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

K=Potassium by KPota
6
0
0

평일 오전 열한 시 이십 분 윤서천은 도넛 팝업스토어를 둘러싼 인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치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시간에 상상도 못할 장소에 있다는 상념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짚으면서. 어쩐지 비현실적인 광경이라는 감상이 우선 들었다. 손에 든 커피잔에서 느껴지는 냉기만이 자신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도넛 가게 맞은편의 카페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카페라는 장소에 사람이 없는 꼴을 본 적은 없지만서도. 도넛 가게의 웨이팅에 근거한 특이적인 인구 쏠림 현상은 확인되었다. 도넛 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가 이곳인 것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천영은 인간 구경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도넛 가게의 키오스크로 웨이팅 등록을 마친 후 카페로 들어온 이래 줄곧 스마트폰의 액정만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당장 급한 업무를 끌어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게 있었다면 애시당초 자신을 따라나오지 않았을 테다.

서천에게도 급한 일은 없었다. 없다 못해 급한 일이라는 걸 떠맡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타임 랙이 필요했다.

얼마 전 그는 삼 년 좀 더 있었던 연구실에서 나갈 기회를 얻었다. 박식해 보이는 학위가 수여됐다. 세간에서는 이걸 졸업이라고 불렀다.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아버지가 계셨다면 당장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셨을 텐데. 아버지였다면 분명 교수가 되라고 하셨겠지. 쉬운 길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입김이 닿으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대로 나아갔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한참 전에 세상을 떴다. 육체를 이루던 대부분은 불타 없어지고 한 줌의 유골만이 남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을 차리니 언제나의 방 안이었다. 제 소유가 아닌 집의, 얹혀살고 있는 집의 방 안이었다. 동거인은 요즈음엔 보이지 않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곳에도, 연구실에도, 조금만 더 잔류하고 싶었다.

갈 길을 잃었다. 이 앞으로는 당신과도 함께하지 못한다. 어쩌면 후자의 공포가 조금 더 높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서천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서천은 연구실에 남게 되었다. 박사후연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제도 아래에서 보호받는 신세가 된 것이다. 박사 과정 학생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전직하는 데에 서류상의 결재가 필요한 점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서류가 이관되는 과정에서 시간이 떴다.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정식 출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적어도, 라는 건 한 달은 우습게 넘어간다는 소리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연구실에 얼굴을 비춰도 누구도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천영이 이렇게 된 거 좀 쉬다 오라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오늘로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출근은 아직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 천영을 꼬셔 나들이나 나온 참이다.

"너, 단 걸 계속 찾는 경향이 있어."

천영이 말했다. 고개는 여전히 숙이고 있지만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다. 그의 음료는 따뜻한 라떼다.

"아는 애한테 계속 얻어 먹었더니 입맛이 바뀐 거 같아요."

옆 연구실의 박사생 얘기였다. 연구 성과는 그럭저럭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됨됨이가 좋은 무서운 연구자다. 서천은 이따금 자신의 정신보다 그의 정신이 더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 때문에 나도 자꾸 단 걸 먹게 되잖냐."

"싫으세요?"

"나이 먹고 단 거 찾으면 안 돼."

서천은 당과 니코틴과 알코올을 비건강의 저울에 달아보았다. 니코틴과 알코올의 비건강성을 이기지 못해 당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저 보곤 건강해 보인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그것은 살이 붙었다는 완곡한 어법일 뿐이다. 천영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서천의 얼굴을 살피다가, 팔을 뻗어 왼쪽 뺨을 꼬집었다. 단 것에 맛을 들이기 전보다는 확실히 지방이 붙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 거냐?"

웨이팅 이야기였다. 서천은 메신저 앱을 열어 현 웨이팅 순서를 확인한다. 예상 대기 시간 17분이라는 애매한 숫자가 표시되었다.

"왜 도넛을 삼십 분 씩 기다려서 사야 되는 거야?"

"수요공급의 원리에 따라서요."

천영은 아주 탐탁치 않은 얼굴을 해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카페를 나서 이정표를 따라 사라진다. 돌아오면 같이 담배라도 피우러 가자고 할까.

