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발걸음
1편
나는 그대를
2024.12.16. P.M.12:37
[삐이이익————][ 클레…마티…스… ][삐이이이익———]
“으— 으… 어디…지…?”
살아라, 외쳐라, 꿈꿔라, 끝내 달려가라. 말해라, 펼쳐라, 세어라, 꿰뚫어라.
[ 이번 정류장은 동남 페르텔라 상점 거리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오르테쿠 상류 다리입니다. ]
“벌써… 다 왔네.” [삐이——]
품어라, 잡아라, 부숴라, 끝내 상승하라. 미지를 향한 별빛의 여행.
“여기서 내려서— 이 가게로 가라고 하셨지…. 산메 씨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어느 잔잔한 하늘의 시간. 나는 지금 태인 씨의 추천을 받아 어느— 마을에 나와 있다. 비록 그분은 결혼 준비를 한다고 하여 바쁘셔 그리 자세한 도움을 구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는 나에게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상관없다.
날아라, 질러라, 눈뜨라, 끝내 움직여라. 말해라, 펼쳐라, 세어라, 꿰뚫어라.
그렇다고 쉬운 일인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함께 보내온 감으로 한다면, 어떻게 잘되지 않을까. 한없이 멀어져 다시 돌아오려면 하늘을 수어번이나 갈라야 하는 때가 오기 전에, 나를 대신하여 있어 줄 빛을 마련하는 데에는.
품어라, 잡아라, 부숴라, 끝내 상승하라. 너를— 찾아—
[끼이익-][삐이이익———][탈칵 탈칵 탈칵][삐이이익——]
“이제…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3분. 이 라인이 젊은 연인들한테 인기 있는 곳이라고…….”
살아 한 번도 이런 걸 챙길 생각은 안 해봤는데,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산메 씨가… 좋아하실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커플이라면 꼭 맞춰야 하는 게 있죠. 바로 커플 장신구! 반지, 팔찌, 목걸이— 좀 더 본인에게 맞을만한 걸로, 둘의 사랑을 각인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거예요. 저도 마리 씨랑 이렇게 팔찌 맞췄고요. 자길 위해 신경써서 산 거니까, 암만 괴팍한 사람이여도 싫어하진 않을 걸요?”
…싫어하진 않으시겠지, 적어도, 날 대신하여 곁에 있어줄, 빛줄기라 이야기 한다면.
어린 시절, 눈을 감아 상상하면, (저 멀리있던) 북두칠성- 항성에도- 닿을 수가 있었지.
작은 커튼, 망토 하나 휘두르고, (저 내려앉은)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곧— 검이었지.
[삐릭]
“그니까요, 그니까요, 아무리 봐도 그 둘이 뭔가 있—”
[띠리링-]
“어, 어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 반지 좀 맞추려고 왔습니다만…”
“오- 반지요? 반지면— 거기 좌측에 진열된 것들 있는데, 그거 그대로 완제품으로 사실 수도 있고, 원하는 거 하나 골라서 그걸 기반으로 커스텀할 수 있는데, 뭐로 하시겠어요? 커스텀은 비용이 좀 더 많이 들어요.”
“음…… 커스텀으로 하면… 각인 같은 거 새길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원하는 각인, 혹은 원하는 보석 장식 등, 말 그대로 나만의 반지를 만드는 거랍니다. 편하게 고르세요.”
“음…”
연한 갈색빛에 잔디 같은 바닥으로 이뤄진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 반지를 포함한 여러 장신구가 다닥다닥 선반에 뭉쳐 놓여있고, 그 옆으로 탁자와 의자, 직원 공간으로 보이는 다소 연식 있어 보이는 문까지. 전통 가게인 걸까.
태인 씨가 말하길, 이 거리는 크리스마스…와 유사한 때처럼 연인들이 시간을 보내기 좋은 때엔 성수기라 사람이 북적인다고 하며, 그 외엔 비수기라 눈치싸움만 잘하면 혼자 거리를 독점할 수 있다 했다. 그 말에 바로 와본 건데, 정말 나 말곤… 방금까지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 새의 모습을 한 인물 외엔 손님은 없는 거 같다. …근데 왜 저렇게 날 쳐다보는 거지?
“이거—로 커스텀 할게요. 문양 같은 것도 됩니까? 반지라서 가능할지.”
“엄청 세세한 건 어렵고, 좀 단순한 것들은 가능해요. 근데 사이즈는 좀 작게 보일 거예요. 그거 감안하신다면 오케이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세트로 두 개 하겠습니다. 사이즈는 14호랑 15호로 하나씩 가능할까요?”
