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나비의 춤

나비의 마음

2편

나는 당신을

2024.12.16. P.M.03:34

[띠리링-]

“오, 딱 맞춰서 오셨네요. 손에 뭐가 많이 들리셨네~”

“몇 개 필요한 것들을 좀 구매했습니다. 반지는… 완성되었나요?”

“그럼요, 아주 멋있게 완성되었죠. 보실래요?”

“확인은 중요하죠.”

낮의 태양이 중천을 넘어선 시간. 주변을 탐방하다 슬슬 다 됐을 거라는 케무스 씨의 말에 따라서 가게로 돌아와 반지를 확인한다. 테리나라는 이름의 직원분이 테이블 아래에서 진회색의 사각형 반지함을 꺼내 보여준다. 펼치니, 내부 재질은 진한 네이비 색으로 되어 있다. 내가 처음 요청했던 색 조합이다. 반지는…

“꺼내서 확인하셔도 돼요. 마음에 드시나요?”

“…아주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가격이 얼마였죠?”

“반지함 포함해서 57,800라콜입니다. 결제는 저쪽에서 도와드릴게요~”

이러면 이제 목표 하나는 완료됐다. 다음은… 아, 혹시 모르니 그것도 하나 챙겨둘까.

“아, 혹시… 목에 거는 줄도 하나, 가능하겠습니까?”

“줄이요? 네네. 색이랑 재질은 어떤 게 좋으세요? 체인, 가죽, 실, 갈색, 금색, 은색, 검은색, 동색, 빨간색— 이렇게 있거든요.”

“음……실로 빨간색 두 개 부탁드립니다. 묶고 푸는 건 제가 직접 할 수 있을까요?”

“아유, 그럼요. 어디 보자…… 찾았다, 이거거든요? 묶는 법 모르시면 제가 설명해드 릴게요.”

발 빠르게 근처 진열대에서 잘 포장된 붉은 실 두 개를 가져와 계산대에 추가하고 잘 보이라는 듯이 세워서 보여준다. 꽤나 친절하다. 젊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들어오기 전 문밖에서부터 웃는 표정만을 보인다. 삶에 희망이 가득한가 보다.

“방법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실 두 개까지 포함해서 58,000라콜 결제해드리겠습니다. 카드 꽂아주세요. ……네, 됐습니다. 결제는 끝났고요, 서프라이즈 용이시면 따로 선물 포장 필요하실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선물 방식은 생각하는 게 있어서 말이죠. 이렇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에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뿐이죠. 저희는 그저 누군가가 마음을 일궈내는 것을 도와주는 순간이 좋아서 하는 건데요~”

“…아름다운 마음가짐이십니다. 그럼 이만, 수고하십시오.”

“조심히 들어가세요~~”

[띠리리링—]

어느 한 세계의 나비에게서, 붉은 실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파생된 미신을 들었었다. 『속현괴록』이라는 어느 설화에 나오길, 거기에 등장하는 월화노인이라는 인물이 붉은 끈으로 두 남녀를 묶으면, 그들의 거리가 얼마나 멀든, 사이가 얼마나 안 좋든 반드시 맺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설화는 원산지인 나라와 그 주변국에 여러 버전으로 퍼지며 높은 인지도를 가졌고, 이는 곧 그 나라권에서 미신으로 탈바꿈해 붉은 실로 연결한 두 사람은 반드시 맺어진다는, 일명 <운명의 붉은 실>이란 이야기로 퍼져나갔다 한다.

나랑 산메 씨는 이미 맺어진 사이다. 허나, 그 사이의 연결고리는 불안정하여 언제 무슨 일이 생겨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우리 사이의 실타래는 약해지고 약해져 당장 끊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그것이 우리 사이의 끝을 의미하진 않겠다만, 영원한 불안정을 싣고 가는 셈 되겠지. …비록 허무맹랑한 미신이지만, 이걸로나마 그 타래를 굳건히 체결할 수 있다면…… 살면서 처음으로 미신이나마 붙잡고 싶다.