주변에는 사람이 이전보다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카페에 사람이 몰리는 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평일 낮에 여가를 즐기는 이들 특유의 느긋함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모르는 얼굴이다. 그리고 평범하기까지 한 얼굴이다. 모르는데다 평범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이 어딘가 마음에 걸린다.

2인용 테이블에 앉은 평범한 얼굴의 누군가에게는 동행이 있었다. 그보다는 확실히 미남이고 연상인 듯한 남자였다. 줄곧 휴대전화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와는 다르게, 동행인 남자는 카페 너머의 도넛 가게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특정한 대상을 쫓는 걸 보아 그저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서천은 그의 시선을 따라 도넛 가게를 살핀다.

오른쪽에서 시작한 입구로 손님이 줄지어 들어간다. 각양각색의 도넛이 쌓인 매대를 시계 방향으로 훑어 왼쪽의 계산대 겸 출구로 나가는 루트다. 남자의 시선은 그 중 어떤 한 사람만을 줄곧 따른다. 맨투맨에 카고 바지를 입은 손님이다. 한 손에 쟁반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집게를 든 그는 상당히 기묘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넛을 집어 쟁반으로 나르기 전 반드시 도넛을 집게로 툭툭 두드린다. 꼭 도넛의 속이 꽉 찼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버릇이라기엔 이상하다. 도넛이 수박도 아니고 두드려서 고를 필요는 전혀 없다.

맨투맨은 곧 충분한 양의 도넛을 골랐는지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치고는 가게를 뒤로 했다. 남자의 시선이 맨투맨의 뒤를 쫓았다.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벗어난 후에는 시선을 물릴 수밖에 없었지만.

"뭘 그렇게 보냐?"

금세 돌아온 천영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손에 채 닦이지 않은 물기가 남아있다.

"도넛이 뭐가 있나 싶어서요."

천영은 깊게 캐묻지 않고 납득한 듯 싶었다. 서천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타고난 호기심이 강한 천영의 눈은 어느 정도 가리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맨투맨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한다. 도넛을 두드려서 얻을 수 있는 결과값을 짐작해 본다. 대표적인 건 강도와 밀도다. 도넛의 겉표면이 단단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도넛의 내부가 조밀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그것을 판단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는가 하면.

평범한 누군가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신 컵을 정리하고 카페를 나선다. 바로 앞의 도넛 가게로 들어가 순번을 확인하고 쟁반을 든다. 유산지를 깔고 집게를 손에 드는 모습을 서천은 줄곧 바라보았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도넛을 고르는 주도권은 평범한 쪽에 있었다. 잘생긴 쪽은 늘어선 도넛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집게조차 들지를 않다가, 돌연 어떤 도넛 하나를 가리켰다. 집게를 든 평범한 얼굴이 그가 가리킨 도넛을 집는다. 밋밋한 얼굴에 당황의 빛이 한순간 퍼져나가는 걸 서천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무어라 하며 도넛을 집는 걸 망설이고 있으니 이젠 잘생긴 동행인이 집게를 뺏어들기까지 한다. 무조건 사야만 하겠다는 건지 제가 원하던 도넛을 쟁반으로 옮긴다. 평범한 그는 연신 툴툴댔지만 두 사람은 이내 계산대에 닿고 말았다. 어떠한 소란 하나 없이 계산을 마치고, 그들은 맨투맨과 같은 경로로 서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가 있는데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냐?"

"안에 크림이 든 도넛이 있나 본데요."

"구멍 뚫린 건 없고?"

"있어요, 그것도."

링 모양 도넛을 먹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서천은 짐작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니 웨이팅 시간이 급격히 줄어 있었다. 다 마신 커피잔을 정리하는 사이 입장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왔다. 두 사람은 사십 분 가량 체류했던 카페를 뒤로 했다.