자세히 사이즈를 재본 적은 없지만, 얼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산메 씨는 15호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네네, 사이즈 충분히 가능하고요. 두 개 세트라… 혹시 용도가 어떻게 되세요? 보통 혼자서 반지를 두 개 맞추시는 거면—”
“커플링이요. 그— 상대방한텐 서프라이즈로 하고 싶거든요.”
“오호, 서프라이즈 커플링이라~ 로맨틱하네요~ 그러면— 저기 앉으셔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트리에 손님이요~”
이곳의 이름은 <서크라디나 아트리에> 대부분 종류의 장신구를 취급하며, 커스터마이징도 비교적 자유로워 이 거리에 처음 방문한 커플들이 거진 처음 발을 들이는 곳이라나…. 이 거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읽다 보니, ‘보통’의 커플들은 서로에게 무언갈… 물질적인 일종의 증표를 많이 나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만큼 우리는 ‘보통’에서 거리가 멀다는 건 새삼 느낀다.
애초에 그런 ‘보통’에 들어가기엔 둘 다… 생각하니 쓸쓸하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관광객인가?”
“…네?”
“…여행객인가?”
“아뇨… 그냥, 필요한 것만 사려고 잠깐 온 겁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도시 사람 같은데, 오가는 길이 꽤 멀 거 같다만. 비수기 시즌에 여길 ‘잠깐’ 혼자 오가려는 커플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이 동네 사람인가?”
“아뇨, 여기서 꽤 먼 곳에 살긴 합니다. 하지만 성수기에 인파에 쌓인 채로 올 생각은 없습니다. …그쪽은 여기 주민이십니까?”
“그럼.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60살 때쯤, 어릴 때부터 살아온 지박령 같은 주민이지. 내년이면 벌써 210년째 살게 되는군.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오면서, 이렇게 비수기에 서프라이즈 커플 장신구를 사러 오는 손님을 보는 건, 말했듯이 꽤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보통은 성수기 시즌… 지난달에 있었던 사자의 해몽이나 조만간 있을 성자의 백야 때 놀러 오기 바쁠 텐데.”
“그런 걸… 딱히 챙기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죠. 장신구도 이번에 처음 맞춰봅니다.”
“흠, 얼굴만 봐선 꽤 젊은 인간인 거 같은데, 말의 무게감이 길게 느껴지는군. …여기는 처음 오는가?”
“처음이죠. 아는 분 추천을 받기 전까진 위치도 몰랐습니다.”
“…꽤 염세적인 도시 사람인가 보군. 여기 말고 갈 곳들은 정했나? 길은 좀 알고 있고?”
“아뇨, 추천은 받았는데,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길도 전혀 모릅니다. 여기 오는 것도 지도를 계속 켜놓은 채 왔으니까요.”
“……상대방은 바빠서 안 왔나?”
왜 이렇게 많은 걸 물어보는 걸까. 내가 그렇게 신기해 보이는 걸까. 예전부터 이런 관심은 내게 좋은 상황을 가져온 적이 없어서, 그리 좋지 않다. 난 여기에 질문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말이다.
“반 정도는 말이죠. 서프라이즈를 위해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도 있고요.”
“그런가. …혹시 서프라이즈 선물로 좀 특별한 걸 구하고 싶으면 우리 가게를 좀 추천하고 싶은데—”
“오래 기다리셨죠— 일단 이거 보시면서, 내용들 채워주시면 돼요. 각인은 문구는 이 폰트 목록 보시면서, 원하시는 거 번호 적으시면 되고요. 문양 같은 건 직접 여기 그리셔도 되고, 이미지 파일 준비한 거 있으시면 요기 적힌 이메일로 보내주셔도 돼요.”
“아, 네. …뭐가 되게 많네. 사람들은 이런 걸 다 하는군….”
2장의 하나는 양면, 하나는 반쪽에 내용이 새겨진 종이.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이미 ‘반지 - 13’이라 적힌 종류 선택 칸과 여러 내용을 쓰게끔 정돈된 수많은 선의 집합. 하얀 종이에 빼곡하진 않지만, 마치 심리검사 내지 설문조사라도 하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꽤… 많은 칸들이 보인다.
“이 정도면 많지도 않죠. 이것보다 커스텀할 요소가 많은 것들은 더 길답니다. 혹시 이런 거 처음 맞추시나요?”
“네, 완전… 알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걸 접하는 게 처음이거든요.”