운명의 붉은 실은 우리 사이를 안정적으로 이어줄 테니까.


“…가셨군.”

“수고했어요, 언니. 어우 서프라이즈 반지라는 이야기에 나까지 다 설레네~”

“나도 그 말 듣고 오랜만에 머리띠 꽉 묶고 만들었다. 꽤 난이도 있는 커스텀이었어.”

“보통은 하나당 완전 처음부터 만드는 거 아니면 1시간 정도랬나?”

“그쯤. 뭐… 2시간도 엄청나게 힘낸 거지만. 흠… 곧 있으면 4시네. 아우슈타에서 커피랑 디저트 좀 사 올까? 저녁 먹기엔 이르지만, 살짝 허기지네.”

“거절할 이유 없지. 난 고구마 라떼에 치즈 케이크가 좋아. 떼는 아이스로.”

“자주 먹는 메뉴네. 알았다, 다녀올게.”

[띠리리링—] [똑 똑 똑—]

2024년 12월 16일, 오후 3시 46분. 성자의 백야까지 앞으로 9일. 백야 전에 손님이 오는 경우는 꽤 오랜만이었다. 사자의 해몽은 한참 지났고, 백야가 코앞인 순간에 커플링을 당일 바로 맞추러 오다니, 참 독특한 손님이다. 잠시나마 본 인상착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어두운 것이, 생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케무스 씨, 별 탈 없이 안내하는 중이시겠지.

그래도 덕분에 백야 전에 하고 싶었지만… 금액이 조금 모자라 포기해야 했던 걸 다시 할 수 있을 거 같다. 테리나한테 말하면 안 되는 탓에,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 졸였는데, 저 손님 덕에 가능성이 보인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페르텔라 강에 울려 퍼질 백야의 노래 속에서, 소망을 밝히겠다고 포부를 가진 게 어언 5년. 슬슬… 실행할 때가 됐다.

[끼이익 띠링 띠링—]

“아리스- 하—이”

“오, 로안나 하이. 오늘도 저녁 전 간식이야? 요새 자주 사 먹네.”

“알면서 묻기는 항상 시키는 거, 알지? 딸기 라지랑 고구마 라지 아이스, 치즈 케이크 2조각.”

“너 요새 치즈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애가 치즈를 먹는다? 테리나가 치즈 좋아하는데, 혹시 설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결제나 해주시죠. 21,150라콜 맞지?”

“네가 나한테 숨기는 거 말해주면 18,000에 해주고, 아니면 21만에 해줄게.”

“뭐야 그 유치원생 같은 협박은? 내가 그거에 넘어갈 거 같니? 그리고 포스기에 21,250 찍는 거 다 보이거든.”

“헤, 그래서, 나한테 끝까지 말 안 해 주실겨? 너, 학교 다닐 땐 친구라고 실실 붙어 다닌 놈이 이러면 나 좀 서러워—?”

“6년도 더 된 학교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너한테 괜히 입 열었다가 네가 테리나한테 가서 쫄래쫄래 말할 거, 내가 모를 줄 아니? 네 행동 패턴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거든.”

“헤, 그래서, 나한테 끝까지 안 말해주실겨? 너너, 학교 다닐 땐 친구라고 실실 붙어다닌 놈이 이러면 나 좀 서러워—?”

“6년도 더 된 학교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너한테 괜히 입 열었다가 네가 테리나한테 가서 쫄래쫄래 말할 거, 내가 모를 줄 아니? 네 행동 패턴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거든.”

아리스 셴 이르타, 테리나 폰 아르토마샤, 로안나 데 한트라크. 태어난 곳도 다르고, 자라난 환경도 다르고, 서로 하고 싶은 것도 다르지만, 대학교에서 우연히 인연을 트고 벌써 몇 년을 이리 지내는 건지. 셋이 같이 기숙사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본 이곳 강가 하류의 빛깔을 보고 홀린 듯이 이 동네로 이사 와서 꿈을 펼치고자 난리를 쳤었지….

