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절단
그러나 보고 싶은 내용만 적은
“유리님.”
“……아, 레이.”
“또 멍 때리고 계셨어요?”
“응, 뭐. 그렇지.”
심드렁하니 대답하니 새로 들인 조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아니, 쟤가?
“늘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렇게 실내가 답답하면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세요.”
그런 게 아닌데.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조수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건지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나갔다.
유리는 책상에 놓인 찻잔을 보고 작게 웃었다. 들어온지 이제 10개월인데 저를 이렇게 아껴주고 생각해주는 걸 보아하니 정이 많은 성격인 거 같았다. 그래서 편한 것은 유리였지만. 유리는 차를 한 모금 목 뒤로 넘기며 맛을 음미했다. 익숙한 맛이 혀에 감도는 것을 보아하니 자스민 차인 것 같았다. 아니, 자스민과 레몬을 섞은 건가? 이질적이지만 그래서 풍미를 돋는 조합적인 맛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리 익숙한 맛이 아니지만, 그래도 좋았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차 한 잔의 여유를 한껏 즐길 즈음, 회색빛이던 영상 통신구가 노란색과 빨간색을 오가며 진동했다. 황궁에서 오는 퉁신이었다. 꼭 받아야 하는 통신 때문에 찻잔을 내려놓는 것마저 아쉽고 귀찮을 정도로 여유를 즐기고 있던 유리는 조수를 불렀다.
일을 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호출을 받은 조수는 어리둥절한 낯을 하고 있다가, 유리의 손이 까딱이는 방향을 보고는 한심한 눈빛을 했다. 그렇게 불경한 눈으로 상관을 바라보면서도 명령받은 건 하고 갔지만.
꽤 길게 진동하던 통신구는 조수의 손길을 받고서야 익숙한 얼굴을 띄우며 잠잠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상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유리!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위급’ 등급의 통신을 이렇게 늦게 받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터라.”
[뭐? 장난해?]
“덤으로 저하께서 절 놀리려고 ‘위급’ 등급의 통신을 자주 날리신 터라, 이번에도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그, 그건……. 아니, 애초에 장난 통신은 개인 통신구로 하잖아! 이건 공적인 용도로 쓰는 통신구라고!]
유리는 찻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장난기가 심한 상관은 장난보다는 괴롭힘에 가까운 짓을 많이 벌였지만, 그건 둘 다 상처 받지 않고 위협에 무뎌지지 않을 선 안에서였다(그 예로 왕세자는 장난을 걸어올 때 몰락 귀족 출신 고아인 유리의 배경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위급’ 등급의 통신을 시도때도 없이 보내는 것도 그 장난의 일환인데, 공사 구분은 철저한 왕세자는 장난에 쓸 개인용 통신구를 아예 유리에게 보냈다. 일할 때 쓰는 통신구로 아무 때나 ‘위급’ 등급의 통신을 날리는 것은 본인에게도 유리에게도 못할 짓이라는 말과 함께.
그 덕에, 유리는 적어도 철 없는 왕세자 때문에 위장통이 올 일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하아……. 일이 좀 틀어졌어. 위(威) 제국이 우리가 보낸 첩자를 색출한 거 같아. 이미 다 잡아 놓고 압박하는 거라 가서 해명해야 하는데, 호위도 없이 사절단을 보내기가 좀.]
아하.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 제국은 사절단의 호위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였다. 제국의 치안을 의심하는 거라나 뭐라나. 개뼉다구 같은 소리였다. 국력이 조금만 약했어도 통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는데, 아쉽게도 위 제국은 군사력 하나는 끝내주게 강한 나라였다. 위 제국 다음으로 국력이 강하다는 동(侗) 제국 정도야 배짱 부리면서 호위를 딸려 보내지 카르나 왕국 같은 약소국은 꼼짝없이 사절단의 호위를 국경선에서 돌려 보내야 한다.
근데 상황이 이러니 호위를 안 할 수가 있나. 그렇다고 호위를 하자니 대놓고 객기 부리는 거 같고, 그렇다고 아예 호위를 안 하자니 금방 쌈 싸먹혀 싸그리 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제격이지. 내 얼굴을 아는 자는 없고, 난 카르나 왕국 최고의 마법사이자 서방(西方) 마탑의 주인이니까.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언제 출발하나요?”
