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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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이었다. 황제로서 첫 공무를 하게 되는 날인만큼 맑은 날인 쪽이 기분이 좋았지만 그게 다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인 탓인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 밀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로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평소와 같은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얼굴에는 엷게 화장이 되어 있었고 주변에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밀비 본인보다도 주변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떨리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붕 떠올라 있는 분위기는 눌러 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무래도 그 역할을 할 사람은 밀비 본인 밖에 없는 듯 했다.

평소의 배로 공을 들이고 있던 치장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늘 간단하게 묶은 뒤 그대로 늘어지게 두었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땋은 뒤 틀어 올려져 있었다. 밝은 금발 사이사이, 어두운 색의 루비가 늘어진 머리장식이 꽂혀 있어서, 조금씩 고개를 움직일 때 마다 빛을 반사하며 화려하게 반짝였다. 몇 벌의 드레스를 품에 안고 오던 여관이 그런 밀비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런 것은, 오랜만이시지요?”

“하루 정도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놔두자, 싶어서.”

꾸미는 것을 좋아하냐, 싫어하냐 묻는다면 밀비는 좋아하는 쪽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자리에 맞는 차림새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 자신이 마냥 풍류를 즐기며 느긋하게 살아가는 귀족일 뿐이었다면 모를까, 밀비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만큼 실용성을 중시했다.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쓸데없는 격식을 차리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과, 필요하다면 미용 시중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유연함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밀비는 가문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동궁의 황제가 될 후계로 뽑힐 수 있던 것이다.

“‘서쪽’을 신경 쓰고 계신가요?”

“안 쓴다면 거짓말이지.”

숨길 것도 없는 솔직한 대답이었다. 제국은 초대 황제의 고명顧命을 이어받아 두 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특이한 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두 개의 황위는 초대 황제의 자녀이자 그 뒤를 물려받은 두 형제의 가문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고 있었다. 초기에는 황제가 자신의 직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가문의 범위가 넓어지자 황제는 결혼을 하지 않고, 가문은 부모와 관계없이 적당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모아 황제의 후계에 걸맞게 길러내어 뽑았다. 밀비도 그렇게 자라 황위를 손에 넣은 이였다.

황좌의 양위는 두 황제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따로 의논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양쪽 가문에서는 암묵적으로 비슷한 또래의 이들을 황제로 내세웠다. 갑작스러운 병사, 혹은 사고가 있어 한 명의 황제만이 남아있던 때도 더러 있었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음은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다. 바로 전 대의 황제들은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차이를 둔 탓에 밀비가 황위를 기다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꼭두각시 같은 것엔 신경 쓰지 않으실 분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동궁의 황제가 쇠약해 쓰러졌을 무렵부터 가문 내의 어린 아이들을 뽑아 미래의 황제를 준비하던 밀비의 가문과 달리 ‘서쪽’이라 불리는 집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동궁의 황제가 죽고, 서궁의 황제가 쓰러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무렵에야 그들은 황제의 후계를 내세웠다. 제국의 남쪽에 살던 백작 가문의 아들이라고 했다. 황가의 피가 이어진 것이 맞는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제도帝都의 정치와는 영 떨어져 있던 가문이었지만 누구도 토를 달진 않았다. 적당한 장기말을 준비하지 못한 서쪽에서 입맛대로 주무를 황제를 내세운 것이다. 힘겨루기를 할 대상이 눈 앞의 황제이건 그 뒤의 가문이건 동궁의 황제로서 밀비가 취해야할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꼭두각시 보다는, 인형사 쪽.”

과연. 밀비의 대답에 시종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선별해 온 드레스를 펼치듯 밀비에게 보여주었다. 짙은 파랑과 빨강. 두 벌이었다. 금색의 드레스는 살펴보기도 전에 옷자락만 보고 제외시켰다. 위엄을 드러내는 것에 금색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싶었지만 선명한 금발에 금빛 드레스라니. 어딘가의 졸부 집안 자제도 아니고. 밀비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붉은색의 드레스를 살폈다.

붉은색은 ‘동쪽’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었다. 종종 겉치레(라고 밀비는 생각했다.)가 필요한 장소에 입고 가는 의상의 색도 대부분이 붉은색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대관식. 가문의 새로운 얼굴을 소개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인만큼 붉은색의 옷을 입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밀비는 바라보던 드레스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여지껏 눈길도 주지 않던 파란색 드레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걸로.”

