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거취
3편
언제나 한결같이
2024.12.17. A.M.10:12(+0 MCT)
[쾅!]
“차원의 도서관 람브리에…”
C가 혼자 사라지거나, 곤란하다고 할 때마다 오는 이곳. 이젠 하도 많이 와서 이름도 다 외웠다. 거대한 하얀 건물, C는 마치 해결소인 것처럼 여기에 오는 일이 많다. …여기서 어떻게 그 녀석을 찾아야 하지? C처럼 마력을 추적할 수도 없는데.
[위이잉-]
…이 자동문이라는 건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애초에 내가 작동시켜야 하는 건데 왜 자동문인 거지? 반자동… 반수동이 더 어울리는 말 아닌가. 하필이면 이런 건 다 유리라서 부딪히기도 하니 짜증 난다.
[타박- 타박- 타박- 타박-]
평평한 대리석 바닥. 나무가 섞인 새하얀 벽과 기둥. 온갖 과학의 산물. C와 함께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감성. 그 어떤 불안정한 파동 따위 없는 조용한 공간. 갑갑할 정도로 안정적이다. 이렇게 무너지지 않은 온전한 큰 건물을 제 발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이 세계밖에 없다. …열람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여기 있었던 거 같은데. 시간 낭비하지 않으면 좋겠다.
[웅성웅성…][수군수군…]
사람이 좀… 있군. 대부분 어린아이인 거 같은데. 도심지에서 벗어나 숲 안까지 족히 5분은 걸어와야 하는 도서관인데, 이렇게 사람이 오는 게 신기하군. 이 도시 어린아이들은 그리 다 책을 좋아하는 건가.
[스르륵]
“뭐지? …포스터?”
알림. 12월 17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2시 10분까지 <??? 보육원> 아동들이 우리 도서관에 문화 체험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머무를 예정입니다. 방문하시는 손님분들께선 해당 시간, 아동들의 소음이 발생하여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보육원… 행사인가. 보육원……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아, 거기는—”
“누나, 조금 전에 읽었던 책 어디에 있던 거야?”
“응? 그 하얀 소설책? 왜, 너도 읽고 싶은 거야? 가자, 같이 찾자.”
“야 너는 무슨 그것만 하루 종일 읽고 있냐? 만화 말고 나처럼 교양 있는 책 좀 읽어봐라~”
“…만화책이잖아? 퍽이나 교양 있는 책이네요.”
“형! 이것 봐봐! 곤충이 이따시만하게 그려져 있어!”
“오, 그러네. 어우, 역시 난 좀 징그럽다야. 그리고 여기 도서관이니까 큰 소리 내면 안 된다고 했죠? 쉬잇-”
“언니, 언니 그거 다 읽으면 저기- 놀이방 가자, 놀이방. 거기에 재미있는 거 많대!”
“책 읽기는 이제 지루하세요? 좋아, 그럼 5분만 딱 기다려줘.”
“뭐라고 검색해야 하냐… 고… 고…”
“고전 설화, 고전 설화. 오빠 수업 제대로 안 들었구나? 고전 설화로 분류된다고 했었잖아~”
“………평화롭군. 진태인은 어디 있지?”
그리— 오래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풍경이다. 얼른 목적만 달성하자. 혼자 어디에 간 건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한 문장 적힌 쪽찌 하나만 남기고 어디 갈 이유가 없을 텐데.
[드르르륵—]
누군가 집이라 부르는 푸른 별에서 기적이 일어나려 해. 절망 따위… 끊어 내버릴… 작은 섬광의 노래를…
“여기서 어떻게 해야 이 2,000만 라콜의 거금을 줄이면서 손해를 안 볼 수 있을까… 옵션이 하나같이 너무, 고르기가 어렵네.”
차가운 빗길 아래 아련히 버려진 마음을 붙잡아서. 최선이라… 혹은 최악이라… 모두가 달리 말하는 것.
2층 직원 휴게실, 이런 곳에 있었다니. 괜히 큰 열람실을 다 둘러봐서 시간 낭비를 해버렸군. …노래까지 듣고 뭘 저리 열심인지.
“…진태인.”
“음? 어, 산—메 씨…? 왜— 여기에—”
저항의 문이 지금 이 순간 너의 곁에 열렸다. 새로운 메시지—
“왜긴. 내가 왜 왔는지… 이유를 가장 잘 아는 건 너 아닌가?”
