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독경담
仰毒敬談
"니는 원래 여자아이여야 했다. 그게 잘못되어서 천지신명님이 노하신 게지. 쯔쯔, 어짤꼬......"
"꿈에 귀신이 나왔다고 애가 질질 울었다꼬? 에잉, 남자애 몸에 음기가 철철 흐르니 잡귀들이 꼬일만도 하지."
"태생부터 비틀렸으니 누름굿으로 처치할만한 녀석이 아닌 기라. 그런 걸 해 봤자 임시방편이라꼬."
"신내림을 언제 쯤 받아야 쓰겄나? 고등학교 안 가도 된다. 열 다섯이면 간당간당하게 애기무당이제. 요즘은 이쪽도 전망이 괜찮다. 인간 아닌 것들이 길거리에 파다하대."
"안 받는다꼬! 유진아, 니 그러다 죽는데. 잡귀가 우습게 보이나? 할매가 하루종일 니 주변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니가. 그냥 신님 한 분 모셔라. 그게 너한테도 편할 게야."
"유진아. 어떤 도사님을 만났길래 이렇게 된 거고. 유진아! 니 이러면 멀쩡하게는 못 죽는다. 뭘 들인 겐데! 유진아!"
할매는 무당이었다. 어머니는 무당이 아니었다. 모계 격세 세습이라는 말을 어렴풋하게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여자아이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해 기다리던 신께서 화가 났다. 본래 나에게 붙어있어야 했던 수호신마저 데리곤 떠나버렸다. 성격 한 번 포악한 신이 아닐 수 없다.
그 덕에 나는 평생을 잡귀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잡귀라고 하니 별 거 없는 잡다한 귀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귀신으로 들리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통의 사람은 죽으면 성불한다. 그리고 윤회한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이번 생에 한이 남은 자들 등은 현세를 방황한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훔쳐 다시 살아가거나 한을 풀려고 든다. 이렇게,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하등 도움되지 않는 귀신들이 바로 '잡귀'다.
처음에는 꿈에 기어들어와 괴롭혔다. 그 다음에는 직접 육체를 강탈하려 들었다. 갑자기 놀래켜선 몸의 주도권을 흩뜨린 후 육체를 강탈하는 형식이다. 잘 놀래지 않기 위해, 즉 기가 세지기 위해 운동도 해 봤지만 허사였다. 태생부터 정해진 기의 총량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은,
다른 신의 힘으로 잡귀를 억누르게 해 주셨다.
다른 신의 힘으로......
그건 뭐였던 걸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 가만히 있으렴. 반항하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 있으니 유의하고.
당시의 나는 몽롱했다. 교수님이 내 주신 차를 마시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기분 좋은 졸음이어서, 도무지 거부할 수 없어서, 소파에 누웠다.
교수님이 내 위에 있었다......
올라탔던 것 같다.
그것만은 명료하다.
그 외에는 기억이 없어.
몹시 청명하고 따뜻하고 좋은 기분이었던 것 같기도......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기분이 좋다. 이건 무엇 때문일까.
몹시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상상 이상으로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있는 듯한 기분.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죽어도,
달라질 것은 없지 않나......
교수님은,
교수님은 강력하니까,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가시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죽는 것이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그가 죽어버릴까 염려한다.
아니, 분명 교수님보다 내가 일찍 죽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염려할 건 없나......
"......배! 선배!"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천장을 아는 얼굴이 가리고 있다.
유준이......
여긴, 아마도 교수님의 연구실. 천장도 익숙하고 공기도 익숙하다. 하지만 인기척은 바로 옆에서만 나는 걸 보아 교수님은 높은 확률로 부재중.
빈말로도 푹신하다고는 하지 못할 소파에 누워 있는 듯하다.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열어봤자 나오는 거라곤 힘빠지는 신음. 유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묘한 포지션의 40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왜 이러고 계신지 기억은 나세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역시 쓰러지기 전후의 기억이 없다. 별 거 아닌 잡담을 하려고 대학교를 찾아온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인문대 건물 정문을 밟은 후로는 완전히 암전이다.
"1층에 경비실 있잖아요. 경비원 분들 계신 곳."
반응이 없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틀린 판단이 아니었으므로, 유진은 그저 고개를 까딱인다. 아직도 성대는 제 구실을 못하는 채다.
"거기서 곤봉을 들고 나오셨어요. 당연히 경비아저씨가 멈춰 세웠지만 도망가셨고."
