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Repositioning 1

유학이후프로 X 고졸 얼리프로

안내사항

*본 창작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의 2차 팬 창작으로 원작과는 무관합니다.

*본 창작물에서 나오는 프로 농구 및 구단 설정은 현실과 상이합니다. 단 참고 자료로 각 구단 채널 / KBL 채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포스타입에 게재된 게시물을 재 업로드 한것입니다.

20xx년 3월 28일 광주 TC 전자 : 서울 LC

 

 

‘내가 너네들 다 이기게 해줬잖아.’

그게 되겠냐. 과거의 흑역사가 새삼 생각나는 건 어릴 때 뱉었던 그 말이 얼마나 한심한 발언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어서. 관중석의 환호성과 탄식이 교차하는 가운데 최종수는 입술을 짓이기며 전광판에 떠오른 숫자를 보았다. 81 : 80 1점 차의 패배. 그리고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숫자 하나의 차이로 뒤따라오는 결과물들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패배. 프로 1년 차의 정규시즌 마무리. 이렇게 허망하게 끝난다고.? 최종수는 벅찬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일어나서 각 선수와 인사를 하고 벤치로 가야 하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가운데 오로지 주먹에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1년을 이렇게 끝날 수 없을 텐데. 드래프트 때도 내가 승리를 이끌겠다고 호언장담했잖아. 근데 이건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종수야 수고 많았다.”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멍하니 전광판을 본 채로 멈춰 있는 최종수를 일으킨 건 함께 경기를 뛴 선배들이었다. 풀타임 내내 뛰어다닌 최종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여러 가지 말을 해주었다. 그 말들이 단순히 팀의 막내를 위로해 주는 말인지, 정말로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최종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좌절과 자책의 감정이 막히고. 받아들일 현실을 직시하게 할 뿐.

이제 가자. 그 한마디에 숙연히 코트 밖으로 퇴장할 뿐. 코트에서 벤치로, 벤치에서 경기장 밖으로. 서울 LC 팀은 구단 버스에 타러 가기까지 침묵을 유지하였다. 지는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아니 정규리그 동안 승리한 경기보단 패배한 경기가 더 많았지. 하지만 여러 번 겪은 그 침묵의 시간은 최종수로서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익숙해지기 싫은 시간이었다.

서로 말을 한다면 분하다던가 아쉽다던가 단발적인 감정밖에 나오질 못하고 그 감정은 어떤 기폭제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힘겨운 침묵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수고했다. 고생했다. 네 글자로 구성된 한마디뿐.

“모두 수고 많았다. 경기 총평이라던가 분석은 다음에 할 테니까 일단 오늘은 푹 쉬자.”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마지막으로 탑승한 감독은 별다른 말 없이 다음을 기약하였다. 여러 가지 악재로 성적이 부진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문턱을 밟아 지금 이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할 만큼 했다고 평을 받은 팀이었으니까.

최종수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는 버스의 자리에 앉아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머릿속에는 작년 가을부터 시작된 시간이 필름처럼 천천히 재생되었다.

미국 NCAA 디비전 1에서 활약하고 한국 프로농구에 출사표를 던진 최종수.

그리고 그를 1라운드 1픽으로 지명한 서울 LC 팀.

사실 한국에 귀국했을 때, 최종수는 자신이 1라운드 1픽이 될 거라 자신했으니 드래프트 구단 순위가 뜨자마자 1라1픽을 할 팀을 조사했었다.

에이스로 활약했던 선수의 상무 복무라던가 다른 주전의 부상. 경기 실적 저조로 인한 슬럼프 등…. 여하튼 악재란 악재는 다 모아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제가, 팀의 승리를 이끌어 보겠습니다.’

당당히 밝힌 포부. 그 포부에 따라 서울 LC 팀의 에이스로 활약할 최종수의 활약은 기대가 되며 저번 시즌 꼴찌였던 서울 LC 팀의 성적 역시 기대할 만하다. 드래프트 이후 농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서울 LC 팀과 최종수에 대해서 그런 평을 내렸다. 최종수 역시 그 평가가 기대에서 실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열심히 뛰었다.

물론 세상일들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조각들이 하나하나 잘 맞춰줘야 굴러가는 법이었으니.

가을에 개막하여 다음 해 봄까지 진행되는 시즌. 그리고 그 시즌 동안 진행되는 50여 개의 경기. 그 경기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여 이야기하자면 초반에는 합이 안 맞아서. 그리고 타 팀 프로 선수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뭐 한국 농구 스타일과 해외 스타일이 달라서 등. 여러 이유로 초반의 팀 실적은 부진했었다.

아무리 최종수 혼자 아득바득 득점해도 돌아오는 건 팀의 패배. 그러다 보니 별별 소리를 다 들었던 것 같다. 팀을 먹여 살리는 슈퍼루키라던가. 불운한 에이스라던가 뭐. 프로 무대가 자기 자신을 증명해 내는 시간이라 하여도 증명은 증명이고. 팀이 지는 거에 무던해질 사람은 없었다.

팀 내에 패배의 향이 짙어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바닥까지 내려갈 즈음. 다들, 이 악물고 뛰면서 팀의 막내가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의기투합하여 이겼던 게 정규리그 3라운드 막바지쯤이었던가. 뭐든 경험이 중요하다고 첫 승을 거두고 난 후 그 승리를 발판 삼아 서울 LC 팀은 연승과 패배를 번갈아 하며 막판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렇다 해도 마지막 경기의 패배로 플레이오프 턱걸이조차 넘어서지 못한 모양이 되어버렸지만.

아쉽지만 지난 시간을 곱씹어봐야 후회밖에 안 남고. 제대로 된 평가와 피드백을 주고받으려면 지금의 미련 넘치는 감정들이 모두에게서 조금 빠진 후에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광주에 있는 타 팀의 홈구장에서 서울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창가에 머리를 기댄 최종수는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종수야, 네가 언제든지 이기고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몸이라 금방 잠이 올 줄 알았건만 시즌 초, 자신의 아빠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잘 깔아놓은 길을 걸어가 당연한 성과만 얻었던 아들에게 해준 걱정 어린 조언.

‘아빠도 그랬어.’

실수도 해 보고, 경기 말아먹은 적도 있었고. 잘한 날도 많았지만 못한 날도 있었다고.

‘뭘 걱정해요. 나는 뭐 져본 적이 없는 줄 아나.’

청소년 대표로 간 세계대회라던가, 해외 대학 시절에 역량과 피지컬 차이로 밀린 적도 있었으니 지금 와서도 ‘패배’라는 단어가 생소한 건 아니었다. 여러모로 회자하는 고등부 시절의 경기 하나는 극적인 승부 끝에 패배해서 승리만을 바라보던 자신에게 다른 교훈도 알려줬으니까.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든 건 1년의 실적을 이른 시간에 정산하였고 그 정산표에는 패배가 많이 써졌으며, 그 패배는 자신의 능력으로 메꿀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새벽에 가까운 시각, 선수들을 태운 버스가 장시간의 운전 끝에 서울에 멈추었다. 하나둘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한 선수들은 다들 기운 빠진 걸음으로 각자 갈 길을 향해 걸어갔다. 잘 쉬고 내일 시상식 때 보자 같은 말을 남기고.