“…C 님 찾으러 오셨습니까? 여기 안 계십니다만…. 아니 그리고 직원 휴게실을 이렇게—”
[드르르륵—]
“C가 쪽지 하나만 남긴 채 어제 하루 내내, 정확히는 그제 밤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딜 갔나 마력을 추적했더니, 확인 가능한 마지막 행선지가 여기더군. …C는 종종 나한테 말하지 않은 고민 같은 게 있으면 너한테 오지. 아니라는 소리는 못 할 거다. …어제 아니면 그제도 그랬겠지?”
“만약에 제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거죠? …때리실 거예요? 아니면 또 번개라도 쏘실 거예요?”
“…아이들도 있고, 건물 안이라 불필요한 이들까지 엮이면 귀찮으니, 무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지만.”
[스윽— 꾸욱—]
“말할 때까지 눌러앉아야지. 무작정 여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보단 그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여기 의자는 꽤 맘에 드는군.”
“…진짜 눌러앉을 생각이에요? 여기 직원 휴게실인데. 저 말고도 일반 직원분들도 오간다고요.”
“못 할 거 같나? 어차피 너도 오늘 여기 계속 있어야 하는 처지 아닌가? 어떤— 행사 같은 걸 하는 중이던데.”
“윽, 그건 또 언제… 상황 파악 빠르시네요….”
“그냥 빠르게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난 눌러앉을 필요 없고, 넌 괜한 사람이 일에 휘말릴지 걱정할 필요 없고, 그게 가장 이성적인 판단인데. 너나 C나 영 이상하군. …C가 자기가 어디에 가는지 나한테 밝히지 말라 했나?”
“C 님이야 평소에도 자기 세계 일 생겼다며 갑자기 사라지는 분이잖아요.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니겠어요? 왜 그렇게 C 씨를 찾고 싶으신 거예요? 뭐 애인이라 걱정이라도 되시나?”
“……걱정 같은 건 되지 않아. 단지, C의 세계에 이상이 생겨 간 거라면 징후가 보였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고, 나긋하게 써진 쪽지 하나 카페 테이블에 올려두고 그리 사라지니 궁금한 거지.”
“…정말 궁금하기만 한 거예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그건 다른 이유다.”
하필이면 보육원 행사 같은 걸 해서, 심기 불편해지는군. 조금 전 열람실에서 진태인을 찾다가 아이들이 말을 걸어 귀찮아지기도 했고, 괜히 오래 그 광경을 마주했다간 좋지 않을 거 같다. 하지만 여기에 있으면… 그 아이들을 마주할 일이 없겠지.
[톡톡톡톡톡톡톡]
“머람. ……만약에 C 님이 산메 씨에게 자기 위치를 알리기 싫다 하면 어쩌실 거예요?”
“…이유를 물어봐야지.”
“어디 있는지 찾아내서요?”
“가능하다면 그래야지.”
“하지만 C 님은 산메 씨가 본인을 찾지 않으셨으면 해서 그러는 건데도요? 그건 C 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요.”
“…지금 날 말로 설득하려는 거야?”
[톡톡톡톡톡톡톡]
“뭐 힘겨루기 같은 건 성립되지도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죠.”
“……이유도 알려줄 생각이 없나?”
[톡톡톡톡톡톡톡]
“알려주지 말라고 요청 받았거든요. 제가 또 약속 하나는 기깔나게 잘 지키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허. 어이가 없군. 이봐, 진태인. 내가 지금 너하고—”
[루티아 리스파 시즌— 라피아 이스풀 페리즌— 타임 투 린 파 디른— 델리로움 온스파 히즌— 루노데 시나 루노 코토와—]
“어, 라파엘 전화네? …잠시 전화 좀 할게요. —여보세요? 어, 너 요즘 바쁘다 하지 않았어? 웬일로 전화를…”
이런 순간에 무슨 전화를. …이건 뭐지? 조금 전까지 노래 들으면서 뭘 엄청나게 쓰던데, 결혼식— 준비— 계획? 그러고 보니 전에 결혼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은데. ‘혼인신고는 언제 하지?’, 예식장 대관, 식대, 주례, 축가, 스튜디오, 정장, 메이크업… 사람 이름 같은 것도 잔뜩 적혀 있는데. 여기 박혀서 뭐 하나 했더니, 이걸 정리하고 있던 건가.
