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MATE

CHECKMATE

01.

새 황제들이 즉위하고 첫번째로 맞는 겨울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냉기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누가 잊어버리고 간 모양인지 잘 닦인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곤란한데. 내 팔이 닿기에는 턱없이 높은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잘 정돈된 책상과 그에 맞춘 의자 하나뿐 사다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있을 리가 없지. 사용인들은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되, 자신들의 존재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이 실수라니. 고된 일을 하는 이들에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폐하의 자잘한 일상 시중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일단 그것도 정리가 끝나야 하지. 정무를 보기 좋은 환경으로 집무실을 준비하는 것이 먼저였다. 겨울바람이 쌩쌩 들이치는 집무실은 나라도 사양이다.

어쩔 수 없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의자를 빼냈다. 고급이긴 하지만 황궁에는 흔한 의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고 해도 이것은 황제가 앉는 옥좌였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끝내야 했다. 그래도 차마 신발을 신고 밟을 용기는 없어서 나는 얌전히 구두를 벗었다. 마음의 준비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의자에 발을 얹으려는 찰나,

“날씨가 많이 추워졌군요.”

집중하느라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숨까지 멈춘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단순히 받침대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황제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중죄다. 같은 처지인 시종들 사이에서나 모른 척 눈을 감아준다는 것이 통했겠지만 상대는 동의 기사단장. 측근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호락호락 넘어가주지는 않을 것이다.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내게 떨어질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단장, 하디 님은 말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왼쪽 허리에 찬 검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폐하께서 직접 헌상하신 검이라지. 나 같은 피라미도 저 검에 죽는걸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날 지나쳐간 하디 님은 열린 창문을 닫고 있었다. 의자가 필요했던 나와 달리 가볍게 팔을 뻗는 것 만으로도 창문이 닫혔다. 조금 뒤집어진 정복 망토를 바로 정리한 하디 님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무심결에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잘 닦인 유리 같은 눈. 책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곧 폐하께서 오십니다.”

짧게 말한 그는, 내가 빼냈던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벗어 둔 구두를 허겁지겁 신었다. 정무를 돕는 제관에게 폐하의 도착을 알리러 가야했다. 집무실을 나서던 나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02.

황궁의 공기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오전의 조의에서 서황제의 암살 계획이 밝혀진 탓이다. 밝혀낸 것은 동궁의 황제를 위시한 세력들이었다. 주모자는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 외의, 암살 계획에 관련된 사람들은 적법한 절차를 밟아 형벌을 내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덕분에 정전正殿이 피바다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어지럽혀진 정전의 뒤처리를 해야 했을 이들에겐 한 명이나 여럿이나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암살 계획이 있었다고는 해도 일개 시종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는 그다지 와 닿을만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덤덤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황궁 내의 가십에 대해 떠드는 것 보다도 해야 할 일이 먼저다. 품 안의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의 정무가 끝날 시간이었다. 준비와 마찬가지로 뒷정리 또한 내 몫이었다.

폐하는 깔끔한 성격이었고 일을 하는 도중에도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 정리할 것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할 일이 많지 않아서 편하기는 한데…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마침 떨어진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굴러간 모양이다. 창문 아래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책상 위에 올려 두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시종장의 예고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은 뒤 고개를 숙였다.

“어디에 떨어뜨렸나 했더니.”

언제나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 예상대로였다. 언제나 집무실에 퍼져 있던 잔향보다도 더욱 진한 향이 가까워진다. 사뿐한 걸음 뒤로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발소리에 나는 숨을 죽였다. 찾으셨습니까? 목소리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늘 듣던 부드럽지만 무감정한 것과는 달랐다.

“잔심부름 같은 것은 제게 맡기셔도 됐을 텐데요.”

“기사님이 옆에 없으면 진정이 안되는 몸이어서 말야.”

“수양이 부족하신 듯 싶습니다. 이 참에 검술은 그만 두시는 게 어떨지.”

“섭섭한 소리를 하네.”

주군과 가신이라기 보다도 장난스러운 친구 사이 같은 대화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집무실을 떠났다. 남겨진 나는 멍하니 집무실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아니 하디 님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그런 말도 하는구나.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03.