장시간의 운전 동안 버스 안에서 깜빡 졸았던 최종수는 마지막으로 하차를 한 후 경기 끝나고 나서도 보지 못한 핸드폰을 보았다.

‘종수야 수고 많았어.’

‘집에 언제 올래? 오면 같이 식사하고 푹 쉬자.’

부모님이 쓴 메시지들. 최대한 경기에 관한 이야기는 빼고 집 밖에서 홀로 자취생활을 한 아들을 위로해 주는 마음으로 쓴 티가 났다.

그걸 보니 마음이 뭉클해진다기보다는 그냥 복잡했다. 부모님이야 언제나 저의 편을 들어줬으니, 성적이 부진해도 뭐라 할 사람들이 아닌데. 게다가 아빠는 이런 일이 선수 생활에 한두 번쯤은 있을 거라고 말해줬었는데. 그렇지만 혼자 이러고 있는 게 분하고 못나 보여서. 그래 자존심이 상한다고 치자. 그래선지 답장의 문장이 손에서 나오질 않았다.

‘주말에 찾아갈게요.’

겨우겨우 한마디를 써서 메시지를 전송한 후 최종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휴식기는 무슨. 시상식을 진행한 후, 구단 회식이 있었고 회식 이후에는 부모님을 찾아뵈어서 간만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니 어느샌가 정규시즌 마무리를 위한 비디오 미팅 날이 되었다.

팀의 막내답게 최종수가 아침 일찍 사무실로 오면 썩 좋지 못한 얼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쉬고 왔다고 해도 플레이오프 진출 못 했는데 얼굴이 좋아질 리가 있나. 죽상에서 조금 나아진 정도. 딱 그 정도로 다들 큰 회의실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았다.

“자. 일단 마지막 경기부터 좀 보자.”

시즌 마지막 날에 치러졌던 광주 TC 전자 팀과의 경기. 앞자리에 앉은 전력 분석관이 비디오 파일을 실행하여 화면을 재생하고 감독이 멈추면서 피드백하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사실 매 타임아웃 때 했던 얘기의 반복이긴 했다. 살릴 찬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놓친다던가. 턴오버가 나온다던가 등.

“그리고 종수에게 공을 너무 몰아주고 있어.”

아무리 종수가 에이스라고 해도 적어도 볼 비중은 줄여놔야지. 볼 비중을 늘렸다면 슛을 넣을 수 있는 상황이라도 만들던가. 그리고 종수. 체력 관리를 하는 것도 네 몫이야. 어느 정도는 팀원들한테 맡겨둬도 되잖아. 팀원을 못 믿는 건 아니지?

그렇게 시작된 저번 경기의 피드백은 이번 시즌의 총평으로 이어졌다. 에이스 하나만 믿고 가는 팀 상황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다른 선수들의 기량도 보여줘야 한다. 다음 시즌 전까지 고쳐야 할 목록과 이번에 맞이할 비시즌에 가지고 가야 할 숙제들이 산더미였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못 했지만 그만큼 준비 기간도 길었으니, 앞으로 잘해보자. 격려의 한마디를 끝으로 총평의 시간은 끝이 났다.

“남은 기간 잘 쉬고. 기분 전환도 해. 그래야 다음부터 힘낼 수 있잖아.”

알겠습니다. 단답형의 답이 들려오고 다들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와중 마지막으로 나가려는 최종수의 바로 뒤에서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종수는 잠깐 남자.”

“네?”

“별거 아냐.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별거 아닌 할 얘기라고 해도 감독님이 하면 중요한 얘기가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최종수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감독님과의 독대라던가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들. 학교에서 했던 상담 시간과 비슷한, 그런 시간 말이다. 최종수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얌전히 감독이 할 말을 기다렸다. 단둘만이 회의실에 남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감독 김순호는 입을 열었다.

“네가 에이스 역할을 하는 데다 막내라 부담되지.”

어렵게 뗀 첫마디. 최종수는 침을 한번 삼킨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로?”

“네.”

감독은 헛기침을 한두 번 하더니 운을 띄웠다. 이전에 고등학교 감독님한테 들었어. 3학년 때 부담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다고. 요지는 이러했다. 총평에서도 말했듯이 에이스 하나만 믿고 가는 팀 상황이다 보니 시즌 동안 득점 비중이 가장 높았던 최종수가 부담을 받아서 또 그런 상황이 오게 될까 봐. 걱정스러운 말들이 이어졌다. 팀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너 자신을 몰아세워서 무리하진 말고. 프로에 오면 신체적 부상 외에 정신적 부상도 조심해야 한다는 등. 그런 이야기들.

“철없을 때야 그랬겠지만 이젠 안 그래요.”

물론 그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상황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사람이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 철없는 고등학교 3학년이 아니라 4년의 외국물도 먹고 경험치도 쌓은 최종수였으니 달라야 했다.

“그냥.”

최종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문제가 있다면 제가 생각보다 잘 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 뿐이에요.

“뭐?”

허, 기찬 소리가 들려왔다. 팀원 전부가 에이스라 믿고 있는 선수가 생각보다 잘 하지 않는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

“네 득점 비율 다시 보고 생각해 봐. 게다가 바닥 치던 우리 팀 성적 네가 죽어라 뛰어서 다들 의기투합했어. 그리고 그 기세로 연승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막판 스퍼트로 쭉쭉 이겼잖아.”

“그렇지만 다른 에이스들도 이만큼은 하잖아요.”

하지만 최종수는 자신이 그렇게 결론을 낸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1라운드 1픽에 농구 유망주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기량 아니던가. 최종수는 저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프로 1년 차, 기대를 받은 신인. 그리고 아버지는 유명한 농구선수.

꼬리표가 많은 만큼 기대받은 것이 많았으니 그만큼 해주어야 했는데 생각대로 되질 않아서.

물론 옛날 철없는 고등학생 시절에 그 시선들에 압박감을 느껴서 죽어라 증명해 내려고 했었다. 승리는 당연했으니 팀보다는 나 자신의 증명이 우선. 지금은 압박감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하면 되레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야를 넓혀서 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애쓰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는 않으니 여러모로 안 좋은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담된다던가 그런 건 아니에요.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거죠.”

최종수는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면서 최대한 좋게 말하고는 흘금 감독의 눈치를 보았다. 감독은 팔짱을 낀 채로 종수를 한 번 훑어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푹 쉰 후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이번 비시즌 기간에 세계대회는 없으니까 잘 쉬고 다음 드래프트에 올 신인들이라던가 내년에 복귀할 주전이랑 합 맞추는 데 집중도 해 보고.”

