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Repositioning 2

유학이후프로 X 고졸 얼리프로

안내사항

*본 창작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의 2차 팬 창작으로 원작과는 무관합니다.

*본 창작물에서 나오는 프로 농구 및 구단 설정은 현실과 상이합니다. 단 참고 자료로 각 구단 채널 / KBL 채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포스타입에 게재된 게시물을 재 업로드 한것입니다.

20xx년 5월 2일 수원 ST : 대구 전력 공사

 

 

플레이오프 챔피언 최종 결정전. 그러니까 7차 마지막까지 이어진 승부는 흔치 않은 건 알고는 있었다. 그만큼 관심도가 집중되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기상호가 생각나 최종수가 경기라도 볼 생각에 표를 예매하러 갔을 때는 당연히 매진이었다. 직관은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스트리밍 해주는 채널을 켜서 홀로 볼 생각이었는데….

최종수는 길고 긴 입장 대기 줄에 서 있는 동안 자신이 들고 있는 S석의 표 사진을 찍어 기상호에게 보냈다.

【너네 경기 보러 왔다.】

 

기상호

【헐, 지금 표 구할 수 있었어요?】

【매진이라 들었는데?】

 

【아니.】

【아빠가 표 예매해놨더라.】

 

기상호

【형이 본다고 하니까 진짜 긴장되네.】

【저 이제 몸 풀러 가볼게요.】

내가 보는 게 뭐 있다고 긴장까지 하는지. 최종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입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7차전이라 그런지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응원하는 팬들. 팬이 아니어도 농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수도권 팀에 속한 타 구단 선수들의 얼굴까지.

“어라 최종수 선수님 아니세요? ”

그 외에 농구리그 유튜브를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경기장 안으로 입장하던 사람을 찍으며 구경하러 온 선수들과 구단 팬들을 찍던 PD가 최종수를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신인상을 받은 선수에 가족까지 나란히 있었으니 기획 영상에 있어서 분량을 채우기에 딱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오늘 가족분들이랑 경기 보러 오셨나 봐요?”

“네. 아버지가 표를 예매해주셔서 오게 되었네요.”

PD의 들뜬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 최종수는 그것이 좀 부담스러웠다. 인터뷰야 중학교 때부터 많이 하긴 했는데 간단하게 하는 인터뷰와 최근 유튜브로 찍는 기획 영상은 좀 달랐다. 인터뷰는 준비한 질문에 따라 답을 하는 건데 구단 유튜브를 비롯한 협회 유튜브는 재미라던가 입담을 요구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첫 시즌부터 여러 사람에게 '노잼'인증을 받아버린 최종수로서는 이런 영상에서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 수 없으니 이 시간이 좀 불편했다.

이 경기의 주연도 아닌데 뭘 그리 물어볼 게 많은지. PD는 어떻게든 이 노잼선수의 분량을 뽑고 싶었는지 최종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었다. 최근 근황부터 시작해서, 오늘 경기 누가 이길 것인지 예측도 물어보고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 등.

사실 근황이야 그냥 운동하고 루틴을 잃지 않으려고 지냈어요.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요. 밖에 대답할 게 없었다. 오늘 경기는 정말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선수들을 파악하고 분석하기보다는 경기마다 스스로 승패를 만드는 쪽에 더 집중하는 편이었으니 누가 더 우위다 열세다. 그런 얘기를 잘 하지도 않았고. 응원은, 잘 모르겠다. 사실 어제 만난 기상호를 생각하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막연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왜 응원하는지 이유를 물으면 대답하기 이상한 이유라 그냥 이기는 팀 응원해야죠. 같은 발언을 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라길래.

“그냥 서로 좋은 경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정말로 경기를 관람하러 온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적당한 말로 마무리 지었다.

“종수야, 너는 농구 말고도 사람과 재미있게 대화하는 것도 배워야겠네.”

진땀빼며 PD와 이야기하는 저의 모습을 보던 부모님이 쿡쿡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농구선수가 농구만 잘하면 되는 거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지만. 아빠 얘기는 또 달랐다. 농담조로 얼굴이 되는 네가 한국농구의 부흥을 위해 힘써야 하지 않겠냐고. 요새는 또 시대가 달라서 선수가 경기에 임하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팬 서비스를 비롯한 대화 기술도 중요하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그냥 어색하게 미소지어 보이면서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적당히 자리에 앉아있으면 코트에서 가볍게 몸을 풀면서 슛을 던지는 수원 ST의 선수들, 그리고 대구전력공사의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기 시작 전까지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농구를 보러 왔으니 할 이야기라곤 농구선수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번 드래프트로 뽑힌 신인은 플레이오프 최종전에 뛴 적이 얼마 없으니 이야기의 대상은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구에는 승대가 있었지? 너랑 청소년 대표했던.”

“네.”

“어떻냐? 너보다 1년 더 일찍 드래프트로 들어와서 지금 엔트리에 들어있는데”

“뭐, 골 밑에서는 잘하는데 외곽으로 나와서 슛 쏘는 건 안 좋죠.”

“아무래도 국내에서는 골 밑 싸움을 많이 시키는 방향으로 가르쳐줬으니까.”

그래도 최근에는 트랜드가 바뀌어서 프로에서는 슛 연습 시킬 텐데? 아무래도 슛이 단번에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최종수를 보고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얌전히 사진도 찍어주다 보니 어느새 경기 시작시각이 되었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스타팅멤버들의 이름이 불렀다. 익숙한 이름들. 하지만 그 이름들의 나열 속에서 기상호 그 세글자가 있지는 않았다. 마침 앉은 S석이 벤치 맞은편이라 가만히 앉아있는 기상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앉아서 자신이 불릴 시간을 기다리기보다는, 벤치에서 꾸준히 선수들을 지켜보는 모습. 최종수로서는 그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종종 중요한 경기 때 컨디션 유지한다고 초반부에는 벤치에서 경기를 보게 하고 후반부에 투입했었으니까.

최종수는 시선을 벤치에 앉은 기상호로부터 코트 위로 돌렸다.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기에 초반부터 기세가 치열했다. 득점도 그렇고, 수비도 그렇고. 정말로 오늘 쏟아부을 걸 다 쏟아붓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경기장 내에 있는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중해서 봐야 하는 상황들의 연속.

손안에 땀이 맺힌 것도 모른 채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경기에 집중하니 1쿼터 10분, 2쿼터 10분이 훌쩍 지나갔다. 2쿼터까지 대구전력공사 측의 우세적 상황이 되었지만 3쿼터 이후부터 기상호가 투입되면서 수비를 성공시키는 거로 게임의 분위기를 바꾸어나갔다. 그 이후부터 공격이 영 풀리지 않았던 수원 ST의 공격이 풀리기 시작하고. 대구 전력공사도 따라 잡아가고.

서로의 공격, 수비가 고양감을 끌어내는 상황의 연속. 최종수는 이리 진행되는 경기를 본 적이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경기 시간에 부족한 잠을 채우려 한데다가 중요하다 하는 경기는 유튜브 영상으로 보고. 게다가 치열하다 할 수 있는 결승전은 언제나 장도고가 상대였으니 이런 치열한 승부는 보는 것보다는 겪는 쪽이 많았다.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로 제 학교의 경기를 뛰는 데 집중을 하는 데다 다른 학교의 경기를 볼 시간에 제 역량을 키우려고 연습에 더 매진했고.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 허투루 쓰이는 거 없이 모든 걸 쏟아붓는 시간. 물론 모든 경기 때마다 선수들은 자신의 역량을 쏟아부었지만, '시즌 마지막'이란 단어가 붙으면 그 느낌이 다르긴 했다. 더 집중력이 끌어 올려진 상태에서 한계를 모르는 채로 무작정 뛰어다니게 된다. 최종수는 그 순간 속에서 경기를 뛰고 있는 기상호의 모습을 보았다. 코트 밖이라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그는 정말 경기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상대 에이스의 공격으로부터 기상호는 수비를 성공시키고 팀에 공격권을 가지고 왔다. 그 모습을 보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4년 전의 그 경기가 생각났다. 서로 물러날 수 없던 그때 모든 것을 연소시켰던 순간.

