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비앙] 제목없음


제목없음 

 

 

1. 

  언젠가부터 나는 여름의 시작과 함께 열병에 종종 시달렸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오한과 두통, 수면 중 근육의 경련은 7월의 한가운데를 지나 8월의 머리를 짓밟아가며 깊어졌고, 8월의 허리를 향해 힘차게 달려갈수록 식은땀을 동반한 악몽의 빈도수가 높아졌다. 

  그렇게 여름을 앓았다. 마치 고대에서부터 신비롭게 이어져 온, 불가피하고 중요한 의식 같은 거였다. 

  리카르도 칼리치아, 여름의 나는 어째서 새카만 꿈속을 헤매이는가. 어째서 고열에 헛소리를 지껄이는가. 어째서 여름을 고달프게 앓는가. 

  정답은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일. 불가항력적인 일. 내 것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어주질 않는 오감의 종착지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어떻게 거쳐서라도 기어이 비앙카 데 메디치였다. 

  이윽고 8월, 올해도 나는 여름을 앓는다. 

 

 

 

2. 

  내 팔을 깊게 베어 잠에 빠져있는 비앙카의 뺨을 건드려보았다. 세간의 평가에 따르면 까칠하고 예민하며 냉정한데다 무섭기까지 하다는 비앙카였지만, 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는 그러지 않았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칼을 넘겨주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키스해오곤 했다.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특유의 ‘다나까’ 말투가 아닌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어미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그래서일까. 톡 건들어본 손길에 비앙카는 약간만 뒤척이곤, 으응… 옅은 잠투정 소리만을 흘릴 뿐이었다. 벗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간밤, 달은 몸을 참지 못해 새겨버린 잇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덮고있던 시트를 팔뚝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채도가 낮은 금발이 길어있다. 밤새도록 입을 맞추었던 목덜미로 머리칼이 무성했다. 

  반쯤 젖혀진 남색의 커튼 사이로 아침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오래된 여관방의 바닥은 어두운 나무로 짜여 있었다. 그 위로 일렁이는 빛의 물결은 어찌나 강렬한 생동감을 과시하는지.

  엊그제부터 여태 머무르는 중인 이 여관방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모든 것을 지글지글 태워버릴 듯한 8월의 중간인데도 초가을의 시원함이 돌았다. 사르디나 특유의 고온다습한 바람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상쾌한 공기였다. 희한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세계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공간인 것처럼.

  지난 새벽엔 거대한 바다 괴생명체에게 쫓기는 꿈을 꿨다. 소름끼치게 벌어진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그 와중에도 비명을 온 힘을 다해 삼켰다. 비앙카의 휴가는 굉장히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꿀 같을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은 속절없다.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주 미미한 기류마저 없는 방안을 유일하게 부유하는 건 쌔액쌔액, 높낮이도 박자도 일정한 숨소리. 그러고 보니 비앙카의 생일이 곧이다. 올해는 무슨 선물을 해줘야 좋을까.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굴리며 드러낸 맨어깨를 자장자장 도닥이는데, 마주하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열렸다. 내가 좋아죽는 청록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깊은 눈꺼풀이 열렸다, 닫히고, 다시 열렸다, 닫히고. 다시 열리고. 비앙카의 속눈썹은 길다. 화장기가 없어도 꾸민 듯 길다. 

  맑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원래도 낮은 목소리가 한참 바닥에 깔렸다.

 

“…지금 몇 시야?” 

“어… 일곱시 좀 안 됐는데.” 

“근데 왜 벌써 일어났어?” 

 

  잠이 덜 깬 손이 느리게 다가온다. 한참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참으로 다정하다. 

 

“아니, 그냥.” 

“내가 코라도 골았어?” 

“아니.” 

“그럼. 잠꼬대라도 지껄였을라나…”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무슨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 

“왜. 리카르도 너, 여름에 악몽 많이 꾸잖아.” 

 

  뺨을 어루만져오는 손. 오랫동안 바닷바람과 부대끼느라 거칠어진 손은, 하지만 따스하다. 햇솜 이불같다.

 

“진짜 그런 거 아냐. 그냥 깼어.”

“그럼 더 자자. 나 진짜… 진짜로 너무 피곤해…”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여인의 물질처럼 내 안으로 푹 안기어오는 몸. 처음부터 내 것었던 듯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냥 마른 듯한 팔뚝은, 알고 보면 기분이 좋을 정도로 부드러운 탄력이 있다. 

약간의 소음이라도 단잠을 방해할까, 아예 숨을 착 죽이고 있었다. 곧 연한 주근깨가 콕콕 박힌 어깨는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어깨의 둥근 모서리와 빛바랜 금빛의 정수리로 가벼운 입맞춤을 건네었다. 

 

“잘 자, 비앙카. 사랑해 자기야.” 

 

  이건 아마도 들리지 않을, 그래서 중얼거려보는 흔한 내 말버릇. 

  비앙카와 나는 잠자리 파트너다. 

 

 

 

3. 

이 기억은 4년 전쯤이다. 사르디나 전체에 비상이 걸린 일이 있었다. 베로나 항구 앞바다에 괴생물체들이 출몰했었다. 

  그 생명체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해신을 닮아있었다. 그렇게, 커다란 바다뱀의 형상을 한 그것들은 전설처럼 온 세계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크기에 개체수가 많아 위협적이었다. 전 사르디나 정예 해군들과, 해상 위 활동을 통령에게 암암리에 허가받았던 해적들이 괴생명체의 퇴치에 일제히 동원되었다. 