알 기회도, 시간도, 관심도 없었으니까. 산메 씨가 이런 걸… 좋아하거나 신경 쓰는 분도 아니시고. 솔직히 지금 하는 것도 내… 미묘한 마음에서 하는 의외의 행동인걸. 도박이라면 도박일까.
“흐응— 우리 거리 장인분들이 엄청나게 좋아할 상이시네. 아, 호구 잡기 좋다거나 그런 뜻은 아니고요. 음… 혹시 이거 말고 또 서프라이즈 계획 중인 거 있으세요?”
“어… 딱히 정하진 않았습니다. 딱히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신기한 분이시네. 그러면— 여기 계신 케무스 씨한테 가이드 받아보시는 건 어때요? 여기 오래 사셔서 주민 그 누구보다 잘 아시고, 이쪽에 관한 지식이 매우 두터우시거든요.”
“…케무스 씨?”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안 하고 떠들었군. 케무스 릭 알폰드라, 간단하게 케무스라 한다. 말했듯, 여기엔 벌써 209년째 살고 있다. 테리나 말대로, 이 거리에선 나보단 오래 산 사람이 없긴 하지. 다 단명종들이니까. …지식이 두터운 건지는 모르겠다만, 근처에 마음이 통하는 이들의 향수 공방에서 후각을 살려 일하는 중이다. 오늘은 개인 휴가라 여기서 농땡이 피우는 중이었고.”
“아, 그렇군요…. 그럼— 음—”
가이드를 붙여서까지 다닐 생각은 없었는데. 뭐, 홀로 문외한인 상태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것보단, 뭐라도 아는 사람에게 지식을 전수 받으며 준비하는 게… 더 성공률이 높긴 하겠지. 합리적인 선택이긴 하다.
“…이게 끝나면, 외지인을 위한 가이드 좀 부탁드리지요.”
“알겠다. 부족함 없는 가이드를 해주지. 그럼 그동안… 근처 카페에서 커피 좀 한 잔 하지. 다 끝나거든, 근처에 있는 아우슈타 카페에 와서 날 찾게나. 별다른 일이 있지 않는 이상 2층 테라스에 있을 거다. 그럼 수고해라, 테리나.”
“네— 좋은 식사 되세요—”
[끼이익—][띠링-띠리리링—][끼이익—][띠리링—]
“아우슈타 카페 2층 테라스…”
“나가서 왼쪽으로 돌아 쭉 가면 나오는 목제 카페인데, 커피가 아주 일품이에요. 케무스 씨는 희한하게 거기서 탄 커피가 아니면 못 마신다 하더라고요? 공방이나 집에 안 계실 때 어디있나 찾아보면 열에 아홉은 그 카페에 계세요.”
“그 카페에서만 파는 한정 메뉴라도 있는 건가요? 보통 한 곳만 가는 분들은 한정 메뉴 때문인 경우가 많던데요.”
“그건 아닐걸요? 거기서 한정 메뉴를 판 적은 없거든요. 가게마다 같은 메뉴여도 원두나 로스팅 방법 등, 조리법은 미세하게 다르니까, 그거 때문일 거예요. 드시는 메뉴가 항상 정해져 있긴 하시지만요. 오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2층 테라스에 계실 땐 화이트 모카에 녹차 조각 케이크를 드시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아요.”
매번 같은 카페, 같은 좌석, 상황에 따른 같은 메뉴… 마치 패턴이 정해져 있는 NPC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요. ——여기 마을은, 커플 손님이 그렇게 많습니까?”
“보통 저희 같은 상가는 사자의 해몽이나 성자의 백야 같은 행사 시즌에 젊은 층 손님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게 대표 수익인데, 보통 그 기간에 밖에 놀러 나오는 경우가 혼자보단 단체 친구 모임이나 커플들이 많잖아요? 근데 단체 모임은 도시 쪽 넓은 곳이 더 수요 채우기 쉬우니까, 저희는 구역 자체가 넓은 것도 아니라, 좀 더 적은 인원의 커플 손님들을 주 수요층으로 잡다 보니 그분들에게 유명한 곳이 된 거죠. 부부나 커플끼리 운영하는 가게도 많고요.”
“원래부터 이런 상가였나 보군요.”
“사실 이렇게 된 지 엄청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어요. 케무스 씨의 말로는 50년 좀 됐다나? 특히 근래 들어 트렌드에 맞춰서 더 발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에요. 원래 저희나 케무스 씨가 일하는 향수 공방도 그 전엔 ‘이게 될까?’하는 고민만 하다가 10여 년 전에 수요층에 대한 트렌드가 확실하니 수입이 될 거다란 기대에 열린 거고요. 뭐… 수요층이 층인 만큼 비수기엔 손님 같은 분이 많지 않은 이상 들쭉날쭉하지만요.”
