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그 후의 일상 16
시차의 틈새
- 와 근데 스칼렛, 브라이언 생일에 라운지에서 케잌 자를땐 누구 생일이냐고 그랬으면서! 진짜 너무하네. 송이사님이 무섭긴 한- 아 죄송…
- 틀린말도 아닌데요 뭘. 근데 그건 아니고, 두 분이 아-주 각별하셔가지고.
아- 각별하시구나. 곧이곧대로 고갤 끄덕이는 아라의 그 젼혀 알바가 아니란 무관심한 말투가 아니었어도, 가경은 심사가 뒤틀린걸 꾹 참고 있는 현의 얼굴을 두고 도박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 네…여자친구.
애인이라고 할지, 연인이라고 할지, 한 이불을 덮는 사이라고 할지, 머릿속에서 자기 혼자 운을 떼어보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단어가 무진장 낯간지러웠다. 여자이고 친구인건 아니고. 한 번도 뱉어본적 없는듯이 어색한 단어는, 온 몸에 불티가 기어다닌 마냥 목덜미까지 뜨거웠다.
- 여친! 와- 타미두요?
- ? 나요? 내가? 내가 누구랑?
- 타미 왜- 오피스와이프라고, 스칼렛이랑
잔뜩 킬킬대며 놀리듯이 운을 떼는 아라 부터도 이미 농담임을 분명히 했고, 그 목적을 달성하듯 배를 잡고 웃느라 기역자로 몸이 꺾인 타미도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고 있는데 그 농담의 당사자들은 영 웃질 못했다. 벌떡 일어나서 뭐라뭐라, 타미의 웃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말을 뱉는 현은 화면 밖으로 밀려나 표정이 잘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자리에서 입술을 질겅대는 가경은 영 농담이 들릴 상황이 아니고.
- 그래서 기다리셨구나- 반가워서 더 떠들고 싶지만, 그럼 전 자리 피해드릴게요! 타미 따로 연락할게요
손에 들린 속옷 그대로 크게 손을 흔든 아라가 사라지고, 셋만 남은 기묘한 정적 속에 다시금 이어폰의 잭을 연결한 가경은 크게 쉼호흡을 뱉었다.
- 선배, 얼굴 빨개졌어.
- 시끄러
- ㅎ 암튼 생일 축하해요. 나도 그만 일어날게. 둘이 얘기해
- 어? 잠깐. 둘하고 할 얘기 있는데.
붙잡는 가경쪽을 향해, 일어나려던 걸음을 멈춘 타미의 모습은 금방 화면을 가득 메우는 현으로 전환되며 초점이 일렁였다.
- 침대 하나에요?
- 머? 어?
- 침대가 하난데?
- 넌 지금 아라를 두고 뭔 생각을-
- 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고, 아 선배!! 이건 좀 아니죠!
복장이 터진단 그 얼굴에 대고,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합당한 근거를 들어가며 설득을 해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한 줌 남은 기력을 통할리도 없는데다 굳이 냅다 쏟아버릴 이유도 없거니와, 타미가 자리를 뜨기 전에 해야할 이야기가 있었다.
- 장회장. 만났다며.
같은 공간이 아님에도 무거워진 공기를 공유한 가경의 시선은 현에게 머물렀다. 섭섭하네. 출장 좀 갔다고 회사 소식 업데이트도 안해주니. 둘이 모인 자리가 아님 어렵겠다 싶어 부러 듣는 귀를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던져보는 농담을 받아주는 이가 없었다. 시공간의 벽을 넘어서는 주제가 오히려 머나먼 거리를 체감케 한 나머지 혼자 덩그러니 남은 호텔방의 뒷편이 허전했다.
- 신경쓰지 마세요.
한참을 기다려 들은 현의 목소리엔 얼핏 짜증이 섞인 것 같았다. 등줄기를 세우고 화면쪽으로 기대고 있던 가경은 테이블에서 간격을 조금 띄워 거리를 벌렸다. 타미 쪽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가 멀쩡한 셔츠깃을 거칠게 털어내는 몸짓에서 읽힌 그 감정은, 아는체 해봐야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대화의 흐름을 끊지 않기로 했다.
- 글쎄. 어떤 조건으로 무슨 제안을 했는지 그런 세세한 이야긴 못 듣긴 했는데. 그 의도가 뭔지를 정확히 알아야지 않을까.
- 그쪽도 세세한 조건을 늘어놓지는 않았어요. 투자를 하고 싶다. 그 정도? 우리가 우회상장을 하려는 의도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계열사 매수에 대한건은 아는 것 같았고.