[내일 아침. 제국까지는 텔레포트 진으로 갈 거니까 몸만 와. 짐은 이쪽에서 다 챙겼어.]
나한테 사절단 예복 같은 건 없는 걸 알고서 미리 준비해준 저 준비성까지. 일단 합격이다. 저런 것도 안 해주면 좀 뜯어내고 가려고 했는데.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신을 껐다. 곧 왕궁에서 사람이 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자연스럽고도 조용하게 사절단 일행에 끼어들겠지. 이렇게 참여한 작전만 열몇개가 넘는다. 이게 다 칩거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정 때문이었다. 얼굴이 팔리지도 않았고 어쩌다가 본 사람은 죽었거나 눈과 혀를 잃었으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은 잠입 작전을 굉장히 수월히 만들었다. 왕세자도 조수도 늘 얼굴의 3분지 2를 가리는 가면을 쓴 채 본다. 조수를 갈아치울 때마다 왕궁에서 사람이 온다. 시체 처리를 위해서였다.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작전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다.
율리시스 가네아 시르바레닌이 사절단과 함께 가니.
“저기 있다! 쫓아라!”
“으아아악!”
“쳇……!”
누가 그랬냐? 이번에도 작전은 성공할 것이라고.
아주 그냥 줘 패줘야지.
유리는 그런 생각을 한 건 자신이라는 사실은 의식 너머로 밀어버리고 속으로 마구 욕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이미 제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궁 곳곳에 마력 억제용으로 놓인 마정석이 밝게 빛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몇 시간 전에는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답은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저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마법사가 저걸 감춰서 제가 감지조차 못했던가, 제가 눈을 붙였던 그 몇 시간 동안에 저걸 놨던가.
“도대체 어떻게……!”
제국의 국경선을 넘었을 때부터 마력 탐지기를 들이 밀더니, 황궁에 도착한지 한나절도 안 됐는데 숙소로 머물고 있던 궁에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수소 사람들을 죄다 깨우며 이리저리 병사들의 복장을 확인해 보니, 일반 병사가 아니었다.
황제만 가질 수 있다는 보라색으로 염색한 제복 원단, 손에는 팔뚝만한 길이의 완드. 그리고 등 뒤에 크게 수놓아져 있는, 마법을 뜻하는 위 제국의 글자 ‘마(魔)’. 병사들의 정체는 황제 직속 마법호위병단이었다.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기회를 보다가 한 번에 탈출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저 귀신 같은 것들이 알아채고 금세 추격해 올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유리는 복도에 무수히 많이 박힌 마정석들을 노려보았다. 저걸 부수려면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정도가 필요한데, 이 양이면 그들도 마력을 쓰지 못한다. 마정석을 부수려면 마력이 필요하고, 마력을 쓰려하면 막히고, 막힌 걸 풀려면 마정석을 부숴야 하고. 악순환인 것이다.
제국 놈들이 이렇게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 표면적으로는 호위를 붙여서 보내지 않았으니 좀 유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유리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달렸다. 그러면서 이를 갈았다. 국경선에 도착하자마자 호위들 싹 다 물러나라고 행패 부린 게 누군데. 가는 내내 우리한테 첩자 보낸 거 맞냐고 떠본 게 누군데.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첩자 고문하고 처형한 거 구경시킨 게 누군데. 숙소로 가는 길 잘못 안내해주고도 뻔뻔하게 군 게 누군데. 그러고도 만족을 못해서 우리 사절단 측 최고 결정권자 데려가서 몇 시간 동안 붙잡아 둔 게 누군데! 니네가 그러고도 제국이냐!
“사라졌습니다!”
“안 보입니다!”
“샅샅이 뒤져라! 현(玄)궁을 나가게 두지 마!”
‘저 사갈 같은 것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은 없다. 살아서 나가는 게 중요할 뿐이다. 유리는 끓어오른 분노를 간신히 가라앉혔다. 다른 생각을 하자. 좋은 거.
그래, 국경선을 넘기 전 사절단에게 마력 억제 마정석이 통하지 않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배급해서 다행이었다. 그들은 소란이 일었을 때 이미 이 궁을 빠져나가 본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유리는 교묘하게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아 숨을 골랐다. 왕세자가 거동이 불편한 옷을 주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법도 못 쓰는데 옷까지 불편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붙잡혔을 것이다.