  전투야 치열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는 꼴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는 할만했다. 그것들은 크기만 컸지 그다지 영리하진 않아서, 앞뒤로 달려들며 공격을 퍼부으면 바닷속으로 가라앉거나 헐레벌떡 도망치곤 했다. 그래서 승전보는 심심찮게 울려 퍼지곤 했다. 해상을 활개 치던 개체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최후의 전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멀리서부터 독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거대한 것이 있었다. 여태 해치운 놈들의 몸집보다 두세 배는 될법했다.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배를 띄워놓고 대기나 타고 있었다. 해군의 상부에서부터 전해온 짧은 서신이 있었다. 

 

직접 진두지휘한다. 너희는 후방을 맡아라. 

 

  골똘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흘려 쓰는 비앙카의 서체였다. 심각한 와중에 픽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엄연한 공문서인데, 이렇게 편하게 써갈겨도 되는 거야? 

  뱃전에 기대어 대기를 타고 있자니 뒤편에서부터 거친 소음이 났다. 돌아보았다. 사르디나 해군의 전투용 보트들이 물살을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건, 선두를 차지한 보트의 뱃머리를 디딘 사르디나 해군 제 3함대장. 머릿속까지 달아버릴 정도로 타오르는 뙤약볕 밑에서도 온몸을 꽁꽁 감싼 푸른 정복. 카스카티나의 위용을 과시하며 비앙카는 자신의 이름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찌나 사납게도 번뜩이던 금발이었는지. 

  고개를 우둑, 시원스레 꺾어주곤 짝, 짝! 박수로 주위를 환기했다. 

 

자! 이제 정신 차리고 저 해군 놈들이 얼마나 잘하나 보자고! 여차하면 지원사격 들어간다, 알겠지! 

 

  버럭 고함을 질러주곤 양손의 대도를 고쳐잡았다. 그러며 멀어지는 비앙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유 모를 찌릿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타고나기가 대범한 성질머리를 잘 알았어도 조금은 걱정했는데, 역시나 비앙카였다.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쩌렁쩌렁 외치는 명령의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1부대 좌현 일렬! 2부대 우현 일렬! 3부대는 후방으로! 키를 쉬지 마라! 대열을 완전히 갖출 때까지 재빠르게 움직여! 

 

  차분하면서도 날이 선 지휘에 따라 해군의 보트들은 기민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전설 속 해신을 닮은 거대한 괴생명체는 순식간에 포위된 상태였다. 

 

장전! 

조준! 

일제 발포! 

 

 일제히 발사되는 탄에 바다를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일어났다. 

 

발포! 

발포! 

발포! 

 

  발포! 발포! 발포! 비앙카의 사나운 고함은 끊기지 않는 듯했다. 저러다가 목이라도 쉬는 건 아닐지, 잠시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이윽고 괴생명체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몸뚱이를 비틀어내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명령이 다시금 하늘까지 치달았다.

 

1부대, 2부대, 끝에서부터 후방으로! 빠지면서 쉬지 말고 머리를 쏴라! 전원 후방으로 빠지면 나는 정면으로 달린다! 

 

  점차 움직임이 둔해지는 괴물을 포위했던 병력이 서서히 빠지자, 뱃머리에 발을 디딘 비앙카가 탄 보트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괴물의 대가리를 향해 달리는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특유의 냉철함과 침착함에 더해 살벌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리카르도 대장! 3함대장이 그냥 끝내버릴 거 같은데요? 아주 조져버릴 기센데? 

그러게? 이러면 우리가 여태 대기탄 게 시간 낭비나 한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야 좋지! 수고 안 하고 돈 벌고. 낄낄. 

 

  옆에서부터 들려오는 지껄임을 듣는 둥 마는 둥 바짝 가느다란 눈을 했다. 완전히 끝내는 순간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 모든 신경을 괴생명체의 맥 잃은 대가리와, 이윽고 카스카티나의 사거리를 확보했는지 해상에 멈춘 보트에게로 쏟았다. 신중하게 조준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래 비앙카, 쏴버려. 멋지게 쏴버려라! 그래야 너답지! 

 

탕! 

탕! 

탕! 

탕! 

 

날카로운 총성이 연이어 솟았다. 마지막 발악을 하다 서서히 방향을 틀어 도망가는 괴물을 보며 이제 대충 끝인가? 한시름 놓는 순간, 

 

아악-! 

 

  찢어지는 비명에 고개를 번뜩 세웠다. 괴생명체의 꼬리에 감긴 비앙카의 몸이 공중으로 휙 날았다. 

 

이런 썅! 

 

  눈이 뒤집혀선 미친놈의 속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던 해군의 보트로 뛰어내렸다. 당황한 쫄병 나부랭이 놈을 바다로 내던져버리곤 배를 달렸다. 비앙카를 구해야 했다. 대장! 리카르도 대장! 미쳤어요? 돌아와요!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배를 달렸다. 비앙카, 비앙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 역시 제대로 살질 못한다! 

  괴생명체는 한층 느릿해진 속도로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덕분에 힘을 지나치게 쓰지 않고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 고맙게도 괴물 놈은 비앙카를 감은 제 꼬리를 바다에 푹 담그지는 않았다.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되자 비앙카의 상태부터 가늠했다. 축 늘어진 걸 보니 정신을 놓은 거 같았다. 그 와중에도 꽉 쥐여있던 카스카티나. 