어쩐지 이어질 것이 좋은 사건은 아닐 모양이다. 유진은 무심코 두 눈을 꼭 감아버린다. 이런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대로 여기에 들어오셔선 교수님을 공격하려 드셨고. 정말 기억 안 나세요?"
난처한 미소로 끄덕이니 유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제가 들어온 건 일단락 된 후라...... 동아리 실적 보고드려야 했거든요. 그래서 왔는데 선배는 벽에 처박혀 있고, 교수님은 선반에서 붕대 찾고 계시고. 아, 교수님은 수업 나가셔야 해서. 응급처치만 하고 휘리릭 떠나셨어요."
왠지 머리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는데. 붕대가 감겨 있는 거였나. 여전히 관절은 움직이지 않아서 만져볼 수는 없었다.
유준은 선배를 빤히 내려다본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곤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 이런저런 노트가 산재한데, 공부라도 하고 있는 걸까.
"덕분에 도서관도 못 가고 이러고 있네요.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시간 있음 선배 좀 보고 있으라고. 아무래도 자습은 애매하죠? 시간이 없다고 하기엔 '자율'이고, 있다고 하기엔 오늘 치 공부를 그냥 넘기는 게 양심이 찔리고."
"......미안하다."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유진은 몇 번 목을 가다듬어 본다. 유준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다. 둥근 테 안경 너머의 눈이 흐릿하다. 피곤한 건지도 모른다.
"미안하면 밥 사 주실래요?"
"밥?"
"커피라도 괜찮고."
"또 수면제 타려고?"
"교수님한테 얻어들은 게 있어서 좀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눈치가 빠르시네요."
할로윈 때의 일이다.
할로윈은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날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멀쩡하게 죽은 사람들이 잠시 돌아오기도 하나 (이 경우에는 윤회 직전의 영혼이 속한다) 온갖 잡귀가 위풍당당하게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야, 귀신은 자기를 부르면 신이 나서 달려오니까. 산 사람의 몸에 굶주려 있는 잡귀라면 더더욱 신이 나서 돌진해 온다.
그래서 유진은 할로윈 기간이면 교수의 연구실에 틀어박힌다. 온갖 신의 물품으로 도배된 그의 연구실은 너무나 청명하고 기가 강해서, 잡귀는 절대 출입할 수 없으므로.
그 때도 유준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괴사건의 브리핑을 위해서였다. 유준은 동아리 부원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므로 대표가 되는 일이 잦았다.
"선배? 왜 여기 계세요."
"할로윈이라 잡귀가 세 배는 많아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천운이야."
"잡귀라...... 진짜 빙의 같은 거 하세요?"
"보여 줘?"
"아뇨, 긴 칼에 베이면 엄청 아플 것 같으니깐 사양할래요."
교수님은 부재중이셨다. 연구실 문 앞 플레이트의 〈재실〉을 〈강의〉로 바꾸는 것을 깜빡 잊으셨던 듯했다. 유준은 두리번대다가, 자연스럽게 싱크대 근처로 향했다. 커피 포트에 담긴 커피를 천천히 뽀얀 머그컵에 붓는다. 여간 익숙한 손놀림이 아니다.
"이왕 만난 거. 커피 한 잔 드세요. 저도 마시려고요."
유준은 소파에 앉아있던 유진에게 컵을 건넨다. 유진은 별 의심 없이 컵을 건네받는다.
"교수님이랑 친해?"
"네, 뭐. 암묵적인 동아리 대표라서."
민속학 동아리에는 대표가 없다. 회원의 탈퇴율이 기이할 정도로 높기 때문이다.
유준은 한 잔을 더 내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다. 오늘따라 쓰다. 원두를 바꾸신 걸까. 하지만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 식도로 꿀꺽 넘겨본다.
"계속 이런 일을 할 건 아니지?"
유준은 한 손에 컵을 들곤 싱크대에 기댄다. 눈을 잠시 가늘게 뜨곤 사실 상의 선배를 바라본다.
"지금은 이쪽이 더 재밌어요. 장래에 대해서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쪽은 안 돼. 자칫 잘못하면 개죽음이야...... 유준이도 알지 않나?"
"사람은 어차피 죽거든요."
영 맥락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유준은 가늘게 눈웃음을 짓는다.
"이왕 죽을 거면 재밌는 걸 하다가 죽어야지."
"음, 전혀 재밌지 않은데."
"전 재밌어요, 선배."