또, 지금 2군으로 뛰는 애들도 열심히 하면 같이 주전으로 뛸 수 있어. 너 혼자 무리하지 말고 다 같이 다음 시즌 잘 해 보자. 아직 너도 1년 차잖아. 네 능력의 가능성은 크니까 잘해보자. 그런 땅 파는 생각 하지 말고. 그럴듯한 위로지만 잘 다가오질 못하였다. 이만 가봐. 그 말이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고 나서야 최종수는 회의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즌이 일찍 마무리된 사람에게는 특별할 일이 없었다. 그동안 못 쉰 거 쉰다고 해도 한 사나흘은 갔으려나. 선수도 경기라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은 이상 평일을 쳇바퀴처럼 자신의 루틴대로 행동하게 되는데 뭘.

어쨌든 경기라는 이벤트가 사라진 최종수에게서 특별할 일이 있다면 그동안 미룬 약속을 공수표처럼 수거할 수 있다는 점? 딱 그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4년의 기간을 해외에서 보낸 최종수에게 대학교 동기라던가 선후배는 없었으니 연락하는 사람이라곤 딱 한 부류였다. 고등학교 친구들. 아 하나 더 있다면 같은 팀으로 뛰었던 청소년 대표? 그 정도일까.

이규

【종수 약속 잡힌 거 많아?】

 

【아니.】

이규

【그럼 다음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돼?】

 

【뭔데?】

이규

【조재석 술 사줄 겸 우리 18청대 했던 애들 모이자고.】

누군가는 플레이오프 기간이었지만 진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공수표를 수거할 기간이었다. 마침 학생인 재석이도 4학년이라 대학리그 뛴다고 이리저리 불리느라 바쁠 테니 이때 아니면 못 볼 거라고. 물론 그 1년 기간 동안 누구 얼굴 안 본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특별히 할 일 없이 바쁘지도 않은 사람인 최종수가 약속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약속 장소 정해지면 보내줘.】

 

이규

【ㅇㅋ】

약속이 잡히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적당한 저녁 시간 약속장소는 고깃집. 이전에는 청소년 대표도 했던 사람들인데 어째 만나다 보니 플레이오프 미진출 팀에 속해있는 1~2년 차 막내 모임들이 되어버렸다. 최종수는 자리에 앉아 익숙한 얼굴들을 한번 훑어보다 이 자리에 없는 얼굴이 떠올라 옆에 있는 이규에게 물었다.

“임승대는? 청대 애들 모인다면서.”

“걘 지금 결승전 뛰고 있을 텐데 여기에 오겠냐.”

“아 맞다 걔 대구였지?”

최종수는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하품을 하였다. 며칠 전 들었던 플레이오프 결승 진출팀에 대한 소식. 분명 수원 ST와 대구 전력공사 두 팀이었지.

“종수형은 승대 형한테 너무 관심 없다니까요.”

“나한테 연락도 없는 놈에게 무슨 관심을 가져.”

“맞아. 만나서 싸우지만 않으면 된 거지.”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는 불화. 그렇지만 누군가의 흑역사는 어떤 안줏거리가 되는 법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조재석이 눈을 반짝이며 최종수에게 물었다.

“종수형 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어떻게 된 거예요? 들리는 이야기로 멱살 잡혔다 하던데.”

재석아 넌 눈치가 없어도 진짜, 옆에 있던 강인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단 술이나 채우자며 소주를 한 병 깠다. 형 저 진짜 궁금하단 말이에요. 고작 술 까는 거에 굴할 조재석은 아니었지만 이미 비슷한 부류의 후배를 다루는데 익숙한 강인석이 마시라며 조재석의 잔을 채워줬다.

“나중에 술 들어가면 술김에 말할게.”

과연 그런 날은 오기나 할지. 최종수가 픽 웃고 다 같이 한번 짠하고 마셨다. 이후에는 각자 근황을 나누며 고기가 구워지길 기다렸다. 사실 근황이라고 해도 결국 농구 이야기뿐이었다. 팀 성적, 경기 이야기. 팀원 이야기 등.

“그나저나 종수는 아쉽네.”

“뭐가?”

“마지막 경기말이야. 이기면 플레이오프였잖아.”

1점 차 패배, 1경기 차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출사표를 던진 프로 1년 차에 모두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1년 차에 주전으로 출전할 선수도 몇 없긴 하지. 에이스로 활약하는 최종수가 특이 케이스이긴 했다.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주며 다음에는 잘 될 거라는 격려도 건네주고 아쉽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 가까이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쉬워서 할만한 성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지나간 거에 연연해봐야 뭐해.”

다른 사람들이 아쉬워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냉정히 생각하면 턱걸이로 올라간 팀이 6강이나 4강 올라가서 뭐 크게 달라지나 싶기도 하고, 그냥 패배 실적만 올라가는 거 아닌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름 여우가 신 포도를 보듯 생각하니 그 마지막 경기에 대해서는 이젠 별생각이 안 들었다. 지난 일을 발판삼아서 성장하는 것과 그때를 아쉬워하며 매달리는 건 별개의 감정이었으니.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주변의 표정이 다들 놀란 눈치라, 최종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나?

“왜,”

“아니 진짜 달라졌다 싶어서.”

이규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하는 걸 보니 또 그 지긋지긋한 고3 시절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이겨도 독기 가득하게 굴고, 중간중간에 감독이 긁으면 파블로프의 개 마냥 반사적으로 실적을 보여주지 않나. 그 문제의 쌍용기 결승 때는 진짜 못 볼 꼴 다 보여서 얘 지면 큰일이 나는 거 아닌가 싶었다고.

“야, 내가 고3 때 그렇게 못난 놈이었나?”

“못난 건 아니지만 그냥…. 예민했죠?”

조재석이 조심스레 말하고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을 보니 타인의 시선에서 보는 자신의 그 시절이란 정말 예민함의 극성 그 자체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최종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이제 그 시절에서 4년이나 지났는데 그 두고두고 회자할 옛 시절은 좀 잊어도 되지 않나? 최종수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했다.

“하 씨 그땐 미안했다. ”

그래도 사람이란 게 가장 기억에 남은 부분만 계속 머릿속에 가져가는 법이었으니. 최종수가 낼 답이라곤 연거푸 사과하는 방법뿐이었다. 다들 짝짝 손뼉을 쳐주고 웃어넘기는 꼴을 보니 사실 이거 놀리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튼.

잘 먹고 잘 마시면서 적당히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올 즈음 구운 고기는 다 떨어졌고 식당은 피크타임이라 새 고기가 나오는 데 오래 걸린다고 하였다. 다들 적당히 배를 채운 상태라 이대로 계산하고 저녁 모임을 끝내도 되었지만 헤어지기 아쉬워서 2차로는 호프집에 갔다. 적당히 맥주와 안주를 시켜서 마저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TV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원 ST와 대구 한국 전력과의 6회차 결승전.

아직 2쿼터 진행 중이기 때문에 승부는 알 수 없지만 6차전인 만큼 치열한 게임이 진행되었다. 그런 경기인만큼 음식 하나 먹는 사이에 슛 하나가 들어가거나 뭐 하나 마시는 사이에 턴오버로 속공이 되기 때문에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키 큰 남자들 넷은 수다를 떨다 말고 손가락으로 과자를 집어 먹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대구 전력공사 측에서 공격을 진행하려는 중 단 한순간. 수원 ST의 선수가 공을 스틸하며 바로 속공으로 2점 레이업을 넣었다. 이어서 캐스터의 벅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상호! 바로 공을 스틸해서 레이업 득점까지 성공합니다!’ 그리고 옷 소매로 땀을 닦는 얼굴을 비추었다. 테이블에 앉은 넷이 익히 다 아는 얼굴이.