결혼… 인간들은— 사랑한다는 이들끼리 식을 치르고 어디에 알려서 혼약한댔지. 종종 인간을 우호적으로 여기는 용들이 비슷하게 따라 한다고는 얼핏 들었는데… 인간은 무슨 신고까지 해야 한다니, 귀찮은 방식이로군. 사랑 같은 걸 인정받는데 그 잘난 법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나, 신기하군 그래.
“응, 알았어. 잘 지내~~ 응~ —어! 그거! 함부로 보지 마요…!”
“네 연인과 혼약을 맺을 예정인가?”
“…4개월 뒤에 맺을 예정이에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열심히 준비 중이에요.”
“신기하군. 사랑 따위를 인정 받으려고 굳이 돈을 내가며 거창한 식 같은 걸 치르고 법에 신고해야 한다니. 불필요하다 느끼진 않나? 적당히 본인끼리만 시간 들여 마음 확인하고 인정하면 그걸로 끝나는 것도 가능할 텐데.”
“엄밀히 말하면 결혼식은 안 해도 되는 거긴 해요. 예식장 티켓팅에 예약이니, 스드메 준비니, 식대 예상 인원 집계니, 가격 비교니, 힘들여가며 전국 팔도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고생하느니, 피곤한 일이 아니라 여기는 사람은 대충 가진 돈 흩뿌리면 알아서 다 해주는 갑부들 아니고서야 없겠죠. 굳이 돈 쓰고 싶지 않고 본인들만 괜찮으면 그냥 거주지가 속한 구청 같은 데 가서 서류 몇 자 쓰고 도장 찍는 걸로 끝내면 되고요.
……그럼에도 굳이 결혼식을 하는 건, 성대한 축하까진 안 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의 반려로서 함께하기로 약속한 그 기쁨을 모두와 나누고 싶고, 거기까지 걸어오는 데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고, 단순 서류 작성으론 절대 생기지 않고 남겨지지 않을, 영원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죠.”
“예컨대, 굳이 남들에게 알리고 기억에 남기려고 한다는 건가?”
“짧게 말하면 그렇죠. 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여러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죠. 애초에 결혼한다는 그 전제를 세우기까지의 과정도 간단한 게 아닌데. ——너무나도 복잡하여 사전마다, 사람마다, 법률마다 다 다른 뜻을 말하고, 당사자들은 1년에 몇 번이고 흔들리기도 하고, 셀 수도 없이 재정의하고, 다시 뭉치는 게 사랑인데, 결혼식이라고 간단하겠습니까?”
“…사랑이 그렇게 어려운 감정인가?”
“산메 씨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인데요?”
“내게 있어 사랑은… 짜증 나고 찢어서 죽이고 싶어도 막상 그 대상이 없으면 지루해질 거 같은 감정. 이라고 알고 있다.”
“……그럼 산메 씨는 본인이 C 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방금 말한 정의로 따지면, 글쎄, 사랑은 아니지.”
“그게 뭔— 하지만 둘은 연인사이잖아요. C 님도 그래서——”
“그저 우리 둘이 뜻이 맞고 그나마 가장 마음이 통하는 건데 C가 나에게 고백했었고, 난 그걸 받아준 거뿐이다. C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난— 딱히 C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하진 않아.”
…갑자기 침묵이 흐른다.
“……사랑하지 않는데 고백을 받는다고요? C 씨는 그걸 알고 있어요?”
“거절할 이유는 없고, 본인이 좋다고 그리 말하는데, 받아주는 게 예의인 거 아니겠나. 아마— 말을 안 했으니 모르겠지.”
“그럼, C 님이 지금 산메 씨에게 본인 위치를 알리지 않고 어디 알 수 없는 곳에 간 건… 진짜 아무 생각 없으세요?”
“말했잖냐, 그저 궁금할 뿐이라고.”
“………C가 그 말을 들으면 슬퍼할 거예요.”
“상관있나? 일순간 마음이 안 맞아 슬퍼한 적은 많다. 어차피 금방 나아질 거야.”
