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럼 분석: 분해능 향상의 이론과 실제
스펙트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시료가 어떤 파장의 빛을 잘 흡수하는지를 관찰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파장의 빛을 하나씩 전부 쬐어보면 된다. 그렇다면 모든 파장의 빛을 어떻게 하나씩 쪼일 수 있을까? 그건 우리 과학자가 생각해봐야 할 일이지.
인간들은 좋은 두뇌를 모아 백색광에 담긴 수많은 파장을 분리하는 방법을 궁리했다. 처음으로 떠오른 것이 주변 상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리즘이었다. 유리를 잘 조각해 만든 프리즘에 햇빛과 같은 백색광을 비추면 그 안에 섞여있던 파장이 확 퍼져 무지개와 같은 스펙트럼을 보이곤 하지 않나. 좋아, 일단 넓게 펴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제 쫙 펴진 빛을 하나하나 분리만 하면 된다. 근데 그걸 어떻게 하지?
이것도 실은 간단했다. 아주 좁은 틈을 가진 슬릿을 이용하면 되었다. 백색광이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파장으로만 나뉘어졌다고 치자. 만약 빨간색을 띠는 파장을 시료에 쬐고 싶다면, 프리즘으로 쭉 나뉜 무지개 앞에 슬릿을 가져다 대면 된다. 좁은 틈을 잘 조정하다 보면 빨간 파장 외의 빛은 모두 가려지고 오직 빨간 빛만이 틈을 파고들어 시료로 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다른 색의 빛을 사용하고 싶다면 다시 슬릿을 이동하면 되고.
그렇게 일곱 가지 파장을 시료에 쬐어 가장 흡수를 잘 하는 파장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해당 시료의 특징으로 라벨링한다. 이건 빨간 빛을 잘 흡수하고, 저건 초록 빛을 잘 흡수하며 다른 건 파란 빛을 잘 흡수한다며.
그런데 이따금 복잡한 녀석들이 튀어나온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녀석들이. 말하자면 초록과 파랑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빛을 게걸스럽게 흡수하는 녀석들이. 이건 대체 무슨 빛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일곱 가지로 나뉜 스펙트럼으로는 도저히 판단이 되질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분해능의 문제입니다. 분해능이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물체를 어느 정도까지 구분하는가를 뜻하는데요. 예를 들어 100nm와 110nm를 구분하는 기기가 있고 100nm와 105nm를 구분하는 기기가 있다면, 우리는 후자의 기기의 분해능이 더 좋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마저 간단한 얘기다. 빛을 가려내는 슬릿의 틈을 더 좁혀 보다 좁은 범위의 빛만을 골라내면 된다.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
강은율 부교수의 분석화학 강의가 한창인 강의실 맨 뒤에 앉아 녹화 기기를 체크하던 윤서천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사라졌다.
“고마워, 윤 조교. 오늘 시간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 있지. 윤 조교가 학교에 남아서 다행이다~”
박사 과정을 마쳐 박사후연구원으로의 이관을 그저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누굴 가르치는 처지도 아니지만 학교 사람들은 줄곧 서천을 윤 조교라고 불렀다. 그 호칭에 크게 불만은 없는고로 이곳에서 서천은 여전히 윤 조교다.
초여름의 뙤약볕이 비치는 낮.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의 면면에는 식후의 노곤함이 떠올라 있다. 각자 시간표가 다른 만큼 점심시간이 같지는 않겠으나, 아무래도 두 시가 넘어가면 다들 점심은 챙겨먹지 않았겠는가. 조금 전까지 두 시간짜리 보충 녹화 강의를 찍은 서천과 은율은 그렇지 못했지만.
은율은 도움을 준 백수 서천에게 밥을 사겠다며 상쾌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박 교수님은 점심 드셨겠지?”
“아까 저희 교수님이랑 같이 나가시던데요.”
“뭐, 도 교수님이랑?! 왜?”