“진짜 기상호 쟨 미쳤다니까.”

“쟤는 고등학생 졸업하고 바로 얼리로 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2년 동안 봤을 때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이규가 혀를 내두르며 한마디를 하자 조재석은 버튼 누른 자판기 마냥 지상고의 쌍용기 우승 이후부터 지상과 원중이 붙었을 때 일화를 바로 쭉 내뱉었다. 공태성의 높이라던가 김다은의 골 밑의 든든함, 그 외에 정희찬의 스피드. 각자의 장점이 잘 맞물린 팀. 그 정도만 해도 성가시긴 했지만 제일 성가신 건 기상호의 수비였다고.

패턴을 새로 들고나오면 얼마 안 있어서 몇 개를 파악하고, 온볼러 대응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고. 농구에서 수비란 공격만큼 돋보이진 않아도 당하는 사람만큼 숨이 막히는 건 없었다. 그런 상대를 대학까지 가서 만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재석아 끔찍한 이야기 해줄까? 이제 너도 프로 선수 되면 기상호 쟬 평생 볼 거다.”

“에이 같은 팀 되면 되겠죠.”

“저긴 드래프트 때 확률상 9~10픽을 할 텐데 그게 가능하겠냐. 넌 최소 1라운드에서 상위 픽 감인데.”

이젠 넌 쟤를 컵대회에서도 볼 거고 시즌에서도, 플레이오프 진출하면 플레이오프에서도 볼 거라고. 이미 프로에서 경험한 이규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맥주를 마시며 잔혹한 진실을 건네주곤 낄낄 웃었다.

경기를 보면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2쿼터가 끝나 하프타임이 되었다. 광고가 나오기 직전 송출된 하이라이트 장면에는 기상호의 스틸 장면이라던가 상대의 턴오버를 유도하는 장면 등이 보였다. 최종수는 턱을 괴며 그 하이라이트 장면 속에 담긴 기상호를 보았다.

시즌 동안 진행된 수많은 경기. 그 경기들을 뛰었던 수원 ST의 주전인 기상호와 서울LC의 에이스인 최종수.

4년의 기간이란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4년이 뭐야. 조재석은 자기 입으로 고등학생 때 벤치에도 들지 못했다가 2학년이 되자 주전을 꿰차고 청소년 대표를 했다는데. 그러니까 이름 하나 들어보지 못했던 선수가 갑자기 슈퍼루키처럼 나온 건 있을 만한 일이고, 거기에 더해 4년이란 기간을 훌쩍 지나 한국으로 귀국하니 그 녀석이 이미 고졸 얼리로 프로의 세계로 가서 유망주가 된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일이었다.

뭐 첫 만남이었던 쌍용기 결승전 때도 그 녀석이 죽기 살기로 자길 쫓아왔으니, 4년 후 현재 프로리그에서 본 기상호가 성가신 놈이 될 거라 생각은 했었다. 실제로도 성가셨고.

가장 먼저 컵 대회서 만났을 때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니 천연덕스럽게 ‘이젠 인사받아주네요.’라고 말하는 모습. 그리고 경기 내내 끈질기게 쫓아오며 막아서던 그 모습까지.

“종수 괜찮아?”

“응?”

“종수형, 조금 전에 살벌하게 기상호 노려본 거 알아요?”

“아, 그랬나.”

상념에 빠진 표정이 심각해 보였나 보다. 최종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괜히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하이라이트에 잡힌 기상호의 얼굴이 어른거리며 이전에 보았을 적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씨, 야 다음에 술 마시면 쟤를 부르지 말거나 날 부르지 마.”

이전에도 그랬던 것 같지만 이게 몇 번째인지. 최종수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싱글벙글 웃는 조재석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실 누구 한 명이 만취되어 흑역사를 쌓든, 다음날 컨디션 관리를 못 하든 최종수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놈이 취해서 ‘마셔요.’ 하는 술버릇이 있으면 좀 사정이 달라진다. 억지로 후배가 권하는 술잔을 몇 잔 먹어주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를 끝냈더니 숙취로 올라오는 두통이 상당했다. 구단 회식 때보다 더 마신 것 같은데. 최종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형들! 나중에 또 봐요! 대학리그 경기 보러 안 오면 삐질 거에요.”

아직도 텐션이 가라앉지 않은 조재석이 또 보자며 열렬한 인사를 했다. 보호자에 익숙한 강인석이 기 빨린 얼굴로 조재석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 나중에 집 들어가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본인도 그 택시에 탑승하였다.

“휴, 한숨 돌렸네. 종수는 집이 이 근처였던가?”

“어.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니까 알아서 갈게.”

“그래, 나중에 또 보자”

“또 봐.”

술자리 말고 다른 거로.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남기면서 최종수는 손을 흔들었다. 머리가 울리는 느낌에 심호흡하며 바깥공기로 술기운을 좀 깨려고 했건만, 시끄러운 소리와 번쩍이는 불빛으로 가득한 번화가에 있던 탓인지 되려 머리가 더 아파져 오는 느낌이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길가에 미어터지고. 공기는 갑갑하고. 빨리 집에 가려면 이 인파를 거쳐서 가야 했기에 최종수는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 해도 번화가에서 벗어나는 걸 택했다.

조금 돌아, 근린공원이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니 그제야 숨을 틀 수 있었다.

몇 안 되는 봄 날씨를 즐길 수 있는 시기. 화려하게 피웠던 꽃들은 다 지고 새파란 나뭇잎이 튀어나오는 나무 사이를 지나가면 늦은 밤에 가볍게 달리는 사람들이라던가 야외 코트에서는 배드민턴을 치거나 다른 공들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보였다. 산책할 때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 그 광경을 지나 다시 아파트나 빌라가 늘어서는 길목으로 걸어가니 길거리 농구코트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티셔츠와 교복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프로 눈에 보기에는 그냥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시합. 본다고 해서 크게 도움 될 것도 없는데, 최종수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단순한 직업병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놈이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나서.

‘혹시 동네 코트 같은 데서 농구해본 적 있어요?’

농구가 즐거워서 한다고 하는 그놈은, 여전한 얼굴로 경기에 있었다. 물론 매번 즐겁다고 실실 웃는 것도 아니었고, 인상 찌푸리거나 심각해 보인다던가. 아니면 특유의 그 표정을 짓는다던가 뭐. 다른 얼굴도 있었지만, 최종수는 유독 그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대화는 몇 번 해봤나? 해봐야 인사, 잘 부탁한다. 수고했다. 그 말뿐이었는데. 시상식이나 시합 아니면 만날 일도 없는 놈. 그놈의 얼굴 신경 쓰인다고 자꾸만 생각하는 꼴이 구질구질했다. 최종수는 헛웃음을 내뱉고 마저 가던 길을 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최종수 형 아니에요?”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보다. 최종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눈을 끔뻑 뜨면서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기상호가 보였다.