경기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그 순간. 샷클락이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 마지막 패턴이 시작된다. 그리고 기상호의 어시스트. 위닝샷이 넣어진다. 버저가 울렸다. 힘찬 목소리. 승자는 수원 ST입니다! 환호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최종수는 제 옆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는 아빠를 따라 일어나 손뼉을 쳤다. 얼싸안는 수원 ST의 모습을 보니 눈이 크게 떠지고 가슴 한켠이 두근거렸다.

저런 경기를 하고 싶었다. 그저 단순히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저런 경기에서 제 전력을 쏟아붓는 사람이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니 슬럼프고 팀의 패배라던가 자신의 역량 부족 같은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목표 하나를 마음속에 둘 뿐.

 

 

다 같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포옹하며 울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진짜 죽어라 뛰었는데. 우승 앞에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 감독님 말대로 컨디션과 정신력의 싸움이었고. 그 싸움에서 한 끗 차이로 이겼다. 사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막상막하의 승부였으니 수원팀과 대구팀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서로 껴안아 주며 수고했다. 한마디씩 해주었다.

진짜로 우리가 우승했다고? 몇 년 전만 해도 플레이오프 진출은 꿈도 못 꾸었던 꼴찌 팀이 저번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고 이번에는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상호야, 진석아, 그리고 또 은혁아”

수원 ST의 주장 세형은 같이 뛴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다 마음이 울컥했는지 코를 훌쩍이면서 목멘 소리를 내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이 좋은 날에 너는 왜 우냐며 사람들이 등을 두드려주면서 머리도 한 대 쳤다. 근데 감정이란 거 쉽사리 전염되는지라 감동한 사람은 울고. 누구는 웃고 난리가 났다. 다 같이 얼싸안으면서 감정을 전염시킬 즈음 감독이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얘들과 팬들한테 인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저희 수원 ST를 응원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홈구장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선수들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그냥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던 그 순간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만큼 그 이후의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후에 무엇을 했더라. 기억이 나긴 하는데 되짚자니 머리가 아파져 왔다.

기상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어가며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베이지 톤의 천장. 책장에는 만화책이 꽂혀 있고 옷걸이에는 산책용으로 쓰는 운동복이 걸어진 벽. 창가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 어떻게든 집에 잘 들어왔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어서 기억이라는 영상을 되감기 했을 때, 어제 체육관을 떠나고 난 후 어디 술집에 들어가 다 같이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미친 듯이 마셨던 게 기억이 났다. 집에는 돌아갈 수는 있나 흐린 눈으로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봤었던 것 같은데 그때가 소주 몇 병째였더라. 차가운 길바닥이 아니라 집에 있는 걸 보면 귀소본능이란 건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방문을 열어 거실로 나오니. 출근 준비하는 누나가 제 꼬락서니를 보곤 픽 웃었다.

“꿀물 타 놨으니까 마시고 정신 차려라.”

비척이는 걸음으로 부엌으로 가자 모락 김이 나는 물이 한 컵 놓여 있었다. 따스한 꿀물을 한 모금 마시니 쓰린 속이 좀 가라앉아 그런지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니고 고마운 누나를 알아볼 정도로만?

“역시 내 챙겨주는 건 누나뿐이다.”

“나중에 집 나가면 어림없으니까 챙겨줄 때 챙겨 묵으라.”

“힝. 낸 여기가 좋은데.”

“암만 서울이 좋아도 니는 수원 쪽으로 내려가는 게 출근하기 편하지 않나.”

슬슬 독립해야지. 작년 가을, 시즌을 개막했을 때 누나가 꺼낸 말이었다. 2년 전. 얼리 드래프트로 남들 대학 갈 나이에 취직했을 때. 기상호의 거주지는 자취냐, 구단 숙소냐.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사실 법적 나이상 미성년자에게 자취를 시키기에는 불안하고, 그렇다고 숙소로 보내자니 이른 나이에 사회에 나가게 된 기상호가 숙소에 살게 되었을 때 같이 사는 선배들에게 어떤 실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도 있었다. 가족은 긴 회의 끝에 마침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는 누나 기상은과 기상호가 몇 년간은 같이 살자, 그리 정하였다. 1년 차. 첫 연봉이 정해진 시기. 신인 선수였으니 그리 큰 금액은 아니긴 했지만 이른 사회인으로서 돈을 버는 시기. 그때야 누나는 막내가 뭘 알겠냐고 생활비나 제때 주면 되는 거로 대신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2년이라면 집 계약 연장도 있고, 슬슬 아무것도 몰랐던 타지생활에서 익숙해질 참이니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난 니 나이 때쯤 타지에 올라가서 자취생활 하면서 대학 다녔는데. 너도 홀로 서는 인생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대학에 합격하면서부터 쭉 서울에 있던 누나가 그리 말하며 슬슬 막내 동생을 절벽으로 밀어 강하게 키울 생각을 한다. 사실 바로 절벽으로 민 것도 아니고 저 절벽 밑에 뭐가 있고 어떻게 내려갈지 천천히 알려주긴 했지만.

물론 독립해서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다면 만화책도 더 넣을 수 있고. 주말 저녁에 TV로 뭘 보느냐 싸움 안해도(사실 백이면 백 기상호가 지는 싸움이긴 했지만)되고. 누나 말 따라 누구보다 더 일찍 일어나 그 붐비는 지하철이나 찻길을 안 겪어도 되고. 사실 개인적인 편함의 이유 이전에 누나도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려는 구간이라 독립준비를 해야 하는 게 더 컸다. 슬슬 준비해야 하긴 하는데….

독립 이야기 꺼낸 게 시즌 중이라 비시즌이 되면 각자 살아갈 집 알아보고 다음 시즌 개막 전에 이사하자. 서로 암묵적으로 그리 약속을 했을 뿐. 결국, 그 예고했던 비시즌이 되니 준비하긴 해야 했다.

“그나저나 닌 또 어디서 잘생긴 놈만 골라서 형 삼아오는 거냐?”

이제 진짜로 집 알아봐야 하는구나. 독립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하다 제 누나가 한 생뚱맞은 질문에 기상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소리고?”

“어제 집까지 데려다준 사람 말이다.”

어제 집까지 데려다준 사람? 사실 필름이 끊겨서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얼추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에 드래프트로 수원 ST에 온 준수햄. 입단한 건 기상호가 먼저였지만 고등학생 때 버릇이 아직도 남아서 기수고 뭐고 그냥 준수햄, 준수햄 하면서 같이 다녔다. 성준수도 고등학교 후배가 달라붙는 게 성가시긴 해도 나쁘진 않았는지 회식 때마다 귀가하는걸 몇 번 도와줬었고. 사실 술자리를 썩 좋아하질 않은 성준수가 술 여러 잔에 먼저 뻗는 기상호를 챙겨준다는 핑계로 회식 자리에 빠지려는 구실도 있었지만.

“준수햄 말이가, 누나도 전에 길에서 안 봤나? 작년 컵대회 끝나고 회식 때 나 델따준 형이었잖아.”

“성준수? 걔 말고 다른 사람이던데?”

“그럼 누구지. 울 팀에 누나가 잘생겼다 할 사람은 준수 햄밖에 없는데”

기상호는 누나가 타준 남은 꿀물을 단번에 마시며 눈동자를 데구륵 굴렸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함께 어제 일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분명 그 광란의 술자리에서 빠져나오게 한 건 성준수였다. 더 마시다간 둘 다 집 못가겠다 싶어서 일찍이 취한 저를 질질 끌고 다닌 것까지 기억이 났다. 얜 나이랑 같이 몸무게도 처먹었네 욕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는데 준수햄이 아니라고? 혹시 누구 딴 사람도 같이 갔나. 어차피 신세 진 사람에게 인사는 해야 하니 기상호는 핸드폰을 들어 메신저 있는 성준수와의 대화 창을 눌렀다. 먼저 물을 것도 없이 1시간 전에 보낸 그의 메시지가 채팅창에 떠 있다.