때마침 품에 보관하고 있던 소형 통신구가 짧게 여러 번 진동했다. 사절단이 무사히 도착하여 인원 확인을 마쳤다는 뜻이었다. 단 한 번도 진동이 길게 울리지 않았으니 제가 구해야 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되면 일이 쉬워진다. 초조함과 다급함으로 점칠되었던 유리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지며 여유를 되찾았다.
파사삭!
쨍그랑!
모래 흩어지는 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났다. 마력 억제 마정석이 깨지는 소리였다. 아까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가 와도 저 마정석들을 못 깬다고 했나? 맞는 말이다. 다만 그게 유리가 그들보다 훨씬 더 대단할 뿐. 지금까지 마력을 쓰지 않은 것은 저 마정석들을 깰 때 방출하는 마력이 그가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협해버릴 것을 걱정한 것이었지, 저딴 억제기에 발목 잡힌 것이 아니었다. 유리는 이례적으로 강하고도 양이 많은 마력을 타고난 마법사였다.
저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력을 방출해서 현재 위치가 들켰을 테니 이제부터는 속도 싸움이었다.
“자, 그럼. 탈출해 보실까?”
유리는 사각지대에서 가장 가까운 창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고……. 라이트 스피어를 날렸다.
콰아앙!
쾅!
양 쪽 벽면에 있는 창문들이 깨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면서 화약이 폭발하는 것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유리는 만들어진 탈출구로 마법으로 띄운 몸을 날렸다. 창틀에 남아 있는 유리 파편들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쳐지나가며 옷의 일부분이 투두둑, 뜯어졌다. 건물 밖으로 나온 마법사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지고 있던 텔레포트 스크롤을 죄다 털어서 남들 준 덕에 유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마법진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개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처음부터 만들려면 아무리 유리라고 해도 10초 정도는 필요했다. 지붕에 올라간다면 그 정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리는 고도를 더 높여 재빨리 지붕으로 날아갔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누군가는 지붕에 올라올 수도 있었다.
탁.
다행히 지붕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휴.”
유리는 곧바로 마법진을 전개했다. 아래가 소란스러운 걸 보아하니 아직도 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사는 없었으니 지붕까지 올라오는데 좀 걸리겠지. 그럼 저는 이대로 탈출하면 되었다. 유리는 씩 웃었다. 그는 속도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텔레포트. 좌표, 카르나 왕국 수도에 위치한 왕궁, 레이바 궁 3층 동서쪽 복도 끝, 왕세자의 방.]
눈 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의 공간에 접어들었다가,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왕세자가 초조하게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 돌아오는 거야.”
“지금.”
“유리?”
왕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아니, 거의 연극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쓰러졌다.
유리는 기겁했다.
“뭐야! 왜 이래요!”
“왜 이러긴, 너 안 돌아와서 내가 마음을 얼마나 졸였는데……!”
“진짜 왜 이러지…….”
“걱정도 못 하냐!”
“아하, 걱정.”
난 또 뭐라고. 심드렁하니 반응하는 유리를 보고 왕세자는 가슴을 움켜 쥐었다. 어디가 안 좋은가, 싶어 유리는 의원을 부르려 했다.
“난 네가 이럴 때마다 심장이 쫄린다…….”
왕세자의 다음 말에 죽은 눈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안락한 왕궁에서 가슴을 졸이고만 있었을 왕세자를 향한 걱정은 집어치운 유리는 혀를 쯧쯧 차며 물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뭔데요.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제국의 횡포가 이정도로 심해졌으니 가만히 있는 것은 말도 안 되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지금 군 관계자들은 싹 다 다시 출근하라고 했어. 재무 쪽 인사들도 마찬가지고.”
“그렇군요. 그럼……, 전 이 전쟁을 확실하게 승리로 이끌 방법을 고안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렇지. 그리고 너도 같이 회의 참석해야지.”
“젠장.”
“어딜 피하려고.”
“제기랄.”
왕세자는 씩 웃으며 유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리는 그런 그를 뚱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전쟁을 앞둔 당사자들 치고는 가벼운 태도였으나 그 속에는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확실하게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포부가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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