“너, 왜 여기 있냐?”

“네? 그야…. 집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수원 아니었어?”

“아, 저 누나 집에 살아서….”

기상호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 어색하게 미소짓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 손에는 치킨상호명이 적힌 비닐봉다리와, 다른 한 손에는 맥주 한 캔이 넣어진 봉지 하나. 오늘 경기를 이긴데다 수훈선수까지 했으니 소소한 포상의 시간을 가지려는 모양이었나보다.

“형은요?”

“집 가는 길.”

“아, 형 집도 이 동네였구나.”

그럼 잘 가요. 기상호는 어색한지 마저 걷던 길을 걸어갔다. 문제가 있다면 그 길 역시 최종수의 집 가는 방향과 일치했다는 점일까. 최종수는 먼저 갈 길을 가는 기상호의 뒤를 따라갔다. 아니 그냥 가던 길을 갔을 뿐인데 길이 겹쳤을 뿐이지.

“저 최종수 선수님?”

“왜.”

“굳이 절 바래다주지 않아도 되는데요.”

“미쳤나? 내가 왜 널 바래다줘.”

“근데 자꾸…. 뒤에만 따라오셔서”

“나도 집 가는 길이 이쪽이거든?”

아 그랬군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우연이겠거니. 둘은 함께 각자의 집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기상호는 별로 친하지 않은 형(그것도 다른 팀 소속)이 알고 보니 같은 동네 사람이고, 우연히 마주쳐서 집 가는 길을 공유하게 된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그 최종수라면 이미 서울에 집이 있던데 굳이 본가가 아니라 이곳에 사는가. 집값이 괜찮고 교통편도 그럭저럭 좋은 편이라 혼자 자취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타인의 자취에 관한 사정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이 어색한 기류에 대한 고찰이었다.

코트 안이라던가, 경기장이라는 바운더리 (예를 들면 자판기나 매점 같은 장소) 내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 제 옆에서 지켜줄(?) 사람이 있고, 누군가가 보는 상황이라면.

그러니까, 단둘인 상황은 좀 많이 어색했다. 저 형도 그리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거니와 자신도 낯을 가리는 편이고. 더해서 유독 최종수는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가 느껴졌으니까.

그래도 최종수 저 정도면 성질 많이 죽은 거라고. 원래 자기보다 잘하는 애들 마음에 안 들어 하니까 그냥 네가 잘하는가 보다. 그렇게 여기라며 최종수보다 1~2년 위에 있는 장도고 출신 선배들이 그리 말하긴 했다. 하긴 인사 안 받아주던 성질이 이젠 인사는 받아주는 거 보면 성질은 죽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관계가 나아진 건 아니지.

근데 이 형은 대체 어디가 집이길래 언제까지 나랑 같이 갈 건지. 평소라면 금방 도착할 것 같은 거리가 유독 길어지게 느껴지는 시간. 괜히 등불이 깜빡이는 가로등이라던가, 길가에 제멋대로 주차된 차에 시선이 갔다. 사실은 제 옆에서 함께 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까 봐 괜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었지만.

“오늘 수훈선수였지?.”

축하한다. 덤덤한 그 말이 들리자 기상호의 눈이 커지고 움찔. 몸이 잠깐 멈추었다. 이 형에게서 축하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이리저리 딴 곳으로 시선을 두던 눈을 그제야 옆으로 돌리면 최종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만 보고 있을 뿐이다. 괜히 쫄았다.

“어, 경기 보셨구나…. 감사합니다.”

“요즘 너 잘 나간다.?”

“아이 뭐, 신인상 수상자인 형만큼은 아닙니다.”

“미국물 먹고 와서 1라운드 1픽으로 뽑힌 놈이니까 받은 거겠지.”

기상호는 눈을 여러 번 깜빡거리다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술 냄새. 상기된 얼굴. 한잔 걸친 건 알겠지만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여태 만났던 최종수를 생각하면 기상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경기장 안의 모습뿐이었다. 언제나 호전적이고, 자신감 넘쳤던 모습. 이렇게 풀 죽은 듯 말하는 걸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혹시 술버릇이 자책하는 건가. 기상호 기준에서 최종수가 말하는 저 자책은 택도 없는 이야기라 코웃음 치며 가볍게 말했다.

“형맨치 막기 힘든 에이스가 어디 있다고.”

“말이라도 고맙다.”

“아니 저는 나름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사실 기상호의 입장에서 프로리그에 와서 쉬운 상대 어려운 상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점점 상위로 올라갈수록 개인의 실수는 줄어들고 자주 쓰는 습관은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저 경기 마다 언제나 죽기 살기로 집중력과 머리를 끌어올리며 상대방이, 상대 팀이 만들어내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찬스를 만들어낼 뿐.

그 날고뛰는 프로 선수 중 어려운 상대는 여전히 이름난 에이스들. 서울 LC의 에이스는 당연히 최종수였다. 기술 면에서, 스펙면에서 모자란 게 없었으니까. 그를 수비 매치업 하는 상대로선 정말 죽을 맛이었단 말이다. 또 생각나네. 서울 LC팀과의 첫 대진 때, 감독님은 따로 기상호를 불러 물었다. 저번에 최종수 어떻게 막았냐고. 어떻게 막았냐고요. 그냥 풀타임 뛰게 해서 지치게 했어요. 저 형 욕심 많아서 공수 다 활약하고 체력 아낄 생각 안 한 거든요 그 말을 듣고 감독의 표정이 어땠더라 정말 그걸로 막았냐? 하는 표정이었지. 근데 진짜로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꼼수로 수비를 성공시키는 기상호도 유일하게 정석적인 수비를 하며 체력 소진을 노릴 수밖에 없는 상대가 최종수뿐이었으니까.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푹 쉬곤 재차 말해주었다.

“형이 젤 어려웠다고요.”

“근데 넌 결승전 갔잖아. 난 플레이오프 떨어졌고.”

“아니 형네 팀 악재란 악재 다 낀 거 모두 다 알 걸요? 뛸 수 있는 선수가 얼마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 하나도 해결 못 하는데 무슨 에이스야. 그나마 잘하니까 에이스라 하는 거지.”

게다가 신인상도. 드래프트 신인 중 바로 주전으로 뛰는 경우 몇 없는데 팀 상황상 주전 먹고 득점 다 가져가니까 그런 거지. 체념 섞인 목소리. 현재 프로로 뛰고 있는 농구선수들 다 모아서 최종수의 이 발언을 들려준다면 다들 무슨 소리냐고 어이없어 할 텐데. 진짜로 다시 한번 말하라 하고 녹음이나 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 얼굴을 흘금 쳐다보니 최종수의 얼굴은 자신의 발언에 덤덤해 보여서. 취기에서 나온 한탄인지 아니면 하나도 안 취한 상태서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인지. 이런 발언을 듣는 기상호의 기분은 조금 이상했다.

“왜. 너 고1 때 봤던 싹수없는 형이 이런 말 하니까 놀랐냐?”