성준수

【일어나면 최종수한테 고맙다고 인사나 해라.】

이건 또 뭐고. 기상호는 눈을 비벼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수햄이 최종수를 언급하다니? 어제 최종수를 보았었나? 그리 생각하고 있을 찰나 최종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최종수

【야. 잘 일어났냐?】

“으에에? 종수형?!”

딱 타이밍 맞게 온 메시지. 하마터면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기상호는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분명 준수 햄과 같이 회식에서 빠져나온 건 맞을 텐데. 인사하라고 하는거 보면 분명 그 필름 끊긴 사이에 뭔가 신세를 졌다는 게 맞았다. 그리고 잘 일어났냐는 안부 인사. 누나가 말한 성준수가 아닌 잘생긴 형. 백 퍼센트 최종수가 저를 집까지 데려다준 게 맞을 것이다.

“뉜 지는 낸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사인이나 받아 온나. 자랑이나 하게.”

태연한 한마디를 남기며 기상호의 누나는 문을 열어 출근했다. 기상호는 여전히 벌린 입을 한 손으로 막으며 다른 한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종수형이? 아니 우리 집 위치를 알고 있으니 집까지 데려줄 수야 있긴 하지. 근데 어쩌다가? 경기 구경하러 온 건 알고 있었다. 분명 부모님과 같이 보러 왔다고 했으니 부모님네 집 간 거 아니었나. 대체 어쩌다 마주친 거지? 혹시 필름이 끊긴 상태로 준수햄네 집까지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종수형 덕분에 무사 귀가를 할 수 있었던 건가? 기상호는 침착히 심호흡한 후 메시지를 보냈다.

【형이 어제 저 데려다줬어요?】

서울LC 최종수

【ㅇㅇ】

 

【저 어제 뭐 실수 한 거 없죠? ㅠㅠ?】

서울LC 최종수

【어】

【성준수가 니네 집 위치 몰라서】

【헤매길래 내가 너 데려다줬어.】

 

그제야 모든 상황이 맞춰져 갔다. 여태까지 성준수가 기상호를 집 앞이 아니라 적당히 집에 가까운 큰 길가까지 데려다준 거라 집 위치는 잘 몰랐고. 어쩌다 마주친 최종수가 마침 기상호의 집 위치를 알고 있어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기상호는 찬물로 세수를 한번 한 다음 심호흡을 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덕분에 잘 들어왔어요.】

서울LC 최종수

【아침밥은 먹었고?】

 

【아뇨. 이제 막 일어났어요.】

【진짜 고마워요.】

【형 아니었음 저 모르는

곳에서 눈 떳을지도】

서울LC 최종수

【고마우면 만나서 해장국이나 사주던가.】

 

이건 또 무슨 일이지. 기상호는 고개를 기울이며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제 과음한 건 자신이었는데. 굳이 과음한 사람을 위한 메뉴선정을 해주면서 만나자고 하는 걸 보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하는 소리인지. 하지만 여태 빈말이 별로 없었던 최종수를 생각하면 뭔가 용건이 있겠거니. 그리 생각했다.

【형, 수육도 드실래요?ㅎ】

 

그래도 은인에게 대접하려면 해장국보다는 좀 더 많이 먹여야지. 기상호는 인근에 있는 해장국집 위치를 찍어 최종수에게 보냈다.

같은 동네 주민끼리 만나서 편한 점은 대충 입고 나가도 된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건 동네 주민의 편함보다는 서로의 민낯을 봤던 사이라 가능했던 점이지만. 잠옷에서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식당 앞에 기다리고 있자 마찬가지로 트레이닝복에 캡모자를 푹 눌러 쓴 최종수의 모습이 보였다. 전에 민낯 볼 때도 그랬지만 뭐 망가지는 일 없네. 대충 입어도 인물이 사니까 뭐든 되는구나. 기상호는 멍하니 최종수를 바라보았다.

“뭘 그리 쳐다보냐?”

“아뇨 형은 그냥 대충 입고 나와도 인물이 살아나는구나 싶어서요.”

들어가서 밥이나 먹기나 해. 최종수는 픽 웃으며 기상호를 식당 문 안쪽으로 밀었다. 월요일 늦은 아침부터 해장국 먹으러 온 사람은 얼마 없었다. 조금 한산한 식당, 널찍한 자리에 앉아서 주문했다. 저희 해장국 두 개랑 수육 한 접시 주세요.

“저 정말 뭐 실수한 거 없죠?”

한국인의 패스트 푸드답게 바로 밑반찬과 함께 물잔과 물통이 놓인다. 기상호는 물컵에 물을 따라주고 수저를 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아 주며 재차 물었다.

“없어. 그냥 짐덩이 들고 가는 거였지.”

“진짜요?”

“어. 있었으면 바로 말했겠지.”

“다행이다.”

저와는 다르게 대학 생활을 한 동기들이 가로되, 제 주량을 모른 채로 술자리를 가질 때 조심하라 했다. 누군 개강파티에 선배 구두에 토했더라, 누군 엠티서 난동 피웠단다. 같은 이야기를 하며 주량 모르고 마실 때 흑역사 만들기 쉽다고 하던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회식 때 좀 많이 마셨다 싶으면 혹시 뭐 추태를 부렸나 전전긍긍하며 슈뢰딩거의 흑역사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렇지만 난생처음으로 필름이 끊겼을 때, 최종수가 별일 없었다고 하는 거 보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실수하면 뭐. 내가 그걸 가지고 뭐라 할 거 같냐?”

“그건 아니고…. 오늘 아침 먹자 하니까 뭐 일 있나 싶어서 그랬죠. 따로 카톡으로는 말 못 하고 이렇게 밥 먹어야 할 수 있는 중요한 얘기 같은 게….”

“네가 동네 사람끼리 연락하고 살자며.”

겸사겸사 부른 건데. 정말로 같이 아침 먹자는 약속이 별 뜻 없이 말 그대로의 의미였음을 알게 되니 홀로 전전긍긍한 저만 낯부끄러워진 셈이었다.

“그렇지요…. 제가 그랬죠.”

동네 사람. 그러고 보니 그냥 그 구실로 최종수를 집에서 재우고 같이 아침 운동도 나가고 농구도 하자면서 연락처도 주고받고 그랬다. 결승전 생각하느라 다음 시즌 전에 집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그냥 막 뱉은 말이긴 했는데. 기상호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며 이 기간 한정 동네 사람이라는 대해 말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사할 때 얘기해도 늦지도 않고. 그냥 말 붙일 구실 필요해서 핑계를 댄 것뿐인데. 기상호 홀로 고민과 해답의 프로세스를 다 내고 있자 제 앞에 있는 최종수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뭐야.”

“아뇨. 국 나왔으니까 먹기나 해요.”

딱 타이밍 좋게 해장국이 각자의 자리에 놓인다. 기상호는 수저로 국을 휘저으며 한 김 식힌 후 한 숟갈 입에 가져갔다. 서로 말없이 해장국을 흡입하고 있을 때, 뒤늦게 수육이 한 접시 놓였다.

“근데 형 부모님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어떻게 저랑 마주친 거지.”

“어젠 저녁 먹고 집 가는 길이었어. 내일부터 운동 나올 거고 오늘은 집에서 정리할 게 있었으니까.”

“벌써요? 휴가는요?”

“플옵 떨어진 기간 동안 쉬었으면 됐지.”