“그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함께 있는 이유가 뭐예요 대체? C는 당신한테 사랑한다면서 있는 건데. 당신은 C가 위험에 빠진다 싶으면 항상 먼저 구해주잖아요. 말도 C 말만 듣고. 이제까지의 모습만 보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보이지, 당신 말 같은 사이론 안 보이는데도요?”
“왜 자꾸 같은 답을 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그저 우리 둘이 뜻이 맞고 그나마 가장 마음이 통하니까 따르는 거고 지키는 거지. 내 손에 벗어나서 쓸데없는 변수를 일으키면 귀찮고 짜증 나니까. 네가 생각하는 비이성적인 이유는 고려한 적도 없어.”
“———그 말, 진짜입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했나?”
조금 전까지 전화한다고 웃는 표정이던 놈이 갑자기 왜 저리 표정이 굳어지지? 뭐 잘못 먹었나?
“………허, 그간 나름 노력했는데, 역시 당신을 이해하는 건 저한텐 불가능한 일인 거 같네요.”
“언제 내가 너한테 날 이해해달라 한 적 있었나? 그런 적 없는데.”
“그래요? 그럼, 제가 당신 말을 들을 필요도 없겠네요.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챱—][스윽—][드르르륵——]
“…나가세요, 마리 씨한테나 가야겠어요.”
“C 위치는 알려달라고 했을 텐데.”
“알려주기 싫으니까 나가시라고요. 보안 장치 가동하기 전에. 시끄럽게 일 벌이고 싶으시면 있으시던가.”
“…이해가 안 가는군. 뭐, 까짓거 혼자서 찾아보지.”
[터벅- 터벅- 터벅-]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리 구겨지는 거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야. …카페에서부터 다시 추척해 보는 수밖에.
[드르르륵——]
2024.12.17. P.M.12:08
“…역시, 다 묻혔어.”
암만 C의 마력이 특유의 향이 강하다 해도, 온갖 인파가 다 지나가는 길에선 손쉽게 묻혀버리기 마련… 카페에서 람브리에까지는 지나가는 인파가 적어 명확하게 추적할 수 있는데, 하필 이 동네는 무슨 요충지니 하며 온갖 것들이 몰려다니는 곳이라 람브리에처럼 외곽만 아니면 인간에 치이지 않는 때가 전혀 없으니.
“쯧, 곤란하군.”
이제라도 다시 돌아가서, 불필요한 소란이 생길 건 감안하더라도 진태인 그놈한테 캐물어야 하나? 애초에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 녀석이 성질을 내는 거지?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우리 관계에 자기가 그리 화를 낼 이유가 있나?
“정말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끄르르륵……]
“…일단 허기부터 채워야겠군.”
C가 준 카드를 사용하면 되겠지. 마침 가까운 곳에 식당이 있었던 거 같은데—
[휘리릭-!]
날아다니는 건 안 되어도 잠깐 낮게 활공 중인 건 괜찮겠지. …저긴 국-밥 종류 파는 가게인가? 간판이— 밥이 이 세계 언어로 살루트라 했던 거 같은데, 사랑 트는 확실히 읽히고… 저길 한번 가봐야겠다.
[휘리릭-! 끼익-][터벅- 터벅-][디리링—]
“어서 옵쇼—”
식당에 털이 수북한 수인이 카운터라니, 괜찮은 건가. 사람들 먹는 모습을 보니 국밥이 맞는 거 같네. …적당히 메뉴판이랑 가까운 구석 자리에 앉자. 식사 시간인가? 여기도 사람이 꽤 많이 앉아 있군…. 메뉴가— 다 어떻게 되는 거지? 쿠-스-테-눔-푸-넬-마-살-루-트… 켈-쿠-바-눈-푸-넬-마-살-루-트… 쳇, 그림은 없나.
“주문하시겠습니까?”
“어——— 쿠스테눔…? 하나.”
“예— 여기 8번에 쿠스테눔 하나!”
사전 펼쳐서 나오는 기본 생활 언어 같은 건 얼추 외웠는데, 여전히 몇몇 단어와 고유명사들은 뭔지 모르겠네. 대체 왜 이 세계 언어는 알파벳이 몇십 개가 넘고, 발음도 조합에 따라서 달라지고, 생긴 것도 몇몇 빼곤 왜 죄다 복잡하게 생겨 외우기 어렵게 해먹은 건지. 어쩜 이리 비효율적인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지, 근데 진태인 그 녀석은 여기 출신도 아니면서 이걸 다 외웠다고…?
