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elier’s principle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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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인근 프랜차이즈 카페. 그리고 지금은 어디든 사람이 붐비는 점심시간.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하며 때우고 거리로 나오니 육안으로 확인되는 모든 카페에 사람이 포화되어 있었다. 연구실에 돌아가서 할 일을 잠시 생각했다. 해야 하는 일은 있었지만 급한 일은 없었다. 카페에서 줄을 서서 시간을 버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았다.

오더 앱은 그의 음료가 14번째로 준비되고 있다는 언질을 남겼다. 그러려니 했다. 사람이 많은 카페 한구석에 서서, 오전 랩미팅에서 석사 애들이 가지고 왔던 논문을 대충 훑어보았다. 흥미가 가는 접근이 있었다. 하지만 메소드에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초록을 넘어 본문과 결론까지 읽어보았지만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다. 시간이 남는다면 연구실에서 재현해 볼 법하다.

그의 음료가 8번째 순서까지 이르렀을 때, 바로 옆, 어깨 뒤에, 남자가 한 명 와서 섰다. 그 역시 테이크아웃을 기다리고 있는 걸 테다.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이미 매장 손님들이 전부 점유하고 있으니까.

시선이 느껴졌다. 아는 사람인가 싶어 제 어깨 뒤로 고개를 돌린다.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아니, 분명 모르는 얼굴이지만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남자가 대뜸 물었다.

생명과 학생인가?

생명과 학생이라고 어림짐작하는 걸 보니 논문을 읽은 모양이다. 휴대폰 액정이 작아서 눈이 아팠을 텐데.

"아니요."

많이 쓰지 않아 잠겨 있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럼 약대?"

"화학입니다."

그러자 남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 역시 같은 테마로 일본에서 석사 학위를 땄지만, 그 때는 따지자면 약대 내지 보건대 소속이었으니까.

"연구 주제가 특수해서 일단은 화학과에 있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한테 참 별 얘기를 다 한다 싶었다. 말을 마치고 가만히 남자를 바라봤다. 더 할 얘기가 있냐는 시선을 주었다.

그러니 남자는 조금 처진 눈을 휘면서 웃었다.

"그거 신기하네요. 독성학을 화학과에서 다루는 건 처음 보네."

독성학이라는 학문을 국내에서 본 적은 있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남자는 뒷말을 잇는다. 제 몫의 음료는 아직 4번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혹시 이 근처 대학 학생이에요?"

이 근처에 대학이 한두개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대학이라면 특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 학교에서 몇 년 째의 박사 과정을 지내고 있다. 사실대로 말할까 어쩔까를 재고 있으니 남자는 또다시 입을 뗀다.

"나도 그쪽으로 가거든."

"아, 네."

"화학과면 같은 건물이겠네. 난 생명과에 볼일이 있어요. 오랜만에 와서 길을 안 잃을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되는데, 동행 좀 해 주지 않을래요?"

"오랜만이시라는 건?"

"거기서 석사를 했어요."

"아하......"

남자의 겉면을 슬쩍 훑는다. 나이는 마흔이 좀 넘었을까. 반을 들어올린 새카만 머리에는 새치가 듬성듬성 났다. 안경줄이 달린 안경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몸에 걸친 캐주얼 정장은 선이 딱 떨어져 깔끔하다는 인상이다.

문득 자신의 지도교수를 떠올린다. 연배가 대강 비슷할 것도 같다. 어쩌면 석사도 비슷한 시기에 했을지 모른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음료가 준비되었다는 알림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남자의 음료도 기다려보기로 했다.

11월의 바람은 차다. 거리에는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들의 열기로 바람이 덥혀질 법도 하건만 유체의 흐름이라는 건 의외로 날래서, 여전한 찬 기운을 이끌고 카페에서 나온 남자 둘의 뺨을 할퀴기나 한다.

그는 제 몫의 음료 한 잔만을 들고 있다. 남자는 두 잔을 종이 트레이에 담아 들었다. 방문할 상대를 위한 것인가 보다.

"뻔하다면 뻔한 산학협력 공동연구인데, 생각해 보니 아는 녀석이 거기서 교수를 하고 있는 거 있죠."