아 그렇지요. 기상호는 말을 하다 말고 묵묵히 수육을 집어 먹었다. 그놈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서울 LC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가 저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우승컵까지 거머쥔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 기만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번의 술에 취한 최종수가 말했을 때와는 다르게 덤덤하게 말했다는 점일까.

“우승 축하한다.”

지금처럼 말이지. 축하한다. 단 4글자뿐인 한마디인데 저 형이 말하니 왜 이리 어색한지. 아니 저 말이 안 어울리긴 했다. 제가 아는 최종수는 언제나 승자의 자리에 있어서 축하한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할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감, 감사합니다.”

“경기 잘 봤어.”

기상호는 눈을 깜빡 뜨며 최종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태 인상을 찌푸리거나 무심한 표정이 대부분인데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부드럽게 휜 눈가라던가 자연스러운 미소가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경기를 잘 봤다고 표정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와. 대박.”

“또 뭔데?”

“형 지금 표정 사진으로 찍었으면 사람 여럿 울렸을 거라고요.”

뭔 또 헛소리야. 아이 진짜 잘생겼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최종수는 픽 웃고는 수저를 들어 해장국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결승은 어땠어?”

“결승전만 7번 하는 건 죽을 맛인 거 같아요.”

“정말로?”

“뛰기 직전에만.”

풀려버린 긴장, 자연스레 나오는 농담. 둘은 서로 마주 보며 풋 하고 웃었다. 스포츠 경기는 선수부터 한 경기라도 더 뛰려고 아득바득 매달리는데. 결승전의 부담이 암만 커봤자지. 당장 1초가 아쉬운 경기중에서는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경기는 진짜 경기중에도 부담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고요.”

시즌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다 쏟아부어야 했던 경기였다. 우리 팀 슛은 왜 이렇게 안 터지고 다른 팀 슛은 왜 이리 잘 터지는지. 저거 우리 홈구장 림인데도 다른 팀한테는 후하고 우리 팀한테 혹하게 구네. 경기 전반 벤치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내내 뒤처지는 상황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후반부에 자신을 넣는 것을 전술로 삼았으니까. 그러니까, 후반에 그 점수 차를 메우려면 공격 성공도 성공이지만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수비를 성공시켜야 했다. 그 탓에 수비마다 이걸 성공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해지고, 공격 하나 실수하면 죽을 것 같았으니. 끝이 나니 후련해졌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의 연속들이었다. 사실, 이 기억도 나중에는 미화되어서 그땐 좋았지. 하겠지? 어쨌든 끝났으니 된 거지. 기상호는 고개를 흔들며 마저 해장국을 한입 머금었다.

서로 말없이 해장국을 다 먹고 남은 수육을 천천히 먹고 있을 즈음 기상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우왓”

“야 벨 소리가 그게 뭐냐?”

“아 죄송해요. 평소에 무음으로 해두는데….”

기상호는 재빠르게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한번 누르고 발신인을 바라보았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이름 3글자. 성준수.

“잠시만요. 준수 햄이 전화 온 거라.”

기상호는 핸드폰을 들어 성준수의 통화를 받았다. 잘 들어갔냐. 부터 시작해서 성준수는 기상호가 기억 못 할 어제 일을 대략 알려주었다. 생각했던 대로 성준수가 기상호의 집을 몰라 한참 길거리를 헤매다 최종수가 도와줘서 무사히 귀가시킬 수 있었다는 얘기. 상대방의 피곤한 목소리를 들으니 저쪽도 만만치 않게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종수형이랑 같이 밥 먹고 있어요. 준수 햄도 나중에 휴가 끝나고 봐요.”

그래. 수고해라. 상대방의 두 마디로 전화가 끊기고 기상호는 수화기를 내려 다시 수육을 하나 집어 먹었다.

“야. 궁금한 건데.”

“네?”

“성준수랑 나랑 왜 호칭이 다르냐?”

기상호는 수육을 씹어먹으며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호칭이 다른 것에 대한 질문보다는 형이냐 햄이냐 그 차이로 따지는 모양인데. 이런 디테일에 신경을 쓰던 사람인가.

“그야…. 멋대로 친한 걸 과시하면 좀, 실례인 거 같아서….”

그렇다고 형이랑 친한 사이가 아니란 뜻은 아니고. 이걸 뭐라 해야 하지 단순 사투리라기보단 좀 다른 뜻이라. 손짓과 발짓해가며 호칭의 다름에서 나오는 친밀도를 이야기하니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하고. 기상호는 볼을 긁적이며 최종수의 눈치를 보았다.

“괜찮으면 종수 햄이라 불러드릴까요.”

이 친밀도에 따른 호칭을 해도 되냐 허가를 구하니 더 이상한 기분이긴 한데. 여전히 눈치를 보며 답을 기다리니 최종수는 팔짱을 낀 채로 한숨을 작게 내쉬곤 한마디 할 뿐이었다.

“마음대로 해.”

기상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수육을 한 점 짚었다가 곁눈질로 팔짱을 낀 최종수의 표정을 살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도 뭔가 마음에 걸린 것 같은데. 최종수가 호칭의 작은 차이를 왜 신경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종수 햄이라 불러야 하겠구나. 그저 무던한 생각을 하면서 늦은 아침의 해장을 마저 이어나갔다.

 

 

최종수는 결승전을 다시금 떠올렸다. 때때로 자신이 하지 못하는 어떤 경험은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 경험을 하는 사람을 보면 빛나 보였고. 사실 동경이라는 건 그냥 정말 하늘에서 빛나는 별 같은 아득한 사람을 대상으로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사실 그 마지막 경기라는 현장에 있다 보니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그렇게 착각 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지막 경기 중 수비를 하면서 위닝샷을 어시스트한 기상호의 그 얼굴을 떠올리면 확실히 그는 빛나 보였다. 닮고 싶었고.

아들 오늘 경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최세종은 흐뭇한 얼굴로 최종수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다음 시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며칠 전에 들었다면 아버지의 위로도 턱도 없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조금 덤덤히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네 그렇게 해야죠.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그리 목표를 잡고 다시 마음을 잡았다. 기분좋게 가족끼리 식사를 마치고 본가에서 챙길 물건을 챙겨 차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주택들이 들어서고 한쪽 길가에 차를 주차해둔 거리. 좁은 길 사이를 지나다니며 천천히 운전하는 도중, 인도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여 시속을 더 낮춰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정말로 아는 얼굴이 길거리에 있었다.

기상호 정신 차려. 니 집 어딘지는 알려줘야지. 만취 상태인 기상호와 그를 흔들어 깨우며 간간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성준수. 결승전 이겨서 거하게 먹고 집 못 찾아가는 상황인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최종수는 차의 창문을 내려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성준수에게 말을 걸었다.

“야. 기상호네 집 찾는 거냐?”

성준수가 저를 두고 '왜 여기에 있고 넌 또 뭐냐'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니 좀 황당했다. 내가 너희 동네 침범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지? 꼭 자신이 침입자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일로 싸울 생각은 아니었으니 최종수는 본론만 말하기로 했다.

“나 걔 집 위치 알아.”

“니가 어떻게?”

“저번에 한번 같이 갔었거든.”

성준수는 말로 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말하는 능력이라도 있나. 인상 한번 찌푸렸을 뿐인데 속으로 뭐라 생각하는지 훤히 보였다. 최종수는 대답 대신 제 뒷좌석의 차 문 잠금을 열었다.

“일단 타기나 해라. 기상호 집 데려다주는 김에 너희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만취한 후배를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해서 집 위치를 알아내는 것보단 그래도 도움을 받는 게 나았다고 생각했는지. 성준수는 기상호를 최종수의 차 뒷좌석에 그냥 던지다시피 놔두고 자기는 조수석에 앉았다.

“난 이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줘. 막차 타고 집 갈 거니까.”