*

몸 치장을 마치고, 의상을 갖춰 입었음에도 대관식은 아직이었다. 황족으로서 황궁을 드나들 수 있던 어릴 적 부터 생각하는 것이지만 황궁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쓸데없이 기다리게 하는 시간이 길었다. 밀비는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대기실’을 살폈다. 무언가 세련된 이름이 붙어있는 방인 것 같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역대 황제의 초상이 벽에 붙어 감시하듯 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이 빛에 바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창문은 작게 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커튼을 쳐 놓은 탓에 살짝 벌어진 천의 틈으로 빛만 뿌옇게 번졌다. 이쯤 되면 감옥이지. 밀비가 웃으며 발을 까딱였다. 지루해.

전하.

가벼운 노크소리에 이은 시종장의 목소리. 느슨하게 앉아있던 밀비가 눈을 치켜 떴다.

하디 님의 방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들여보내.”

밀비의 부름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찾아온 이는 문이 열린 ‘대기실’을 목도하자 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어두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밀비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 허리를 굽혀 밀비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깨 위에 얹어진 붉은 망토가 움직임에 따라 검은 정복 위로 흐른다. 처음 보았을 때, 수습 기사용의 어설픈 제복을 입고 있던 것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었다. 딱히 얼굴을 보고 뽑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서쪽의 황제가 데리고 다닌다던 ‘검’에도 지지 않을 모습이어서 밀비가 만족스레 웃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도 그만두겠다는 소리 하러 온건 아닐테고.”

“청하면 들어주실겁니까?”

“물론 아니지.”

산뜻한 대답이었다. 예상했다는 듯 하디는 실망한 기색도 없이 무덤덤한 얼굴이다. 황제의 호위를 맡은 기사가 되었음에도 하디에겐 어떤 자부심도 없었다. 황제나 제도帝都의 귀족들과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황궁의 기사단에서 내리는 기사의 작위를 얻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던 이였으니 당연했다. 능력도 그에 걸맞게 소박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일이지만, 그의 능력은 감춘다고 해서 쉽게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밀비 뿐만 아니라 많은 귀족들이 그를 탐냈지만 미래의 황제에게 맞설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선택 받은 기사 본인만 제외한다면.

밀비의 제안에도,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기사를 보며 한동안 황궁 내가 소란스러웠다. 밀비로서는 그냥 보내줘도 상관없는 상대였다. 가문에는 밀비를 위한 인선人選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랜 소꿉친구를 호위로 들인다는 서궁의 황제처럼, 황제는 오래 알고 지낸 이를 곁에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밀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마음에 든 것은 손에 넣어야 했다. 황위에 비하면야 사람을 얻는 일은 훨씬 쉬웠다.

“확인하러 온 것 뿐입니다.”

내키지 않은 듯 굴고 있지만, 세심하게 상태를 살피는 점이 마음에 든다. 밀비는 그가 확인하러 온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밀비가 했던 ‘약속’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약속을 했기에 밀비는 그를 곁에 둘 수 있었다. 서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어서 밀비는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디 또한 더 말을 얹는 것 없이 가슴에 손을 얹고 약식의 경례를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 참 그렇지.”

기사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시종에게 맡겨 둔 것이지만, 대관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본인이 찾아왔으니 마침 잘된 일이었다. 시종장 있나? 밀비가 목소리를 높이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며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하디는 여기에 있으니까, 이쪽으로 가져오라고 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명령에 하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종장은 곧, 밀비가 명령을 내렸던 시종과 함께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밀비에게 허리를 깊이 굽혔다가 옆에 선 하디를 보고 화들짝 놀란 듯 붉은 비단에 감싸인 것을 내밀었다. …검? 묵직한 금속의 느낌에 하디가 밀비를 돌아보자 밀비는 말없이 풀어보라는 듯 턱짓했다. 수습기사들의 검을 손질하던 대장장이에게 물어 특별히 맞춰 주문한 것이었다. 장식이라고는 검의 손잡이에 큼직하게 박힌 푸른색의 보석이 전부인 것 처럼 보이는 검이었다. 수수해보이지만, 의식용으로 진상 받은 자신의 검과 길이만 다를 뿐, 검 집이며 검 날에 새겨진 문양까지 똑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금 더 화려한 것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밀비의 나이트는 그를 대신해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같은 모양인 것으로 충분했다.

“당신의 검이야.”

“길이는 어떻게 맞추신 겁니까?”

“제국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의기양양한 밀비의 태도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했지만, 하디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낡은 검을 통째로 빼내어 들고는 밀비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밀비가 그것을 받아 드는 것과 동시에 열린 문 사이로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 보였다. 하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수도사를 끌고 온 주교가 입을 열었다. 낯익은 얼굴에 밀비가 미소지었다. 가자. 밀비가 앞장섰다. 그의 뒤를 나이트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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