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로그

고장

여름이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실내장식과는 상반된 구형의 선풍기. 마찬가지로 그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쥘부채. 이것들 사이에 둘러싸여 드러누워 있는 애머디. 누군가가 본다면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본인에겐 대체로 모범적이고 또 서민적인 삶을 산 애머디에겐 언제 나와 같은 모습이다. 팔락팔락 그가 손짓할 때마다 삐죽삐죽한 앞머리가 한들거린다. 측면에서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엔 옷자락이 얇게 펄럭인다. 형편없이 늘어진 자세이건만 애머디는 미동도 않는다. 표정은 무념무상. 업무를 볼 때의 총기 어린 눈빛은 어디 가고 먼 곳을 바라볼 뿐이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면적이 꽤 큰 편이다. 따라서 부지관리를 하는 일에도 꽤 품을 들여야 한다. 여름철마다 정원의 잔디를 뽑고 정돈하느라 땀을 한 바가지는 흘린다. 집 청소를 하려면 대청소가 되곤 하는데 일라이저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먼지는 많이 쌓이지 않은 편이다. 그 외의 수도관이나 가스, 전기배선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일도 잊어선 안 된다. 자주 쓰는 가전제품의 체크도 게을리해선 안됐다. 

' 그러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

찌는듯한 열기를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해도 사방에서 몰려온다. 비단 점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딱히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머디는 이 상황이 오고 만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더위에 매우 약하단 사실도, 이렇게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단 점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미 눈치챘을지라도. 멀쩡히 작동하고 있던 에어컨이 고장이 난 건 아침의 일이다. 주말 아침, 그것도 토요일 아침에. 끔찍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참담한 기분으로 켠 뉴스에서는 폭염예보 주의보까지 떴다. 나는 망연자실 하기도 지쳐 무력하게 쓰러지고 싶었다. 일라이저가 지켜보지만 않았더라면 그랬겠지.


" 제가 제대로 점검 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

뉴스를 보고 심각해진 건 일라이저도 마찬가지. 나보다야 더위를 잘 버티는 듯했지만 주말 내내 에어컨 없이는 힘들 것이다. 당장 에어컨이 멈춘 오늘 아침만 해도 나는 땀범벅으로 불쾌하게 잠에서 깼고 일라이저도 피곤한 낯으로 얼굴을 비췄다. 불편한 기색은 없지만, 평소보다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이것도 세월이란 건지. 처음엔 영문을 모르겠던 일라이저의 표정 변화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저 말은 더위를 잘 타는 날 생각해서 한 말이다. 평소라면 쓸데없는 걱정은 말라고 해줬을 텐데... 달리해줄 말이 없어 뒷목을 쓸던 나는 그대로 창고로 향했다. 일라이저는 묵묵히 애머디를 뒤따랐다. 이렇게 되면 차선책을 찾는 게 낫다. 말은 못했지만 씻고 나왔는데도 벌써 식은땀이 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도 않으니. 본가에서 가져온 잡동사니 중엔 분명 선풍기도 있었을 거다. 에어컨이 있는 건 알았지만 버리긴 뭣해서 가져온 게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새로운 감회를 느끼면서 애머디는 창고 안을 뒤적거렸다. 일라이저의 경우 가져온 짐 자체가 적었기에 창고 방이라곤 해도 대부분 내 사유물인지라 그는 멀뚱히 서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멍하니 있던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 저기, 이것도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민 것은 쥘부채였다. 디자인이 익숙한 것을 보니 부모님이 여행 기념품으로 적당히 예쁜 걸 사온 것 중 하나같은데... 나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린 걸 찾아내다니. 조금 놀란 눈치로 보고 있으니 일라이저는 곧 부채를 펴 보더니 살랑살랑 부쳐본다. 바람은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 ...꽤 쓸만하군. "

눈을 감고 잠시 바람을 느껴보다 그를 마주했다. 이러나저러나 날 챙겨주는 녀석은 지금 이 녀석 뿐이라는 걸 실감한다. 부려 먹는 기분은 아직도 종종 들긴 하지만. 일단 챙겨두라고 한 뒤에 애머디는 걸음을 옮긴다. 읏차, 제법 크기가 되는 선풍기를 꺼내 들고는 거실로 향했다. 기대를 품고 콘센트를 꼽았으나. 확실히 없는 것보단 낫… 다고 하기도 전에 뜨거운 바람이 가차 없이 불어온다. 

애머디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충격이었다.

" 더워... ... ... "

" 그,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선풍기를 새로 살까요? "

" 그러는게 낫겠어... "

보기 드물게 침울해진 애머디의 모습에 일라이저도 덩달아 어수선한 분위기다. 척 보기에도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걸 보니 더욱. 그걸 신경 쓸 여유도 없는 애머디는 시든 눈으로 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주문하면 의미가 없잖아.