대로에 맞닿은 교문을 서천보다 한발 빠르게 넘어가던 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은은한 와인색으로 물들인 짧은 머리칼이 둥실 떠올랐다가 되돌아간다.
“저한테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얘기하고 다니시진 않으셔서……. 한 시 쯤에 박 교수님이랑 같이 주차장 쪽으로 가는 걸 봤을 뿐이에요. 그 뒤론 안 돌아오셨으니 점심이라도 드시러 간 건가 싶었죠.”
녹화 강의를 찍던 5층의 강의실은 과학관 뒤편 주차장에 면해 있다. 녹화 기기를 관리한다고 해도 은율이 칠판에 필기를 수없이 하지 않는 이상 카메라를 돌릴 일은 없다. 때문에 서천은 두 시간 녹화 중 한 시간 반 정도를 딴짓에 소모했다. 휴대폰의 알림을 확인하거나, 앞으로의 할 일을 생각하거나, 은율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거나, 모든 걸 관두고 창밖을 관망하거나……. 다시 말하자면 주차장부터 주차장 뒷문 너머의 좁은 도로를 거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그리고 한 시 즈음하여 익숙한 뒤통수가 또다른 익숙한 뒤통수를 이끌고 주차장에 나타났다. 유기화학 연구자인 박연우 교수와 서천의 지도 교수인 도천영이었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차에 타지는 않고 그대로 주차장 뒷문으로 나갔다. 신경쓰이는 조합이라 서천은 그 뒤로도 창밖 관찰에 힘을 쏟았지만, 은율의 녹화가 끝난 두 시까지 두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신기하네. 박 교수님이 다른 사람이랑 점심을 같이 드시는 분은 아닌데.”
“교수님하고는 많이 드시지 않아요?”
은율은 수상하리만치 박 교수와 붙어다닌다. 학교 근처의 대형 식당에서 두 사람이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자주 목격된다. 두 사람의 연구 분야는 거의 겹치지 않고 공동 연구도 그다지 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지만, 그럼에도 은율은 틈만 나면 박 교수를 찾아댔다. 좀 과할 정도로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인간상이라고 서천은 평가했다.
“그야 그렇지만 난 경우가 다르고.”
어디가 다른 거야?
“아니, 차라리 윤 조교랑 식사를 하시면 몰라. 왜 도 교수님이지?”
나는 왜?
“업무 얘기를 하실 게 있으신가 보죠.”
물론 그런 게 있다면 도 교수의 측근인 서천에게 일찍이 정보가 들어왔을 것이었다. 여태 그가 박 교수와 무슨 일을 하게 됐다는 말을 해 준 기억은 없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은율도 업무 건에 대해서는 짚이는 게 없는지 고래를 설래설래 저었다.
“수상해, 수상해.”
“나중에 여쭤보세요. 도 교수님이랑 어디 다녀오셨냐고.”
“뒷문으로 나가면 뭐가 있지?”
“좁은 골목에 줄지어 선 가성비 밥집이랑, 사람 열 명 들어가기도 어려운 감성 카페, 낮에는 열지 않는 지하 술집, 교수님들 나잇대에는 맞지 않는 자질구레한 소품샵, 원룸촌, 저가의 숙박 시설.”
“뭐가 이렇게 많아!”
“중심지니까요.”
은율은 갑자기 피어오른 의혹에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서천에게는 착실하게 답례를 해 주었다. 고가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결코 싸지는 않은 초밥 한 판과 여름 한정 메뉴인 냉모밀, 초밥집 옆 에스프레소 바의 이름이 어려운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 같은 것으로. 박 교수님이랑 전에 와 봤는데 커피를 풍미 있게 잘 내리시더라고, 같은 말을 하며 은율은 종적을 감춘 두 교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입에 올렸다.