“그렇군요….”
[타박타박— 휘리릭]
세상 끝에— 하나의 가로등만이 비추는— 비춰지고 비춰주는 잊혀지는 길가 속에, 그대에게— 고할게요—
“…너는 왜 손님한테 가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있니?”
나의 희망의- 등불은 바로 그대였다고 바라만 봐왔던 손— 그 길에 닿고 싶었기에- 이렇게 걸어왔다고…
“아, 언니. 그냥— 심심한 데다가 손님도 한 분만 있으니 입이 재잘재잘 열리는 거지~”
잊어주시길——
카운터 안쪽, 천막으로 가려진 내부에서 밀금색의 묶어 내려앉은 날카로운 단발머리가 눈에 띄는 앞치마를 두른 사람이 나왔다. 갑자기 어디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나 했는데, 앞치마 주머니에서부터 목까지 이어폰이 튀어나와 있다. 소리를 얼마나 크게 하고 듣는 걸까. 그 와중에 앞치마가 온전히 깔끔하지 않은 걸 보니 커스텀 가공 역할의 직원인가 보다. 언니라고 하는 거 보면 자매인 걸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적색의 비슷한 날카로운 단발인데. 키나 나이는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까, 테리나 넌 그 입이 문제라니까. 우리 마을 사람들 단체로 입만 떼다가 무게 재면 네가 제일 가볍게 나올걸?”
“에이~ 타 종족분들은 제외하고 인간들로만 계산해야지~”
“인간으로만 따져도 그럴 거다. 으—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거 끝나면 내 자리에 올려놔.”
“예이—”
[타박타박- 타박타박-][달가락— 끼이이익— 탕]
“두 분은… 자매 분이십니까?”
“아뇨, 친자매는 아니고, 같은 학교 나온 선후배 사이죠. 이 동네에선 유명할 정도로 공예 기술이 무척 뛰어난 언니랍니다.”
“흠— 가게는 두 분이 운영하시는 겁니까? 아까 부부나 커플끼리 운영하는 가게가 많다고…….”
“평소 비수기 땐 저희 둘끼리만 나오고, 성수기엔 두 명이 더 나와요. 그리고 커플은 아니에요~ 언니는……… 아, 다 적으시면 불러주세요. 배송 주문 있었던 거 깜빡할 뻔했네~~”
……뭐, 지금 내 역할은… 나비가 아니니까, 내 할 일에나 집중할까. 시간이 그렇게… 여유롭게 많은 건 아니니까.
2024.12.16. P.M.01:19
[푸쉬이이이—]
“이제— 작업은 들어갔구, 과정은 조금 전에 말했듯 2시간 정도 소모될 거라 하거든요? 그동안 케무스 씨한테 가이드 받고 오시면은, 저희가 케이스에 담아서 준비해 드릴게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클레마티스——라고 합니다.”
“클레마티스~ 꽃 같은 이름이네요. 그럼 아주 예쁘게, 최고의 커플링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연인을 위한 서프라이즈 가이드, 잘 받고 오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전까진 장신구 같은 게 필요하거든, 그냥 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손을 휘저으면 만들어져서,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히 정하고, 기록하며, 시간 단위로 가공을 거쳐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정하고 쓰는 데만 거의 20분 가까이 잡아먹었다. 적당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아 물어보기도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원래 그러듯 그저 내가 마음만으로 만들어내면 되는 일이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따지고 보면 비효율에 가깝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을 하나의 작은 장신구에 단 하나의 변색 없이 담아 전달하는 건 해본 적도 없고, 자신도 없다. 괜히 평소처럼 했다간 그 뜻이 변색되어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까, 작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했다.
물론, 아무리 결과물이 달라도, 산메 씨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그 색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겠지만.
[띠리리링—]
그래도 이렇게 하면 검은색은 줄어들겠지.
“나가서 왼쪽으로 돌아 쭉 가면 나오는 목제 아우슈타 카페. ……확실히 비수기라 그런가, 유명한 곳이라 하기엔 다소 휑한 분위기가 있군. 성수기 땐 여기에 사랑을 나누는 커플이 많단 말이지…. 차라리 성수기 때 와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보통의 커플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내는 것도, 방법이었을까.”
모르겠다.
사실 이런 걸 물어보려면 태인 씨라는 가장 가까운 표본이 있어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빠르겠다만, 바쁘시다 하니 어쩔 도리가 있나. 그래도 결혼 준비를 할 정도로 긴 시간 안정적인 연애 생활을 하셨으니 정말 많은 도움이 될 텐데.