  거리가 가까워지자 과감하게 배를 버리곤 괴생명체의 몸뚱이로 뛰어올랐다. 미끄러운 비늘에 발을 잠시 아차 했다. 아득바득 길다란 몸뚱이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늘어진 손목을 간신히 움켜잡을 수 있었다. 

 

야! 비앙카! 정신 차려! 

 

  기절한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쥐고있던 대도를 휘둘렀다.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괴물이 몸부림을 쳐댔다. 당장이라도 바다에 처박힐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렸지만 잡은 손목을 안간힘으로 붙들었다. 

  기회를 보아 몇 번 더 후려치자, 이윽고 기절한 몸을 감았던 꼬리가 스르륵 풀려갔다. 으앗-! 외마디 소리와 함께 풍덩! 바다로 추락했다. 나와 비앙카를 뒤로 한 괴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르디나의 거친 바다에 단련된 몸은 늘어져 버린 비앙카를 붙들고도 수면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보트는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쌍으로 물에 빠져 죽기 전에 뭍으로 올라가야 했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작은 바위섬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 듯이 팔을 움직여 헤엄을 쳤다.  

  겨우 바위섬 위로 기어 올라가다시피 할 수 있었다. 기절해 늘어진 몸을 그나마 평평한 데로 누이곤 코 언저리로 귀를 바짝 가져다 대었다. 아주 미약했지만 숨소리가 있었다. 하…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비앙카! 정신 좀 차려봐, 응? 야! 비앙카! 

 

  연거푸 이름을 외치며 뺨을 찰싹찰싹 때리니, 헉, 허억-! 깊은 숨을 토해낸 비앙카의 눈이 번쩍 떠졌다. 

 

비앙카 괜찮아? 

…! 

비앙카? 

너… 너! 리카르도 이 미친, 미친 새끼! 

 

 벌떡 일어나 앉은 비앙카가 팔뚝을 세게 후려쳐왔다. 

 

아 왜 때려! 

너 이 새끼, 내가 퇴각하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어? 몰라? 나 못 들었는데? 

당장 퇴각하라고, 어? 몇 번이나 소릴 질렀는데! 이 멍청한 새끼야! 

아니… 죽을 거 겨우 살려놨더니 왜 성질을 내고 그래… 

너까지 화를 당했으면 어쩔 뻔했나! 게다가 명령 불복종이다 이 미친 놈아! 

 

  헛웃음이 나왔다. 당장 황천길 문턱까지 갔다 온 비앙카는 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참 어이가 없어 죽겠는데, 나한테 그러는 게 사실은 내 걱정해서인 걸 알아서, 

 

알았어, 알았습니다! 함대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 맘에 안 들면 군법으로 다스리십쇼! 

 

  씩씩하게 외치곤 얼굴까지 새빨개져 화를 내던 비앙카를 와락 안아버렸다. 놓으라며, 당장 꺼지라며 몸부림을 쳐대는 걸 더 꼭꼭 끌어안으며 마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눈물이 났다.

 

 

 

 

4.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비앙카는 흔히 보여지기에 그랬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날카로운 판단을 내려, 침착하게 행동한다. ‘철혈의 제독’, 날이 시퍼렇게 선 듯한 이명에 걸맞도록,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도 타고난 군인의 절정이었다. 나는 지금도 ‘명령 불복종이다 이 미친 놈아!’ 찢어지게 외치는 비앙카의 꿈을 가끔 꾼다.

  하지만 나와 단둘일 때의 비앙카는 달랐다. 일렁이다 못해 차고 넘치는 표현력에, 순간순간이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고, 수면 위로 춤을 추는 사람처럼 유연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들숨과 날숨처럼 배인 군인의 절도를 그리도 잘 숨기는지 궁금은 했지만. 비결 같은 걸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조금씩 낡아가는 물음표를 던지면 비앙카는 당장 뒤돌아설 것만 같아서. 너는 왜 그따위 쓸데없는 것을 묻나? 시퍼렇고 냉정한 문장 하나를 툭 내던지곤 나를 버릴 거 같아서.

  어쨌거나 나는 좋았다. 비앙카는 나를 그저 잠자리 파트너로만 여길테지만, 나는 벗은 몸을 섞을 때가 아니어도 마냥 좋았다. 행복했다. 제한된 시간의 꿈결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모르는 척 숨겨야 할 감정들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어쨌는데?” 

“그래서 뭐 어쩌긴. 미친 듯이 헤엄쳤지. 안 잡아 먹히려고.” 

“리카르도 너는 꿈인데도 그게 마음대로 돼?” 

“비앙카 넌 안 돼?” 

“꿈을 잘 꾸진 않지만… 내 맘대로 되는 꿈은 거의 없던데. 그래서, 잡아먹혔어?” 

 

  모로 누운 채 나를 보는 청록의 눈동자엔 아침의 빛이 맑게 고여있었다. 나는 그 두 눈동자 속에서 유성우들의 반사광들을 볼 수 있었다. 제 이름처럼 새하얀 일렁임에, 별빛의 폭포로 휩쓸려버리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꾸며낸 거짓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이런 날에나 부려보는 유치한 어리광. 

  눈을 느릿하게 꿈벅대며 슬며시 쳐다보자 비앙카가 싱긋 웃는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은 입매. 크고 예쁜 눈꼬리가 차근차근 휘어간다. 뱃속이 간질간질해온다.

 

“무서웠겠다.” 

“응.” 

“진짜 무서웠겠다.” 

