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탓에 제국의 여름은 주변의 국가들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라지만, 남쪽에 맞닿은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찌는 듯한 더위는 심해져갔다. 더워. 들이마시는 공기의 온도가 제도帝都와는 확연히 달랐다. 위로는 형이 있어 따로 물려받을 영지가 없는 귀족 가의 차남, 관직에나 진출해 가문에 도움이 될만한 인맥을 쌓으라며 쫓기듯 상경한 제도였다. 짧은 휴가 때 마다 고향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고 오는 이들과 달리 제도 근방에 별장을 마련해 지내던 모로다. 그만큼 제도의 기후만큼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고향의 날씨가 달갑지 않았다. 형이 작위를 물려받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없어 내려오지 않았던 고향이지만 내려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올해는 고향에 내려 올거지?
오랜만에 도착한 편지의 첫머리는 다짜고짜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어렸을 적, 같은 선생님 아래에서 글씨를 배워 형태는 상당히 비슷하지만, 버릇이나 전해지는 느낌은 상당히 다른 정겨운 필체였다. 꾹꾹 눌러쓴 편지는 근황이며 주변의 얘기가 구구절절 이어지고 있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했다.
마차에서 내린 모로모로가 재킷 안에 편지를 넣었다. 저택에 초대받았을 땐 들고 간 초대장을 보이는 것이 예의지만 편지를 가져온 것은 그저 가지고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곳은 편지의 내용만큼이나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다. 문지기가 그를 발견하자 고개를 숙였다. 모로모로 님이 오셨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저택의 현관이 열렸다. 몇 년 만일까. 익숙한 얼굴의 집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로모로 님.”
“오랜만이야.”
“마지막으로 뵈었던 게 전 주인님의 장례식이었던가요. 몰라보게 훤칠해지셨군요.”
“집사장은 그대로네.”
안에 있어?
가벼운 안부 인사 후, 다짜고짜 이어진 질문이었음에도 집사장은 모로모로가 무엇에 대해 묻는지 제대로 알아들은 듯 했다. 예. 짧게 대답한 집사장이 먼저 가라는 듯 허리를 굽혔다. 안내는 필요 없었다. 모로모로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빛이 쏟아지는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장소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키가 자란 탓인지 둘러보는 시야가 상당히 달라져 있어서 모로모로는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이제 올려다볼 필요 없이 눈 앞에 보이는 초상화들을 보며 걷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설마, 아직도 자는 건 아니겠지.”
“아직 아침 시중이 덜 끝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일어나 계십니다.”
“아침?”
뻔뻔한 얼굴로 대답하는 집사장을 보며 절로 헛웃음이 흘렀다. 보통이라면 점심을 끝내고 차까지 가볍게 마셨을 시간이다. 아직도 도련님 취급을 하며 싸고 도는 것이 못마땅하다.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은 어린 가주를 감싸고 도는 기분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가문의 주인은 어엿한 성인이었다. 사교계라는 생태계는 어리광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모두가 그렇게 어리광을 받아주도록 둘 수는 없었다. 모로모로가 짧은 한숨과도 같은 충고를 했다.
“…적당히 해.”
“알겠습니다.”
과연 지금의 대답이 얼마나 지켜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로모로는 그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나이는 두 살이나 많지만 그는 관직도 받지 못한 차남, 아직 ‘도련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식으로 작위를 이어받은 백작의 일에 말을 얹는 것은 소꿉친구이기 때문에 허용된 선이었다.
몇 년 만이었지만, 모로모로는 헷갈리는 일 없이 살롱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문 앞에 서자 뒤따르던 집사장이 문을 밀어 열어주었다. 모로모로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이 상당히 낮아진 기분이었다. 차를 올리라고 할까요? 의례적인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마실 것은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식사도 하지 않고 살롱으로 뛰어 올 백작의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아침 시중이 덜 끝났는데도 무작정 뛰어온 모양인지, 살롱으로 들어온 백작은 어설픈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매지도 못한 상태로 목에 걸친 리본 타이와 커프스도 제대로 달지 못한 소매 끝. 손님을 맞이할 만한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모로모로는 따지는 일 없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보였다.