그저 앞만 보던 최종수의 시선과 마주쳤다. 무거운 한숨. 이어지는 단조로운 말소리. 그니까 그땐 내가 미안했다고. 4년 전에 그거 좀 그만 잊어줘. 사람이 철없을 때 그럴 수도 있지. 아, 이건 술 취한 게 맞다. 기상호는 그냥 취기에 나오는 한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형도 그런 생각하는구나 해서요.”

“뭔 생각.”

“그 뭐라 해야 하나, 혼자 땅 파는 생각…?”

단둘만이 걷고 있는 고요한 밤길. 가로등과 집의 불빛만이 둘이 비추고 서로의 걸음 소리만 들려오는 길. 그 길에서 기상호의 코웃음 소리와 함께 푸념 섞인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지면 내 땜에 진 거 같고, 이기면 딴 사람이 잘한 거고. 그래서 민폐는 안끼칠라고 죽어라 뛰는데 맨날 의심했어요. 내가 이 경기에서 1인분은 했는지.”

기상호는 자신의 농구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나 다름없는 쌍용기를, 그리고 그 대회에 있던 경기들을 생각했다. 결승까지 쭉 이어진 전승. 팀은 이기고 있었지만, 그 승리가 자신의 활약 때문이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비라도 잘해야 하니까 최대한 자신이 할 방법으로 나섰을 뿐이지.

기상호는 자신의 수비를 승리의 결정적 요소로 삼지 않았다. 따지자면 상대의 승점을 줄이는 요소라고만 생각했다. 마지막 결승전 때 다들 한마디씩 해주면서 초심을 짚어주니까. 농구를 계속해야지 결심하고. 늘 그 마음으로 하다 어찌어찌 얼리 드래프트로 여기까지 왔다. 죽어라 하고 노력하니 딱 오늘, 이 순간까지 왔다. 식스맨. 수비의 키포인트. 오늘은 득점이 잘 되어서 수훈선수까지 차지.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뭐, 고등학생 때에 비하면 좀 나아졌어도 의심병 도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오늘을 포함해서 몇 번 수훈선수로 뽑히긴 했지만, 여전히 이 경기에서 내가 다른 선수보다 잘하고 있는지 못했는지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치열한 상황이니까. 좀처럼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저 쿼터 끝나고, 경기가 끝나고 수고했다면서 토닥여주는 등과 잘했다면서 머리를 헤집는 손을 느끼면서 나름 안도할 뿐.

“그냥, 마인드 컨트롤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거.”

농구를 하는 그 시간에 최대한 집중해서. 오로지 경기에만. 자기 의심에 매달리게 된다면 한없이 땅을 파게 되는 건 이전에 한 번 경험했으니. 나름의 경험자로서 할 조언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거 길어지면 슬럼프로 올 것 같은데 잘 이겨내 봐요.”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사실 그 최종수가 이런 고민거리를 가질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었는데. 그도 사람인 걸 생각하면 저와 비슷한 고민거리를 가질 때도 있구나. 그런 기분도 들어서 좀 신기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어느새 연립주택이 늘어선 제집 앞까지 왔다.

“근데, 저 이제 집에 다 왔는데. 형 집은 어디에요?”

가만히 말을 듣던 최종수가 주변을 두어 번 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지도 앱을 켜고 확인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나친 것 같은데.

“...지나쳤어.”

“얘기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나름 진지한 주제이기도 하고, 사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난 이제 집에 가야 해서 잘 가’라는 말을 하기에는 좀 어색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냥 철두철미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그, 최종수 형?”

기상호는 뒤돌아서 다시 돌아가려는 최종수의 뒤통수에 말을 걸었다. 아까 들었던 고민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뒤통수가 쓸쓸해 보여서인지. 이대로 보내고 가기에는 뭔가 신경 쓰여서.

“사실 오늘부터 요 주말에 누나가 본가에 가서 지금은 집에 아무도 없거든요.”

같이 마실래요? 혼자 술 마시면서 치킨 뜯기에도 좀 쓸쓸하고. 누나도 잘 치우기만 한다면 자기 없을 때 친구 데려와도 된다고 했었고. 기상호는 맥주가 든 비닐을 들어 보였다.

 

 

최종수는 작은 편의점에서 사이다와 숙취해소제를 계산하면서 고개를 살짝 뒤쪽으로 돌아보았다.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기상호가 보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길 가다가 마주쳤을 뿐인데. 안그래도 오늘 저녁약속이 끝날때만 해도 집에가서 쉬고 싶은 상태 아니었나. 게다가 내일 낮에는 부모님을 뵈러 가야 하는 일정도 있었고. 그런데 어째서 기상호가 함께하자는 말에 승낙을 했었는지. 머릿속으로 의문투성이지만 이미 손에는 계산을 한 사이다와 숙취해소제가 들려있었다.

아무래도 술김에 누군가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던걸까. 그래, 그냥 그런거라 치자. 그 저녁 약속에서 술을 너무 마셨었고 자리를 이어가기에는 조재석이 너무 취했고 강인석은 피곤했었으니까. 우연히 마주친 기상호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그냥 쟤와도 말을 더 트고 싶은 그런 마음이라고. 여태 기상호에 대해서 ‘즐겁게 농구하는 재수없는 놈’, ‘쌍용기 이후로 신경쓰이고 이겨먹고 싶은 놈’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또 사뭇 진지하게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민 상담도 해주니까. 농구 외적으로도 알고싶어졌을거라고. 그리 저 혼자 납득하며 편의점에서 나왔다.

2층쯤에 있는 기상호와 그 누나의 자취집.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깔끔히 정돈된 현관과 부엌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집과 규모는 비슷해 보이지만 둘이 사는 공간이라 그런지 공간 자체가 차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저기는 누나 방이니까 들어가지 마시구. 저 TV킬건데 뭐 보고싶은거 있어요?”

“아니 딱히.”

“그럼 저 애니메이션 볼건데 괜찮죠?”

“집주인은 넌데 뭘 허락받아.”

“아니 그래도 같이보는거니까. 못보는거 억지로 보게 하면 안되잖아요.”

요 앉아서 같이 봅시다. 기상호가 TV앞에서 밥상용 테이블을 펼쳐놓으며 치킨을 먹을 준비를 해두고 최송수는 편의점에서 사온 숙취해소제를 하나 따 마셨다.

“형은 다리먹어요? 아니면 가슴살?”

“방금 먹고오는 길이라 배불러.”

“그럼 저 혼자 먹습니다.”

“그러던가.”

저 진짜로 혼자 먹어도 되는거죠? 나중에 먹고싶음 말해요. 그렇게 재확인을 시키고 나서야 기상호는 열어둔 박스 안에 있는 가슴살을 하나 집어 먹기 시작했다. TV화면에는 예능프로그램이 재방송 되고 있어서 기상호는 TV리모컨을 조종하여 무엇을 볼지 이리저리 커서를 오르내리렸다.

“형, 트라이건 봤어요?”

“그게 뭔데”

“형 고등부 별명 인간태풍 나오는 애니메이션요.”