보통 때와 달리 죄인들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누구도 아닌 황제의 시역을 꾀한 이들이니 그럴 만 했다. 처형은 두 황제가 직접 자리할 정도로 커다란 일이 되어 있었다. 황제들 뿐 아니라 제도 내의 내로라하는 귀족들과 교회의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자리할 수 없었지만 황제의 자잘한 심부름을 할 시종은 예외였기에 나는 단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나 이외에 서의 황제가 데려온 시종 뿐이었다. 황제와 기사들은 단에 올라 처형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흥거리를 구경하러 나온 것 마냥 여유로운 폐하와 달리, 서의 황제는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암살의 대상자였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하디 님의 검에 목이 날아간 주모자는 서황제 뿐 아니라 ‘왕의 검’과도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던 자라고 들었다. 서황제의 세력은 근처의 사람들을 솎아내지 못할 정도로 기반이 약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측근이라 불리던 이들이 줄줄이 처형장으로 끌려 나와 참수당했다. 기계적인 살육이었다. 집행자의 칼날에서 쉴 새없이 피가 흘렀다.

“쓸만한 개를 들였다고 해서, 방심하고 있다가는 당신도 당할 겁니다. 동황제.”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는 단상 위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지만 저주와 비슷한 폭언을 퍼붓는 모습에 나 뿐만 아니라 처형장을 에워싸듯 자리 잡은 귀족들도 아연한 얼굴을 했다. 더 이상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집행자의 칼이 그의 목을 쳤다. 다들 폐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귀족들 모두, 서황제의 기분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계속하라는 손짓이 떨어지자 죄인이 끌려 나왔다. 내려다보는 폐하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개, 라니 너무한데.”

과장된 말투지만 목소리는 차가웠다. 귀족들에게는 닿지 않을 크기였다. 서의 황제 마저도 기색을 살필 정도로 언짢아 보이는 폐하의 모습에도 하디 님은 담담했다.

“신경 쓰이십니까?”

“내가 들인 건 개가 아니니까.”

“하는 일이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이전의 집무실에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04.

처형 다음날, 동궁은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암살 계획이 밝혀진 날에도 서궁의 일이라며 쉬쉬하던 시종들이 궁의 이곳저곳에 모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본래라면 시종은 함부로 궁의 내부를 돌아다녀서는 안되지만 폐하는 피로를 이유로 정무를 미룬 채 침전에 칩거 중이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궁은 시종들의 차지였다.

이곳저곳, 이라고는 했지만 시종들은 모두 창가에 서있었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는 정원은 황량하다고는 해도 잘 다듬어져 있어 운치가 있지만 이렇게 소란을 떨며 구경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을 끈 것은 정원이 아닌, 동의 기사단장이었다. 기사단장의 동궁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명령이 있었다. 벌써 두시간 째 였다. 정복은 빗물에 푹 젖어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그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얼굴로 꼿꼿이 정원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폐하의 명령에 동황제도 겁을 먹은 탓에 미쳐가고 있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오후 정무를 해내는 모습을 보이자 불온한 소문은 금세 사그라 들었다. 나는 명령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세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처형장에서의 대화 때문일 것이라고 홀로 확신하고 있었다.

구경하는 것도 질린 탓인지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아니, 하디 님이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구경꾼이 있었던 것이다. 할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취침 시각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날 때 까지, 그는 계속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지독한 고집이었다.

05.

나흘 째가 되어서야 폐하는 내렸던 명령을 거두었다. 이틀 째부터 제관들은 입을 모아 기사단장의 황궁 출입을 허가해달라 읍소했다. 정무를 보는 황제의 곁에 기사단장이 없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암살 계획이 밝혀진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 요청조차 없었더라면 폐하는 만족할 때 까지 기사단장을 정원에 세워 두었을 것이고 기사단장 또한 그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융통성이 없는 주종의 모습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하디 님은 젖은 정복을 입은 채 동궁 안으로 들어섰다. 나흘 내내 잠도 자는 일 없이 겨울비를 맞고 있던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한동안 정체에 대한 여러 소문이 돌았지만 직접 그에게 물을 만큼 배짱이 좋은 사람은 없었기에 소문은 그저 소문인 채 돌아다녔다. 다음 해 여름, 전염병에 걸린 것을 이유로 황궁을 나오기 전 까지도, 그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지 못한 채 나는 황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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