“호호, 뭐, 알아서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다 만들면 배달해 줄까? 아니면 들고 갈 거야?”

“들고 갈게. 여기서 앉아서 뭐 좀 보게.”

“알았쇼. 20분만 기다리시요~”

—그 손님, 이미 커플인 걸까, 아니면 서프라이즈로 고백하려는 걸까. 둘 중 뭐든 간에 테리나랑 대화할 때 옆에 슬쩍 껴서 뭐라도 물어볼 걸 그랬네. …에휴.


2024.12.16. P.M.04:20

“수고하시게—”

“모든 물품 구매는 제가 직접 하려 했는데요….”

“마침 나도 여기서 사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늙은이 말동무해 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라 생각하고 받게나.”

“…감사합니다.”

“시간이— 곧 있으면 저녁대로군. 난 조금 전에 동료들한테 호출을 받아서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야겠네. 그 지도는 자네 가지게. 나한텐 복사본이 많으니 가져간다 해서 문제 될 거 없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덕분에… 백지뿐인 계획에 틀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익숙하니까. 만약 낮에 말했던 것처럼 내일까지 이어서 할 거라면, 또 도움이 필요하거든 내가 일하는 소나타 향수공방에 와서 동료에게 ‘케무스 씨를 찾습니다.’라고 말해주게. 아마… 자네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카운터에 있을 걸세. 그리고 거기서 향수 제작도 하고 싶거든, 마찬가지로 내 이름을 대면 원가보다 더 싸게 해줄 걸세.”

“소나타 향수공방… 기억해 두죠.”

“고맙네. 12월의 해는 추위에 금방 숨어버리니, 조심히 들어가게. 마음을 여행하는 젊은이.”

“케무스 씨도 조심히 들어가십쇼.

…손에 짐이 좀 많아졌는데, 아까 이야기한 호텔에 가서 방을 잡고… 식사를 좀 해야겠군. 어디 보자 아까 호텔 위치가…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겠군. 천천히 걸어볼까. 아쉽게도 강가를 볼 순 없지만, 노을 지는 조용한 길가를 걷는 것도 좋지.

[위이잉——]

지나가는 차들은 꽤 많지만,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없다. 그리고 암만 비수기라지만 몇 시간을 다녔는데도 돌아다니는 이를 거의 보지 못했다. 있어봤자 다들 케무스 씨를 알아보니, 다 이 동네 사람들뿐이었을 터. 가게들은 모두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지만, 안에는 내가 들어온 것에 놀라며 급히 일어서는 직원밖에 없었다.

작금의 모습만 보면 여긴 외로운 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성수기만 되면 커플 손님으로 붐빈다 하니, 그 광경을 상상하고자 해도, 이 외롭게 홀로 서 있는 가로등을 보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나부터가 그런 광경을 봐온 기억이 없기에, 웃음 가득한 길가란 단어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웃음 가득한 길가. 크리스마스의 흰색으로 가득 찬, 사람 가득한 거리.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 …어떤 분위기일까. 지금과는 정반대라는 건 당연하겠다만, 그 세세함은 모르기에, 묘사할 수 없다. 적을 수 없다. 아마도— 영원히.

…산메 씨는 오려고 하지 않으시겠지.

“그런 거,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똑같은 새하얀 눈밭이라 하더라도 단둘이 있는 걸 선호하시지, 인파 사이에 섞이는 건 택하지 않으실 거다. 마치 이 가로등처럼. 누군가가 보기엔 외로워 보인다고도 하겠지. 아니, 정확하게는 많은 이들이 보기엔 그렇겠지.

“…상관없어.”

우리가 이 조각배에 어울리는 존재들이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거무칙칙한 현무암 덩어리의 전망대에서만 살아왔는데, 이 빛 덩어리 조각배에 탑승한다 해서 바로 거기에 어울릴 순 없겠지. 애초에 배 안에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 다음 신호에 건너세요. ]

이 배는 희망을 품은 자들의 배니까.