석사 시절에 같은 연구실에 있었던 동기가 유학을 다녀와 박사 학위를 따더니 교수직을 하나 꿰차고 있다. 우연찮게도 그의 연구실과 함께 공동연구를 하게 되었고, 친교를 다질 겸 하여 얼굴을 보기로 했다, 라고.

"그럼 선생님도 학교에 있으십니까?"

"아뇨, 나는 기업체예요. 크지는 않은 회사에서 대표를 맡고 있죠."

횡단보도 너머로 학교의 정문이 보였다. 언제쯤이면 학교 정문을 보지 않는 하루가 올까. 그때의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는 잠시 다른 생각을 흘린다. 사고의 전환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업이 쉽지는 않은데 한 번 벌려놓으니 재미는 있더라고요."

남자는 말이 많았다. 타고나기를 달변가로 타고난 것 같았다. 이런 류의 사람이라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숱하게 봐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연구실에도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런 이들을 대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데, 적당히 추임새만 넣어주면 된다. 듣고 있다는 시그널만 흘려주면 그들은 신이 나서 끝도 없이 말을 한다. 일종의 인간 라디오인 것이다.

물론 자연대 건물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꺼질 라디오다. 귀찮지만 가는 동안 귀가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 전원을 켜 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남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메시지가 온 것 같았다. 그는 무심코 시선을 남자에게로 돌린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오뚝한 콧대의 옆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는 기시감의 이유를 알아챘다.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그래...... 지난 여름에 보았던 사람이다.

덥고 습했던 그 여름에, 카페의 창문 너머로 보았던.

"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샜다. 남자는 왜 그러냐는 듯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잊고 있었던 잡무가 떠올라서요. 허울 좋은 이유를 댔다. 남자는 웃으며 시선을 휴대전화로 떨어뜨렸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물론 남자가 휴대전화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정체를 파악한 그에게는 소중한 사색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여름날 보았던 조사원과 조사 현장을 생각해 낸다. 그는 제 입으로 불륜 조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카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가 알고 있던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현장이 불륜 현장이라고 자연스럽게 확신한 이유는, 그가 알고 있던 그 사람에게는 애인이 있고 그런 그 사람이 지금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는 그의 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한 손에 커피 두 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자연대 건물로 향하고 있는 남자는, 불륜 현장에서 보았던 불륜 상대임에 틀림이 없다. 그 때도 안경줄이 달린 안경을 쓰고 있어 패션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일이라는 거 번잡하지 않아요?"

메시지 전송을 마친 남자가 뜬금없이 물었다.

"번잡?"

"기껏해야 태어난 날일 뿐인데 축하받다니."

"뭐, 그렇죠."

생일이라는 단어에서 사고는 또다시 전환된다. 생일을 앞둔 연구실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냥 구성원도 아니고, 무려 교수가 그 당사자다. 며칠 전부터 그에 대한 자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교수가 생일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올해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며 틈만 나면 고민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일을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본 건 오랜만이었다. 아마 청소년기 이후로는 처음일 거다. 선물은 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흔한 말도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 생겨난 놀라운 변화였다.

"생일이세요?"

"그런 거 같네요."

남자는 아주 익숙하게 웃는다.

"축하드립니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까?

그냥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의 불륜 상대로 의심되는 남자에게......

아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불륜을 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하다. 심약하고 소심하고, 또 쓸만한 이동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계점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다. 아니, 그가 위치한 지리적 상황 그리고 처한 인간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한계점은 네 개까지 카운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불륜 상대가 아닌가?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무슨 관계인가?

퉁명스러운 조사원은 왜 구태여 불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는가?

그들이 단순히 친교로만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의 애정이 뒷받침된 관계이기 때문에?

자연대 건물의 입구가 보였다. 그가 일과를 보내는 연구실은 4층에 있다. 생명과 연구실이라면 아마 5층에 밀집되어 있을 거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길에 헤어지도록 하자. 점심시간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보단 계단으로 올라가는 편이 마음도 편하고 무엇보다 몇 배는 빠르다.

"명함 있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남자는 안경 뒤의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이쪽을 쳐다본다.