" 제가 금방 사올게요.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

" 부탁한다. 그리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

" 뭘요, 같이 사는 사람끼리 당연한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


그렇게 떠나보낸 일라이저가 가고 덩그러니 남겨진 애머디. 그동안 무얼 했느냐 하면 처음의 부분으로 돌아온다. 털털털 더운 바람만 쐬어주는 선풍기라 할지라도 무풍보다는 낫다. 실제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니 조금은 나은... 기분도 든다. 일라이저가 쥐여준 쥘 부채도 더하니 어떻게든 버틸만하다. 더위에 이렇게 약했었나... 폭염이니 약하지 않은 쪽이 이상한 거겠지? 일라이저 녀석은 어떤 때라도 땀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긴 해. 차를 끌고 갔으니 그렇게 덥진 않으려나. 거긴 냉방장치가 돌아갈 거고. 아, 차라리 따라갈 걸 그랬나? 마트에서 쉬면 좀 나았을 텐데. 그렇지만 솔직히 한 걸음도 나가기 싫은걸... 하루종일 마트에 있을 것도 아니고. 소파 한구석에서 중얼대고 있으니 더욱 비참해진다. 이런 식의 투정은 요즈음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더더욱 막힘없이 불만이 터져 나온다. 회사 일은 여전히 빠듯하게 굴러가며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마냥 순조롭지 않다. 성격이 그새 죽었다곤 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녀석을 보면 아직 답답하다. 에스퍼를 위해 일하고 있건만 진짜 에스퍼를 위한 일은 무엇일지 고민이 끝나질 않는다. 답이 하나였다면 덜 피곤했을까. 그것조차 모르겠다. 짜증이 치미는 건 당연한 현상임에도 쓸데없이 열을 낸다. 이어지는 탈력감은 곧 우울감으로 이어진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맞는지, 이대로 나아가는 것이 맞는지. 곧이어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과거의 행적까지 되짚어간다.

' 너 그렇게 하다간 후회한다? '

누가 한 말인지도 가물가물한 문장. 이제 와서 떠올리기는. 애머디는 저도 모르게 몸을 말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새삼 무겁다. 바람은 불고 있는데도 별 효과는 없다. 이건 일시적인 우울함이 분명하다. 아무렇지도 않아. 지긋지긋하게 겪어 왔잖아. 아, 어쩐지 어지럽다. 수분이 모자른가 보지. 그런 생각이 들어 부스스 몸을 일으켰으나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수분 섭취? 아니면 물수건 만들기? 얼음은 꺼내봤자 금방 녹을 텐데... 잡생각이 머리를 잠식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제길, 진짜 형편없는 상태네 이거.

" 선배님? 뭐하세요? "

조용한 안개가 걷힌 것은 그의 부름 뒤였다. 어느새 거실까지 달려와선 허겁지겁 박스를 내려놓는다. 꽤 무거웠을 텐데. 수고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날 위해 움직여주는 녀석이 이해되지 않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왠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툭, 무언으로 응시하던 그가 이마에 손을 짚어 애머디의 열을 잰다.

" 열사병일 수도 있겠어요. 좀 누워 계세요. 수건도 덮어 드리고 선풍기도 틀어 드릴게요. 오늘은 선배 곁에 있어 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

" 아... 응, 그러는게 좋겠어. "

애머디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 드러누워 있던 소파에 도로 돌아가 있자 곧 있어 일라이저가 얼음물과 선풍기를 가져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대면서도 군더더기는 없다.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된 탓이겠지. 똑같이 무더위 속에 있으면서도 이 녀석은 흔들림이 없다. 그런 점이 늘 부러웠다. 아마 과거에도 앞으로도 쭉 부러워할 것이다.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일라이저가 있어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비상시에 이렇게 대처를 잘해줄 사람은 없었을 테지. 가족과 사이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거리는 있었다. 아마 아프면 아픈 대로 간호받기 껄끄러워 숨기고 있었을 거다.


조금 더 있자 애머디는 차게 식힌 물수건과 성능이 좋은 선풍기 바람에 둘러싸여 있게 됐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피부도 이걸로 조금 열을 식히자 혈색이 돌아온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일라이저도 이걸로 안심된 모양이다. 

" 빨리 오고 싶었는데 폭염이라 사람이 좀 몰려서 늦었네요. 마트도 북적이더라고요. 선배님을 데려가는 편이 나았으려나 고민했는데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길래 혼자 갔어요. 그렇지만 가기 전에 먼저 조처를 해둘 걸 그랬네요. 제가 더 일찍 알아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죄송해요. "

조곤조곤 사과하는 그의 입 모양을 가만 바라봤다. 아직 의식이 몽롱하긴 하지만 그의 말은 또렷이 들린다. 이렇게까지 훌륭한 조처를 해주고 기껏 하는 말이 사과라니.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다. 무언가 답해줘야겠는데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답답함을 느낄 무렵 애머디는 잠시 손을 들어 손짓했다. 애머디의 손짓에 일라이저는 바로 다가와 몸을 숙여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들어주겠다는 기세로군.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머금던 애머디가 그대로 손을 쭉 뻗었다.

' 바보 같긴... 그래서 두고 볼 수 없는 거겠지. 너도, 나도.. '

말로 내뱉지 않은 채 그대로 그의 머릴 쓰다듬었다. 힘이 없어 툭툭 내리누르는 형태가 되긴 했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그 손길을 일라이저는 피하지 않는다.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따로 항의하지 않고 그가 손을 뗄 때까지 허리를 숙였다. 투박하게 쓸어댄 탓에 앞머리가 삐죽해 졌지만 애머디는 만족스러웠다. 그대로 손을 거둔 애머디는 눈을 감고 나직하게 말했다.

" 걱정 마라, 난 괜찮다. 일어나면 답례하지. "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뜨지 않는다. 뒤늦은 나른함이 몰려와 의식을 저편으로 끌고 간다. 그 모습을 일라이저는 묵묵히 지켜본다. 문득 한편에 널브러진 쥘부채를 다시 쥐고는 조심스럽게 부쳐준다. 애머디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일라이저는 그 뒤로도 쭉 애머디 옆에 있었다. 간간이 눈을 뜨면 애머디의 상태를 확인하고 때때로 수분을 섭취시켜 주며 그를 안정시켰다. 그런 눈길에는 걱정도 서려 있었으나 왠지 모를 만족감이 아주 약간은 그의 마음에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렴풋한 의식 사이로 애머디는 분명한 존재감에 안도하며 깊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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