[ 좌우를 살피고, 조심히 건너세요. ]

부서진 것 하나 없는 안전한 세계. 모든 것이 질서로 통제되는 세계. 산메 씨는 오히려 답답해하실 거다. 좋아하지 않으시겠지. 결국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순하다. 갈림길이 많지 않다. 눈앞에 이 사거리 3차선보다도 좁을 테지. 단순명료할 것이다.

산메 씨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은, 내가 가야 할 길은 크게 변화하지 않겠지. 계속.


페르텔라 강. 현지어 그대로 적으면… Uvuont-Ferru`Teallra. 에메랄드빛이 특징인 평균 폭 0.8km에 수심은 1-4m까지 다양하고 길이는 417km에 달하는 거대한 강으로, 약 4개의 지역구를 관통하는, 강을 부속으로 둔 슈미루트라 하는 이 나라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강이라 한다.

강의 상류는 주로 발달한 도심지가 차지하고 있으며, 하류는 비교적 덜 발달한 교외 지역과 이곳 같은 여행지 일부가 차지하고 있는데, 과거 상류 도시 주민 중 가진 것이 적은 이들을 하류 쪽으로 내몬 역사가 있어 토착 하류 주민들은 상류 주민들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상류는 주로 기업들을 위주로 인프라가 건설되지만, 하류는 주로 개인이나 시민 협회를 위주로 인프라가 건설된다고 한다.

각 구간은 시내·외 버스와 기차, 고속도로를 통해 이어지며 상류는 관광, 하류는 휴양의 목적이 크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과거 페르텔라 강이 있던 곳은 본래 크나큰 숲이었는데, 지금의 강가 최상류와 연결된 산지 너머 바닷가에서 건너온 숲 전체를 다 뒤덮을 만큼 긴 어류형 생명체 <페르텔라>에 의해 강으로 바뀌었다 하며, 그 생명체가 넘어온 이유, 넘어와서 한 것 등 세부 내용은 전설이 기록된 지역 별로 모두 다르나, 그 생명체에겐 소망을 이뤄지는 힘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이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에메랄드빛 찬가, 페르텔라>라는 별명이 강가에 붙었다는 것은 공통으로 존재한다고… 팜플렛에 적혀 있다.

…나름 큰 호텔이라고 로비에 이런 팜플렛도 있구나.

“손님, 방은 다 준비되었습니다. 다만 식사 제공은 당장은 어려우며, 익일 조식부터 제공할 수 있습니다. 룸서비스는 일부 제한 사항이 있으나 바로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짐을 옮겨드릴 테니 바로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적절한 주변 식당을 추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방으로 가 정돈하며 직접 정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당일 투숙인데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여기, 603호로 준비해 드렸으니, 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혹여 미처 확인하지 못한 특이 사항이 있을 시, 방 내 전화기에서 0번으로 거시면 로비에서 즉시 받아 처리하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1층과 2층엔 로비 외 옆 편의점과도 연결되며, 자동판매기와 팬트리, 식사가 가능한 카페 등이 있으니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성수기엔 사람이 붐비는 곳이라고, 그리 빽빽하지 않은 교외 구역임에도 꽤 본격적인 호텔이 있다. 그만큼 금액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나한테 금액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득이라면 득이다.

[띵동-]

이런 숙박시설에서 자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이번만 특별히 일상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할까.

[6층. 문이 닫힙니다.]

산메 씨와 함께 올 수 있으면… 더 좋을 것도 같지만. 둘만이 있는 공간이란 점에서 나름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데.

[6층. 문이 열립니다.]

603호… 603호… 여기로군. 엘리베이터 내려서 몇 걸음 채 가까이 있네. 이런 방이면 엘리베이터 소리를 조금 신경 쓰실지도 모르겠군. 문은— 이렇게 대는 건가? …카드 결제하는 기분이로군.