"물론이죠. 하나 드릴까요?"

"이것도 인연인데. 하나 주세요."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한 손으로 명함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건넨다. 

에스앤바이오로직스. 들어본 적도 없고 뭘 하는 사업체인지 짐작도 안 가는 이름이다. 명함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중앙 계단을 함께 오르던 남자는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바이오 분석을 주로 해요. 바이오 분석? 제약 관리 쪽인가. 아뇨, 하긴 요즘은 바이오 분석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쪽을 떠올리긴 하지만. 저희 회사가 주로 밀고 있는 건 DNA 쪽입니다. 아하, 그럭저럭 단기간의 전망은 있겠군, 이라고 그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천의 연구실이 있는 4층에 발을 딛는다.

"오랜만에 와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많이 달라지진 않았네요.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아, 그럼 나도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이름이요?"

"명함을 가져가셨으니까. 혹시라도 연락할 일이 있으면 좋잖아요."

"아......"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구태여 거절하기도 이상한 물음이다. 먼저 명함을 달라고 한 건 자신이니 더더욱.

커피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그는 입을 떼려고 했다.

순간 남자의 시선이 그의 등 뒤로 향한다.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다.

줄곧 미소를 띠었던 얼굴에 변화가 생긴다.

미소가...... 조소로 변하는 순간이다.

"당신......"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은 목소리다.

예감이 영 좋지 않아서 그는 벌렸던 입을 다문다.

뒤를 돈다.

끔찍한 표정의 지도교수가 서 있다.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힘써본다.

"교수님?"

대답은 없다. 눈동자를 굴려 맞은 편의 남자를 흘긴다. 조소로 물든 남자의 얼굴이 교수를 바라보고 있다.

"아는 사람이냐?"

교수가 물었다. 평소보다 톤이 하나 이상은 내려갔다.

머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는다.

"아뇨. 자연대에 볼일이 있는데 안내를 해 달라고 하셔서, 안내해 드렸습니다."

"볼일?"

"아는 사람을 만나신다고......"

"이런 데서 다 뵙네요."

남자가 능숙하게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교수는 가족의 원수라도 본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교수가 남자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동시에 당신,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형이 떨리는 목소리. 복도를 걷는 사람들이 한번씩 이쪽을 바라보고 지나간다. 큰 호기심은 실리지 않은, 적당히 재미있는 가십을 보고 지나가는 듯한 시선이, 악의 없는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그쪽하고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내가 선약이 있어서요."

연락은 그쪽 학생을 통해서 부탁해요. 방금 명함을 하나 얻어 갔거든. 이름이랑 연락처가 쓰여 있으니까 연락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남자는 청산유수로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줄곧 교수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한 곳에 집중된 눈동자가 떨린다.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 근육은 파리한 감이 있다. 가다듬으려 애쓰는 숨결이 마음과는 다르게 도통 진정되지 않는 것 같았다. 표정을 읽으려 했다. 실패했다. 분노와 절망이 분리하기 어려운 비율로 혼합되어 있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조차 어림할 수 없다.

교수의 몸이 일순 앞으로 튀어나간다.

그래서 그는 교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쪽을 돌아본다.

고개를 저어 주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이러면 안 된다. 학교 안이니까. 당신의 평판이 걸려 있으니까.

교수는 어딘가 허망한 시선을 해선 한순간 참고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점심시간의 괴사건 이후로 천영은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서천이 갓 사온 커피도 제 책상에 내려놓지 않고 연구실로 따라 들어가 캐물어도 대답다운 대답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나쁘다 못해 죽상인 안색으로 한숨이나 푹푹 쉬는 걸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오후 수업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네 시도 되지 않아 천영은 먼저 퇴근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는 자택으로 사라졌다.

서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역시 오늘은 별로 할 일이 없다. 천영을 따라 일찍 퇴근할까 싶다가도 처음으로 보았던 그의 우울한 모습을 떠올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는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 그저 답답하다.

책상 앞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본다. 그대로 눈을 감는다. 콧잔등을 짓누르는 안경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느낀다.

사건에 대해 생각한다.

사견에 대해 고민한다.