도천영에게 있어 박연우는 아주 불편한 상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천영보다 잔뼈가 굵은 선배 교수이기도 했다. 연차와 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계가 형성되는 학교라는 사회에서 천영은 연우의 말에 거역할 힘이랄 게 그다지 없었다. 떠맡다시피한 두 시간짜리 교양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가던 길에 연우에게 붙잡힌 천영은 들고 있던 강의 자료만을 제 연구실 책상에 던져놓고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는 비밀스럽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비밀스럽게? 비밀이라는 단어에서 천영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교수 대 교수로서 그다지 친밀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어떤 업무에 관련한 대외비는 아닐 텐데. 더군다나 같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없으니 대외비는 더더욱 아닐 것인데…….
연우에게 끌려가다시피한 천영은 과학관 뒤편 주차장으로 향했다. 점심 먹으면서 이야기 할 건데, 차 끌고 갈 필요는 없어. 연우가 그의 국산 승용차 앞에서 귀띔했다. 천영은 어쩐지 막막해져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다.
주차장 뒷문을 넘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손바닥만한 가게들을 몇 지나치던 와중 앞장 선 연우는 이따금 오른쪽으로 돌다가 다른 때에는 왼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타고나기를 과묵해서,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천영에게 별다른 말을 걸지는 않았다. 상하관계가 뚜렷한 사이에 침묵이 생기면 불편한 건 하급자 쪽이라는 걸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아직 간판의 불도 켜지 않은 지하 술집이였다. 한 시가 좀 넘은 시간에 이런 술집이 문을 열지는 않았을 것 같았지만, 연우는 성큼성큼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천영은 별 수 없이 뒤따랐다. 어딘가 기시감이 있는 계단에 천영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나다를까 술집은 조명이 켜져있기는 커녕 문조차 열려있지 않았다. 천영이 겨우 뭐라 한 마디 꺼내려 다짐했을 때, 연우는 대뜸 청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 아래쪽의 잠금쇠를 풀기 시작했다. 천영은 배 안에서 튀어나오는 비명을 억눌러야만 했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억누른 비명은 목소리를 뒤집는 형태로 기어나왔다.
“문 여는데.”
“그러니까, 왜 교수님이 문을 여시냐고 묻는 겁니다.”
“나한테 열쇠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교수님한테 열쇠가…….”
“자주 마시러 다녔더니 주인이 스페어 키를 줬어.”
“스페어 키를 손님한테 맡겼다고요?”
“문제 될 거 있나? 난 신원도 확실하고 근처에 살고, 딱히 가게 물건을 훔칠 사람도 아니고. 팔아주면 팔아줬지.”
설전 아닌 설전을 하는 사이 연우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문을 열었다. 지하 특유의 텁텁한 냉기가 코끝에 닿는다. 연우는 아무렇지 않게 가게 조명을 켜곤 문을 도로 닫았다.
가게 한구석의 기다란 바 테이블 뒤를 양주가 가득한 찬장이 장식하고 있다. 응당 바텐더가 있어야만 할 자리지만 지금은 텅 비어 샴페인 잔만이 바리케이드 마냥 나란히 섰다. 바 테이블의 일인용 카운터석 외에는 4인용 테이블석이나 소파석 등이 가게의 남은 자리를 적당히 꾸미고 있다. 연우는 당당하게 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더니 웬 바나나 한 송이를 꺼내왔다.
“거기 서서 뭐 해? 앉아.”
입을 벌린 채 문간에 붙박힌 듯이 서 있던 천영은 괜한 저항을 관두고 주춤주춤 카운터석에 앉았다. 착석감이 좋지 못한 높은 스툴이었다.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요.”
연우는 길고 묵직한 바나나를 꺾어 천영에게 건넸다. 먹으면서 조용히 들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천영은 느낀다. 조심히 받아들고 얌전히 껍질을 벗겨 먹는 수밖에 없다.
“강 교수랑 관련된 일인데.”
“…강 교수요?”
“강은율 교수.”