“응. 나 무서웠어. 너무 진짜 같아서…” 

 

  말꼬리를 흐리자 길고 마른 팔이 가만 벌려져 왔다. 

 

“진짜 무서웠겠다, 우리 리카르도. 일로 와. 안아줄게.” 

 

  기다렸다는 듯 꿈지럭꿈지럭, 품으로 안겨들었다. 

 

“다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 그냥 꿈이야.”

“…….”

“그러니까 생각하지 말지. 착하지, 응?”

 

  제법 높게 솟은 가슴으로 이마를 처박았다. 따뜻하다. 뒤통수를 도닥여주는 손 역시 따뜻하다. 장난기가 불쑥 솟았다. 말랑한 윗가슴을 앙 물어대니 귓가로 타고 낮은 웃음이 좌르륵 흘러내린다. 하지마 간지러워, 이 바보야! 

 

이- 바아- 보- 야아-! 

 

  늘어져 뭉개지는 발음이 참 듣기 좋았다. 재차 가슴을 물었다. 여기저기 가볍게 씹는 것도 모자라 푸우, 푸, 입바람을 세게 불어넣었다. 짐짓 웃음을 참길래 강도를 더해가니 더는 견디기 힘든지 뒤틀어내는 허리를 작정하고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쉬지 않는 내 열 손가락을 떼어내며  입을 앙다물던 비앙카는 결국, 

 

아핫- 간지러워! 진짜! 하지마, 하지마- 그만! 정말 그만!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웃음을 잔뜩 뿌려놓곤 깊고 깊은 키스를 해왔다. 

  비앙카의 입술은 언제나 달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달아 나를 취객으로 만들곤 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넥타르도 이렇게까지 달콤하진 않을 것이었다. 간지럼 태우기를 그만두곤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팔뚝처럼, 오래된 군인의 훈련으로 단련된 허리 역시 촉감이 좋은 탄력감이었다. 

  그리곤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고즈넉한 침묵 속에서 나의 머리를 감싸 안은 비앙카는 착실하게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정수리며 이마와 뺨으로 키스를 해주었다. 

  나는 비앙카가 첫 여자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단호히 밀어냈었다. 미안, 아직 연애할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십 대의 중간 자락부터 나는 여름을 심하게 앓는 이유를 잘 알았다. 

  비앙카에게 나는 첫 남자가 아니다. 이전에 파트너가 몇몇 있었던 걸로 안다. 비앙카를 안았던 남자가 몇 명이었는지, 얼마동안 얼마나 몸을 섞었는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딴 시시껄렁한 것들로 비앙카를 천하게 바라보기엔 내 감정은 석화 같았다. 나와 잠자리를 갖기 시작하면서 다른 곳은 쳐다보는 시늉조차 없었던 걸 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다. 

 

“…비앙카.” 

“응?” 

“있잖아?” 

“응.”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이는 건, 침대 위에서만 볼 수 있는 다정함과 따사로움. 과거의 기억 어디에 남겨져있을 남자들에게도 비앙카는 이렇게나 사랑스럽게 굴었을까. 삽입의 여운에 젖은 채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키스해주었을까. 온기가 흐르는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주었을까. 단정한 손끝으로 눈과 코와 입술의 선을 따라 그려보았을까. 신이 예전부터 그리 하라 명령해두신 것처럼 입맞춤을 먼저 건네었을까. 

  이따위 생각은 시작되면 한도 끝도 없이 가지를 뻗어나갔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못난 질투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비앙카.” 

“왜.” 

“비앙카…” 

“왜 자꾸 이름만 불러. 무슨 할 말 있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참았다. 솟구치는 감정을 꿀꺽 삼켰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어서 어렵지는 않았지만 서럽기는 했다. 

 

“아니, 그냥.” 

“왜.” 

“…….” 

“왜. 뭔데. …하고 싶어?” 

 

  아니. 지금은 아니야. 그냥 너랑 이렇게 마주 보고만 있어도 벅차오를 정도로 행복한걸. 너와 몸을 섞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물론 그럴 때도 꿈결처럼 행복하지만, 이럴 때면 내가 너무 초라해진단 말이야. 차마 속을 보이지 못하는 용기 없는 내가 견딜 수 없이 슬퍼진단 말이야. 비앙카, 그런 너는 모르지. 이런 내 마음을 꿈에도 모르지. 

 

“오, 비앙카, 아침부터 세게 나오는데? 괜찮겠어?” 

“하핫, 괜찮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당장 안아달라는 듯 조르는 표정에 아, 모르겠다, 한가득 끌어안아 목덜미로 입술을 묻었다. 하아… 귓가로 스며들어오는 달뜬 숨에 눈썹을 못나게 찌푸렸다. 오늘 아침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힐 정도로 슬픈 순간이 될 것이었다.

 

 

5. 

  사관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올 열병보단 다른 고민에 시달렸다. 대차게 차일 것이 뻔했지만 고백을 해볼까서였다. 차라리 다 털어놓으면 맘이 편할까 해서.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소꿉친구로서도 남을 수 없을 것이 무서웠다. 불편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운 마음을 먹었다. 비우자고. 포기하자고. 이젠 그만 내려놓자고. 

  그렇게, 오래된 비앙카를 접어내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다. 십 대의 중반부터 앓아온 첫사랑을 외면하는 건 참 어려웠다. 그러나 해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허망한 꿈에 휘져 시들고 싶지 않았다. 

