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나조>를 보기-미즈키의 전쟁 트라우마와 치유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키타로의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본문에는 내용과 결말 스포일러가 모두 있으니 작품을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읽지 않기를 추천드립니다.
게게게의 수수께끼~키타로의 탄생~(이하 게나조)은 겉으로는 상당히 명백하고 호쾌한 애니메이션이다. 아버지 콤비가 사악한 제국주의 망령을 물리치고 아들을 구하고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메시지를 직접 보여주면서도, 상징물을 통해 인물의 심리나 미래를 보여주는 미장센(ex 수조 속 물고기, 지하철에 탄 여자아이가 가지고 있던 인형과 사요의 유사성) 역시 함께 연출하여 사실 파고들수록 꽤 깊이가 있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한편 <게나조>는 ‘일본군’을 미화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이는 키타로 시리즈의 원작자 ‘미즈키 시게루’의 일생이나 작품 성향을 보면 사실 억울한 비판에 가깝다. 다만 애니메이션 자체는 미즈키 시게루가 작업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의 사상과 시각을 따라가 다소 회피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나조>는 그 서사나 연출이나 전부 미즈키 시게루의 영향을 받고 오히려 일본 애니메이션이 해온 그 ‘회피’에 정정당당히 맞서는 작품이라 본다. 그 이유를 <게나조>의 투톱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미즈키’의 트라우마와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보고 설명하고자 한다.
미즈키 시게루의 <전원 옥쇄하라!>와 ‘죽어야만 하는 사물’로서 미즈키
‘미즈키’는 현재는 출세 지향적인 샐러리맨이지만 본래 참전군인 출신이었다. 이 인물의 생애 모티프는 미즈키 시게루의 참전군인 시절과 이를 반영한 작품인 <전원 옥쇄하라!>에서 따왔다. 군인 시절 미즈키 시게루는 군대 부적응자였고 반항적이었다. 전투에서 도망치기도 하고, 죽지 않았다고 책망받다가 왼팔을 잃기도 했다. 미즈키 시게루는 파병됐던 라바울의 원주민들과 친하게 지냈고 이때 경험에서 전쟁 중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반영해 그린 <전원 옥쇄하라!>에서는 마루야마라는 인물이 중심적으로 나오는데, 마루야마는 작가의 자캐와 닮은 그의 아바타 같은 존재다. 마루야마는 모자라서 맨날 상관들에게 얻어맞고 가끔 멍청하게 행동할 때도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전원 옥쇄하라!>에서 비장하고 용기 있는 인물들은 허망하게 죽고, 국가는 이들에게 끝까지 적에게 비겁함을 보이지 말고 패전하느니 모두 전사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부대 전원 모두 말라리아나 옥쇄명령을 받아 사망하고, 마루야마 역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잊혀 간다고 느끼며 죽는다. 다른 부대원들이 맡겨놓은 유서나 메시지도 당연히 유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미즈키’는 ‘만약 마루야마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을 가정한 다른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다. 국가에 의해 명령받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을 뻔했는데도 살아 돌아와서, 전쟁의 결말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된다.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윗사람들의 뻔뻔함을 경멸하면서도, 본인도 악착같이 무슨 짓을 해서든 삶을 이어가겠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미즈키는 꿈속에서 계속 과거 전쟁을 반복하고 자신을 제발 죽이라고 소리친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겠다는 미즈키와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라고 외치는 미즈키는 서로 모순된다.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논리가 담겨 있다.
그냥 ‘싸움’과 ‘전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싸움’은 인간 vs 인간의 싸움이다. 여기에서 승자는 명예를 얻고 패자는 승자에게 굴복하게 된다. 삼국지 같은 데서 장수들끼리 하는 일기토나 기사의 대결 같은 것을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의 게임이다. 전쟁의 군사들은 국가가 쓰는 장기말, 즉 사물이 된다. 그래서 일개 군사에게 주어지는 명예란 없으며 한 병사가 죽는 것도 쓰고 버리는 사물과 입장이 비슷해지는 것이다.