교수의 사촌동생이 그 음울한 추리소설 작가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교수는 서천이 자신의 사촌동생과 인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그런 정보의 불균형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있었다. 여태 써먹은 적은 없지만서도.

음울한 추리소설 작가는 바이오 분석 업체 사장과 만났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는 그것을 불륜 현장이라고 칭했다. 작가의 사촌 형인 교수는 사장과 사이가 아주 나쁘다.

마지막으로 교수의 책꽂이에는 너덜너덜해진 작가의 책이 꽂혀 있다.

정말 마지막으로 작가는 교수를 아니꼬워하는 것 같았다.

주어진 조건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각각의 조건에는 뻔히 보이는 연관성이 있기도 하고, 지금으로서는 짐작이 되지 않는 가려진 링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만 같아서는 교수를 쪼아 대답을 듣고 싶지만, 그의 상태를 보니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

십 년, 아니...... 십 년까지 갈 것도 없다.

오 년 전의 나였다면 그의 상태는 아랑곳도 않고, 오히려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해서는 그를 있는대로 들볶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실은 점심에도 교수에게 몇 번이나 질문을 했다. 저 사람은 누구며 무슨 관계고 왜 그런 반응을 보이신 거냐. 약간의 우회와 치장은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그런 내용이었다.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조금 뗐다가, 무언가 단념한 듯이 입을 도로 앙다문다. 가서 하던 일 마저 해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더 캐물었다간 당장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을 해선.

이게 가장 문제였다.

상당히 오랜 시간 얼굴을 마주했지만 그런 표정을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당황했다.

더 건드릴 수는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손을 뗐다. 발을 돌려 연구실에서 나왔다. 등 뒤에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다. 천장의 물결 무늬가 보인다.

연구실 안에는 그 외에도 사람이 몇 있다.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갖는 이는 없다.

한숨을 쉬어 보았다.

천영의 심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관점을 달리해 보기로 했다. 나 자신은 어째서 낮의 소란에 집착하고 있나?

단순한 흥미 본위인가?

그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흥미보다도 선행되는 것이 있을 텐데.

교수의 옆 얼굴을 눈에 담았을 때 깨달았던, 그......

쓰레기 봉투는 그를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한숨을 쉰다. 오늘 한숨을 대체 몇 번이나 쉰 거지, 생각하면서. 쓰레기를 그러모으려 무릎을 굽히니 생활 쓰레기 특유의 미묘한 쉰내가 난다. 천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뱉었다. 그렇다고 손을 물릴 수도 없는 일이다.

손가락에 걸리는 건 무언가를 닦아내는 데에 사용한 얼룩진 티슈와, 어젯밤에 먹은 기억이 나는 파이형 간식의 포장과, 영수증 선택 기능이 없는 키오스크가 줄줄이 뽑아낸 영수증의 찢어진 조각, 기타 등등. 아무렴 생활에는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들. 그러니 쓰레기통에 들어간 거겠지만.

쓰레기를 다시 욱여넣은 종량제 봉투를 꽁꽁 묶는다. 이번에는 엎어지지 않았다. 묶은 것이 풀리는 일도 없었다. 한숨. 이 시츄에이션에서 벌써 세 번째.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몸을 혹사시켰으니 그럴 수밖에.

학교에 있자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억지로 퇴근했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혼자 있기도 참 뭐했다. 집 근처까지 와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천영은 차를 늘 세우던 곳에 세우곤 동네를 무작정 돌아다녔다.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줄곧 사촌동생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불과 십 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심성이 유약한 사촌동생이 어느 날 사이비 종교에 들어갔다. 천영은 기가 막혀서 화를 냈다. 그런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 당장 나오라고 몇 번을 쪼아댔다. 얼마 후 사촌동생은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기는 했다. 문제는 종교보다 더한 혹을 달고 나왔다는 것이다.

반 년 뒤 그의 친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생이랑 연락이 되지 않는단다. 천영도 일이 바빠 사촌동생의 일에 힘을 쓸 여력이 없던 시기였다. 동갑내기 사촌은 동생이 혼자 살던 집까지 찾아가 보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집 안에 사람은 없고. 현관 문고리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있기나 하고.