  나란히 생활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늦은 산책을 함께 나가기 위해 비앙카를 기다리지 않았다. 항상 강의실 맨 앞줄에 앉는 비앙카의 옆을 차지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지도 않았다. 예전처럼 가벼운 장난을 걸지도 않았다. 마주치면 담백한 인사만을 건네곤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공유해온 비앙카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을 거였다. 하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비앙카처럼’ 행동했다. 먼저 남보듯 해놓고도 내가 내심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름마다 숨넘어가게 앓는 짓도 지긋지긋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감정들을 꽤 지웠지 싶었다.  그 무렵의 나는 비앙카의 꿈을 덜 꾸게 되었다. 얼마나 명백한 증거인가. 기뻤다. 반복되어온 열병에서 이젠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생각은 얼마 뒤 깨지고 말았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동기 몇몇과 술집에 들어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예상보다 많이 마시게 되어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밤공기를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술집 문 옆에 쭈그려 앉아 취기를 쫓고 있는데, 담배 연기와 함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취기에 청각이 둔해져 별생각이 없었지만, ‘비앙카’, 이제는 그립지 않노라 다짐하고 당부했던 이름에 술이 확 깨고 말았다. 귀를 바짝 세웠다. 

 

진짜? 전혀 안 그럴 거 같이 보이는데, 비앙카 데 메디치. 

내가 봤다니까. 웬 남자랑 같이 여관에 들어가더라니까? 

남자친구 아냐? 

남자친구면 손잡거나 팔짱 끼거나 했겠지. 

생각보다 까졌네. 그렇게 안 생겨 가지고. 

그러게. 존나 학내의 뉴스감 아니냐? 

왜. 소문 낼라고? 

못 낼 게 뭐 있어. 싸가지 없는 년.

 

  싸납게 일어섰다.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두 시선이 나에게 향해왔다. 한 놈은 똑똑히 아는 얼굴이었다. 얼마 전 비앙카에게 고백했다가 보기 좋게 차였던 놈. 제 딴엔 자신이 있어 요란스러운 공개 고백을 했던 듯한데, 전교생 앞에서 쪽을 당하더니 꼴사나운 앙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너 뭐라 말했냐. 비앙카가 뭐? 

뭐, 뭐야 넌? 

다시 말해봐. 비앙카가 뭐? 

 

눈썹을 치켜뜬 나를 요렇게 보던 눈이 비웃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아아, 누구신가 했더니, 학내 최고 말썽꾼 리카르도 칼리치아 아냐? 

……. 

니가 뭔데 끼어들- 아 맞다. 너 비앙카 데 메디치 수발이나 드는 놈이지? 

뭐? 

왜. 주인님 뒷담 들으니까 열 받아? 

뭐라고? 

더 해줘? 비앙카 데 메디치, 그 몸이나 막 굴리는- 

 

  바로 주먹이 나갔다. 가뜩이나 오른 열에 술기운까지 더해져, 나가떨어진 개새끼 위로 올라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놈의 일행이 저지해왔지만 눈이 돌아버린 날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완전히 미쳐있었다. 깔아뭉갠 놈을 패고 또 패고도 모자라, 늘어진 몸으로 침을 뱉어주었다. 

 

개 같은 소리 떠들고 다니기만 해봐. 그땐 아주 죽여놓는다. 

 

  며칠 뒤 나는 벌점 누적으로 퇴학당했다. 후회는 없었다. 사관생도는 기질에 맞질 않아,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어도 언젠간 알아서 그만두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함도 있었다. 부모님의 실망으로 가득 찬 훈계가 있었다. 반성하는 척을 했지만 속은 되레 시원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개 같은 새끼의 말에 따른 비앙카의 처신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내에 뒷말이 돌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곤란해지진 않았을까, 그런 것들만이 중요했다. 비앙카는 나에게 있어서 그저 새하얗고 새하얀 사람이었다. 그런 비앙카를 욕보인다면 그 누구라도 죽을 만큼 패줄 자신이 있었다. 

  외출금지령이 내려졌다.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시종이 가져오는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내내 비앙카 생각을 했다. 머리가 울리도록 생각을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미칠 거 같다. 

 

  깨달았다. 나는 비앙카를 내려놓지 못한다. 

  비앙카는 집안에 틀어박힌 나를 수차례 찾아왔었다. 반가웠다. 하지만, ‘도련님, 메디치가의 아가씨가 오셨어요-’ 사용인의 문 너머 말은 죄다 씹어버렸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몇 주가 지났을까. 외출 금지가 풀렸다. 야시장이 열리는 밤이었다. 방안에만 처박혀 있느라 굳어버린 몸을 풀고 싶었다. 시장 구경이나 할까, 오랜만에 방을 나섰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리곤 어느 골목을 꺾다 무심코 목격했다. 여관의 입구에서 어떤 남자와 나오던 비앙카. 반갑게 이름을 외치고 싶었는데, 키가 훤칠한 남자와 포옹하는 걸 보는 순간 들던 손을 떨구었다. 

  남자는 몇 마디를 하더니 뒤를 돌아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이, 훌쩍 가까워진 나에게로 돌았다. 나를 알아본 비앙카는 깜짝 놀라 커진 눈이었다. 

 

리카르도? 

 

 천천히 다가갔다. 

 

비앙카. 

 

  바람이 불었다. 마주한 머리칼이 사선으로 흩날렸다. 빛바랜 금발은 제법 길어져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바람이 멈추었다. 흔들리던 머리칼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웠다. 청록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비록 내가 갈구하는 감정은 들어있지 않다고 해도. 