[탁—]
“여긴가…? 아—으-우—슈—타— 맞는 거 같네.”
[끼이익—— 띠링 띠링—]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케무스 씨 계십니까?”
“케무스 씨요? 아— 네. 2층 테라스에 계세요. 주문하시겠나요—?”
“그러면… 음… 작게 쓰여 있는 건…… 카라멜 마끼아또, 핫에 레귤러 사이즈로 가능하겠습니까?”
“카라멜 마끼아또, 네— 6750라콜 되겠습니다. 카드 꽂아주시고—— 됐습니다. 음료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케무스 씨 옆 맞으시죠? 여기서 누군갈 기다린다고 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2층은… 저 계단인가.”
연한 갈색의 목제를 바닥과 천장에 깔고, 재질은 알 수 없지만 하얀 벽들로 건물을 세우며, 이에 대비되는 검은 틀의 조명으로 무게감을 잡고 분위기가 뜨지 않도록 바닥과 가까운 일부 벽과 기둥은 나무로 마감 칠이 되어있고 각종 의자, 테이블, 카운터 등의 가구는 진한 색들로 채워 색감을 챙긴 밝은 카페. 또한 입구와 같은 정면의 벽 일부는 투명한 창으로 해 주변이 훤히 보인다.
한없이 어둡고 칙칙한, 밝은 것이란 거의 존재치 않는 나와 산메 씨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내 카페와는 정반대다. 심지어 안정적인 멜로디의 음악도 귀를 채워주지만 거슬리지는 않을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다. 꽤… 포근한 분위기다. 하지만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른 낮이라 그런 걸까.
[털그덕- 털그덕- 털그덕- 털그덕-]
2층도 역시 똑같다. 차이라면 바닥에 카페트가 깔린 테라스가 있다는 것뿐. …저기 있다.
“기다리셨습니까.”
“오, 왔군. 내 예상보다- 정확히 12분 30초 빨리 왔군, 그래. 표정만 봤을 땐 꽤 걸릴 줄 알았는데.”
“…꽤 특이한 분이시로군요.”
“…다른가?”
“음… 판단하기엔 이르죠.”
“같은 느낌이로군. 흠, 굳이 서프라이즈로 계획하는 이유는 있나? ‘챙기지 않아서’로 일축하기엔 표정이 복잡해 보이는데.”
“그건…… 어느 하나 탁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군요. 다만, 상대방이 여러 사람 사이에 끼어 다니는 걸 싫어한다는 건 말할 수 있겠네요. 그거 때문에도 굳이 성수기에 놀러 오는 선택지를 택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 뭐, 인간 중에도 그런 이들은 많지. 성격, 사건, 유전. 그러면… 장신구나 향수 같은 건 좋아하나?”
“아마… 100%, 좋아한다고는 못 할 겁니다.”
“커플들은 그걸 가장 많이 하는데 말이야. 뭐, 나는 이 시간까지 단 한 번도 연애한 적이 없지만. 그러면— 지도를 좀 봐볼까.”
그리 말하고는 외투 주머니를 뒤지더니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고, 잔을 옆으로 치우더니 크게 펼쳐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리하여 보이는 건 가로로 트인 공간에 여러 세로로 놓인 길과 건물들이 크게 크게 그려진 지도이다. 이 마을, 거리의 모습이겠지.
“들고 다니는 지도라, 관광 지도 같은 건가요?”
“아니, 관광 지도까지 필요한 동네는 아니라서 말이야. 그냥— 내가 직접 젊을 때 날아다니며 만든 지도라네.”
“…날아다니며…?”
“…혹시, 우리 토우바레츠에 대해서 잘 모르나? …14년 전에 있던 그 사건으로 고향을 벗어나 도심지로 가는 이들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뭐, 염세적인 이라면 모를 수도 있지. 하여튼, 디지털이 아닌 건 양해 바라네. 내가— 요즘 쓰는 이— 휴대전화 전자기기가 있긴 하다만, 도저히 적응이 안 되어서 말이지….”
“괜찮습니다. 저도 디지털보단 아날로그를 선호하거든요.”
“그런가? 젊은이치곤… 특이하군. 그러면, 하나씩 봐보자고. 일단— 여기.