방은… 불을 어떻게 켜야 하지? …스위치를 눌러도 반응이 없는데. 어— 이건 뭐지? 여기다 카드를 넣는—

[탈칵— 딩— 디리링—]

아, 이거구나. 음, 2인 침대 하나에, 소리는 없는 나무 바닥이고, 큰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둘, 커피포트랑 컵도 올려져 있고, 작은 냉장고도 있네. 이건—— 뭐지? 옷장 같은데 무슨 버튼도 있고, 전자 그림도 있고… 의류 관리기…? 음— 벽은 강이 보이도록 창문이 크게 나 있고, 쇼파까지… 산메 씨랑 앉아서 강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기 적절할 거 같군. 강은— 슬슬 어두워져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름다운, 특이점은 없는 강이군. 흠, 욕실은 여기인가?

“…호텔은, 이렇구나.”

[끼이익— 푹-]

…낯선 감성의 침대다. 사람들은 이런 침대를 좋아하는구나. 여기서— 지도를 좀 펼쳐볼까. 이 근처에 식당이…… 숟가락과 포크가 그려진 건물들이 전부 식당이었지? 그 옆에 작게 그려진 것들은 파는 메뉴들 표시인가? 음, 쌀밥이랑- 육류랑- 생선- 튀김- 면류- 꽤나 다양하게 있네. 육류 쪽을… 한 번 가볼까. 이 거리면 강가 방향으로 5분도 안 되겠네. 주변 좀 둘러볼까.

“일단— 그 전에.”


2024.12.16. P.M.05:52

“주문하신 북동부 특별 쇼트로인 세트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이게 어나더 월드 북동부식 고기요리…”

“고기 본연의 모습을 최대한 잊지 않으며 양념으로 승부 보는 방식이죠. 덕분에 이곳 서쪽을 포함한 다른 이들 중엔 향과 식감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시지만, 좋아하는 분들은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북동부 지역이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는 방식이라 신선함에 넘어오는 분들이 많거든요.”

“산메 씨는 좋아하시겠네…. 잘 먹겠습니다.”

겉보기엔 미디움이나 레어 계열 스테이크와 비슷하지만, 맛이나 향, 식감은 전혀 다른 감각. 산메 씨와 오게 되면 여기서 같이 식사하고, 아니면— 내가 직접 레시피를 찾아서 만들어줘야겠다. 어나더 월드 북동부식 고기 조리법이라고 검색하면 나올까. 근데 검색하려면 컴퓨터가 필요한데… 그게 또 문제로군. 아까 지도에 컴퓨터 그림이 그려진 곳이 있었던가?

“혹시… 이 근처에 공용으로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넷 카페 말입니까? 그럼요, 강 반대로, 위쪽으로 올라가서 도로 건너면 몇 군데 있을 겁니다. 뭐라 했더라? 아들놈이 말하길, 크라… 뭐시기가 젤 좋은 곳이라던데, 간판이 커서 잘 보일 거랍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지금은 이미 해가 져버려 잘 보이진 않지만, 건물이 강이랑 비교적 가깝게, 높게 설치되어있어 덕분에 창문 밖으로 대략적인 강가의 틀이 보인다. 12월 겨울 저녁은 빠르고 깊게 어두워져 2개의 주홍빛 가로등만으론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강 보면서 식사하고 싶으시거든, 낮에 점심 드시러 오시지 그랬어요. 그때쯤 중앙에 뜬 햇살을 받아야지, 페르텔라의 에메랄드빛을 훤히 보면서 식사할 수 있거든요.”

“낮에는 위쪽에서 돌아다니느라, 강을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여기 호텔에 있는 팜플렛에서 봤는데, 저 강이 이 지역에선 전설도 있는 꽤 신성한 곳인 거 같더군요? 상징이나 다름이 없다던데…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상징적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 호텔에서 그것도 알려 주덥니까? 지역 사회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끼이익]

“그래요, 저 강은 비단 우리 마을 뿐만 아니라, 강을 낀 모든 지역에서 자기 목숨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스팟이죠. 혹시 거기서 어디까지 알려 주덥니까?”