카페까지 은은하게 퍼졌던 단내가 강렬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집게와 쟁반은 당연하게도 서천의 몫이었다. 천영은 예상대로 고리형 도넛을 두어 종류 골랐다. 서천은 그의 눈을 피해 은근히 도넛을 집게로 두드려보았다. 푹신한 질감의 도넛 사이사이에 단단한 디스플레이용 모형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육안으로는 진짜 도넛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지만, 이 정도면 집는 순간 모형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그 맨투맨은 이걸 확인하려고 도넛을 전부 두드린 건가? 하기사 도넛을 집고 내려놓는 것보다는 두드리는 게 눈에 덜 띄기야 한다. 진짜 도넛을 고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가짜 도넛을 고르고 싶었던 걸까. 가게 초입에서 모형 도넛에 한 번 속아버려서, 진짜 도넛을 고르고 싶어 전부 두드리게 된 걸까? 하지만 그런 짓은 맨투맨 말고는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일부러 모형을 고르기 위해 도넛을 두드린 건가?

무심코 시선이 앞선 손님들로 향했다. 다들 자기가 원하는 도넛을 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이따금 모형을 집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려놓는 이들도 있었지만, 도넛 하나하나를 검사하기 위해 두드리는 손님은, 놀랍게도 있었다.

도넛 매대를 향한 옆얼굴이 보였다. 아까의 잘생긴 남자가 온갖 도넛을 두드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음."

갑작스레 튀어나온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서천은 목을 가다듬는 척했다. 뒤따라오는 천영이 방금 뭐라 했냐며 물었다. 목이 칼칼하다는 변명을 단숨에 내놓았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아까의 그 남자는 아니다. 헤어스타일도, 패션도 비슷하지만 뒷머리가 조금 더 짧다. 하기사 가게에서 나간 지 이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재입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서천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웨이팅이 삼십 분은 거뜬히 넘어갔으니까.

"도넛에 트러플을 왜 얹는 거야?"

"아뇨, 그건 버섯이 아니라 초콜릿이에요."

"트러플은 버섯 아니었어?"

"그 트러플을 닮아서 트러플 초콜릿이라고 하던데요."

틈만 나면 디저트에 관한 잡지식을 늘어놓는 옆 연구실 박사생에게서 얻어들은 정보였다. 아무튼 궁금해하는 것 같았기에 트러플 도넛을 트레이에 올렸다. 그 사이 잘생긴 남자는 매대 모퉁이를 돌아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너는?"

눈앞의 아무 도넛이나 집어 올렸다. 속에 크림이 든 필링 도넛의 모양을 하고 있는, 단단하고 가벼운 모형이었다. 신묘한 우연이다. 서천은 모형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트레이로 옮겼다.

"라즈베리?"

"네."

그런 이름이었군.

"더 사실 거 없으세요?"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연구실로 돌아가지도 않을 듯하니 그쪽 인원을 챙길 이유도 없었다. 서천은 도넛 다섯 개가 든 트레이에 집게를 내려놓았다. 주시하고 있었던 남자는 이제 계산을 시작했다. 가게 유니폼으로 보이는 모자를 쓴 계산원이 남자의 도넛을 박스에 옮겨담다가, 불현듯 손을 멈추고 손님의 얼굴을 살핀다.

"손님, 이건 모형이신데요."

계산대 앞에 선 남자의 옆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콧대가 높고 인상이 뚜렷한 미남이다.

"예?"

"모형이세요. 두 번째 방문이시죠? 저, 아까 말씀드렸었는데."

계산원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돌발 상황에 당황한 것도 같고, 당황을 넘어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도 보인다.

"아까......?"

남자가 말꼬리를 길게 끌며 되읊었다. 덩치가 크고 체격이 잘 잡힌 사람이 그러니 제법 위압감이 있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가를 실룩대다가, 제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손님들을 보고 단념했다.

"예. 그럼 얘네만 주세요."

그는 결국 멀쩡한 도넛만을 한아름 사 들고 계산대를 뒤로 했다.

서천은 몇 미터 앞에서 벌어진 촌극에 대해 생각한다. 쏙 빼닮은 얼굴의 두 사람. 같은 행동을 했던 두 사람.

아까의 남자는 맨투맨의 이상 행동을 빤히 구경하고 있었다. 맨투맨의 행동으로 도넛 가게에서 무언가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남자는, 맨투맨을 모방해 모형의 존재를 알아챘다. 동행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형을 트레이에 담아 계산대까지 가져갔다. 꼭, 지금 천영의 눈을 피해 모형을 손에 넣은 서천처럼.