천영도 그 즉시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하는 무기질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통화 연결음은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사촌동생 쪽에서 제 번호를 차단했다는 의미다.

그 뒤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사촌과 함께 그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경찰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정 내 단순 불화로는 도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따위의 귀찮음이 섞인 대답.

사촌동생이 살던 집 근처의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어렴풋한 행선지를 알아냈다. 친하게 지내던 형이 하나 있는데, 요즘은 그 사람이랑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형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걸 보니 같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하던데. 주말이면 이 앞 카페에서 자주 보이니까 만날 수 있지 않으려나.

그리고 천영은 그 남자와 조우한다.

"혹시 도진이 형님 되시나? 정말 닮으셨네요."

느물느물 웃으며 내려다 보던 꼴을 아직도 기억한다.

"도진이랑 만나고 싶다뇨. 염치도 없이."

진실되지 않은 매도의 말을 기억한다.

잊을 수가 없는 상판이다.

그렇게 발이 아프도록 동네를 돌고 도니 생각이 정리된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단순히 날씨가 추워 머리가 물리적으로 식은 건지도 모른다.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시간은 어느덧 여섯 시에 가까웠다. 서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니 내용물이 가득한 쓰레기통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정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쓰레기 봉투를 꽉 묶고 나니 더 이상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베란다에 두고 내일 버리든가 할까.

거실 바닥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허기가 느껴졌다.

여섯 시가 넘었으니 그럴 만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그 외에 한 사람 뿐이다.

"뭐 하세요?"

귀가하자마자 입에 담을만한 말은 아니다. 적당한 말로 받아치기 위해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흰색 모직 코트를 입은 서천이 신발을 벗는 모습이 보인다. 한쪽 손에는 알 수 없는 가게의 종이 봉투가 들려 있다. 적어도 천영이 잘 아는 프랜차이즈는 아니라는 의미다.

"그건 뭐냐?"

"먹을 거요."

불성실한 대답에 천영은 잠시 미간을 일그러뜨린다.

"슈톨렌이요."

"슈톨렌?"

"이거 보세요. 어차피 말씀 드려도 모르시잖아요. 빵이에요, 빵."

천영은 드디어 몸을 일으킬 추진력을 얻었다. 그가 제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거나 말거나, 서천은 종이 봉투를 식탁에 내려놓는다. 빵이 들어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숙성시키면서 썰어먹는 빵이에요."

믿기 힘든 설명에 천영은 자연스럽게 미생물의 증식을 염려하게 된다.

종이 봉투를 열어보면, 안에는 빵으로 예상되는 박스와, 길게 선 또다른 박스가 하나 더. 아마 높은 확률로 술일 것 같은 모양의 박스가.

"저녁 드셨어요?"

"......아니?"

"후식으로 드세요."

"넌 저녁 먹었냐?"

"아뇨? 이렇게 된 김에 나가서 먹죠."

"뭐? 그럴까."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갑자기 물어보니 생각은 안 나네."

"일단 나가죠."

"뭐가 그렇게 급해."

"교수님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안 거야?"

"집에 온기가 전혀 안 돌아서요."

타당한 지적에 머뭇대던 찰나 서천은 대뜸 그의 손을 잡는다.

"나가죠. 추우니까."

천영은 생각한다. 이상하다. 다른 때에 비해 행동이 과격하다. 정서가 과잉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야, 너 오늘따라......"

"생일이시잖아요."

"어?"

"오늘은 아니고, 내일."

"어, 그렇지, 내일이지."

"미리 축하드리고 싶어서요."

이치가 맞는 것도 같고 맞지 않는 것도 같은 대답이다.

"가요."

그 말을 끝으로 서천은 현관을 향해 등을 돌렸다. 손은 여전히 잡고 있는 채다. 자연스럽게 천영이 끌려가는 모양새가 된다.

하여간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다. 게다가, 상태가 좋으면 좋을수록 기상奇想과 기행의 빈도가 다소 높아지는 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참 다행인 일이었다.

지금의 윤서천은 상태가 좋다는 뜻이니까.

천영은 그의 등 뒤에서 콧바람을 내며 웃었다.

오늘로서는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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