“음… 원래는 숲이었으나, 페르텔라라 하는 어류형 생명체에 의해 강으로 바뀌었고, 그 생명체에게 ‘소망을 이뤄주는 힘’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이 강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에메랄드빛 강으로 유명해졌다… 뭐 그런 내용까지 보았습니다. 다만 페르텔라가 굳이 바다에서 여기로 넘어와 강으로 바꾼 이유와 그 이후에 있던 일들에 대해선 지역별 전승이 다르다는 말로 퉁치고 알려주지 않더군요.”

“딱 절반 정도 알려줬군요. 알려주지 않은 부분은… 내용도 워낙 방대하고, 그거 땜에 지자체끼리 내가 맞다, 내가 맞다 다툰 적이 있어서 안 알려준 거 같습니다. 음— 저도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신 걸 제대로 듣지 않았고, 요즘 세대는 그런 전설의 기원에 대해선 그리 관심 가지지 않는 세대라 저도 자세히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그리 말하고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근처에 앉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개를 내리고 숨을 고르더니, 이래 창문 밖을 바라본다.

“우리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페르텔라는 그 큰 덩치 만큼 넓은 바다를 독식해 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해저 아래에서부터 미지의 건축물이 솟아오르더니 거기서 페르텔라보단 작지만, 힘은 아주 강력한 해양 마물들이 잔뜩 튀어나와 페르텔라가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나름 싸웠지만, 결국 패배해서 도망치듯 산을 건너 넘어와 당장에 눈에 보이는 숲을 자신의 힘을 써 강으로 바꾼 뒤 거기에 안착했다 합니다.

인근 주민들은 바다에서 시작된 큰 지진과 있지도 않은 물의 범람에 놀라 밖으로 튀어나왔고, 이내 크게 다쳐 쉭쉭거리는 페르텔라를 목격한 이들은 공포에 떨기도 했지만, 하나로 뭉쳐 페르텔라를 살리고자 노력했고 그런 그들의 손길 끝에 다시 살아난 페르텔라는,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껴 그 보답으로 그들이 원하는 소망을 들어줬다 하죠.

그 이후로는— 음—— 역시, 기억나질 않는군요. 뭐 흔한 전래동화처럼 오래오래 잘 살았다나, 바다로 다시 돌아갔거나, 그대로 강에 정착하고 곱게 죽었거나 셋 중 하나겠다만은, 하여간 그렇게 저 강에는 페르텔라 강이란 이름이 붙었고, 페르텔라의 영향인 건지, 햇빛을 받으면 에메랄드빛이 나며, 그때 저 강에 어떤 소망을 빌면 꼭 이루어진다는 설화가 생겨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죠.

특히 이 거리의 대부분 이들처럼 부유하지 않은 자, 채워지지 못한 자들은 그 설화에 푹 빠져서, 에메랄드빛이 가장 강할 때 강에 다가가 소원을 빌곤, 아주 악착같이 살아가고들 하죠. 뭐, 종종 제 아들놈처럼 그런 미신에 빠져 사는 건 좋지 않다고 회의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 전설이로군요….”

들어보니 흥미로운 부분도 있지만, 허술한 부분도 많다. 뭐— 허술하지 않은 전설이 어디에 있겠냐만은.

“소원을 빈다는 게— 혹시 정해진 방법이 따로 있는 겁니까?”

“음— 아뇨, 그런 건 없는 걸로 압니다. 뭐 분수에 동전 던져서 기도하기 같은 게 있을 법하지만, 워낙에 넓고 사람이 많아 그런 규칙이 생기긴 어렵죠. 그래서 다 제각각입니다. 누구는 단순히 가까이 가서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아예 얕은 쪽으로 강 안에 들어가 기도하기도 하고, 누구는 흔한 방식대로 동전 같은 걸 던지기도 하고, 돌은 던진다던가, 물길 옆에 비석 같은 걸 세운다던가, 찾아보면 글로 정리하기도 힘들 수준입니다. 지역별 성격도 다 다르니까요.”