크게 신세 지고 싶진 않았는지 아니면 도움이 필요 없는 것인지. 최종수도 굳이 오지랖 부릴 생각도 없기에 성준수의 말대로 인근 지하철역까지만 운전해 바래다주었다. 차에서 내린 성준수가 ‘고맙다.’ ‘기상호 좀 잘 챙겨주라.’ 간단한 말을 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다시 늦은 밤의 텅 빈, 하지만 좁은 길거리를 운전하니 몇 분 안 되어 바로 기상호의 집에 도착했다. 적당히 빌라 차를 세워둔 후 뒷좌석의 문을 여니 뒷좌석에 곤히 누운 객이 색색거리며 자고 있었다. 얼마큼 먹인 것인지는 몰라도 챙겨주는 사람 없으면 뭐 길바닥에서 눈 떴겠네 싶었다.

“야 기상호 정신 차려”

몇 번 치기도 하고 흔들어 깨우려는데 꼼짝도 안 한다. 진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든 상태라 혹시 뭐 이상 있는 거 아닌가? 숨소리도 들어봤는데 호흡은 정상이어서 최종수는 기상호를 업어 2층까지 가기로 했다. 이번에 포스트업 하는걸 어느 정도 견디던데 무겁기는 진짜 무겁네. 업어주는 사람이 운동선수라 망정이지.

“준수햄…. 저 무리에요….”

겨우겨우 업고 갔더니 이놈이 사람 착각하네? 최종수는 이 부분에서 좀 기분 나빴지만, 최대한 선해 하자면 이전에 기상호 들고 간 게 성준수였으니까.

“야 사람 부를 거면 제대로 불러라.”

그냥 저 혼자 툴툴거리며 집 안까지 바래다주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나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덤덤히 기상호 방문 열어주었고. 그래서 침대까지 고이 모셔다 주었다.

사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안부를 묻고 아침 먹자 약속할 때도 별생각은 없었다. 내일이면 다시 출근해서 훈련을 받고 간간이 잡힐 연습경기를 하거나 전지훈련을 준비하면서 보낼 거라 이긴 놈 얼굴 좀 보면서 결승 경기 얘기나 나누자. 그런 생각이었는데

“안 그래도 지금 종수형이랑 같이 밥 먹고 있어요. 준수햄도 나중에 휴가 끝나고 봐요.”

근데 쟤랑 나랑 왜 호칭이 다르냐? 최종수는 어제 기상호가 저를 두고 준수햄, 준수햄 거렸던걸 생각했다. 그때는 기상호가 그냥 사람 착각한 거라 속으로 욕하고 끝냈는데 막상 면전에서 호칭을 다르게 하며 얘기하는 걸 들으니 좀 이상했다. 그래서 바로 물었더니 기상호는 멋대로 친한 걸 과시하면 실례일까 봐 저한테는 형이라 하고, 오랫동안 팀으로 있던 성준수한테는 햄이라 한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친밀함의 차이 정도라 얼버무리던데 그러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너 성준수랑 팀 먹은 거 고작 2년 정도 되는 거 아니였냐?

따지고 보면 고작 한 경기 보고 4년 뒤에야 다른 팀으로 마주한 자신이랑, 1년 동안 함께 고등학교 팀에 있었고 이젠 같은 구단이라 1년 더, 아니 그 이상의 기간 동안 팀원으로 지낼 성준수와 위치가 다른 건 맞긴 했다. 근데 꼭 그렇게 구니까, 선 긋고 나는 여기까지고 이 이상은 더 친해진 다음에 얘기해보죠. 그러는 것 같아서 좀 기분이 이상했다.

기상호 그놈이 먼저 동네 사람이라며 멋대로 훅 들어 온 거잖아. 그래서 나도 그 좁혀진 거리만큼 밥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겠지 싶어서 바로 약속을 잡았더니, 걘 내가 무슨 용건이 있어야 부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 이후로는 좀 마음이 복잡해져서 기상호가 햄이라 불러드릴까요? 물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니까 꼭 엎드려 절받는 것 같았지만.

최종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이 뭔지 모를 섭섭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저놈이야 그냥 저를 보고 같은 동네 사람이니까 친해진답시고 멋대로 집에 데려와서 재워주고 같이 아침 운동하고 연락하고 그 정도인데. 그냥 기상호가 이 어색했던 관계도 뭣도 아닌 그냥 아는 사람 정도의 사이에 불쑥 들어와 앞으로 잘 지냅시다. 하는 정도였을 뿐. 거기서 선 그였다고 뭐 섭섭할 것도 없을 것이다. 최종수는 복잡한 마음을 다스려가며 수육 한 점 집어먹었다.

그냥 어제 경기서 반짝였던 얼굴이 떠올라 잠깐 혼자 설레발 치고 그랬던 거 같았다. 동경했었으니까. 별거 아닌 이유였어도 그 치열했던 경기의 현장에 있던 얼굴은 빛나 보였다. 더해서 쌍용기 그 마지막 순간 정말로 농구 좋아하는 얼굴로 슛 던졌던 그 표정도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뭔가 제가 그때 가지지 못한 그런 표정으로 있었으니. 그래서 그냥 오히려 내 쪽에서 더 친해지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이해하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근데 종수햄, 주말에는 뭐해요?”

목 언저리를 매만지면서 고개를 푹 숙였던 기상호가 흘금 저를 올려다보곤 호칭 바꿔가며 말하니 괜히 또 기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쟤가 또 거리 좁혔다가 벽치는 행동을 반복할 거라 생각하니 자신도 거리를 좀 두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최종수는 한쪽 눈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주말은 왜?”

“그냥, 별일 없음 놀자고요.”

형 내일부터 훈련 들어가면 만날 시간이라곤 주말밖에 없을 텐데. 놀면 그때 놀아야죠. 최종수는 멋쩍게 웃으며 제 눈치를 보는 기상호를 보았다. 그래, 별일 없으면 약속 잡을 수도 있는 거고. 거리가 가까운 만큼 만날 때의 장점도 있고. 오늘처럼 밥 한 끼 먹을 수도 있고, 저번처럼 집에 가서 같이 애니메이션 보기도 하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원래 이렇게 만나서 갑자기 약속 잡는 게 맞긴 하냐?

최종수는 여태 스쳐 지나온 ‘친구’라는 바운더리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사실 말이 친구지 그냥 농구코트 같은 팀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지냈던 사람들. 솔직히 누군가가 다가와야 그냥 인사해주고 같이 다니고 그것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프로로 취직하며 다른 팀에 있으니 이따금 연락하고 만나자 하면 만나는 관계. 딱 그뿐이었다.

유학 때는? 그땐 그냥 농구 경기를 하느라 교우 관계 이콜 팀워크 이런 공식으로 살았었다. 혹여 교내에 한인을 만나면 한국어로 대화 좀 하는 관계로 지내고.

프로는? 그냥 선배들이 있었다. 아 그리고 동기 한 명 이휘성. 그 애와는 그냥 같은 시기에 입단한 동기라는 희미한 연대감만 있을 뿐이지 개인적으로 교류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훈련 관련으로 대화하고 공지사항 주고받고, 뭐 훈련 힘드네 라던가. 상대 선수에 관한 얘기를 좀 하는 정도. 그래서 다른 팀원들인 선배들과 교류를 이야기하자면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한다고 해도 선배들이 드문드문 챙겨준다고 밥 사주는 정도?

이렇게 생각해보니 좀 노답이네.

기상호가 먼저 관계에 불쑥불쑥 들어와 이리저리 친해질 구실을 만들고 다가오다가도 잠깐 멈추었다가 다가올 구실을 만드는 뭐 밀당을 하니까 이 녀석에게 있어 관계의 개념은 어떻게 되는지 고민하던 참이었는가. 사실 그 개념이 고장이 나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원래 친구 관계도 이렇게 다가가다 어느 정도 선 긋고 눈치 보면서 다가가고 그런 건가?

“좋을 대로 하던가.”