유준은 제 옆 자리에 다가와 앉는다. 묘하게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살풋 접힌다.
"오늘은 연구실에만 계시는 거죠?"
"그렇게 되네. 몸이 허약해서......"
따라 웃었다. 이상하게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유진은 미간을 찌푸린다. 눈을 가늘게 뜬다. 하지만 상은 계속해서 잡히지 않는다. 이상한데. 눈에 이상이 생겼나......
"약이 잘 드네."
"약?"
혀가 꼬인다. 겨우 한 글자를 말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연구실에서 하루종일 있음 지겹잖아요. 차라리 계속 주무시는 게 낫지."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야가 핑글 돈다. 시계가 천천히 뒤로 넘어간다. 목덜미를 잡히고, 허리를 붙잡히고. 상냥하게 눕혀진다. 다리의 각도가 조절된다. 편안하게 누우라는 의도일 테다. 실제로도 편안하다.
"귀신도 잘 들고 약도 잘 든단 말이지......"
비웃음 조의 말투?
아니...... 단순한 감탄인가.
그런 걸 판단하기엔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열 시간 정도를 푹 잤다. 자고 일어나니 중후한 책상에 교수님이 앉아 계셨고, 슬슬 퇴근해야 할 때니 같이 돌아가자고 하셔서, 비몽사몽한 채로 집까지 끌려갔다. 함께 청명한 밤을 보냈다. 고양이들을 위한 사료 자동급여기계를 사 둔 게 천운이었다.
십 분 정도 누워있으니 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소파에 앉아선 뻐근한 어깨를 풀고, 목 관절도 우두둑대며 풀어내고. 머쓱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 유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선 싱크대로 다가간다. 커피를 내 올 생각인 모양이다.
커피를 내 오면 마셔야 하나 고민했다. 오늘은 그냥 놀러온 거니 잠만 자고 갔다간 교수님이 싫어하실 텐데......
"수면제 안 탔어요. 드세요."
"정말?"
"교수님한테 한소리 들었거든요. 안 그래도 불쌍한 애한테 왜 그런 걸 먹이냐면서."
불쌍한 애?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대고 있으니 유준은 잔을 든 채 맞은 편 소파로 복귀한다.
"저부터 마실까요?"
"바꿔 마실래?"
"의심이 많으시네. 그러세요."
유준은 저항 없이 서로의 컵을 바꾼다. 그리곤 느긋하게 한 모금을 넘긴다.
"전 잠들면 안 되거든요. 내일 쪽지시험 예정이라."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구나."
"공부는 항상 해야죠."
"으음."
그제서야 유진은 커피를 마신다. 그 때보다는 확연히 쓰지 않은 맛이다. 부드럽게 목구멍을 넘어간다.
"교수님을 노리는 잡귀가 많은가 봐요?"
"응. 아무래도 이 근처의 수호신 같은 느낌이시니까. 비단 잡귀뿐만이 아니라 사이비 교단에서도 상당히 미움을 사고 계실걸."
"교수님은 뭘 위해서 수호신 역할을 자처하고 계시는데요?"
"글쎄...... 나라도 내가 살던 곳이 이상한 녀석들한테 넘어가려 한다면 기를 쓰고 막으려 할 것 같은데."
"겨우 그런 까닭인가?"
"겨우라니. 삶의 터전은 중요해."
"그렇죠. 그런데 교수님은 좀 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서."
"일단 나는 모르겠어. 항상 부려먹히지만 자경대 이상의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거든."
"자경대라."
유준은 잠시 웃었다. 웃음 포인트가 이상하다, 라고 유진은 느낀다.
"자경대라도 재밌잖아요."
"활동할 때마다 목숨을 거는 게 재미있니?"
"오싹하고 짜릿하고. 재미없는 것보단 낫지 않으려나."
"그렇게 자극만 쫓다간 언젠간 큰일 나."
"선배가 알아서 지켜주실 거잖아요? 그럼 안심이죠."
기특한 말을 다 하네......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몸에서 온갖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
피곤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탈진에 가깝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깎여나가는 기력.
유진은 겨우 눈에 힘을 주곤 맞은 편의 후배를 바라본다.
얼굴의 웃음기는 어느 새 사라져 있다.
"그래도, 저도 제 몸을 지킬 수단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커피에 뭘 탔나?
아니, 분명히 커피잔을 바꿨는데......
바꿀 걸 알고 자기 잔에 약을 탄 건가?