<전원 옥쇄하라!>에서는 파푸아뉴기니 전전의 싸움이 이미 승산 없는 패배인 것을 알고, 적군에게 용기를 보여주기 위해 옥쇄를 명한다. 말로는 국가의 명예와 용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지만, 사실 ‘패전’이라는 떳떳하지 못한 결과를 감추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더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있음에도 비합리적인 결단을 내렸고, 절망한 군의관은 자살한다.) 미즈키는 옥쇄 명령을 받았으나 죽지 못하고 살아난 상태다. 그가 여전히 이 상황을 악몽으로 꾸며 죽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직도 그 상황은 현실이며 그가 전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살아서 더 높은 자리에 출세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미즈키의 심정을 전시 병사와 같은 ‘사물’ 상태가 아닌 ‘사람’ 상태로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사람’은 어쨌든 보호를 받으며 일방적으로 죽지 않을 자격이 있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게게로를 붙잡아 참수하려고 할 때 미즈키가 “일본은 법치국가니까, 법으로 해결합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겉으로는 인권과 삶을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직 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처럼 악몽을 꾼다.
나구라 마을로 들어올 때 전차에서 미즈키를 보며 게게로가 “자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말한 것은 그의 과거나 앞으로 일어날 참극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즈키 자신이 여전히 ‘죽어야만 했던’ 과거의 ‘사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것이 미즈키 본인이 지닌 ‘전쟁 트라우마’다. 그는 여전히 사회에서 환대받지 못한 인간이며, 인정받고자 출세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방법이 되지 못한다.
2. 괴이와 죽음-나구라 마을
게게로가 미즈키에게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고 할 때,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지고 미즈키의 등 뒤에는 죽은 군인들의 환영이 나타난다.
일본의 요괴는 민간신앙에서 전승돼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있으며, 키타로 같은 ‘유령족’들도 이에 속하는데, 이 외에 형태를 가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현상을 ‘괴이’로 칭한다. 미즈키의 등에 드리어진 병사들의 환영은 실제 인격을 가지고 행동하기보다 그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괴이 현상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나구라 마을이 ‘죽어야만 했던’ 미즈키의 악몽을 재현하는 죽음의 공간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는 밝은 도쿄 사무실로 떠나 열차가 어두운 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이미지와 함께 겹치며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나구라 마을에 있는 요괴들이 사는 비밀스러운 섬과 더 깊은 구덩이는 죽음보다도 더 깊은 장소를 의미한다. 즉 저승이다.
일본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신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는 죽어서 저승에 있는 아내를 남편이 찾으러 가는 스토리다. 게게로 역시 아내 이와코를 찾아 클라이맥스에서 구덩이로 향한다. 구덩이 속에는 토키야의 몸을 뺏은 죽은 토키사다 옹이 라스트보스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토키사다에 의해 목숨을 뺏긴 유령족의 원혼들이 잠든 곳이기도 하여, 구덩이는 저승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미즈키는 나구라 마을에 오고, 구덩이까지 들어가면서 전쟁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광경을 다시 보게 된다. 출세만을 노리고 찾던 약품 M와 류가 일족의 비밀을 알아버린 이상 눈앞에 펼쳐진 건 트라우마의 재현이고 게게로와 함께 저승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3. 이타심과 트라우마의 극복
게게로와 미즈키는 토키사다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죽은 유령족 시체 사이에서 이와코를 찾는 게게로와 미즈키를 보면서, 토키사다는 “저렇게는 살기 싫다”고 조롱한다. 게게로는 병사들을 계속 싸우게 만드는 마약성 약품의 재료가 되는 피를 공급해 주는 요괴로서, 미즈키는 죽지 못하고 명예 없는 병사로서 둘 다 토키사다로 대변되는 국가적 관점에선 인간으로 환대받지 못하는 사물일 뿐이다. 게게로는 아내를 찾고 키타로를 임신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듣지만,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상 어차피 토키사다에게 이용당할 운명이었다.