빈 그릇과 기상호를 앞에 둔 채로 최종수는 물 한 컵 마셨다. 그럴 수도 있지. 사실 친해지고 싶은 상대가 먼저 다가와 준다는데 거기서 내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서 당황한 거지.

“그래서 주말에 만나면 뭐할 건데?”

“뭐. 형 취미생활 뭐 하는지 보고?”

“딱히 취미는 없으면 어쩌려고.”

“어, 진짜요? 그럼 주말에 뭐해요?”

“그냥 쉬는데. 뭐 NBA 경기 영상 보거나 자고.”

“와, 형 이렇게 들으니 그냥 농친놈 같다.”

전 애니메이션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게 전부인데. 저희 주말에 만나도 그냥 집에 있는 거 아닌가. 차라리 날 좋을 때 나와 동네 코트에서 농구 한판 하거나 길거리 농구 구경하는 게 낫지 않나요. 기상호가 그답지 않게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며 만나게 된다면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을 말을 더듬어가며 하는 걸 들으니 픽 웃음이 나왔다.

“만나서 꼭 뭐 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하죠…? 근데 만나서 하는 일이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 보면 좀 그런 거 같아서.”

“그럼 너 딴 놈 만나면 뭐 했는데.”

“네?”

“나 말고 딴 사람 만나봤을 거 아냐. 프로 2년 차라 나 말고 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뇨 딱히 뭐 누구 만난 적은 별로 없는데요.”

가끔 지상고에 있던 형들 만나면 술 마시고 얘기하는 게 전부였고. 아 근데 1년 차 때는 저 미성년자라 음료수만 마셨어요. 빠른년생 서럽게. 그나마 다은햄 만나면 같이 게임 해주고 그랬지.

게다가 프로 선배들은 저랑 나이 차가 몇인데. 같은 팀 형들이 안 놀아주는 건 아니고. 챙겨주긴 하는데…. 그냥 다 같이 모여서 놀 때 뭐 피시방 가서 놀거나 아니면 먹으러 가거나 하는 정도려나. 게다가 제가 먼저 나서서 주말에 약속 잡을 수 없는 편이죠? 말끝을 흐리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꼴을 보니 이놈도 저와 똑같은 처지라는 게 느껴졌다.

혈연 지연 학연중 학연인 대학동문 없음. 더해서 내향적으로 노는 사람끼리 비슷한 신세. 최종수는 여태 기상호가 거리를 좁혀갈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똑 닮은 동류를 알아챈 거다 저놈도.

쟤가 2년 동안 선수 생활을 먼저 했다고 해도. 친해질 관계가 될만한 선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격상 이리저리 뻗대며 친해질 구석을 만든다 해도 그냥 딱 동생과 형 그 정도의 사이였겠지. 최종수는 자신이 반년 동안 겪었던 경험에 빗대어 기상호를 이해했다.

“난 주말에는 부모님 찾아뵙거나 친구 만나는 거 아님 널널해.”

너도 비슷할 거잖아. 최종수는 자신의 허용범위를 알려준다. 사실 알려준다기보다는 문 열어두고 여기까지 들어와도 됩니다. 안내해주는 거지.

“그럼 이번 주말에 형네 집에 놀러 가도 되나요?”

“어. 마음대로 해.”

그렇게 해장국이랑 수육 다 해치우고 서로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기상호는 좀 자야겠다면서 집으로 가고, 최종수도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서 훈련을 해야 했기에 혼자만의 휴식시간을 가지기로 했었다. 그렇게 비시즌의 마지막 평일의 휴가를 보낸 게 월요일.

그리고 다음 날부턴 그냥 쳇바퀴 흐르는 삶의 재시작이었다. 정식적으로 팀 소집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 그전에는 먼저 나와서 운동을 하는 건 자율이었으니. 휴가를 쓸 일이 없는 사람이나, 욕심이 많은 사람만이 나와 있었다. 그런 사람들끼리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아침훈련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좀 해두고 기술 훈련 좀 해두고. 오후에는 좀 쉬었다가 오후 훈련을 하고. 저녁 간단하게 먹고 나서 자율 훈련 좀 하기. 손에 농구공을 쥐었을 때부터 했던 일들이 반복되는 셈이었다.

그 일과 도중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누울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이 있다면 하나는 취침시간과 휴식시간의 침대고, 다른 하나는 운동시간 중 매트 운동 중 자세가 눕는 자세일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훈련 이후 치료시간 중 치료 침대.

오후 훈련이 끝나 치료를 받는 시간. 다들 발목이니 허벅지니 아픈 부위에 전기치료를 받거니 아니면 아이싱을 했다. 유일하게 손과 입이 비는 시간인지라 핸드폰을 보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나름의 휴식시간이나 다름없었다. 막 플레이오프가 끝난 기간이라 그런지 다들 휴가를 간다고 SNS에 어딜 다녀온 사진을 찍어 올리고 하니 화제는 자연스레 여행 이야기가 되었다. 실제로 지금 자리에 없는 팀원 중 여행을 다녀오려 휴가를 낸 선수도 있었고. 여행지 얘기를 하거나 자기 다녀온 여행 이야기도 꺼내던 도중. 누군가 가만히 핸드폰을 보고 있는 종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종수, 너는 여행 다녀왔어?”

“네?”

“보통 휴가 기간에 여행 다녀오지 않아? 아니면 주말에 쉴 때 다녀오던가”

딱히 SNS도 안 하고 근황 같은 걸 잘 말하지 않았던지라 선배들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 최종수가 ‘아니요.’라 대답도 하기 전에 선배들이 먼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해댔다. 종수는 미국에 있다 왔으니 어디 해외로 갈 필요 없지 않냐. 미국 유학이랑 여행이랑 같냐. 다른 나라는 가봤겠지. 토론의 장이 열리기 전 최종수가 입을 열어 논란의 불씨를 껐다.

“아뇨. 이번 휴가 때는 그냥 집에서 쉬었어요.”

“정말?”

“딱히 생각해둔 곳도 없어서…. 그냥 친구들 좀 보고 지내죠.”

“전지훈련 전에 어디 놀러 다녀와도 좋을 텐데.”

아니면 주말에 시간 날 때 국내라도 다녀오면 되지. 요새는 일본도 1박 2일로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다더라. 첫 휴가를 그냥 집에서 보낸 동생이 안타까웠는지 여기저기서 참견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가 할 말이라고는 네. 밖에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관심이 동하는 화제는 아니었던지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꾸 듣다 보면 머리 한쪽에 그 단어가 남기 마련이었다.

여행. 나와서 휴식도 취하고. 기분전환도 할 수 있고. 일단 다른 사람이 말하는 여행이란 그랬다. 부모님과 여행을 갈 때 그런 기분전환을 좀 하긴 했는데. 요새는 좀 다르다. 쉬는 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어디 다른 곳까지 가야 하나. 게다가 주말에는 기상호랑 놀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기상호가 만나자고 한 주말에 무엇을 했냐 하면 정말로 집에서 놀기로 해서 기상호가 집에 왔다. 늦은 집들이 선물이라며 뭘 바리바리 싸 들고 오던데 온갖 생활용품이라던가 인테리어 용품을 강제로 증정해줬다.

“집들이 선물치곤 많은데?”

“사실 저도 안 쓰는 것들 모아서 드리는 것도 있어요. 겸사겸사? 형 필요하면 주고 아니면 말고. 아, 이거 다 미개봉이니까 안심하시죠.”

“묘하게 창고 정리하는 것 같다? ”

“근데 형 집에 없는 것들 아니에요? 딱 보니까 없을 것 같은데.”

뻔뻔하게 말하는 꼴 보니 좀 짜증이 나긴 하는데 그래도 굳이 사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없으면 뭔가 허전할 물건들을 준거라 군말 없이 받기로 했다.

“근데 형 집 진짜 아무것도 없네요. 이거 사람 사는 집 맞아요?”

