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안드_발터] 하지만 밤이 많이 깊었다


하지만 밤이 많이 깊었다

너의 이름이 정확히 walter 인지 walther 인지 찾다보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walter 라고 기록한다. 


아주 추운 날이었다. 정말 기이한 일이었지.

흰 국화들을 잔뜩 두른 관에 파묻힌 너는 제법 평안해보였지만, 
네 품에 안긴 발뭉은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 
발뭉의 영향으로 남들보다 빠르게 노화가 온 너의 유언장 속 마지막 소원은
발뭉을 조각내고 부수어 사르디나 앞바다로 던져 버려달라는 거였지. 

다들 의아해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해서, 마지막 소원을 이행하기 위해 다들 달라붙어봤지만, 
발뭉은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안간힘을 써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남자 몇 명이 한 번에 들러붙어도 꼼짝하질 않았다. 
그 정신 사납고 시끄러운 꼴을 한참 뒤에서 보다가, 
너에게 다가갔다. 

영면에 든 너의 온화한 표정에 인사를 하고, 
허리를 숙여 아주 작게 속삭였다.




발터 베른하르트는 죽었다.
그것도 아주 일찍.  
모두 너 때문이지. 
망자의 영혼까지 빨아먹을 셈인가? 
너의 운명을 이어가라.




그제야 너의 한 몸같던 그것이 말을 알아먹더군. 

귀찮게도 내가 처리를 맡았다. 유언장에 그리 써있었다.
거절을 할까 했다만. 
네 마지막 순간, 네 두 눈에 비치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결국 너의 가장 중한 유품을 처리하기로 했다. 

문득 기억나는 것은, 
네가 오랫동안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며 준비해왔을 유언장을 펼쳐본 순간. 
살아 생전의 너처럼 또박또박하고 귀티 나는 정자의 글씨로 제법 장문이었다. 
뭐 그리 재미있는 내용이라고, 읽고 읽고 또 읽어버리는 바람에, 
네가 부재한 겨울이 세번째인데도 여태 내용이 생생하다. 
저 멀리 동방의 어떤 나라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삼년장을 치룬다던데. 
넌 나의 부모도 아니고 친자나 뭐 그런 것도 아니지만 가슴 한 켠이 서늘하기야 하다. 
마치 실수로 엎어버려 이가 나간 스튜 접시 같다.

 

언젠가 물어왔었지. 


미리안드님, 근데 왜 저를 도와주시나요? 

질문 금지. 귀찮다. 


하고 고개를 돌렸었지만…  
너를 처음 봤을 때는 상냥하군, 생각했다. 
버릇이 상대의 눈을 읽는 것이어서, 당연히 너를 읽었다. 
태양같은 금빛 눈동자 속으로 밝은 빛이 윤슬처럼 일렁이는데, 
처음엔 그것이 한 쪽에 지펴둔 장작불이 비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럴만도 했던 것이, 당시의 너는 귀티 나는 촌뜨기 여행자- 
단순 그런 느낌이었어서. 

그리고 곧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오로지 너만의 빛이었다. 

이것이 네 질문엔 대한 내 답변이다. 


잠시 펜을 쉬었다. 
오늘따라 방이 왜 이리 밝은가 했더니 보름달이어서. 
창가에 기대어 한참 달 구경을 했다.

별 이상한 동방의 음식이나 운좋게 구할 수 있었던 독주의 이름 같은 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만, 
어쩐 일로  술을 죽죽 퍼먹던 네가 해주었던 것은 제법 생생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솜씨좋게 올려주던 손은 
그때까지만 해도 또래보다 작은 편이었는데. 

짧은 대화가 여태 머릿속에 남아 이곳에 기록한다.


미리안드님, 이건 동방에서 비녀 라고 부른대요.

…… .

오다가 주운 나뭇가지에요.

 … 이 모양새가 주운 꼴은 아닌데.


그러자 너는 풀어진 웃음을 하고 자리를 옮겨갔다.


다음에는 예쁜 꽃들도 엮어서 땋아드릴게요!


그리고... 그래. 더는 않겠다.



너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 
딱 두 가지. 
네가 이승에 없으니, 이젠 나만이 가져갈 것들. 



우선. 

네 가슴팍에 남은 큰 상처는 여전히 미안하지 않다. 
아주 겨자씨만큼의 미안함조차 없다. 
덕분에 나는 큰 부상을 면했다만, 
스태프를 놓친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마물에게 맨몸으로 달려들은 것은 네 잘못이다. 
그 날 너에게 처음으로 큰소리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다른떄처럼 훌쩍이는 대신 바락 대들었고. 
빽빽거리는 너를 고룡의 후예에게 던져준 그 날 밤에는, 
너에게도 말했었지만…  
사실 잠에 잘 들지 못했다. 
그러하니 여전히 미안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아직 발뭉을 수장시키지 아니하였다. 
수장은커녕 너의 유언장 대로 때려부수지도 않았다. 
이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점에서 발하는 이유이다. 

너를 선택했고 너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품었을만큼 중요한 것을 
파괴할 권한이 나에게 있는가? 

그리고 너, 발터, 발터 베른하르트. 
어째서 발뭉의 장례를 나한테 맡긴 건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하니 
나의 이 질문들은 시덥잖은 혼잣말로 그치겠지만… 

발터, 
너는 다정하고 상냥한 자이니,
내 목소리를 들었다면 반응해라.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바람을 읽을 것이다. 
별들이 반짝이면 별빛을 헤아릴것이고. 
산새가 크게 울면 날갯짓을 눈으로 좇겠다. 


네가 마지막 순간에 나를 부른 이유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너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반쪽짜리 기록일망정 내가 이렇게 펜을 끼적인다. 


그리고 나는 내일 사르디나에 간다. 
이 기록 또한 태워서 수장하겠다. 
실링은 내일 하겠다. 혹시 알까, 네가 꿈 속에 나와줄지.
그래서 내 혼잣말들에 답을 해줄지.
그래서 기록을 할 무언가가 더 생길지.

너는 상냥하고 다정한 자이니, 정말로 찾아와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밤이 많이 깊었다. 
너도 이만 잠자리에 들어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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