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등등

사랑

건강하지 않은

“고백…… 할 거야?”

“아니. 굳이 뭐 하러?”

조심스레 물어본 질문에 대답이 칼 같이 돌아왔다. 조용히 앉아 듣고 있던 세라흐는 움찔했다. 평소라면 그런 그의 행태를 수상하게 여겼을 레이는 감정에 매몰되어 그것을 보지 못하고 넘겨 버렸다.

“해봤자 좌천이나 되겠지. 아니면 평생 못 보던가. 두 개 다 거기서 거기니까 뭘 시도해봐. 지금이 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레이는 손을 들었다. 더 이상 말 얹지 말라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이 이상 넘어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상태의 레이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그 사람은 나랑 안 어울려. 내가 한참 부족하지.”

덜컹.

“그 사람도 내가 고백해서 심란한 것보다 그냥 이렇게 친구처럼 지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나랑 노는 게 더 나을 걸?”

움찔.

“아니 근데 당신은 왜 자, 꾸…….”

레이는 짜증을 내며 세라흐가 앉아 있는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전혀 평소의 엘프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 세라흐?”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레이가 세라흐의 이름을 부를 때, 때마침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엘프들의 변신이 풀릴 때면 나는 이른바 ‘해제 연기’였다. 변신한 주체가 인간이어도, 엘프의 모습에서 변신이 풀리면 나는 연기. 그것 하나만으로도 진실을 알아 버린 레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완드를 꺼내 연기를 모조리 바람으로 날려버리자, 드러난 것은 새하얗게 질린, 그러나 모습은 세라흐가 아니라 베란드 왕세자인 남자였다.

“어떻……. 어떻게 당신이…….”

“…….”

왕세자는 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레이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난, 난 세라흐를 믿었, 믿…….”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겐바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닿지 못했다.

“만지지 마.”

레이가 넋이 나간 얼굴로 그의 손을 쳐냈다.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레이의 시선은 진실을 알아버린 그 후부터 쭉 왕세자에게 박혀 있었다.

“어쩐지, 어쩐지. 나한테 왕세자한테 고백할 거냐고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보더라.”

이제……. 이제 만족해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던지는 물음에는 희미하게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내가, 내가 이걸 어떤 심정으로 몇 년 동안 숨겼는데……. 그걸 이렇게 하루아침에, 아니, 몇 시간 만에…….”

“레이.”

“이렇게 털어놓는 게 아니었어. 아니었어…….”

왕세자를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초점이 나가 있는 눈을 보며 사람들은 흠칫했다. 레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놀란 왕세자가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변명을 위해 입을 여는 것보다 레이가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게 훨씬 빨랐다.

“다들 정말 미워요. 미워. 내가, 내가 말했잖아요. 이런 거 당사자한테 알리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냥 여기서 그 사람이 행복한 것만 봐도 좋다고 했잖아요…….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건데. 내가 내 짝사랑 말하기 싫다는데 왜 당신들이 개입해.”

“레이, 우리는…….”

“듣기 싫어요. 어차피 일은 저질렀잖아. 나 갈 거예요. 적어도 오늘 하루 간은 나 찾지 마요.”

아무도 말을 끝내자마자 텔레포트로 사라지는 레이를 붙잡지 못했다. 왕세자가 세라흐로 변장해서 모임에 숨어 들었다는 걸 몰랐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의 말처럼, ‘일은 저질러졌기에’. 그들이 달래줘야 할 사람이 은신처로 사라지자 자연스레 다음 일은 왕세자를 타박하는 것이었다.

“왕세자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르신 거예요?”

“아니, 난, 난…….”

“아해여, 혹여라도고백을 들었다고 저 아이를 좌천시킬 생각이라면 본좌에게 몇 대 맞고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네. 본인이 말하기 싫다는 애 붙잡고 털어놓게 해놨으면서 무슨 놈의 좌천이란 말인가?”

“그대, 몰랐는데 상당히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는 편이네요.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좋겠습니다.”

왕세자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휘몰아치는 타박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가 일국의 왕세자라는 것은 무시한지 오래인 동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몰아붙였다.

“저 같으면 그 사과 안 받아줍니다.”

“…….”

“저도요.”

“저 같아도 안 받아주는데요, 사과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하긴, 체면치레라도 하는 게 낫죠.”

“…….”

“정말이지. 처신 똑바로 하라니까요?”

“잘못했습니다…….”

완전히 시무룩해진 왕세자는 우울한 낯으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니, 들이키려 했다. 에피르벤이 그의 목울대를 치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커흡, 컥, 쿨럭, 쿨럭! 크흐흠…….”

“잘하셨어요.”

호로롭.

평소에는 기품 없다고 찻잔 내려놓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겐바가 차를 소리내며 마셨다. 화가 나면 기품과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겐바를 아는 왕세자는 곧 날아들 타박에 미리 몸을 긴장시켰다.

“하아…….”

그러나, 그가 예상하는 질타와 비난은 더 이상 없었다. 모두 한숨 한 번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가, 가는 거야? 다들?”

“예, 갑니다. 도저히 당신은 안 되겠군요. 세라흐는 이 사실을 압니까?”

“내가 자신으로 변장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정확히 어디에다가 쓴다고는 말 안 했어.”

“세라흐에게 경고해야겠군요. 레이가 그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이건 세라흐 탓도 있다고 봅니다.”

동감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여기저기서 동의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왕세자의 의견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레이만 신경 쓰는, 우스갯소리로 ‘모험 원정대‘가 아닌 ‘레이 보호자 모임‘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실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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