은율의 힘찬 웃음이 순간 뇌리에 떠올랐다. 썩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허물은 없다. 막내 교수인 은율은 친화력이 상당히 좋아서, 비단 천영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사곤 한다. 심지어 성격 꼬인 윤서천과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천영은 내심 감탄했었다.
“압니다. 무슨 일이요?”
연우는 점박이 기가 보이는 바나나의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학생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양이야.”
“늘 그렇지 않았습니까? 강 교수 인기 많잖아요. 강의력도 좋고 성격도 좋고 학생들 얼굴도 잘 외워서…….”
아니, 다른 이유로도 은율은 학생들 입에 오르내렸다. 아무리 친한 학생을 두지 않는 천영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만큼 그 화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뜨겁다는 의미도 되겠다. 적어도 은율이 전공 강의를 하는 화학과 내부에서는, 그러했다.
천영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바나나를 우물거리던 연우는 결국 그가 내심 염려하던 말을 꺼냈다.
“대학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여론을 몰고 있대. 트랜스젠더 같은 이상한 사람이 자기들을 가르치는 게 싫다면서.”
박연우가 다른 사람도 아닌 도천영에게 문제를 상담한 이유는 이하의 세 가지였다.
첫째로 도천영은 동성애자다. 트랜스젠더보다야 넓게 알려진 부류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상한’ 집단에 속한다는 건 자명하다. 여기서 ‘이상한’ 집단이란, 성정체성을 밝히는 것으로 주변의 시선이 쉬이 변화하여 이따금 커리어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마는 이상한 집단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그는 ‘보편적인’ 교수들보다 은율의 문제에 쉽게 공감하고 분개해줄 것이었다.
둘째로 도천영은 상대적으로 많은 학생들과 만난다. 화학과 내부에서 그의 서열은 뒤에서 두 번째, 그러니까 은율의 바로 앞이 된다. 따라서 그는 짬이 쌓인 교수들이 기피하는 강좌를 대단히 떠맡고 있다. 이를 테면 자연과학부 필수 교양강좌인 일반화학이라든가.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천영은 상당히 많고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강의평은, ‘과제는 많지만 열정적이시고 배울 게 많아요’. 학생들한테 잘해준다는 소리다. 츤데레처럼.
셋째로, 이게 가장 큰 이유였는데, 도천영은 대 태블릿 시대에 손으로 작성하는 과제를 내 준다. 무슨 과제인가 하면 그날그날의 강의를 a4용지에 정리해 강의록을 만드는 과제다. A4용지라고는 했지만 종이라면 아무거나 되는 모양으로, 학생들 중에서는 아예 노트 한 권에 정리하는 부류도 있었다. 학기 초에는 그런 과제 때문에 불평이 엄청나지만 막상 학기말이 되면 다들 그의 참뜻을 깨닫고 강의록을 고이 보관한다고 한다.
“손으로 쓴 강의록을 휴대전화로 찍어서 학교 온라인 강의방에 올린다, 그렇지? 그걸로 도 교수는 과제를 채점하고.”
“그렇죠. 기껏 쓴 강의록을 제가 가져가서 보관하면 학업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요.”
“도 교수가 이번 학기에 몇 강좌 하지?”
“전공 생화학 두 강좌에 교양 일반화학 하나 화학1 하나 합니다.”
천영은 상대가 뭘 요구할지 짐작이 간다는 눈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쨌거나 눈치는 제법 빠른 사람이었다. 이십 년 전의 치정 관계에서 얻은 도천영이라는 인간의 편견을 연우는 최근 들어 수정하고 있었다.
“강의록 파일을 좀 빌렸으면 하는데.”
“…납득될 만한 설명을 해 주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연우는 껍질에 파묻힌 바나나의 꽁지 부분을 무자비하게 꺼내 입 안으로 던져넣었다.