- 우리가 거절할걸 짐작했겠지. 그걸 빌미로 적대적 M&A라도 시도할 생각일까..
- 악의적 인수로 바로와 렙유에 둘 다 타격을 주겠다?
어수선하게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현은 착잡한 맘과 복잡한 머릿속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굴러다니며 날카로운 모서리로 상처를 내는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가득 차오른 감정이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는 순간부턴 그 둘을 찌를테니. 웅웅대는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만, 불안과 고민 그리고 온갖 종류의 망설임들을 모조리 이 자리에서 터뜨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제가 뒤에 미팅이 있어서…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 짐짓 아쉬운척 ‘커피챗 w/그로쓰본부’ 의 미팅 1분 전을 알리는 손목시계를 티나게 내려보았다. 가경을 보고, 가경을 안고, 체취를 마시며 아주 사적이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가경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모순된 바람은 생생하고 실제하는 통증이 되어 어깨 부근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선배. 생일 축하해요. 제일 먼저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늦었다. 선배 돌아오면, 그떄 우리 제대로 축하해요.
- 그래. 바쁜데 너무 잡아뒀네. 나중에 더 얘기하자
—
자릴 정리하는 말 한마디 없이 일어나 나간 스칼렛을 먼저 보낸 타미는 느릿느릿 회의실 유리문을 잡아당겼다. 가경의 빈자리가 컸다. 있으나 없으나, 똑같은 문제고 각자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걸 알면서도 편협해지려는 시야가 베포마저도 밴댕이 소갈딱지로 만들었다.
이건 원래 송가경의 역할인데.
차현에 관한 일이라면, 아주 좁은 틈새 마저도 불확실성을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는 송대표가 남모르게 속을 태우고 있으면, 자기는 두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살살 풀어주는 역할이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치 깨나 보면서 타율은 낮은 차현 만큼은 본인의 역할을 아주 꼼꼼하게도 수행하고 있으니, 더욱 가경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오늘의 짧은 대화 속에서 가경은 얼만큼이나 분위기를 읽었을까. 차현의 찌그러진 미간과, 날카로워진 눈빛에서 타미는 저 모지리가 장회장의 방문을 알린 것이 자기일거란 억측을 했을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어째 다 티가 나서 사람 빈정을 이토록 뒤집어 놓는지. 아마도 숨길 생각이 없으니까 그랬겠지, 생각하니 그 괘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울화통이 확 치밀어 오른 이 감정의 베이스에는 짙은 농도의 서운함이 존재할 터였다. 가경과 현, 두사람 사이에서 함께 일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서운함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 근원지는 송가경일 것이라 예상했지, 이런 양상으로는 또 상상을 해보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니 가경이 출장지에서 여유롭게 계약의 조건을 조정해가며 임직원들의 불만을 잠재울 만큼 매력적인 합병안을 들고 와주길 기대하는건 아무래도 어려워졌다. 그걸 통해 유야무야 현과의 대립 아닌 대립이 무마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바로 전 계열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통한 트롤링이 KU의 목적이라면 렙유가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은 뭐가 있을까. 그 전략은 차현을 붙잡는 데에도 유효할까.
[자?]
[아니]
답장은 되게 빠른데, ‘Summer님이 입력중입니다..’ 안내 표시는 깜박이기만 할 뿐 그 다음 문장이 화면 위로 부상하질 않았다. 그 입력중 표시가 도로 잠잠해졌다가, 몇 초 간의 뜸을 들이고는 다시 ‘Summer님이 - ‘ 하고 있는 것까지의 과정들은 타미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자판에 손만 안올렸지, 용건의 자음과 모음을 머릿속에서 눌러봤다가 백스페이스를 누르는건 비슷했으니까.
[통화가 낫지 않아? 아라씨 신경쓰이면, 내가 잠깐 로비로 내려가고]
신경쓸 사람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의미로든 아라를 염두에 둘 여력은 없었으므로 밤 12시가 넘은 호텔 로비에 송가경을 앉혀두진 않기로 했다. 안그래도 삐걱대는 차현과의 관계에다가 굳이 이런 어마무시한 건수를 덧붙일 이유는 또 뭔가.