푸넬마-살루트가 국밥이란 뜻인 거 같고, 메뉴명이 쿠스테눔, 켈쿠바눈, 츠-살-바눈, ㅍ-ㅖ-툴-바눈, 안-체-스-얀… 이렇게 읽는 게 맞는 건가. 바눈… 고기가 바눈이었나? 그럼 쿠스테눔이랑 안체스얀은 뭐지? 안체스얀은 바눈이라 적힌 것들이랑 가격이 같은데, 쿠스테눔이… 1500 더 비싸니 섞여 있다는 뜻인가.
이 세계에서 혼자 C를 찾으려면 결국 이 세계 언어에 다 숙달되어야 하는데, 외운 지 조금밖에 되지 않아 아직 영 어렵네. 번역기 같은 것도 없고, 진태인이 아니고서야 타인에게 물어봤자 똑같은 말이라서 도움도 안 되고, 오늘 C를 찾아 돌아가거든… 다시 또 외워야겠어.
[디리링—]
“와 날씨 진짜 춥다. 이제 곧 하노루안-페코 이르크라 그런가? 추워진 게 확 체감되네~”
“그러니까. 들었어? 일기예보에서 이번 주말부터 눈이 진짜 말 그대로 펑펑 내리면서 이르크 때는 메트로폴리스 전체가 새하얗게 될 거래. 지금 그거 때문에 엄청 추워진 거라던데. 이틀 뒤부턴 진짜 패딩 안 입으면 자살 행위야.”
“눈이 언제 오나 했는데 몰려서 오는 거야? 다 얼어죽게 만들 심산이구만. 에휴, 뜨끈하게 국밥으로 몸 좀 데우자.”
하노루안-페코 이르크? 그게 뭐지? 행사나 절기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열람실에서도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번 이르크 때 뭐할 거야?’라고 물어보던데. 행사인가…… 행사, 행사라… 단서가 될까?
[톡 톡 톡 톡]
“에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다니… 연말이 순식간에 와버렸다 그냥. 넌 이번 이르크도 혼자냐?”
“…미친놈이 갑자기 시비를 거네?? 그래 나 이번에도 솔로 이르크다 개자식아.”
“쯧쯧, 그러게 평소 행실을 잘~ 다지시라니깐. 아— 올해는 또 뭘 하면서 보내야 하나.”
“쓰레기 새끼… 저기 뭐 요즘에 티비에서 연예인들이 줄기차게 가는 여행지나 가시던가요. 무슨 이색 데이트 장소라고 온갖 곳 다 소개하더구먼. 이르크 기간에는 너 같은 손님 좋다고 엄청 반겨주겠지. 넌 돈도 잘 버니까 고급 호텔 예약도 어렵지 않을 거고.”
“그걸 모르니까 그러지, 임마. 나 많이 버는 만큼 바빠서 그런 거 챙겨볼 시간 없잖아. 그러니 네가 좀 알려줘. 여자 친구가 우리 연말인데 뭐할까 물어보는데 암 것도 몰라서 그냥 어, 어 하는 거 엄청 볼품없는 거 너도 잘 알잖냐.”
“…에휴… 넌 꼭 나한테 나중에 스테이크 같은 거 사줘라 이 새끼야. 나 없으면 연애 못 했을 놈.”
“어렵지 않지.”
[톡 톡 톡 톡]
연말, 데이트, 여행, 새하얀 눈, 크리스마스 같은 건가? …설마 C가? 여태까지 그런 행사 따위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아 왔는데, 그럴 일은… 아니, 아직 판단하기엔 단서가 부족하다. 그래도… 하노루안-페코 이르크라는 크리스마스 같은 행사가 있단 사실은, 기억해 둬서 나쁠 거 없겠군. 하노루안, 페코, 이르크.
…C가 크리스마스 같은 걸 챙기자는 사람은 아닌데.
