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는 결국 그 제안을 수락했다. 이구아수로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들개의 행동을 평가하기란 쉬운 것이었다. 사실, 지금의 태도만 놓고 본다면 놈에게 평가랍시고 육두문자만 날려도 목숨을 보전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도, 이미 그가 하려던 일이었다. 그 것은 잃을 것 없는 제안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도, 들개 새끼는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안 가냐?”

“네 차례다.”

놈은 당장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듣길 원했다. 귀찮은 녀석이다. 그리고, 왜인지 군식구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진짜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이야기를 하다 식사를 할 때가 되어 2인분의 먹을 것을 내어갔고, 놈은 이야기가 끝나고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안 하며 수면 모드를 켜고 저 혼자 바닥 한 켠에 쭈그려 잠을 청했다. 이구아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 뭔데. 일어나. 나가서 자라고.”

더군다나 이 자식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개를 깨우려 말을 걸고, 어깨를 흔들어보고, 일으켜 세워 보기도 하지만 놈이 일어날 기미라고는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말려드는 기분에 짜증이 밀려든다. 이구아수는 녀석을 모로 눕힌다.

“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놈의 등판을 본다. 구세대의 강화 인간이라면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척추를 따라 박힌 외골격의 인공 척추. AC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조종하기 위한 접속 단자에 손가락을 밀어넣는다. 일종의 해킹이나 다름 없는 작업, 괜시리 더러워지는 기분에 이구아수는 자신의 입 안을 물어 씹는다. 놈의 의식을 강제로 부상시킨다.

“야, 나가서 자.”

“밖은… 춥다.”

이구아수는 한숨을 내쉰다. 상대는 여태 AC를 탄 채로 설원 한가운데서 잠을 청하던 놈이었다. 추워서 동면이라도 들어갔다는 건지, 그저 졸리니 이왕이면 따뜻한 곳에서 졸고 싶은 건지. 어느 쪽이든 인간이라기보단 본능에 의지하는 짐승에 가까워 보였다.

“내 알 바냐? 네 주인한테 다시 주워다 복귀시켜 달라고 하기라도 하던가, 아주 여기서 살림이라도 차릴 기세다? 왜 하필 여기서 처 자냐고.”

“…”

놈은 다시 침묵했다.

“씨발, 사람이 말하면 대답을 좀—”

[어쩌면, 이번엔 네가 나의 무조건적인 우군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뇌를 타고 목소리가 울렸다. 이구아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뒷덜미에서 손을 떼어낸다, 욕설을 내뱉는다. 이 소리는, 귀에 의지해 ‘들은’ 것이 아니었다. 뇌에 직접적으로 때려 박히는 일종의 메시지. 코랄이 그러했고, 올마인드가 채택했던 소통 방식과 같았다. 이것이, 들개가 늘 가지던 침묵의 정체였다. 입력 단자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들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수면 상태로 돌아갔다.

이구아수는 들개가 한 말을 곱씹으며 의미를 생각한다. 이번엔, 네가. 마치 이전에 그런 존재가 있었던 것 처럼 하는 말투. 헛웃음이 나왔다. 서로 얻을 것만 얻으면 끝날 관계다. 무조건적인 우군이라니. 그딴 게 되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저 새끼부터가 그럴 생각이 없지 않았나.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 지껄인 그것은 단지 이기적인 헛소리에 불과했다.

*

놈의 주인이 멋대로 전초 기지에 방문해 들개를 주워 간 것은 다시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 동안 놈은 결코 한 번을 깨는 일이 없었다. 일어나지도, 먹지도 않은 채 그저 무생물인 양 기지 한 켠을 차지하고 자기만 할 뿐인 놈에게 마지못해 모포를 덮어 준 것은 이틀째부터였다.

마침내 항로 개척에 성공한 아르카부스의 뒤를 따라 발람과 해방 전선, 그리고 독립 용병까지. 말 그대로 루비콘의 벨리우스에 묶여있던 모든 이들이 날벌레처럼 중앙 빙원에 몰려들었다. 멍청한 새끼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진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서도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더 멍청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거의 세 달 만에 만난 동료들. 미시간은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볼타는 마지막으로 기억했던 것 보다 흉터가 늘었다. 크게 바뀐 것은 레드였다. 늘 미시간을 따라하던 녀석이라 통신을 주고받을 땐 크게 태가 나지 않았지만, 육안으로 보니 사뭇 다르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버리했던 녀석은 어느새 ‘레드 건’다운 사내가 되어있었다.

“넌 이제 전장에 나가도 죽지는 않겠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선배.”

녀석이 어색하게 웃는다. 미묘한 정적이 감돌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하, 이 녀석한테 제대로 된 선배 노릇을 했던 게 언제더라. 어쩌면 이 녀석한테 G5를 뺏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구아수는 레드를 지나쳤다.

“야,”

“여어,”

악우 둘은 씩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혀 인사를 나눴다.

“이구아수, 못 본 사이 키가 줄었는데?”

“너야말로 그 사이 뭘 했길래 팔에 기스가 다 나있냐?”

서로 낄낄대며 둘은 은근히 시선을 주고받는다. 서로를 툭툭 치며 놀리다가, 볼타가 이구아수에게 제 침낭을 던졌다. 두터운 헝겊 조각 사이로 금속이 맞부딪히는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맥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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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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