가장자리 대각선 라인 2개 사이, 일자로 쭉 뻗은 7개의 라인 중 가운데에서 좌로 1칸. 자네 시선 기준, 가운데에 있는 가로에서부터 시작해 정면으로 6번째 건물.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카페일세. 아마… 버스를 타고 왔다면 여기, 큰 건물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서 왔겠지? 이 정류장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1칸 옆 상하 라인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좌로 2칸 옆 정면 라인은 식당이나 간단한 사진, 소품샵이들 주로 자리 잡고 있지. 장신구가 아니어도, 뭔가 물건을 선물하고 싶을 땐 이곳 세 라인을 탐색하는 게 좋지.
그리고 여기서 2블럭 앞으로 가고, 좌로 1칸 간 다음 나오는 2번째 건물이 내가 함께하는 향수 공방이네. 그 양옆 두 건물은 적당히 물건 사고파는 곳이고. 혹시라도 은행이 필요하다면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전부 다른 메이저 기업 은행 건물이 안치되어 있으니, 도시 사람이라면 불편한 건 없을 걸세.
혹시 백화점 같은 걸 원하거든, 여기 왼쪽 가장자리 대각선에 있는 큰 건물, 여기로 가면 되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 앞에선 여기 가는 걸 너무 티 내지 않는 게 좋아. 작은 자영업자 군집 사이에 대기업이 끼어들어 상권을 침해한다는 논란 속에 건물을 짓는 5년 내내 다툼이 많았거든. 원래라면 가장자리가 아니라… 좀 더 안쪽에 들어오려 한 걸 가장자리로 몰아낸 거고. 아무튼—
기념품점은 자네 시선 바로 앞, 넓은 강가가 보이지? 그 강가는 이 거리의 이름이기도 한 페르텔라 강가로, 나는 토착 시민이 아니고 신화 등에 관심 가지는 편이 아니라 엄청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거리와 강가 주변의 대부분 지역에선 꽤 신성시하는 곳이라더군. 그래서 이 근처라면 어느 라인이든 기념품점이 하나씩은 있을 게야. 젊은 커플 중에는 그런 기념품도 한둘씩 챙긴다고 하더군. 여행의 증표라나?
만약 편지, 전화기 케이스, 실링 왁스, 텀블러… 같은 조금 특별한 선물을 원한다면, 육교를 건너 반대편, 육교 기준 좌우 3칸을 탐방해 보게. 그런 걸 위주로 많이 팔거든. 만약 평범하게 생필품 같은 걸 구입하고 싶거든, 좌로 쭉 걸어와 여기, 여기에 생활용품 할인점이 있으니 거길 방문해도 되고. …혹시 뭐 다른 궁금한 거 있나?“
“음… 상당히- 방대한 것이, 하루 만에 끝날 여정은 아닐 거 같군요. 전부 다 둘러본다면……”
“촉박하긴 하겠지. 당장— 지금만 해도 점심을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야. 혹 하룻밤을 지낼 곳이 필요하면 우측 대각선에 큰 호텔도 있고, 구석구석에 작은 모텔도 있긴 하지. 다만 개인적으론… 이 동네 모텔들은 추천하지 않네.”
“시설이 별로인가요?”
“순순히 자네 같은 이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취해주기 위해 세워진 곳은 거의 없다고만 말해주지. 뭐, 지금은 비수기라 손님이 없어 불필요한 소음공해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설명을 들으며 지도를 바라보니, 그려진 건물마다 그 용도를 알려주듯, 작은 그림들이 같이 그려져 있다. 카페엔 커피, 조금 전 아트리에엔 반지, 일한다는 공방엔 향수, 은행엔 여기서 쓰이는 화폐인 라콜의 표시. 그 점을 기억하며, 설명해 준 루트를 따라 쭉 바라보니 건물의 수는 흔히 말하는 대도시 상가보단 적지만, 종류는 적지 않다. 최대한 다양한 손님을 유치시키기 위한 전략이겠지. 분배도 나름대로 특정 분류끼리 묶어 자리 잡고 있는 게, 서로서로 다음 선택지로 자신을 유도하길 노리는 모습이다.
다 탐색할 거면 하룻밤을 여기서 보내는 게 낫겠다.
“그러면… 호텔은 좀 괜찮을까요?”
“호텔은 자네 지갑 사정만 괜찮다면 안 좋을 거 없지. 2인실로 아마, 하룻밤이면 72,000라콜이면 될 거네.”
“72,000… 뭐, 돈은 문제없습니다. 그러면— 음— 혹시 소품샵에는 어떤 것들을 파는지…”
“뭐, 장식용 열쇠고리라던가, 다이어리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물품이라던가, 악세사리, 식기구, 스티커, 잘 꾸며진 시계 등. 젊은이들이 좋아할 물건이 잔뜩 있지.”