방금의 남자는 가게에 들어오기 전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맨투맨과 같은 도넛 감별 행위로 모형을 골라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까와 다르게 계산대의 직원은 그를 불러세웠다. 이건 모형이라 계산하실 수 없다고.

일련의 사건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이 도넛 가게에서는 도넛을 닮은 모형으로 무언가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고, 방금의 남자는 아까의 남자에게 선수치기를 당해 모형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척 닮은 것을 보았을 때 아마 형제지간이 아닐까.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비밀스러운 거래.

크림이 들어있지 않은 모형은 운송 수단으로 사용하기 적합하다.

무엇을 운송하기 위해?

그것은......

"교수님."

"엉?"

"카페에 휴대폰을 두고 온 것 같은데......"

"뭐? 어휴......"

"좀 갖다주세요. 계산하고 있을 테니까."

천영은 귀찮은 기색을 잠시 보이다가 줄을 이탈해 계산대 앞 출구로 나갔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이 정도는 어떻게 무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영이 카페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 서천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시야에서 막 사라지려고 하던 남자를 찍었다. 콧대가 뚜렷한 미남의 옆얼굴이 사진으로 남았다.

계산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남자에게서 모형을 뺏어들었던 계산원이 서천의 앞으로 점점 다가온다. 카페를 곁눈질했다. 천영은 아직 그들이 앉아있었던 테이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살피고나 있다. 안심하고 휴대폰의 메모 어플에 간단한 문장을 쳐 넣었다.

로고가 그려진 노란 모자와 안경을 쓴 계산원이 트레이 위의 도넛을 하나하나 포장 박스로 옮겨담는다. 모형에 이르러서는, 그 손짓이 불현듯 멈춘다. 안경 너머의 두 눈에서 의심스러운 빛이 떠오르는 걸 서천은 눈치챈다.

"신세계 포인트 적립되나요?"

팝업스토어에서 그런 게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서천은 슬쩍 미소를 띄워선 스마트폰의 액정을 그의 쪽으로 들이밀었다.

나한테 팔아. 귀찮은 일 생기기 싫으면.

메모 어플에 적힌 문구를 확인한 계산원은 상당히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서천을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건 차갑게 노려보는 시선뿐이 없다. 그는 입을 무어라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모형을 도넛이 든 상자 안에 끼워넣었다.

"이, 이만 삼천원입니다."

서천은 도넛 네 개와 모형 한 개가 든 포장 박스를 손에 들고 카페에서 소득 없이 돌아온 천영을 맞았다.

천영이 궁금해했던 트러플 도넛은 그의 입맛에는 너무 단 것 같았다. 구멍 없이 둥근 빵 안에 트러플 크림이 들어있는 필링 도넛이었는데, 절반을 뚝 잘라먹고는 접시 위에 방치해버린 것이다. 서천은 반만 남은 도넛의 반을 잘라먹었다. 생각보다 많이 달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의 제가 먹었다면 반의 반만 남은 도넛을 방치해두었을 법한 맛이었다.

"프랜차이즈 도넛이랑 크게 다른 점은 모르겠는데."

설탕 코팅이 된 글레이즈드 도넛을 먹으며 그리 말하는 천영을 보고 그는 아무래도 미식가는 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계산원을 협박해 얻어낸 모형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천영이 혼자 살 때에는 창고 정도로 운용했던 방인듯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서천의 소유가 되었다. 노트북을 두는 책상과 서랍 겹 책장, 그리고 옷걸이를 빼면 아무 가구도 없는 미니멀한 공간이다. 책상 오른쪽 위로 작게 난 창문에선 해가 들어왔다 않았다를 반복한다. 태양의 고도, 그리고 맞은편 건물의 창문 개폐 여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책상 앞에 앉아 모형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 손으로 들고 무게를 가늠하기도 한다.