이때 미즈키가 토키사다에게 대항하고 쿄코츠의 봉인을 풀어 버리면서 그 운명을 바꾼다. 토키사다는 그 전에 미즈키에게 부와 명예를 약속해 주며 권력을 가지고 살라고 제안한다. 사실 이는 미즈키가 나구라 마을에 오고 류가 일족, 특히 사요를 이용하여 챙기려던 목적이다. 그 목적을 거부하면서 쿄코츠를 풀어버리는 미즈키에게 토키사다는 온 나라가 위험해질 거라고 말한다. 미즈키는 웃으면서 그냥 잘 됐다고 한다. 이 순간 미즈키는 그를 괴롭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물로 규정된 실격당한 존재가 아니라, 그 상처를 벗어나 스스로를 인간으로 깨우친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키사다의 제안을 더 이상 고려해 볼 필요도 없이 그냥 “시시하다”고 말할 수 있던 것이다.
미즈키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사요와 다시 마을로 돌아와 게게로를 구하고 구덩이로 향하던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미즈키는 사실 상징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이전처럼 옥쇄 명령을 받아 억지로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이전의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자신을 죽이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일부 민족의 성인식이 아이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고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 어른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미즈키 역시 죽음 의례를 통해 인간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 근간에는 ‘이타심’이라는 감정이 근본적으로 담겨 있다. 트라우마를 겪고 출세만을 생각했던 미즈키에게 게게로와의 유대가 이타심을 일깨운 것이다.
미즈키의 이타심은 토키사다전 이후 구덩이를 벗어날 때 게게로가 준 영모조끼를 이와코에게 덮어준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마음과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영모조끼를 입는 것인데, 미즈키는 오히려 산모인 이와코와 배 속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영모조끼를 벗어서 덮어주고 탈출한 것이다.
이후 모두 사라지고 미즈키는 기억을 잃은 채 머리까지 새하얗게 바래서 구조대에게 발견된다. 아이들이 성장의례를 마친 후 동심을 잃게 되는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이웃집 토토로>같은 것을 보면, 아이인 사츠키와 메이는 토토로를 보지만 어른들은 직접 보지 못한다.) 미즈키 역시 요괴와 함께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죽이고 부활한 미즈키는 과거의 미즈키와 다르다는 것을, 하얗게 바랜 머리색과 일본군 철모가 사라지는 환영이 표현하고 있다. 그를 괴롭히던 전쟁 트라우마와 죽음의 괴이는 이제 그 곁을 떠난 것이다.
4. 결론
미즈키는 사람으로 환대받지 못하고 사물로 전락한 경험, 즉 ‘전쟁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으며 그 점이 악몽의 근원이자 살아 있어도 계속 죽어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던 이유이다. 그랬던 그가 따뜻한 요괴와의 만남을 통해 상징적인 죽음 의례를 거치고, 남이 규정한 사물이 아닌 이타심 있는 인간으로 부활했다고 보는 것이 본 글의 요지이다. 가끔 보이던 ‘일본군 미화’와 같은 비판은 작중에서 오히려 미즈키의 성장 서사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영화가 모두 끝난 후, 관객들 모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엔딩 크레딧에서 오히려 키타로 탄생 비화가 나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야기는 이미 모두 끝났고, 크레딧은 이야기의 바깥을 보여준다. 즉 그렇게 살아난 미즈키의 이후 삶의 행보 같은 것이다.
미즈키는 무덤에서 살아난 아이를 괴물로 보고 처음엔 죽이려고 했지만, 잠깐 게게로의 기억을 떠올리고 아이를 살린다. 이타심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장면이다.
참고문헌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15.
박병도, 「일본의 요괴개념과 재해요괴 : ‘나마즈’와 ‘아마비에’를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43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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