“그냥 침실이랑 옷장만 있으면 되는 거지 뭐 더 필요해?”

“뭐 내 집이니까 꾸민다거나 그런 거 없어요?”

“너는? 저번에 니 방 가보니까 뭐 별거 없던데.”

“제 방에 있는 책들이 나름 인테리어 용품인데요?”

“만화책밖에 없었으면서.”

“아 나름이라고요.”

“그럼 너 가지고 온 거 가지고 꾸며보던가.”

그리 말하니 기상호는 가지고 온 디퓨저라던가 무드등, 탁상용 소품 등, 실내장식용품들을 아무 데나 넣어두더니 멋쩍게 웃었다. 아, 이거 집이 너무 비어서 뭐 잘 꾸밀 수 없네. 얼버무리는 말을 하며 물건 하나 놓는데 낑낑거리다 눈치를 보길래 그냥 한마디 해줬다.

“그냥 대충 내버려 둬. 꾸민다고 뭘 꾸며.”

어차피 인테리어 센스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일 텐데. 서로의 민낯을 알게 되었으니 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늘 뭐 할 건데?”

“짠. 같이 게임이나 해보죠.”

기상호는 그 많은 짐에 들어있었던 게임기와 뭔 연결선을 들어 보였다. 닌텐도 스위치였나. 얼핏 전에 누군가가 하는 걸 보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게임 하면 다들 PC 온라인게임 쪽을 많이 하다 보니 어떻게 뭘 하는지는 감이 잘 안 잡혔다.

“작은 화면이 눈에 들어와?”

“당연히 TV 연결해서 해야죠”

제가 형이랑 같이 게임 하려고 조이콘도 하나 더 장만해왔는데. 기상호는 흥얼거리더니 TV 화면과 기기를 연결해두면서 게임을 이리저리 보며 골랐다. 뭐 다른 형이랑 할 때 이게 그나마 같이하기 좋다면서 마리오나 포켓몬 같은 다들 알만한 타이틀 게임 했는데. 그럭저럭할만해서 시간 보내기에는 적당한 것 같고. 그리고 뭔가 물감으로 쏴서 하는 게임도 했는데 그건…. 좀 빡쳤다. 사실 이런 거에서 승부욕 발휘하는 게 문제였다. 한판 지니까 분하고 이길 때까지 하고 싶었고. 그래서 한 판만 더 하자 하는걸 여러 번 반복하다 극적인 승리를 하니 만족스러워서 다른 거 하자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근데 종수햄…. 진짜 대립형 게임 하면 안 되겠다.”

“너 하는거 보면 넌 게임 해도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 짜증이 나게 굴고 있다?”

“원래 게임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빡치게 하는 거래요.”

기상호 하는 짓을 보면 쟤랑은 대립형 게임 같은 거 하면 안될 거 같았다. 할 거면 협력형 게임을 해야지. 그렇게 골고루 기상호가 하자는 게임을 하나씩 건드리며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은 뭐 먹을 건데? ”

“그냥 배달시키면 안 되나요. 나가기도 귀찮은데.”

“그럼 니가 골라봐. 나보단 잘 알겠지.”

“암요. 제가 한번 맛집을 싹 알려드리죠.”

배달 앱을 켜둔 핸드폰을 던져주니 기상호는 익숙히 아는 음식점을 하나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보쌈집인데 마늘보쌈이 맛있다며 마늘보쌈 대자와 막국수를 하나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른 타이틀도 해볼래요? 혼자 하는 거긴 한데.”

음식이 올 동안 소파에 기대어 있자면 기상호가 게임기 홈 화면으로 돌려준 후 받았던 게임 리스트를 보여줬다. 이게 몇 개람. 뭐 장르도 다양했다.

“너 게임만 하고 살았냐?”

“뭐 다 클리어 한 건 아니고 적당히 찍먹 하면서 해본 거죠.”

그리 말하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는데 솔직히 말해서 듣기로는 다 알아듣지는 못해서 그냥 최근에 한 것 중 재미있던 거 하나 추천해주라고 했다.

“그럼 추리 게임 해볼래요?”

그렇게 말하며 뭔가 삐쭉이는 남자가 있는 게임을 선택해줬다. 역전재판이라 했나.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BGM에 들려오는 걸 보니 유명한 게임이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버튼을 눌러 시작을 해보니 수상쩍은 장면과 함께 법정 장면이 보였다. 기묘한 이름의 일본인들이 대화하는 걸 버튼을 눌러 넘기면 게임이라기보다는 그냥 뭔가 대화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휴가 때 어디 안 놀러 갔어?”

“딱히? 종수햄도 안 놀러 갔잖아요. 똑같은 집돌이끼리 뭘 물어봐요.”

“난 그래도 부모님은 보려 외출은 했어.”

“그래봤자 서울집이죠.”

이러나저러나 집돌이인 건 똑같다고. 기상호가 키득거리면서 남이 하는 게임화면을 보았다.

“근데 놀러 가는 건 왜요?”

“형들이 여행 얘기 꺼내길래.”

“아 하긴, SNS 보니까 다 어딘가로 가긴 했네요.”

준수햄은 이번에 가족끼리 제주도 간다 했고, 병찬햄은 대관령 가서 양 구경하고 강릉 가서 대게 먹었대요. 누가 어디를 가고 뭘 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 그 나열되는 정보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법정 공방에 집중하고 있는 차, 기상호가 물었다.

“그럼 햄은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요?”

“딱히. 여행도 누가 같이 가자고 해야 가는 거지.”

“그럼 부산이나 갈래요?”

“뭐?”

화면 속 선배 변호사가 증거물을 어떻게 제출하는지 알려주는 때. 튜토리얼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시선을 게임화면이 아닌 기상호 쪽으로 돌렸다.

“주말에 1박 2일 정도면 국내는 갈 만하잖아요.”

“근데 부산이면 그냥 너희 동네 가는 거잖아. 그게 여행이냐?”

“아니, 제가 부산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저도 따지고 보면 양산 쪽이 본가지.”

게다가 아예 모르는 곳 가서 서로 헤매는 것보단 그나마 지역 좀 아는 사람이 있는 게 낫지 않나요. 기상호가 툭 내뱉은 말. 하지만 근 이주간 기상호와 저의 행동 패턴을 보았을 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저번에 기상호네 집에 갔던 것도 그렇고. 오늘 놀러 오는 것도 그렇고. 그냥 해볼래요? 하면서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말해주고 나는 또 거기에 혹하고….

그렇지만 괜찮지 않나. 매번 여행은 부모님과 함께 갔었어서 가족 외에 타인과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까.

“그럼 부산 갔을 때 갈만한 곳이나 말해봐.”

 

 

기상호 인생에서 계획이라는 단어와의 거리를 말하자면 조금 멀리 있는 단어였다. 매번 계획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에 얽매이기보다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행동을 취하고. 계획이 있다 해도 때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변화시키고 그런 느낌.

농구를 할 때도 전술에 따른 플랜과 과정이 있겠지만 그건 누군가가 미리 만들어 놓은 과정에 따르는 거지 스스로 계획을 세워가면서 행동하는 쪽은 아니었다. 플랜 A가 진행된다면 상대의 반응을 보고 다른 거로 변경도 한다던가, 상대의 플랜이 있다면 그 플랜을 방해하고. 어찌 되었건 머릿속에 어떤 계획을 만들기보다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빠르게 반응을 해보고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적성이었다. 그래선지 주변에서 도박적이다. 충동적이다. 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아무튼, 이번 일도 그랬다. 최종수가 갑자기 뜬금없이 여행 이야기를 꺼내길래, 요새 너무 집에서 놀기만 했다는 걸 깨달아서 그럼 부산 가는 거 어떻냐고 제안 해본 거다. 사실 만난 지 며칠 안 된 형과 갑자기 여행 제안을 하는 것도 웃기긴 했다. 그렇지만 선수 생활하며 자주 볼 사이, 이렇게 여행 가면서 친해지는 것도 좋고. 집에만 있지 말고 다른 곳도 가는 게 기분전환이 되니까. 그렇지만 첫 여행으로 잘 모르는 곳 가는 것보단 제가 아는 곳 가는 게 서로가 편할 테니까. 기왕 안 가본 곳 놀러 가는 것도 좋겠고. 그런 생각으로 제안을 한건데.