나는 용들을 탄압하고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인간들의 행사 따위, 살아남기도 바빠 인간 친화적 용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 들었을 뿐, 아무 관심 가진 적 없다. C는 망가진 세계에서 여행을 떠난 나비들이 종종 들려주는 이야기로만 접했을 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알아도 챙길 방법도 없고, 챙길 일도 없을 거라 이야기했다. 남의 세계에서 물건을 가져와 아주 조금— 뜻을 이해하기 위해 흉내 낼 지는 몰라도, 그걸 진심으로 챙기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나도, C도.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이고, 불가능하니까.
새하얀 눈이 내리는 배경으로 나무를 빛으로 장식해서, 노래를 들으며 웃으며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기라니. 새하얀 눈과 행복에서부터 글러 먹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둡다. 빛은 잠식당했다. 오로지 흑색만이 범람한다. 행복이란 감정 따위 잊은 지 오래다. 기쁨? 웃음? 행복? 한참이나 오래전에 사라진 걸… 무슨 수로 다시 뽑아낼 수 있는가.
크리스마스 같은 거,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 걸, C가 굳이 챙길 이유는 없을 텐데.
[드르륵—]
“쿠스테눔 하나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아, 이게.”
여러 개의 고기와… 뭐가 잔뜩 섞여 있네. …쿠스테눔이 모듬이란 뜻이었나. 일단, 배를 채운 뒤에 다시 생각하자.
“그래서 그런 소리가 들렸던 거구나?”
“거기까지 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조금. 어휴, 완전 너만 고생이네. 그냥 그런 이상한 커?플? 일 신경 끄고 알아서 하라 해. 우리 일 처리하기도 바쁜데, 그렇게 비협조적인 사람 도와줘봤자 너만 손해지.”
“…그래도 나름대로 연이 있어서 신경 쓴 건데, 참담하네요.”
“너는 그 연한 마음이 문제라니까? 그나저나 참 이상한 사람이네. 아니, 자기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고백받아서 연애한다며 대놓고 그럴 수가 있다니, 음침하다 정말. 그 페르텔라 가서 서프라이즈 준비한다는 상대방이 아깝다 아까워. 나랑 친한 사람이었으면 당장 연락해서 ‘그 자식 나쁜 놈이니까 헤어져.’라 말했다 진짜.”
“에휴, 힘겹네요. …점심은 어떻게 할까요?”
“아까 레이아가 짜장이나 사먹자 하던데. 로트만스 씨 오면 메뉴 정해서 시켜 먹자.”
“그럽시다. ——저희는 이번 백야 때 뭐 할까요?”
“그러게,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뭐 생각하질 못했네. 영화나 보고, 어디 뭐 간단하게 방이나 잡아서 놀까? ‘그것’도 하고.”
“굉장히 무슨 꿍꿍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주실래요…?”
“왜? 난 꿍꿍이 있어서 말하는 건데.”
“…무섭네요, 정말. 백야가 코앞인데 호텔 방 남는 곳이 있으려나.”
“굳이 고급스러운 곳 아니어도 되니까, 적당히 있는 거 골라. 방해받지 않는 개인 공간이 필요한 거잖아?”
“그렇긴 하죠. ——성자의 백야에는, 거의 모든 커플과 부부가 여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죠.”
“뭘 새삼 당연한 소리를. 그 커?플?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말로는 신경 끌 거라 했지만… 그 어딘가 결의에 찬 표정을 하고 떠난 C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떠나질 않네요. 그 사람은 진심인데… 슬픔과 실망에 찬 블랙 백야가 되면 어쩌나…”
“뭐, 본인들이 감당할 일이지. 어쩔 수 있나? 신경 꺼, 우린 우리 일에나 집중하자고.”
“…네.”
2024.12.17. A.M.09:32(-4 WET)
“…9시, 반이 넘었네. 어색한 감각이라서, 못 잘 거라 예상했는데. …피곤했던 걸까, 안정이 된 걸까.”
[탁-][터벅 터벅 터벅 터벅][스르르륵——]
“——이곳의 아침은 밝구나. 으으— 이 호텔, 조식을 제공해준다 했었지. 2층이었나, 1층이었나…”
오늘까지만 돌아다니고, 내일 돌아가서 마무리하고, 25일날…… 할까. 성자의 백야, 우리 말로는 크리스마스. 여태껏 한 순간도 관심 가진 적 없던 날. …바뀌지 않으면, 다른 미래를 잡을 수 없겠지. 더 나은 미래를. —배 채우고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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