  하고 싶던 말을 내보였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비앙카에게. 감히.

 

비앙카. 차라리 나랑 자. 

뭐? 

차라리 나랑 자자고. 

……. 

흉하게 생각하지 않아.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뭘?

너, 이러는 거.

리카르도, 너 지금, 

위험하잖아. 

…….

위험하다고, 정말.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낫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야. 너는 나 잘 알잖아? 소문 같은 거 절대 안 내. 완전 안전빵이라고. 

……. 

그러니까, 아무… 아니. 어쨌거나 계속 그럴 거면, 차라리 나랑 자. 

……. 

 

  빤한 눈동자 속에는 읽어낼 수 없는 기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비앙카를 안았다. 꿈속에서나 애달피 가져봤던 몸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며 속으로 내내 울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비앙카가 얼마나 달콤한 비음을 내는지. 얼마나 보드라운 말씨를 하는지. 얼마나 따뜻한 포옹을 해주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키스를 건네오는지. 

  무엇에라도 홀린 듯 적극적으로 몸을 던져오는 비앙카와, 여자는 난생 처음이어서 매우 서투르게 움직였던 나. 어딘지 기묘한 정사. 

  무더운 입김과 끈적한 땀으로 범벅된 행위가 끝난 후, 채 가라앉지 않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비앙카가 손을 뻗어왔다. 땀으로 푹 젖은 머리칼을 재차 쓸어 넘겨주던 손은 그리도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몰랐던, 몰아치는 태풍의 눈 같이 푹 가라앉는 듯한 다정함이었다.

 

그럼 파트너들은 언제부터 만났어? 

한... 일 년? 됐을라나. 

많… 아니아니. 몇 명이나 만나봤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워낙 짧게 짧게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그래서.

왜?

다들 사귀자길래.

왜 연애는 안 해? 

연애? 왜? 

그냥? 궁금하니까. 

연애… 음. 나는 말이야, 리카르도. 그런 생각을 해. 사람이 자연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내가 사랑할 남자는 분명히 불일 거라고. 그것도 아주 뜨겁게 말이야. 

왜? 

날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다 불태워줄 거 같아서? 

…….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못 만난 거 같아.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비앙카는 낮게 웃었다. 어딘지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 눈매와 입꼬리에서 나는 나에게 부여된 운명을 보았다. 굳게 결심했다. 불이 되겠다고. 비앙카를 지키는 불이 되겠다고. 비앙카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불살라 무너뜨릴 거대한 불이 되겠다고. 

  그해 여름은 유독 심하게 앓았다. 

 

 

 

6.

 “살살… 조금만 천천히… 악, 아흑-!” 

  습도가 높은 비명과 함께 비앙카의 고개가 넘어간다. 점점 높아지는 행위의 쾌감과 슬슬 다가오는 체력의 한계에 반은 정신을 놓은 듯했다. 항상은 아니었지만 오다가다 비앙카는 빨간 눈가를 하기도 했다. 원래도 잠자리에서 예민했지만 모든 감각으로 나를 느끼는 표정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미칠 거 같았다.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이 바로 그 달아오른 눈가였다. 당장이라도 흘러내릴듯 눈물이 고여갔다. 차올라 넘치기 전 입술로 더듬어 어설프게나마 닦아주었다. 

 

 “조금만 참아, 응?” 

 

  귓가로 작게 속삭이자 착하게 끄덕여지는 고개. 이마와 콧등, 입술로 짧은 키스를 해주곤 서서히 속도를 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내 어깨를 매달리듯 붙들고 있는 손.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언제나 단정한 손끝이 세워진다. 맨살을 조금씩 조금씩 파고든다. 달은 숨이 뜨문뜨문 뱉어진다. 걱정이 되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힘들어? 그만 할까?” 

 “아니, 아니… 계속 해줘… 멈추지 말어…” 

 

  크고 예쁜 두 눈에 눈물이 일렁이다 찰박 넘치는 날엔, 비앙카는 유독 민감했다. 그래서일까. 어김없이 세워오는 손톱. 단단한 내 어깨로 손끝을 박아넣는 너는 나를 밀어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붙들어 잡으려는 건지, 알게 모르게 비밀이 많은 비앙카의 속을 가늠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자잘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큰 소리로 앓아대는 비앙카만을 보고 듣고 느끼기로 했다. 

  움직여지는대로 맥없이 흔들리는 뒤통수가 신경쓰였다. 손바닥으로 받쳐주자 한결 편안해졌는지 정신없어 보이는 와중에도 힘겹게 웃어보인다.

  머리끝까지 느낌이 차오르는 순간 온 힘을 다해 마지막을 박아넣었다. 사정과 동시에 아, 하윽…! 짓눌린 소리가 났다. 오래된 경험에 의해 알고 있었다. 한참 고여있던 눈물이 이쯤엔 어김없이 흘러내리곤 했다. 삽입의 여운이 덜 가서 부르르 떠는 비앙카를 꼭 안아주곤 넘쳐흐른 눈물도 닦아주었다. 미안해. 고마워. 귓가에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울지마, 응? 비앙카.”

“…자꾸 눈물이 나네. 창피하게.” 