“야 애초에 이동 거리가 이게 맞냐?”

“루트 진짜 중구난방이네.”

여태 부산에서 안 가본 곳이라던가 남들이 한번 가보라 추천해준 곳을 아무렇게나 말했더니 최종수는 역전재판을 하다 말고 핸드폰을 들어 네이버 지도 앱을 통해 이동 루트를 짜보곤 한소리 했다. 야 광안리랑 자갈치 시장이 이동시간 1시간 걸리는데 이게 말 되냐? 너 부산 살았던 놈이 누가 이렇게 놀러 간다고 하면 그대로 따라주긴 할 거냐? 코트에서 들었던 트래시토크보다 더 살벌한 비판이 들려왔다.

“근데 종수햄, 전 여기 다 가보잔 것도 아니고 그냥 적당히 짚은 것뿐이거든요?”

하지만 억울한 게 자신은 부산 각지에 가보면 좋을 곳을 말했을 뿐이다. 게다가 학창시절에는 부산서 살았다고 해도 천성 집돌이였던 자신은 놀러 가는 것보단 숙소에서 시간 보내는 게 더 많았었다. 그러니 밖에서 논다면 어디서 어떻게 놀았는지도 몰랐고. 자신의 사정을 밝혀가며 억울함을 호소하니 최종수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누르며 한숨을 한번 쉰 후 물었다.

“그럼 넌 어디 가고 싶은데?”

“...그냥 종수햄이 가고 싶은 곳?”

배시시 웃으며 웃는 얼굴로 무마하자 최종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뭐. 게다가 자신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보단 남이 제시한 의견에 따라주는 게 더 편했으니, 결정을 남에게 미루기로 했다.

“그럼 내 마음대로 정해도 되냐?”

“햄이 계획만 짜준다면야 뭐”

햄이 오후에 영도다리 보러 간 다음 광안리 해변 보러 가고 그다음 자갈치 시장에서 쇼핑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서면 가서 밥 먹자고 해도 저는 그냥 따르겠습니다. 물론 햄은 그 이동 거리 보면서 그런 루트를 짜지 않겠지만요.

모든 사람이 말하길, 여행 꿀팁이 있다면 여행을 할 때 계획 짜는 사람대로 따라야 한다는 거다. 어차피 남이 다 해준다는데 군말할 것도 없고. 그냥 몸만 가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럼 내가 다 짜둘 테니까 군말 하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충동적으로 제안한 부산 여행이었는데 최종수는 정말로 꼼꼼하게 점검했다. 일정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느 시간에 출발하면 좋을지. 어디로 가면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지. 그런 거 말이다. 대충 놀 것처럼 굴면서 계획은 왜 이리 철두철미하게 짜는 것인지. 백 퍼센트 MBTI 검사하면 J 나온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기상호는 제 달력 앱에 있는 스케쥴부터 점검했다. 전지훈련 전에는 가야 하고. 당장 가기에는 연휴 껴서 표가 없을지도 모르고. 뭐 그런 거 따지고 보니 2주 후의 주말로 당첨이 되었다.

“부산 가는 거면 넌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어디를 가볼지, 무엇을 할지. 카카오 지하철 앱으로 부산 노선도를 보던 최종수가 기상호에게 물었다.

“어차피 1박 2일로 놀러 가는 거라 굳이?”

게다가 본가는 양산이라 부산 왔다 갔다 하기에는 시간도 걸려서 집 들리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으니 내려오면 연락하면 될 거라 설명하니 부산 관광지와 위치를 검색하던 최종수의 손가락이 멈추고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래도 말은 지금 해두는 게 좋겠죠…?”

단 세글자만 말했는데도 어딘가가 찔리는 기분이라 핸드폰을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연결음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상호냐. 무뚝뚝한 아버지는 안부 물을 것도 없이 무슨 일로 전화했냐며 용건부터 물었다. 응 아부지, 내 한 2주 후에 부산 올라카는데. 그냥 서울에 사는 햄이랑 1박 2일로 놀려고. 집 올 건 아닌데 일단 내려오는 거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대충 용건을 말하니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래? 상호 내려온다 카는데 서울 머스마랑 내려온다 칸다. 그래? 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통화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부산 놀러 오는 거면 그 햄이랑 같이 집 와서 자고 가는 거 어떻나?”

“그래도 되나?”

“어차피 다들 집 없어서 방도 비는데. 같이 오는 사람이 뉜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으면 같이 밥 먹고 자라 해라.”

사실 저의 충동적으로 정하는 건 부모님에게서 영향 받았던 건 아닐까. 아들의 여행계획을 들은 부모님이 친구랑 같이 왔어? 그럼 밥 먹고 가. 하는 그런 느낌으로 말하니 좀 기분이 이상했다. 옛날에야 그러긴 했지. 뭐 친한 친구끼리 서로 집 오가며 같이 밥 먹고 아주 가끔 집에 갈 수 없는 상황일 때는 같이 자기도 하고.

“아이, 근데 솔직히 서울 햄이라 낯가릴 수도 있고. 서로 부담시러울까봐”

“그래도 기왕 온건데 한번 물어봐라. 굳이 그 돈 주면서 딴 데서 잘 필요 있나. 그냥 밥 먹고 자는 거 가지고 와 걱정하는데.”

저와 종수 햄의 연봉을 생각하면 아무리 호텔 값이 비싸 봤자인데요. 저희 그렇게 막 돈 아껴서 여행할 처지는 아닙니다. 금전적 문제에 대해 반박을 하려던 차 어머니는 또 유효타를 날렸다.

“게다가 니가 이럴 때 안 오면 언제 집 오겠나.”

어머니가 명절에만 얼굴 비추고, 연락이라곤 가끔 하는 전화통화가 전부인 불효자를 쿡쿡 찌르는 말을 하니 이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빼며 괜찮다 하면 아들 잘못 키웠다 소리까지 나올 것 같았으니 답은 ‘알았다. 햄이랑 잘 얘기해보겠다’라는 걸로 무마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나 흘금 눈길을 돌려 최종수를 바라보니, 팔짱을 낀 채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거봐 내가 뭐랬냐.’ 그렇게 말하는 모양으로.

“종수햄, 부모님이 내려온 거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카는데...”

“너 내가 말 안했으면 어쩔뻔했냐?”

그러게 말입니다. 계획 짜는 사람 말 잘 들어야 한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근데 햄 우리 집 와서 부모님 뵙는 건 괜찮아요?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되니까요.”

저희 부모님이 뭐 종수햄을 부담스럽게 하는 건 아닌데, 그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고…. 뭐 그래도 아버지는 말 없으신 편이니까 괜찮을지도? 어머니도 좀 말이 드셀 뿐이지 잘 해주시니까요. 최대한 좋게 얼버무리고 있자면 최종수는 가볍게 코웃음 칠 뿐이었다.

“니네 부모님 보는 거 가지고 뭐.”

상견례 하는 것도 아니고 친한 동생 부모님인데. 덤덤히 말하는 걸 보니 혹여 남의 부모님 보는걸 부담스러워서 하지 않을까 싶은 건 기우였었다. 하긴 남의 집에 가서 밥 먹고 잠자는 건 지금도 하는 일이고. 그냥 변수가 있다면 남의 부모님을 보는 것뿐인데. 그냥, 종수 햄이랑 나랑 이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나 보다. 그리 생각하니 괜찮은 것 같았다. 너무 빨리 가까워진 건 아닌가. 의문이 드는 게 있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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