“진짜 왔네?”
“고귀하신 백작님의 초대라서.”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백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모로모로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부담스러울만한 시선이지만 모로모로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어 반쯤 달다 만 커프스를 똑바로 달아주었다. 아. 그제야 자신의 자림을 알아챈 것인지 백작이 황급히 타이를 맸다. 균형이 맞지 않는 리본이었지만 모로모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좀 앉아. 주인이라도 된 양 의자를 권하자 백작은 투덜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가와 입꼬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몇 년 동안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했잖아. 안 올 줄 알았지.”
모로모로가 수학修學하고 있는 곳은 오래 전, 제도의 귀족들이 영지를 이어받지 못하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세운 학원이었다. 영지를 이어받지 못하는 귀족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가지다. 황실의 관리가 되거나, 기사나 사제가 되는 것. 황실에서 직접 선별하는 기사단이나 가문 내에 사제가 있지 않은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와 달리 학원은 학력과 적당한 재력만 있으면 입학이 가능했기에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바쁘긴 했지.”
경쟁이 제법 치열하긴 했지만, 모로모로는 공부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오지 않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댔던 것 뿐이다. 쫓아내 듯 올려보낸 가문의 사람들이야 그가 제도에 머무르며 다른 가문과의 친교를 쌓는 편이 나았기에 알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순진한 그의 친구는 몇 년 동안이나 그의 말을 믿은 모양이었다. 핑계였다는 걸 알면, 아닌 척 서운해 할 것이 분명했다. 좋은게 좋은거지. 딱히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아서 모로모로는 그가 착각하도록 두었다.
티 세트가 담긴 웨건이 살롱 안으로 도착하자,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뭐야? 테이블 위로 자연스레 놓이는 두 개의 잔에 치즈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걸 부탁했던 기억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보며 모로모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집사장에게서 찻주전자를 받아 들었다. 내가 할게. 차 시중을 따로 두었던 적은 없었기에 집사장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따라온 사용인들과 함께 물러났다.
“이번 여름 방학은 여기서 보내는 거야?”
당연하다는 듯 묻는 얼굴을 보며 모로모로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얼굴만 보고 제도로 갈 생각이었는데, 하는 대답은 차와 함께 흘려 넘겼다. 좋아하는 과자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들뜬 이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상대가 상대다. 적당한 때에 급한 일이 있다며 올라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로모로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치즈펠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사냥이라도 갈까?”
“네가 사냥?”
“내일은 손님도 없고. 성 밖에 안 나간지 좀 되기도 했고.”
흐음. 평소 야외 활동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모로모로는 눈을 가늘게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자신과 함께 놀러 나가기 위한 핑계를 만들고 있음을 안다. 모른 척 하고 넘어가 줄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은 놀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것이 모로모로의 작은 심술이었다. 게다가, 누구 덕분에 휴가 기간동안 이 더운 곳에 눌러앉게 생기기도 했고. 모로모로가 일부러 콧대를 누르며 피곤한 얼굴을 했다.
“조금 피곤한데.”
“아… 그럼 가볍게 정원 산책이라도? 아님 시장 좋아했으니까…”
당황한 듯 허둥거리며 새 계획을 내놓는 모습에 모로모로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그제야 놀리는 것임을 깨달은 모양인지 치즈펠이 잼 나이프를 쥐고 있던 손을 붕 휘둘렀다. 떨어지잖아. 주의를 주고 있었지만 이미 웃고 있었기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실례합니다.
이어지는 말을 끊는 노크에 놀란 얼굴을 한 치즈펠과 달리 모로모로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랜만의 휴식 시간을 이렇게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의 본가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 곳은 백작의 자택이었다. 들어와. 황급히 입가를 정리하는 치즈펠을 보며 모로모로가 표정을 풀었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집사장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대 백작 부부가 전염병으로 나란히 명을 달리했을 때에도 슬퍼했지만 당황하는 일 없이 새 주인을 위한 일을 하던 그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방해를 받은 짜증 보다도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집사장이 두 사람의 방해를 해서 당황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치즈펠에게 다가온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제법 힘을 주고 있던 것인지 종이 끝이 구겨져 있었다. 조심스레 건네진 봉투. 봉인된 밀랍 위에 찍힌 인상이 심상치 않아서, 백작과 모로모로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페이퍼 나이프를 건넨 집사장이 긴장한 목소리로 첨언했다.