 

  비싯비싯 웃으며 손목 안쪽으로 눈가를 훔치는 비앙카였다. 긴 속눈썹으로 채 떨치지 못한 습기가 방울방울 매달렸다. 오늘도 기어이 울려버렸다. 오로지 내 의지뿐만은 아니였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침대 위의 비앙카는 가끔 울 때가 있었다. 벗은 몸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내 어깨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풍랑 위의 배처럼 흔들리다가, 리카르도, 리카르도, 리카르도-! 소리높여 외쳐내는 내 이름과 함께 주르륵 울어버리는 거였다.

  나는 이 순간이 미안하기도 했고, 은근히 좋아하기도 했다. 이미 기운이 빠져버린 비앙카를 내 욕심에 몰아붙인 것이 미안했고, 태어날 때부터 본디 내 것이었던 듯 나만을 담아 질러내는 앓는 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아팠어? 내가, 내가 너무 심하게 했나? 힘들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모르겠어, 그냥, 눈물이 나.” 

 

  그럴 때면 평소보다도 더욱 다정하게 굴었다. 열기가 덜 가셔 밭은 숨을 몰아쉬는 등을 도닥여주고, 달은 기가 남은 뺨으로 수없는 입맞춤을 보냈다. 한껏 젖어버린 머리칼을 넘겨주기도 했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금빛의 결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기분이 좋았다.

  행위가 끝난 후의 비앙카가 내 어깨와 등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듯, 나 역시 비앙카의 어깨로 박힌 주근깨들을 차근차근 헤아려보기도 했다. 그 연갈색의 자국들을 톡톡 건들 때마다 움찔대며 움츠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모로 누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비앙카의 손끝이 나의 이마를 가로로 긋고, 코를 세로로 긋고, 잠시 인중을 눌렀다가, 살짝 벌어진 내 입술을 가로 지른다. 그러면 나는 내 숨결이 묻은 손끝을 끌어다 입을 맞춘다. 가볍게 입술을 찍었다가. 조금 깊은 키스를 보내고, 어린 아이에게 하듯 소중히 쥐어본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달은 기운이 덜 가신 숨을 몰아쉰다. 비앙카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행복한 순간.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켰다. 나를 따라 시선이 위로 솟는다.

 

“몸 좀 주물러줄까?”

“됐어. 너 피곤하잖아.”

“난 괜찮은데?”

“…흐응.”

“진짜야.”

“뭐, 그럼 어디…” 

 

  잘 부탁해- 웃으며 쉬이 엎드리는 몸. 덮인 시트를 온전히 걷어내어도 부끄러운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럴 법도 했다. 속으로 햇수를 헤아려봤다. 얼떨결에 잠자리 파트너를 맺은 지 벌써 5년이 넘어간다. 정직해지는 몸과 숨을 섞으며 다섯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다시 봄을 보내왔다는 뜻이다. 

  낭창한 허리부터 손을 대었다. 열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주었다. 탄력성이 훌륭한 근육이 손끝을 휘감아온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니 으으, 시원해…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났다. 

 

“기분 꽤 괜찮지?”

“응… 종아리도 좀 부탁해도 돼?”

“당연하지요, 비앙카 아가씨?”

“아핫, 아가씨래! 아 너무 웃겨- 아가씨래!” 

 

  침대위로 발을 동동 구르며 높은 웃음을 내는 비앙카였다. 왜 그렇게까지 크게 웃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기분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카르도.”

“응?”

“나, 요새 종아리에 쥐가 자주 나.”

“왜. 요즘 하는 훈련 빡새?”

“언제나 그렇지, 뭐… 게다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군화부츠 신고 온종일 서 있으면… 너는 괜찮아? 힘든 거 없어?”

“나야 뭐, 언제나 편한 신 신으니까. 딱히 뭐 없으면 앉아있을 수도 있고.”

“부럽다. 나도 해적이나 할 걸.”

“통령님한테 다 이른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어, 통령님께서 아셨다간 연병장 백 바퀴다?” 

 

  비앙카는 아예 어깨를 뒤틀며 다시금 높게 웃었다. 한껏 휘어지는 눈매는 발간 기가 덜 가셨지만, 그래도 맑고 예쁘다.

  종아리로 손을 가져갔다. 팔뚝과 허리처럼 종아리 역시 싱그러운 탄력이 있었다. 사관학교 시절부터 이른 새벽마다 해변을 뛰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뼈대를 꽉꽉 둘러싼 근육만이 잔뜩인가, 그건 또 아니었다. 탄탄하게 형성된 근육 위로 적당한 살이 붙어 마냥 딱딱하지만은 않았다. 손끝을 부드럽게 휘감아오는 살성에 잠시 옅은 현기증이 일었다.

  종아리를 주물러주는 동안 별말이 없던 입이 문득 열렸다.

 

“리카르도,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뭘?”

“네가 여름마다 앓는 이유 말이야.” 

 

  손이 순간 짧게 멈췄다. 혹여라도 숨겨둔 진심을 눈치채서 그런가 했지만, 

 

“…네 몸에 열이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 

 

  나른하게 퍼져가는 목소리에 휴우, 다행의 숨을 작게 내쉬곤 다시금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어… 그런가?”

“응. 너 잘 모르지? 네가 얼마나 뜨거운지.”

“그… 그래?”

“네 생각은 어때?” 

 

  문득 어느 밤이 떠올랐다. 비앙카의 휴무일이었고, 나는 긴 항해를 앞두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한동안 비앙카를 보지 못할 거란 생각에 우울해 있었고, 그런 내 맘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약속한 여관 앞에서 마주한 비앙카는 품고 온 종이봉투의 입구를 벌려보였다. 와인 두 병과 약간의 치즈가 들어있었다. 라나퀼라산 레드와인. 너 이거 좋아하지? 어찌나 환하게 웃어보이던 비앙카였던지.

