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리는 곳에

해수면의 깊이를 따지는 일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처음 바다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 미쳤나 싶었다. 원래 철학 하는 사람들은 빨리 미친다던데 이 뜻이었나. 하지만 연이안서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기계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학과도 전과할 생각이 가득했다. 연이안서는 어렸을 때부터 철학이 싫었다. 잔뜩 둘러싸인 책장 안에서 책을 뽑으면 동화책보단 철학 이론서가 더 많이 나왔으며 아버지도 철학자라 미쳐버린 게 분명하다는 이야기까지. 연이안서는 삶에서 가장 싫은 걸 꼽아보자면 첫 번째는 철학이었고 두 번째는 바다였으며 세 번째는 폭력이었다. 그러니 지금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게 지구가 멸망해서도 기어코 살아남아 자신 앞에 당당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 몇 번은 무시했다. 환청이겠거니, 물귀신이겠거니. 하지만 이상하게 누군가랑 말투가 닮아서... 내가 유일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랑 너무나 닮은 탓에. 연이안서는 안시은과 고립된 지 50일 만에 바다와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 언니를 지켜주세요.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예요. 제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시은이 탐사를 나가면 바다를 향해 속삭였다. 누군가 뒤에서 떠밀면 바로 바다 아래로 잠길 자세로. 수면 위 얼굴을 수평으로 대어 바다와 대화했다. 응.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꼭 지켜줘야 해요. 바다와 약속이라도 하듯 물에 손을 한 번 담그면 이로써 대화는 끝이 났다. 사람이 바다와 대화한다는 것을 밝히면 누구라도 미친 사람이라 할 것이고 시은도 자신을 싫어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혹은 날 두고 혼자 떠나버리거나... 안시은은 연이안서가 없어도 혼자 살 수 있지만 연이안서는 안시은이 없으면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물론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좋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연이안서는... 생전 처음 악의 없는 다정을 받았으니까. 그 다정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연이안서가 안시은에게 바다와 대화한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바다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거절하고 싫다는 표현을 했지만 꼭 말해야 한다면서. 그럼 네 언니도 바다와 대화할 수 있게 된다면서. 연이안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안시은의 표정을 살폈다. 혐오가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면 어떡하지. 내가 미친 것 같다며 바다에 빠뜨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안시은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고 연이안서는 웃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 좋았다. 아, 이래서 내가 언니를 사랑했구나. 근데 언니. 절 이렇게 오냐오냐 키우면 고마운 줄도 모를 텐데. 이 말들은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오늘따라 추웠다. 저녁을 먹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다시금 구조신호를 보내봐도 달라진 것 없는 일상에 둘은 다시 잠에 들었다. 자다가 죽는 꼴은 당하지 말자며 가장 높은 곳에 침낭을 둔 탓에 항상 어느 정도 추웠지만 이 정도로 추운 적은 없었다. 연이안서는 별일이 아닐 것이라며 빌고 또 빌며 시은을 바라봤다. 시은도 마찬가지였는지 뒤척이고 있었고 연이안서는 팔을 꺼내 시은을 끌어안았다. 덜 추워진다거나 그런 건 없었음에도 내가 언니의 바다가 되어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라. 하지만 자연은 그런 행동이 보기 싫었는지, 쓸모없다는 듯 둘을 비웃는 것처럼.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시기상으로 따지면 겨울이 맞다. 하지만 이미 지구는 멸망했고 365일 꿉꿉하고 습기 가득 찬 봄과 여름 그 사이의 날씨였으며 한 번도 비라던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지구의 종말이 찾아왔다고 명했던 거다. 내내 같은 날씨였으니까.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 어저께가 어제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이 종극에는 미쳐 모두 스스로 죽으라는 것처럼 똑같은 계절이었는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첫눈이 내리는 날을 기다렸지만, 이젠 아니다. 재앙과도 가까웠다. 가뜩이나 보온 제품도 없었고, 우리는 항상 물에 축축했기에 체온은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내려갈 것이다. 그리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럼 우리는 어쩌지. 저 바다에 몸을 담가 다른 곳으로 피신 가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남아있는 것도 자살행위였다. 어떡하지, 여기가 끝인가. 결국 죽어버리게 되는 건가. 고립된 이후로 우리에겐 희망 따윈 없었나. 생각할 즈음 저 구석에서 파도가 쳤다.

자신에게 다가오라는 듯,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주변엔 새조차 없는 곳에서. 파도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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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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