“황실로부터 온 것입니다.”
받아드는 치즈펠의 손끝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봉투의 끝을 찢어냈겠지만 그는 신중한 얼굴로 봉투의 위를 조심스레 잘라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모로모로는 재촉하는 일 없이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편지를 읽은 치즈펠이 말없이 그것을 모로모로에게 내밀었다. 받아 든 모로모로가 편지를 훑었다. 들어오는 단어는 하나 뿐이었다. 황제. 내일의 계획 같은 것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
서쪽의 황제가 쓰러졌다. 제도에 도착하자 마자 어딜가나 그 이야기로 소란스러웠다. 학원 내도 마찬가지였다. 황실과 관련되어 있는 탓에 황실에 대한 소문은 유난히 빨랐다. 동쪽의 황제가 죽은 것이 2년 전이었다. 이미 오래 전, 그 자리를 이어받기로 내정되어 있는 후계에 대해서도 학원 내에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있었다.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은 서쪽의 차기 황제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대를 거듭하며 황족이라 칭해지는 가문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고는 하나 사람들은 익숙한 몇 가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물론, 그 중에 서쪽의 차기 황제가 속한 가문은 없었다.
학생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마련된 학원 내의 살롱은 잡담으로 소란스러웠다. 모로모로와 치즈펠이 마주 앉은 자리만이 고요했다. 같이 있을 때면, 대화를 주도하던 치즈펠은 잔뜩 얼어 있었다. 학생들과 손님의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이 걱정스레 치즈펠의 상태를 물어오는 것을 물린 것은 모로모로였다. 치즈펠은 하루 뒤면 황궁으로 가 황제를 만날 예정이었다.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을 테다. 황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치즈펠은 황제는 커녕 제도에 제대로 와 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이였다. 다른 황족들을 만나는 일은 늘 있는 귀족들을 만나는 일이기에 그럭저럭 처리한 듯 싶었지만 만나야 할 것이 황제라고 한다면 긴장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누구 앞에서나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모로모로 조차도 자신이 황제를 만나야 한다면 차를 마시다가도 체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긴장한 치즈펠을 그대로 둔 채 가지고 온 과제를 살폈다. 분명, 눈으로는 글씨를 읽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야겠지?”
“안가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내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
세력 싸움이나 텃세 같은 건 모른다는 듯 마냥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치즈펠 또한 귀족이었다. 자신의 입장 정도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좀체 볼 수 없었던 모습에 모로모로가 쓰게 웃으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몇 년 동안 차기의 황제를 키우기 위해 교육시켜온 동쪽과는 달리, 서쪽에서는 그저 본인들의 영향 아래에 다루기 쉬운 말을 준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못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대체할 수 있는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내가 하는 걸로 정해지면 다른 사람들은 힘든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너는 해도 되고?”
“나는 뭐.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도 아니고,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국 권력의 정점에 군림한다고 하는 자리였지만, 모로모로는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황제가 부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배우자를 들일 수 없는 탓에 자식은 커녕, 그나마 남아있는 가족과도 황실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보는 것이 전부. 황족 중에서도 일부러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 차기 황제 후보에 오르는 일을 피하는 경우도 더러 있을 정도니, 부러워 하지 않는 것은 모로모로만 있는 것이 아닐 터다. 얻는 것이 크다고는 해도 어지간히 감내하지 않고서야 견디기 힘든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치즈펠의 모습에 모로모로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살롱의 폐쇄시각이 되어 떠나는 치즈펠은 그렇게 말했다. 다음,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었다. 기약 없는 약속을 기다리는 것은 모로모로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모로모로는 그 날, 학원에 자퇴서를 냈다. 황궁에 들어가는 방법은 관리가 되는 것 말고도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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