시냅스의 반짝임이 사그러드는 걸 느낀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힘들다.
"마력을 빠져나가게 하는 약이에요.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마력?
"아, 선배에게 부여된 보호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보호가 완전히 사라져 있을 테고. 위험한 상태죠. 연구실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 주실래요? 교수님도 안 계신데 아까처럼 빙의당하시면 곤란하니까...... 뭐, 그 상태로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지만."
유준은 맞은 편 소파로 다가간다. 옆으로 쓰러진 유진을 내려다 본다.
"두 잔 모두에 약을 탔어요. 저는 일찍이 해독제를 먹어서 효과가 없는 거고...... 실은 약도 해독제도 전부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선배가 오셔서...... 덕분에 좋은 실험이 됐네요."
유진은 가늘게 숨을 내몰고 있다.
생각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맹렬한 피로감.
눈앞의 유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기야 하지만, 피로감에 휩싸인 뇌가 내용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다.
"좀 쉬세요. 마력은 쉬면 천천히 회복되거든요. 아님 교수님한테 좀 나눠받으셔도 되고."
유준은 테이블에 어지러이 펼쳐진 노트를 그러모은다. 제 옆에 두었던 가방에 이런저런 노트들을 쑤셔넣고는, 연구실을 나갈 채비를 한다.
"삼십 분만 있음 오시겠네. 다시 말하지만, 기력이 좀 돌아와도 나갈 생각일랑 절대 하지 마세요. 그러면 저도 피곤하고 교수님도 피곤하고 선배도 피곤할 테니까."
"이런, 유준이도 참. 탐구심이 가득한 아이로구나."
이상한 맛의 음료를 먹여졌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맛의 소용돌이. 구역질을 일으키는 맛이다. 역겨워서 정신이 차려질 것만 같지만, 그렇다고 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교수님이 손수 먹여주시고 있는데.
"회복 포션이란다. 흘리지 말고, 그래. 잘 마시네......"
몸 안이 따스해진다. 몸에서 도망쳤던 온기가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녹슬었던 몸 구석구석에 혈액이 전달되고, 검게 시들었던 뇌세포가 번쩍번쩍 움직이고.
유진은 석민의 품에서 떨어진다. 입가를 적신 희뿌연 음료를 손으로 닦아낸다.
"유준이 걔도 참 이상해요. 제가 무슨 실험용 쥐도 아니고."
"유진이가 약이 잘 들으니 그랬겠지."
"그래도 사전에 얘기라는 걸, 하아...... 교수님, 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 건데요."
석민은 만면에 미소를 걸고 있다. 선이 가는 얼굴을 싱글대며 연신 웃다가, 금테 안경을 벗어선 손수건으로 렌즈를 닦아낸다.
"그야, 적극적인 아이잖니. 네 직속 후배가 될 수도 있겠어."
"비리비리하잖아요. 한 대 맞으면 훅 갈 것 같던데."
"원래 사람은 한 대 맞으면 훅 간단다."
맞는 말이었다. 유진은 사지가 날아간 경험을 반추하며 입을 다문다.
"그러니깐 더욱 쪽수가 중요하지 않겠니?"
"저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아니, 유진이는 분명 일당백을 하지."
"그럼 저만 데리고 다니셔도 되잖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니."
"뭘요?"
"유진이가 죽으면 나도 상당한 손실을 본단다."
"예? 왜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넌 내 제자니 당연히 손실이지."
"그래서 손실에 대비해 2호기를 육성한다...... 그런 이야기신가요?"
"그렇단다. 분명 너는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걸 아시는 분이......"
"그래서 나름 소중하게 기워주고 있잖니."
새침한 표정의 교수를 유진은 빤히 바라본다.
아마 거짓말은 아닐 것이었다......
"저 갈게요."
"아니, 어딜 가?"
"집에 가죠."
"오늘은 안 돼. 같이 돌아가자꾸나."
"예? 왜요?"
"새로운 보호 주문이 말이다, 아직 완성이 덜 되었어. 내일 아침에야 완성될 텐데, 그 동안에 공격을 받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
"......"
"밥 사줄 테니까 기분 풀렴."
"예."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에게 거스를 수 있겠냐고요.
유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석민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량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소중하다는 말에 안심하는 나도 참 멍청하군......'
소파 앞 테이블에 아까의 커피잔이 남아있었다. 유진은 싱크대로 향해 간단하게 컵을 씻는다.
새로이 두 잔의 커피를 내렸다.
맛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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