 피곤할텐데
- 이제 막 열두신데요 뭐. 급한 일이세요? 한국시간 맞춰서 미팅?
- 아.. 그건 아니고. 사실 내일이 여기 시간으로 제 생일이라.. 현이가 꼭 시간 맞춰서 축하해주고 싶대서.
얼버무리듯 우물대는 가경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는 일련의 과정을 아라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어떤 지점이 흥미롭냐 하면, 어쩐지 쑥스러워 하는듯 눈을 피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웃음기가. 어쩌다보니 거의 24시간을 붙어다녀본 결과, 낮은 톤의 차분한 말투나 쓸데없는 움직임이 거의 없고 조용한 가경에게선 보기 드문 일이었다. 회의 중이든 (전)계열사 점검 항목 리뷰 중이든, 싱긋 웃으며 능숙하게 자리를 이끄는 가경은 아라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유니콘의 송이사님이었으나 이쪽은 달랐다. 비치는 감정이 비쳐보일듯 투명해 마치 꼭 잡힐 것 같이 가까웠다.
- 와 진짜요? 생일 너무 축하드려요 대표님! 그럼 우리도 내일 생일파티 해요! 근데 되게 친한 분이신가봐요 그분이랑
- 엘리는 모르나? 타미랑 같이 갔음 알거 같은데?
장난기가 섞인 가경의 얼굴을 보고 의아할 짬도 없이, 어두웠던 화면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정면에 있는 카메라를 피해 왼편으로 스르륵 움직인 아라는, 손을 낮게 들어 좌우로 흔들흔들 저으며 웃고 있는 가경의 얼굴을 한 번 더 훔쳐보았다. 알맹이만 남아 순도 100%가 된 애정이 얇은 노트북 화면 넘어로 옮겨져 랜선을 타고 지구 반바퀴를 도는듯 했다. 어 현아. 줄 이어폰을 조정하면서도 화면에 고정된 채 입모양으로만 무슨 말인가를 하는 가경의 눈이 반짝이는듯 했다. 진짜진짜 축하해요 대표님! 저 그럼 좀 씻을게요 편하게 통화하세요..! 노트북 너머에서 빠르게 속삭이는 아라에게 미안한듯 입술을 물면 고갤 끄덕이는 가경을 두고 아라는 자리를 피했다. 내가 아는 사람? 누구지..
- 선배!
- 응
- 누구랑? 얘기하세요? 이 시간에 아직도 회사에 계신건 아니죠?
- 아니이- 방에 들어온지 한참됐지. 잘 준비 다했는데?
- 방인데..누가?
헉 죄송해요, 저 속옷을 놓고가서, 빨리 할게요! 후다닥 가경의 등 뒤를 지나쳐 옷장을 뒤적이는 아라의 예의 그 ‘허술한’ 차림새가 카메라에 잔상처럼 지나쳤을 때. 이어폰을 끼고 있느라 기척을 놓쳐 그대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가경은, 빠르게 굳어 ‘ㅏ’에서 입모양이 멈춘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현의 표정을 먼저 발견하고 뒤를 돌았다간 비명 같은 ‘아니야!!’ 소리로 아라를 화들짝 놀래키고 말았다.
- 모..뭐가요! ..엥? 스칼렛??
- ..
- 안들리는뎅.. 아 이어폰, 아? 아 스칼렛 본명이 외자였죠 맞다!! 오-와 스칼렛이다!! 잘 지내시죠!
손을 붕붕 흔들면서 까르르 웃는 아라에 의해, 화면과 그를 번갈아 응시하며 일단 이어폰줄을 잭에서 분리시킨 가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반쯤 뒤로 물러 조정했다.
- 엘리? 엘리가 왜 선배 방에 이 시간에..엘리 그거 호텔가운이에요? 그러고 지금 남의 방에 오신거에요? 이 밤중에? 엘리. 지금 무슨-
- 잠깐만.
- 제 방이거든요?! 참나. 호텔에서 가운 좀 입겠다는데, 스칼렛. 못 본 사이에 되게 꼰대 같으세요.
- 저기- 잠시만.
- 엘리 방이라구요? 선배?? 방이라면서요. 잘 준비를 다하셨다면서요.
- 그게 아니라-
셋 모두의 음성이 꼬여들어 그 누구의 말도 온전히 들리지 않는 와중에, 웃긴데 웃기지 않은 사태에서 난감함 점수로 치면 백점 만점에 오억점인 가경이 모두 닥치라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닥치지 않았고.
- 어? 엘리다! 엘리~~
- 타미이이이!!
아마도 회의실이었을 현의 스크린 밖 또다른 인원의 추가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음은 말해 뭐해. 선배 생일 축하해~ 차현이 빡이 쳤든, 엘리가 헐벗었든, 송가경이 말을 잃었든, 본인의 소임을 다하는 타미의 생일 축하엔 그 어떠한 오디오의 잡음이 섞이지 않았다는 점은 가경을 더 억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과 실시간 통화를 하겠단 생각은 도대체 누가 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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