“기본적인 전승만 전해지는 거로군요.”

“그런 셈이죠. …손님도 강에다 뭔가 소망하는 것을 빌 생각이십니까? 그러면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하늘이 맑다면, 그때가 가장 에메랄드빛이 강하게 분사되거든요.”

“오후 1시에서 3시… 참고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여러 개를 빌 거면 한 번에 빌어야지, 여러 번 나눠서 계속 빌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예전에 몇몇 어르신들이 이야기하신 기억이 납니다. 뭐, 귀기울여 들을 사항 같진 않지만요.”

“이것저것 여러 번 잔뜩 빌었다가 안 된 분이 계셨나 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제가 기억하는 페르텔라 강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를 하니 신나서 엄청 나불거렸는데, 식사 방해는 안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먹어가니 이래 되네요, 하하.”

“괜찮습니다.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제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으니까요.”

“하하, 손님 참 좋은 분이시로군요. 그럼, 모쪼록 식사 맛있게 하십쇼.”

의자를 돌려놓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며 주방으로 돌아간다. 휑한데 손님 한 명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니 즐거운 거겠지.

페르텔라 강의 전설… 허술한 부분이 꽤 많다. 갑작스런 구조물의 등장이나 산을 넘은 방법의 부재, 페르텔라를 사람들이 무해한 존재로 인식하고 같은 생각으로 도우려면 소통이 되어야 할 텐데, 그 긴 몸을 가졌으면 목소리가 무지막지하게 크거나 일일이 몸을 돌리지 않는 이상 상류 혹은 하류, 머리가 있는 지역구에서나 소통이 가능했을 터인데 어찌 그리 할 수 있었는지, 페르텔라란 이름은 본인이 알려준 거지… 뭐— 그런 건 내가 아닌 태인 씨 같은 분들이 알아낼 사항이지만.

다만 확실한건, 그런 전설이 생길 만큼 과거 이 주변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하지 않고, 채워지지 않은, 간절한 자들이었던 거겠지.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온 힘을 다해 노력했으나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초월적인 힘을 빌려서라도 일어서야만 했던 자들. 그런 전설을 토대로 마음 속에서나마 승리하고 나아가야 했던 자들. 그런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런 전설이 뻗어난 거겠지…. 안 그러면 회의적으로 무시하는 이들이 많아 묻혔을 테니.

[탈카탁]

소망을 이뤄주는 초월적 힘— 그런 것에 기도할 정도로 간절하려면…… 이전의 나였다면, 머리로 납득은 해도 공감은 못 했을 텐데, 지금의 난 납득과 함께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는 게… 내가 변했다는 표시겠지. 초월적인 나비가 아니기 때문인 걸까? 초월적인 힘으로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이가 있기 때문인 걸까?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 에메랄드빛이 가장 강하게 분사될 때 강 앞으로 가 기도해 소망을 빈다. …메모해둬야겠다.

“이건— 아스파라거스인가?”

[빠그자작-]


2024.12.16. P.M.10:47(+0 MCT)

“아—— 지쳤다——”

“어으, 몸 쓰는 일도 안 했는데 완전… 피로해지네. 운전 수고했어.”

“마리 씨도 수고하셨어요. 암만 지인 찬스를 써도 결혼 준비는… 머리가 이리 아프구나….”

“식은 안 올리고 혼인신고만 하고 끝내는 부부가 왜 있는지 좀 알 거 같네…. 그래도 ‘모두와 함께 나누는 추억 만들기’라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니, 최대한 완벽히 준비해야지.”