[내가 따로 선배랑 통화하는거, 행여 차현 보면 난리나. 지금도 나를 무슨 쁘락치 보듯 하는거 같은데]
[채팅 기록이 남는건 좀 낫고? 현이 개발자 출신인데]
[선배랑 내 대화내역을 걔가 굳이 왜 까봐요]
그 미묘한 믿음의 근거 만큼 복잡한 상황의 핑퐁이 좀 오가고, 어차피 아무도 정확히 짐작할 수 없을 악의와 저의에 대한 추측을 핑계로 한 저주도 좀 오가고. KU 정보의 출처인 민대표에 대한 소소한 뒷담화까지 지나갔을 때, 둘은 비슷한 종류의 안도감과 입밖으로 내기 좀 께름직한 동질감을 느꼈다. 굳이 사수 부사수 관계까지 끌어다놓지 않아도 보는 시선이 비슷한데서 오는 암묵적인 유대감은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자꾸만 건드려댔다.
[현인 좀 어때]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깨고 올라온 새로운 채팅문구를 되풀이해 두어번 읽으며, 타미는 통화가 아닌 디엠으로 대화하길 택한 본인의 혜안을 다시 한 번 깊이 탄복했다. 음성으로 이 질문을 들었더라면, 숨소리만으로도 송가경에게 속내 깊은 곳의 오만 감정을 홀랑 다 털릴 자신이 만만했으니까. 썼다 지웠다 동요한 맘을 투명하게 드러내는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뜸을 들이는게 어떻게 보일지는 차처하고, 그 심란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말을 골라내어 한 번에 텍스트로 옮겨담았다.
[빨리 와요 그냥. 나도 잘 모르겠어. 브라이언이 미움받는거 같다 그랬다며. 그럼 난 어떻겠어]
암튼간에 최선을 다하긴 했다는 얘기다.
—
어깨 부근을 꾹꾹 눌러가며 깊숙이 의자에 기댄 스칼렛 앞, 처음에서 별반 줄어든 티도 나지 않는 플라스틱 일회용 음료잔에서 떨군 물방울이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그만큼의 시간동안 되도 않는 이야기와 목적어를 잃은 비난들이 주변을 빙빙 돌았으나, 수장이 입을 열지 않으니 어디로도 입장이 모이질 못했다. 현을 이해한다는 쪽도, 아무리 그래도 서운하다는 쪽도, 중립을 고수하며 침묵하는 다수도 다 나름의 이유는 명백했으나 스칼렛 그 성질머리 또한 명백해 그나마 유지가 됐을 균형이었다.
- 스칼렛
- ..
- 스칼렛한테 이걸 다 혼자 해결하라는게 아니라요.
아닌가요. 자조적인 웃음이 걸리자 싸해지는 회의실 분위기가 에어컨 바람보다 효율적으로 방안의 기온을 낮췄다. 지금 상황에서 일부에겐 은근한 멸칭의 의미까지 섞인 ‘친써머’/‘사측’ 소리를 듣는 안나한테도 저런 반응이면 뭐, 실망감을 티내는 수군거림에다가 현은 항변할 맘도 들지 않았다.
시련과 고난 같은 것은 주로 순차로 오질 않는법이다. 하나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인과가 무너져 내릴때, 그동안 쌓아올린 관계의 서사라든가, 믿음 같은 것은 대체로 나약할 뿐이고. 그걸 시험에 들게 만든 이 상황이, 나빴을 뿐이란걸 머리로는 알았다. 그리고 머리로만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출형 천장의 파이프 라인을 눈으로 쫓으며 얼핏 지치려고 드는 맘을 달랜 현은 한 번 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거는 아니니까.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불태울 수는 없는 것이고, 회사가 편법을 쓰는게 맘에 들지 않는다고 KU가 껴들어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꼴을 보게 냅둘 수는 없었다.
다만, 당초 회사의 장기적 성장을 위한 상장 계획에 임직원 개개인의 이해득실을 고려할 수는 없다는 회사의 입장엔 함께 반대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겠다고, 최악의 경우 책임지고 함께 이탈하는 것까지 고려했던 본인 꼴이 우스워진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로쓰의 리드이자 본부 인원을 책임져야 할 매니저의 본분을 우선시 하겠다 해놓고, KU의 자본을 대표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원한과 과거사 따위로 마다하는게 말이 되냐는 주장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 대표는 아직 의견 한마디 꺼내보질 못한 지금도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과거사’ 주제에 대고 ‘스칼렛’은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였다.
참으로 치사스럽고 꼴보기 싫었다.
장회장도, 브라이언도, 타미도, 그리고 실망스럽단 눈빛을 보내는 본부 직원도 아닌 그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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