  평소에 술을 삼가는 편인 비앙카는, 하지만 그날따라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생각지도 못한 빠르기에 천천히 마시라며 잔을 빼앗아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침대 위로 나란히 앉아 우리는 먹고 마셨다. 

  비앙카가 가져온 와인들은 도수가 꽤나 높은 편이어서, 두 병을 다 비울 때쯤엔 둘 다 제법 취해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말이 없었다. 묵묵히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쉼없이 흘러들어왔다. 흔들리는 커텐의 소음 외에는 그저 침묵이었다.

  텅 빈 병을 바라보며 조금 더 마시면 좋겠는데, 한가한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았다. 나를 향한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 안에 들은, 눈동자의 어딘지 기묘한 빛은 술기운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어느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날과 똑 닮은 눈빛.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차라리 나랑 자자고, 얼떨결에 파트너를 제의했던 밤, 먼저 말을 꺼내놓고도 민망해하던 나를 향해 빤하던 눈동자.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며 작게 달싹이던 입술은, 하지만 이내 다물렸다. 홀린 듯 바짝 다가가 앉았다. 느릿하게 깜박이던 눈동자가 천천히 닫혔다. 끌어안아 입을 맞추며 천천히 옷을 벗겨냈다. 날것처럼 드러난 몸은 술기운이 많이 올랐는지 타오르는 듯했다. 나 역시 불같은 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밤 비앙카는 울었다. 처음엔 코를 훌쩍이더니, 곧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어 그렁그렁해지던 두 눈.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던 눈물이 한가득 고이고, 이윽고 주르륵 흘러버리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강하게 끌어안았다. 넘어가는 숨을 꺽꺽 삼키며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쉴 새 없이 사과하던 나에게 안긴 채 비앙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후로 비앙카는 가끔씩 그날처럼 울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이유는 잘 몰랐다. 그저 행위의 쾌감을 못 이겨 북받쳐올랐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리카르도.”

“…….”

“리카르도!”

“응! 응… 응?”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멍해.” 

 

  그러고 보니 종아리를 주물러주던 손은 바보같이 멈춰져 있었다. 멋쩍어 뒤통수를 긁적이니 싱긋, 밝은 웃음이 돌아왔다. 

 

“근데 너, 왜 거짓말했어?”

“내가? 무슨?”

“무서운 꿈 안 꿨다고 했잖아.”

“응. 응?”

“근데, 무서웠다며. 진짜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고.”

“…….”

“왜, 거짓말했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두 눈. 나는 이 눈동자에 약하다. 찰랑거리는 바다의 빛을 닮은 그것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했지만, 또한 죄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비앙카는 그저 뒤끝 없이 깔끔한 파트너 관계여서 나에게 다정할 뿐일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마음을 꼭꼭 숨긴 나는 그 청록의 두 눈동자가 빛을 낼 때마다 겁이 났다. 겁이 났다. 속을 들키는 순간 우리는 그런 사이 안 돼, 그럼 이만- 신기루처럼 달아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려웠다. 

 

“응? 왜 거짓말 했어.”

“…….”

“흐응.”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더니, 맑게 웃은 비앙카가 읏차,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묵묵대답으로 고개를 숙인 채 힐끔 쳐다보니, 차곡차곡 개켜놓았던 제 옷을 하나하나 껴입곤 거울을 본다. 제법 길어버린 머리칼 끝을 툭툭 건들여 정리하는 건 비앙카의 오래된 버릇. 

 

“그런 꿈 꿨음 많이 피곤하겠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어… 어디 가?”

“왜?”

“아니… 그냥…”

“왜.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먹을 것 좀 사올게. 들어올 때 산 깡빠뉴 다 먹었잖아.”

“어, 그랬나.”

“금방 올 거야. 커피도 사올게. 넌 주스?” 

 

  대답도 안 듣고 방문을 당기기에 느릿느릿 침대로 누워 뒤를 돌았는데, 

 

“아 맞다. 나, 이 말을 해준다면서. 깜박했었네.” 

 

  자박자박,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귓가로 훅 끼쳐오는 온기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잘 자, 리카르도. 사랑해 자기야.”

 

  심장을 쿵 떨어지게 하는 속삭임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고 말았다. 황망한 눈을 한 채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향한 눈매가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다. 그만큼이나 예쁘게 빛나는 입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소리를 전해왔다. 

 

“리카르도 넌 뭐,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꿈결처럼 경쾌한 음성이었다. 

 

“…어…?”

“너 좋아하는 오렌지도 사올게. 요새 여름 오렌지 괜찮더라.”

“…….”

“하여간, 바보. 멍청이. 둔해빠진 자식.”

“…….”

 

아예 멍해진 머리로 눈만 바보같이 꿈벅이니, 

 

“나 없는 사이에, 뭐, 쪽팔린다고 도망가거나 하면-”

“…….”

“당장 카스카티나 술식개방이다. 알아들었나, 리카르도 칼리치아 로도스 해적 단장?” 

 

  순간 굳은 눈썹을 하며 함대장의 말투로 엄포 아닌 엄포를 놓은 비앙카는, 이내 방긋 웃으며 방을 나섰다. 기분좋은 듯한 손인사를 날리며. 

 

잘 자, 리카르도. 사랑해 자기야. 

 

  죽을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맴도는 환청이 바로 귓전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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