숙취해소제를 마신 다음 사이다를 마시려 찰나 입 안으로 들어간 사이다가 목젖으로 넘어가다 말고 사례가들렸다. 콜록이는 기침소리. 어 형, 사례들렸어요? 태연히 물티슈와 휴지를 가져오는 기상호를 노려보았다.

“너 나 멕이냐?”

안그래도 그 고3얘기 지긋지긋해서 화제가 나올때마다 인상이 절로 찌풀여지는 최종수였다. 게다가 그 인간태풍이라는 별명은 대체 누가지어준건지. 그 시절에는 남이 저를 두고 뭐라 부르든 크게 상관 안했는데 지금 와서 듣기에는, 좀 공감성 수치심이 느껴지는 별명이었다. 근데 누가 그딴 별명을 지어준거야?

“아이 인간태풍 얼마나 멋졌는데요. 애니메이션 재미있으니까 같이 봐요. 이번에 신작 나왔다던데.”

“하...그래 그냥 알아서 해.”

어짜피 집주인은 기상호였으니 뭐라 할 구실은 없었다. 부끄러움은 그 오글거리는 단어가 별명이 된 당사자 몫이지.

TV화면은 애니메이션이 잔뜩 있는 스트리밍 사이트로 넘어가고, 기상호는 리모콘 버튼을 눌러가며 자신이 담아두었던 애니메이션중 하나의 1화를 틀어놨다. 인간태풍이라 하길래 뭔가 했더니 그냥 서부극처럼 보이는 SF 액션 애니메이션이었다.

최종수는 턱을 괴며 TV 화면에 집중하였다. 내용은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무난하게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영상매체라곤 농구 경기가 전부였으니 눈요기는 될 정도라 해야하나.

옆에서 기상호가 치킨을 하나 먹고, 그 이후에 밧슈의 멋진 장면이 나올때마다 그의 멋진 점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얘 이런 놈이었나? 꼭 그 모습이 자신이 보는 무협소설에 대해 열심히 설명 하면서 그 뭐더라 ‘영업’을 하는 이규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그러니 최종수는 상대가 그렇게 굴 때 대응방법을 알고 있었다. 열렬하게 말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적당히 대꾸해주기. 그렇지만 그 대응도 한 한시간쯤 되다보면 시간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체내에 남아있는 취기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최종수가 눈을 감았다 뜨면 이미 기상호가 자신이 먹은걸 다 치워놓고 최종수에게 옷과 세면도구를 내밀고 있었다.

“이거 사이즈 맞을라나. 함 입어보세요.”

그래도 오버사이즈로 산거라 넉넉할거에요. 칫솔은 일회용 남은거 있으니까 이거 쓰시면 되고. 자고 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고갈거라 생각하고 하는 행동. 최종수는 멍하니 눈꺼풀을 두어번 깜빡이다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새벽1시. 귀가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거절하고 집간다고 하기에는 무안한 그런 시간이었기에. 그냥 얌전히 기상호가 하라는대로 하기로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세안과 양치질을 한 다음 기상호가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방에는 이미 이부자리가 펴 놓아져 있었다. 부지런도해라.

“형은 침대가 익숙하죠?”

저 고등학생때는 그냥 숙소에 바닥에 엎어자서 바닥 괜찮아요. 분명 자고가는 사람은 자신인데 왜 귀한 손님 모시듯 하는건지. 나도 바닥에서 자본적 없는것도 아닌데. 중학생때 한번정도? 사양하기에는 기상호는 이미 바닥에 깔아둔 이부자리에 누워서 잘 준비를 하고 있어서. 쭉 페이스에 휘말렸다 생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최종수는 기상호의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오늘 술을 마시고 나서 집 가는 길에 기상호랑 마주쳤지. 어쩌다보니 같이 걸어가다가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집 가버릴 타이밍을 놓쳐 남의 집에서 자게 된 경우는 뭔지. 더해서 쟤는 왜 나를 재워주는지. 그리고 자신은 왜 순순히 따라주는지.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싫은건 아니었으니까. 그래, 이런 경우도 있겠지. 게다가 오늘은 그 조재석 때문에 술도 많이 마신 탓에 그냥 취기 때문에 휘둘렸다 치자. 최종수는 눈을 감아 잠을 청하였다. 새근거리는 누군가의 숨소리를 자장가삼아서.

 

 

패턴이 잡힌 몸은 주말이든, 술에 취했든 상관없이 원래 일어날 시간에 눈이 뜨기 마련이었다. 토요일에도 이 시간에 일어나는건지. 누가 맞춰둔 알람이 울리고 자연스럽게 그 소리에 맞춰서 최종수가 눈을 떴다. 몸을 반쯤 일으켜 옆쪽에 있는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니 기상호가 이부자리에서 팔을 더듬어가며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끄는 모습이 보였다. 기상호가 고개를 들면 야식때문인지 부어버린 얼굴과 마주쳐서 최종수는 저 혼자 픽 웃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요?”

“어.”

아직 잠이 덜 깬 기상호가 겨우 눈을 뜬 채로 이불을 갠 다음 근처에 옷걸이에 걸려진 운동복을 하나 집으며 말했다.

“하암, 저 이제 아침운동으로 산책 좀 할건데 형은요?”

웅얼거리는 목소리. 최종수는 제 눈치 하나 보지 않고 맹한 정신으로 그냥 옷을 갈아입는 기상호를 보았다. 아직도 잠기운에 휘말린 눈동자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수가 그 아침운동에 응할 것 같은 눈길. 자연스레 대하는 태도가 같은 팀 사람한테 구는 것 같네. 천성이 이런 녀석이던가.

“근데 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한테 이렇게 구냐?”

“네?”

“꼭 뭐 숙소에서 같이 자는 형한테 구는것처럼 하니까...”

“아이. 같은 동네주민이잖아요. 나중에 산책하거나 길가다가 또 마주칠수도 있는거고.”

그러니까 고작 동네주민이라고 그냥 경기에서 몇 번 본 상대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 자체가 최종수로서는 이해하기 좀 힘들었다. 천성이 사교적인 성격이면 그냥 그런가보지 넘어갈 수 있었다. 근데 어제 길에서 처음 봤을때 그렇게 어색하게 굴던 모습은 또 뭔지. 조금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친해지는 정도가 무슨 드라이브 엑셀을 밟는 것 같네.

문득 제일 처음 만나서 맞대결을 했던 그 경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경기 직후에서 했던 말. 농구 한 경기 했으면 친구라고 했던 말. 그땐 그녀석이 이긴놈이라 스포츠 쇼맨십에 따라서 한 말인줄 알았더니 나름 진심이었던건지. 낯은 가렸지만 나름 그때도, 지금도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을 했나 보다. 그래 그렇다 치자. 최종수는 지금 영 이해가 잘 안가는 상황을 겨우 납득했다. 그걸 겨우 납득해가면서 거절을 안하는 것도 좀 웃긴 모양새지만.

“아니 형 불편하면 이대로 집 가도 되고요.”