“흠…”
산메 씨는 그런 거 전혀 안 좋아하시고, 관심도 없으실 텐데. 단지, 내가 주면 ‘C가 준 거니까.’라는 마음으로만 받으시고 마실 터. 역시 시중에 파는 물건들론 의미 있는—— 뜻 전달을 할 수 없을까.
“아는 게 별로 없나 보군.”
“아무래도… 그런 이유가 좀 있습니다.”
“사실상 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소리겠군. 그렇다면—”
“주문하신— 카라멜 마끼아또— 나왔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외지인 가이드 해주시네요? 역시 케무스 씨가 최고라니까요. 덕분에 저희 마을이 아주 잘 삽니다~ 그 지도도 도움이 잘 된다고 상인회장님이 엄청나게 좋아하세요.”
“에헤이, 그냥 오래 산 놈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뿐이라니까. 아리스 너도 항상 수고가 많다.”
“커피를 사랑해서 모두에게 커피를 내려주는 게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그럼, 파이팅입니다. 손님도 파이팅이에요—”
[터벅터벅]
“주변에서 꽤 신뢰받는 모양이군요.”
“뭐, 오래 살다보면 다 그러는 거 아니겠나? 그저 제 할 일 하며 조용히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이렇게 되는 거지. 나이를 권리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만 않으면 굳이 신뢰받는 자가 되기 위한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구성원들이 믿어주게 되지. 그럼 그 본인은 그걸 또 그만큼, 제 할 수 있는 한에서 베풀면 되는 거고."
“…꼭 그렇지만은 않던데 말이죠.”
“꼭 오래 살아본 것처럼 말하는군.”
“비밀입니다.”
“비밀이라… 아무튼, 커피 한 잔 하면서… 무에서부터 하나씩 계획해보자고. 살면서 애인에게 처음으로 하는 서프라이즈인가?”
“그렇습니다. 이전까진 서프라이즈는 안 하고,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만 했거든요. 조용히.”
“그럼 조용하지 않아야겠군. …자네랑 상대방에 대해서 좀 더 잘 알아야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니면 난 이 동네에 뭐가 있는지 정도만 알려주는 역할로 끝나던가. 비밀이라 이야기 해주기 어렵다면, 내 쪽에서 상세한 도움을 주는 건 어려우니 말이야. 나도 굳이 상대방이 밝히기 싫어하는 사생활을 캐묻는 취향은 없고 말이지.”
“음…… 말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말해드리죠. 저와 그분에 대해서.”
2024.12.16. P.M.01:54
“자네가 찾는 다이어리는… 2층으로 내려가서 3번을 보게나.”
“2층에— 3번 말이죠. 알겠습니다. 여기는… 마을 다른 가게들과 분위기 차이가 크군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약 20분 가까이 대화하며 루트를 정한 끝에, 처음 목적지로 가장 큰 생활용품 할인점에 찾아왔다. 오는 동안, 길에 놓인 다른 가게들은 저마다 세부 요소는 다를지언정 모두 짧은 시간, 이 거리에 있던 게 아님을 증명하듯 흔히 최신식이라 부르는 차가운 금속으로만 된 건물이 아니나, 여기는 통유리 벽과 철제 기둥, 새하얗고 차가운 네모난 형상으로 누가 봐도 최신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탓에, 주변에 섞이지 않고 홀로 동떨어진 분위기다.
“그 대기업 백화점이 들어올 때 같이 껴서 들어온 브랜드 지점이니까. 뭐, 거기랑 다르게 여긴 생활용품들 위주로 저가에 파는 곳이라 상인회의 반발이 매우 적어 거기처럼 싸우진 않았지만 말이야.”
“상인회… 그러고 보니, 그 바리스타분께서도 상인회장이란 이름을 이야기하셨던데, 여긴 마을 구성원들이 상인회를 차려서 상가로 만든 거리인 건가요?”
“소수 가게를 제외하곤 그런 셈이지. 옛날에… 내가 여기로 넘어오고 얼마 안 지난 때부터, 한창 통합 정부라느니, 화폐 개혁이라느니, 세계가 흉흉하진 않지만 조용하지도 않던 때에 해가 어둠을 걷어 올리고 상승해 가는 시간, 에메랄드빛을 분사하는 페르텔라 강은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어떠한 마음의 결의를 세워주기 충분했고, 당시 강가 하류에 모여 살던 이들 모두 궁핍하여 상류쪽 도심지에서 내쫓긴 이들이었지. 때문에 그들 마음에 새겨진 결의는 하나로 동일했고, 그렇게 이곳 상점 거리를 포함한 여러 구역들이 탄생한 거지.”