“맞아요— 모두와 함께 나누는 추억 만들기— 그 목적이 가장 크죠, 저희는. …내년 4월, 이왕이면 함께 했던 모두가 다 올 수 있으면 좋겠네요. 리에리츠 수사관은 벌써 지휘관님한테 휴가 수락 받았고, 아리아는 축가로 올 수 있게 조율하겠다 했고, 느에르랑 아르네, 마르시는 때가 되거든 청첩장 보내주면 쏜살같이 달려와준다 했고… 지인 찬스 쓴 다른 분들도 오케이 했으니까, 나머진 천천히 알려줘도 되겠지.”

“에리우르 씨는 어쩔 거야? 연락처가 없어서.”

“그러게요. 그날 헤어질 때, 어디 산에다 오두막이나 짓고 살겠다고 하셨는데… 토우그렌톰 일대에 수소문을 해야 하나.”

“자기 이름 알려지고 싶지 않다 하셨으니까, 그건 어려울 걸? 음— 운 좋게 마주치길 기대해야 하나. 이왕이면 가능한한 다 부르고 싶고, 도움 받은 게 많은데.”

“고민이네요— 음, 그분도… 부를까?”

“누구? 어제 너한테 와서 상담요청 했던 사람?”

“네. 클레마티스—라는 분인데, 좀…… 종종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하긴 해도, 그래도 인연이 있는 분이라서, 부를까 고민되네요. 특유의 거무칙칙함으로 결혼식 분위기 다운시키지만 않으면 다행인데.”

“난 그 사람 인상이 영 안 좋아보이던데…… 자기 애인한테 해줄 서프라이즈 도움 받는다고 와서, 슈미루트에— 페르텔라 강? 거기에 갔다매. 애인 챙긴다고 정신 없어서 4개월 뒤에 있을 우리 결혼식을 벌써부터 신경쓸 겨를이 있을까?”

“흠— 그것도 일리 있네요. 그럼 일단 보류해야겠다.”

“으— 근데 너, 그쪽이 유명한 데이트 코스인 건 어떻게 아는 거야? 네가 그런 거 알아보는 타입도 아니고, 우린 거기 가본 적 없잖아. 슈미루트가 있는 방향으론 사건 해결하러 간 곳들 말곤 별로 없지 않았나? 나도 어제 듣고 검색해서 알았는데.”

“아아— 그게 사실은, 전에 도서관에서 궁금하던 책 하나를 찾아 읽고 있었는데, 커플로 보이는 둘이 열람실을 돌아다니며 페르텔라 강 인근 코스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꽁냥거리는 걸 들었거든요. 그때 날씨가 안 좋아서 거기에 저랑 그 둘 뿐이었는데, 제가 시야에 안 들어왔는지, 둘끼리만 있단 생각에 이야기 하다 신이 난 건지 갈수록 목소리가 커져서 어쩌다 보니 다 들었어요.”

“그래? 그때가 언젠데?”

“11월초— 해몽 기간 끝나고 직후였어요. 그 왜, 11월인데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리냐며 한탄하셨었잖아요? 그 기간 초반이었어요. 비 오기 전에 엄청 추울 때.”

“아, 그때. 하긴— 유명 데이트 코스 다녀오고 신나서 그러는 거면, 사자의 해몽 때긴 하겠네. 여기저기서 행사를 엄청 해대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 성자의 백야가 코앞이네. 네 생일도… 3일 남았고.”

“그러게요. 평화로우면 시간이 엄청 천천히 흐를 줄로만 알았는데, 여전히 빠르네요. 나이 먹어서 그런가?”

“벌써 30 중반이니까. 읏챠— 슬슬 씻고 누웁시다. 피곤하다~ 피곤해~”

“네에— 으잇. ………서프라이즈 준비, 잘 하고 있으시려나. 단 한 번도 섞여본 적은, 팔레트 빛깔의 ‘일반인’들의 ‘보통의’ 방식이 두 분한테 맞으실지 모르겠네. 같이 섞여 없던 색을 얻을 수 있음 좋으려만.”


[끼이익——][촤라라락—]

“………클레마티스, 또 어디로 간 거야? 괜히 불안하게— 나 원.”

[끼리릭]

“…자꾸 혼자 걷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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