친근하게 굴던 모습은 또 어디가고 갑자기 낯가리는척, 눈치보는 모습. 웃긴 놈이네. 최종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도 이 시간에 아침 운동해.”

어짜피 꾸준히 유지하고 있던 루틴에서 사람 하나 추가되는 정도다. 이렇게 된거 아침 운동까지 하고 가자는 마음으로 기상호와 함께 집 밖을 나섰다.

사실 아침운동이라고 해도 별건 없었다. 익숙한 동네의 길과 근린공원에 있는 산책로를 가볍게 달리는 것 정도. 동네 한바퀴 돌면서 기상호에게 제 집의 위치를 알려주고. 기상호가 알고 있는 동네 맛집 이야기도 들어보거나, 같이 달리면서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어도 둘이 고등학교때 마주친 선수들이 다른 팀에서 보았을 때 어땟었는지. 그런 고찰이 대부분이었지만. 길거리에 있는 농구코트를 보기도 하고. 함께 달리던 걸음은 텅 빈 농구 코트의 펜스에서 멈추었다. 둘이 잠깐 빈 코트를 바라보고 있자면 기상호가 팔꿈치로 최종수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형 가볍게 1:1 한판해볼래요? 10점내기로.”

“공은 있고?”

“공이야 집에서 가져오면 되죠. 진 사람이 오늘 아침 사기 어때요.”

아침부터 1:1 신청하는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그것도 내일 결승전을 할 선수가. 최종수는 아침이라 텅 빈 농구코트를 한번, 기상호를 한번 훑어보았다. 이런 길거리 코트 위에서 가볍게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 저 놈이랑 하다보면 가볍게 한판이 아니라 그냥 진심이 될 것 같아 최종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일 경기도 있는 놈이.”

“1:1 정도야 금방 끝나잖아요? 농구 한게임 뛰는 것도 아니고.”

“야, 너는 내가 포스트업 하면 안넘어질 자신 있냐? 야외바닥에 넘어져서 다치면 어쩌려고”

“아, 종수형이 저한테 포스트업하는건...”-

“페이스협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거라고?”

“와 이걸 다 담아두시네. 4년전에 한 얘긴데.”

여태 들은 이야기중 제일 어이없는 개소리니까 그렇지. 그 개소리에 넘어가서 잠깐 포스트업 안해준 자신도 이상했지만. 최종수는 미련이 남지 않게 얼른 농구코트가 보이지 않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동네인데, 나중에 한번 해봐.”

뒤따라서 달려오는 기상호가 아쉬워 하는 티를 내는게 보여 한마디 덧붙여주니 안색이 확 밝아졌다. 마저 남은 길을 달려나가 기상호의 집으로 돌아오니 상의는 거의 젖어있었고, 서로의 얼굴에 땀이 송글 맺혀졌다. 기상호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어제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으니 부엌에는 씨리얼박스와 우유, 그리고 캐릭터가 그려진 시리얼컵이 놓여져 있었다.

“냉장고에 샐러드 팩 있으니까 식단 하실거면 그거 드시구. 저 씻으러 갈게요.”

최종수는 익숙하게 부엌에 있는 식탁 의자에 앉아 씨리얼을 시리얼컵에 부은 후 우유를 부었다. 아기자기한 컵에 먹으려니 먹은 것 같지가 않네. 다시 씨리얼을 한번 더 컵 위에 부으고 있으면 기상호가 다 씻고 나왔다.

“야, 이 시리얼 컵 사이즈가 맞긴 해?”

“아, 그거 누나가 사온거라 그냥 그렇게 먹는거에요. 저도 한 세 번정도 부어서 먹던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말린 기상호가 자리에 앉아 시리얼을 컵 위에 붓고 우유를 부었다.

“미국에서는 씨리얼 많이먹는다는데 어때요? 진짜에요?”

“몸 만들어야해서 자주 먹는건 아닌데. 체격 큰 애들은 일부러 탄수화물 더 섭취해야하니까.”

“이걸로 섭취가 돼요?”

“일단 많이 먹으면 뭐든 살이나 근육으로 가잖아.”

“하긴.”

서로 씨리얼을 한그릇 비우고 다시 한그릇을 채웠다.

“이제 7차전인데 어때?”

“전 결승까지 간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고...7차전쯤 되면 이제 선수기량이랑 전술은 다 나온 상태니까 뭔가 비장의 수를 남겨둔거 아닌 이상은 그냥 정신력이랑 컨디션 싸움이라고 감독님이 말하던데요.”

“아무래도 결승전이 단판인거랑 7차까지 하는건 좀 다르지.”

“그쵸. 결승전 한번 할때도 그리 긴장되는데 그걸 여러번 할라카니 진짜 기빨리는 것 같다니까요.”

“그런놈이 오늘 나랑 아침부터 1:1 하자고 한거냐?”

“근데 그건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이 있어야 긴장이 덜해질 것 같아서.”

엊저녁부터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모습은 또 어디갔는지. 최종수는 기상호가 움츠러든채로 씨리얼을 한입 먹고 입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잘해라”

“네.”

둘이서 시리얼을 세 번정도 먹고나니 시간은 낮에 가까워질 때가 되었다. 이젠 가봐야겠지. 최종수는 핸드폰을 보며 일정을 확인했다. 저녁에는 부모님 보러 갈거고. 내일 플레이오프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비시즌 돌입이 온다. 뭐 비시즌이라 해도 출근해서 운동하고 훈련하는게 전부였지만.

“맞다 형 번호 좀만 줘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면 현관 앞까지 마중나온 기상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제 같은 동네 사람 아닙니까. 연락하고 살아요. 그놈의 동네사람. 누가보면 가족인줄 알겠네. 그럼에도 이렇게 지내는것도 썩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 최종수는 기상호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기상호의 배웅을 받고 그의 집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 어제 걸었던 길이었는데 어째 보이는 풍경이라던가 기분이 좀 달랐다. 최종수는 어제 저녁의 일을 상기했다. 취기에 푸념 섞인 말을 했을 뿐인데 자기도 그런 생각 한 적 있다면서 슬럼프 올 수도 있으니 마인드 잘 잡으라는 말을 들었다. 무슨 선배가 해주는 조언처럼 말이다. 고작해야 그놈은 2년 프로리그를 일찍 뛴 것 뿐인데. 아니지. 따지고보면 농구는 내가 더 오래했을텐데, 경험이 많은것도 내 쪽인데.

생각해보면 녀석은 자신에 비해 앞서간 것도 아닌데, 자꾸 앞 서 있는 채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4년 전 고등학생때도 그렇고 지금도. 딱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정체되어있을 즈음에 정확한 해답은 아니어도 도움이 될만한 말을 해주었다.

마인드 컨트롤. 기상호는 그리 말했다. 최종수 역시 멘탈과 관련된 부분이 선수 역량에 포함된걸 알고는 있다. 그렇지만 그 마인드는 어떻게 잡아야 좋을지. 감은 안잡힌다. 그냥 이전처럼 막연히 이기고 싶다는 생각보단 더 뭔가가 필요하다는, 그런 기분이 들뿐. 최종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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