“…케무스 씨도 궁핍하여 쫓긴 이 중 하나였습니까?”
“나는 좀 다른 이유로 왔네. 그래서 처음엔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만, 말했듯이, 제 할 일 하며 조용히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
“그러시군요….”
“당시 그 사람들에게 난 불순물이었지만, 지금은 그 후예들과 같이, 같은 팔레트에 살아가고 있지. 동떨어진 건 결국 얼마의 시간이 흐르든 섞이기 마련인 것이지. 안 그런 경우는 그 사람 혹은 토착민 둘 중 하나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살다 보면 알게 될 걸세. …저기 있군.”
“물건 위치를 금방금방 찾으시는군요.”
“아는 꼬맹이 때문에 많이 왔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편지를 다이어리로 쓸 건가?”
“편지지 한 장으론…… 제 맘을 온전히 못 전할 거 같아서요.”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길래. 평소에 소통을… 잘 안 하기라도 하나?”
“많이 하는 편입니다. 다만, 긴 시간 떨어져 있는 때도 있고, 직접 입으로 전하려고 할 땐 막상 잘 전달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희한한 경우군. 사랑을 나누는 자들의 마음이란.”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복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아가는 자들의 마음 중, 복잡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흠, 일리 있는 말이군. 혹시 더 뭐 살 생각 있나? 직원급으로 족족 찾아줄 수 있는데.”
“음… 보아하니, 생각보다 온갖 물건들이 다 있어서, 조금 둘러볼 가치는 있을 거 같군요. 좀 자유롭게 구경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럼 난 1층 카운터 쪽에 가 있겠네. 다 구경하거든, 아까 들어온 입구 근처에 있는 계산대, 큰 카운터 테이블 있는 곳에서 결제하면 되네. 즐거운 쇼핑 되라고.”
“알겠습니다.”
새하얀 건물, 새하얀 진열장, 항상 웃고 있는 사람들, 빛을 내는 강가. 이 세계는 우리들의 세계에 비하면 너무 밝다. 하나같이 빛으로 가득하다. 어둠과는 거리가 먼 것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다. 태인 씨에게 조언을 구하고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그 시간 동안, 이 세계엔 희망만이 가득해 보였다. 모두 태인 씨와… 평화를 위해 싸웠다는 이들의 힘으로 일궈낸 빛이겠지.
가끔 이렇게 다니다 보면, 마치 행복한 꿈으로만 가득 찬 조각배가, 파도 하나 없는 바다를 거니는 것을 보는 기분이다. 악몽이 들어설 자리는 이미 사라진 배. 파도는 이미 지나가 순항만이 기다리는 배. 그런 배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기분이다.
만약 나와 산메 씨가, 이 배에 탑승하고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에 서 있는 거무칙칙한 현무암 덩어리의 전망대에서 벗어나 이 새하얀 배에 올라타고 배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면, 나나 산메 씨나 행복한 꿈에만 둘러싸인 채 산메 씨는 더 이상 아픔과 분노, 경계에서 멀어지고, 나는 강제로 산메 씨와 멀어져야 하는 상황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배 밖에서 누군가, 무언가, 어딘가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를 모두 무시하고 영원히 배에서 머무를 수도 있을까. 이 세계가 부러운 건 아니지만, 이렇게 종종 있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오늘 전까지 여러 번, 태인 씨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세계의 악을 처단한 길고 긴 모험담을 들었었다. 나비들이 들려준 다른 세계와 달리, 이곳은 승리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적이라 한들 최소한의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으며 목숨을 잃는다 해도 끊임없이 악으로부터 모두를 구하고자 싸워나갔다. 온갖 종류의 절망과 악몽이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덮쳤지만, 한 번은 쓰러져도 결국엔 다 일어섰다. 조금의 함락도 허락하지 않았다. 악몽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어느 한 부분이 망가져도, 복구시키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쳤다.
이 세계엔 빛과 희망이 가득하다. 악몽 따위 해치울 수 있는 행복한 꿈만으로 가득 찬 조각배만이 모든 파도를 견뎌내고 영원히 항해를 이어간다. 우리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다. 격차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한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한다. 비탄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한다. 만약… 그 배에 영원히 머문다면…
산메 씨는——
꿈을 찾아, 별을 찾아, 다함께 또한 나아가자. 허무맹랑, 천방지축, 무의미한 꿈이어도.
[땅!]
“아. …떨어지거나 망가지진 않았군. …어느새 3개나.”
…나는, 산메 씨와…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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