천영이 보았다면 뭐 그런 걸 가져왔냐며 투덜대는 한편 눈을 빛낼 법한 아이템이다. 그는 흥미가 과한 감이 있다. 서천 그 자신도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천영의 경우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면이 있어 위험하다.

학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태도다. 하지만 현실의 범죄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좋지 못하다. 학문의 탐구는 미지의 보석을 찾기 위한 한없는 광질에 가깝지만 범죄 조사는 실질적인 위험이 있는 불길을 꺼뜨리기 위해 뛰어드는 일과 닮았다. 준비 하나 없이 뛰어들었다간 불나방마냥 불타 죽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천은 애써 그의 눈을 가렸다. 그가 불타 죽는 건 원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필링 도넛과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속이 텅 빈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가벼울 수는 없다. 공갈빵을 떠올리게 하는 감촉이다.

모형을 흔들어보았다. 안에 뭔가 들어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고 두 쪽으로 부쉈다. 퍼석, 하는 소리가 났다. 천영이 먹다 남긴 도넛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필링 없이 텅 빈 속이 서천을 반겼다. 부서진 도넛의 부스러기가 책상 위로 떨어진다.

아무 것도 없다? 이럴 수가 있나.

그럼 그 사람들은 뭘 위해서 모형을 가져간 거지?

두 쪽 난 모형을 책상 위에 놓았다. 모형에 부스러기가 눌려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

멍하니 단면을 들여다보았다. 본래는 필링이 들어있었을 공간을 빵이 둘러싸고 있다. 단면의 결 사이사이로 신경절을 닮은 작은 구멍이 보인다. 아무래도 이건 플라스틱 모형이 아니라 실제 빵을 가공처리해 만든 모형인 듯하다.

큰 구멍에 없다면, 작은 구멍에 뭔가 있을까.

제 손톱보다 작은 구멍에 들어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두 쪽 난 모형 중 오른쪽의 것을 주먹으로 눌러 부스러뜨린다. 파괴에서 오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모형을 깔아뭉갠 주먹에 이질감이 들었다. 완전히 부서진 모형에서 천천히 주먹을 떼어냈다. 부스러기가 주먹에 묻어나다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툭툭 떨어진다.

모형의 잔해 사이에 그것은 있었다.

새하얀 정제다.

책상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스러기가 난기류를 타고 비강으로 침입한다. 서천은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허리를 도로 세웠다.

부스러기에서 정제를 골라내 티슈 위에 두었다.

남은 반쪽의 모형도 부숴보았지만, 또다른 정제는 나오지 않았다. 빵 한 개 당 하나만 들어있는 것 같았다.

산산조각난 모형을 쓰레기통 안으로 쓸어담았다. 부스러기와 먼지가 함께 피어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정제와 마주보고 앉아 앞으로의 일을 궁리했다. 첫째, 경찰에 신고한다. 둘째, 약을 버리고 없던 일로 한다. 셋째, 독자적으로 조사한다. 심정적으로는 셋째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뒤이을 귀찮은 일들을 생각하면 별로 실천으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는 왜 구태여 모형을 집으로 가져왔을까?

모형을 고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나름대로 납득을 했으면 되었을 것을.

왜 스스로 파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내딛었을까.

정제를 티슈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행동에 차질이 생긴다. 반백수 신세라도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영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나의 욕망을 천천히 마주하도록 하자.

카페에 앉아 휴대폰 액정만 들여다보던 남자의 밋밋한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 것 역시 사실이다.

어디서 봤었나? 구면인가? 내가 사람 얼굴을 잊을 리 없는데.

물을 새도 없이 그는 가게를 떴다. 그와 친밀해 보이는 동행인은 모형을 가져갔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그게 있다면,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개연성도 없는 믿음이었다.

이런 경험을 언젠가 한 번 했던 것도 같다.

그래, 한여름에 꾸었던 이상한 꿈에 얽힌......

지금은 색이 완전히 바래 어떤 빛깔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악몽에 얽힌 사달에서.

서천은 메신저 앱을 열었다. 지난 해 여름에 대화를 멈춘 일대일 채팅방에 접속했다. 이름 모를 약쟁이의 옆얼굴을 전송했다. 확인 표시는 금세 사라졌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