“우리 대학 커뮤니티에 분석화학 채점 기준에 대한 글이 하나 올라왔어요. 문제 제기를 한 학생을 임시로 A라고 할까. A는 자기 중간고사 점수가 도저히 납득이 안 돼서 분석화학 담당 교수인 강 교수한테 이의신청을 했고, 강 교수랑 독대해 자기가 틀린 부분을 하나하나 확인하기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옳은 답을 적었으며 강 교수의 감점은 불합리하다는 원망의 글을 커뮤니티에 올리고 만 것이다. 그것을 본 커뮤니티의 다른 사용자들은 대부분 글쓴이가 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교수님인데 너보다는 훨씬 잘 아시겠지, 화 식히고 게임이나 한 판 해라, 강 교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이런 글을 남기냐, 등등.
글쓴이에게 혹평을 가하던 댓글창의 분위기가 한순간 전환된 건 익명7의 댓글부터였다.
[ 익명7 트젠이잖아ㅋㅋ 그러려니해 ]
“…강 교수는 자기가 그런 쪽이라는 걸 숨기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패션도 상당히 중성적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보이쉬한 여성으로 봤던 모양이고.”
“그런데 그 애는 어떻게 안 겁니까?”
“글쎄. 과연 알았던 걸까.”
연우는 한쪽 눈썹만을 쓱 들어올려 의혹을 나타냈다.
“가끔 있지. 젊은 교수한테 반감을 느끼는 애들. 그런 반감이 은연 중에 쌓이다가 꼬투리가 잡히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하한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라지질 않는, 꼴보기 싫은 유형이야.”
강 교수의 외관은 학생들 사이에서 은근한 화제였다. 패션도, 얼굴 조형도, 목소리도 모든 게 다 중성적이다. 여성으로 보자면 여성으로도 보이고 남성으로 보자면 남성으로도 보인다. 주변의 여론이 익명7의 내부에서 하나로 모여 트랜스젠더라는 해답을 만들어냈다. 그곳에는 정체성 혼란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없다. 그저 남을 헐뜯기 위해 생각해낸 개념을 익명7은 댓글창에 배설했다.
“수많은 답글이 익명7의 아래로 달렸어. 댓글이랑 답글 개념은 알지?”
“압니다.”
“그런데 익명7은 남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졌는지 답글도 달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어?”
“거짓말인걸 들키기 싫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겠죠.”
“평소에 인터넷 별로 안 하지? 도 교수.”
“…그런데요?”
“날 때부터 인터넷을 끼고 자란 네이티브들에게는 그런 행동이 다르게 보여. 어떻게 보이는가 하면, 얜 진짜 뭔가 알고 있어서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거다…… 라고.”
그 날 이후로 커뮤니티의 여론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화학과는 애당초 학생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학과라 커뮤니티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학교에 있다는 ‘트랜스젠더 교수’의 이야기가 심심할 때마다 올라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남자에서 여자로? 아니면 여자에서 남자로? 화학과에 있다고? 궁금하다. 다른 과지만 구경하러 가고 싶다. 어떤 강좌에 계시는데? 청강하러 갈래. 트젠 좀 징그럽게 생겼던데 그분도 그래? 트젠한테 강의 받는다고? 화학과 존나 재밌게 학교생활하네. 화학이 아니라 뭐 이상한 교육 받는 거 아니냐?
“이런 여론이 당장 지난 주부터 생겼어. 도 교수는 강의하면서 뭐 느낀 거 없었나?”
상세한 설명을 듣던 천영은 이제 바나나를 까먹던 손으로 입가를 누르고 있었다. 주름진 미간이 움찔댄다.
“…그런 건 못 느꼈는데요.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천영은 어쩌면 자신의 ‘이상한 점’이 교내의 소문으로 떠도는 가상 세계를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연우는 짐작했다.
“강 교수 본인은 이런 여론을 알고 있습니까?”
“강 교수도 대학 커뮤니티는 안 해서 여론 자체는 몰라. 근데 요즘 자길 바라보는 학생들 시선이 좀 이상해졌다는 얘기는 하더군. 살이 쪘나, 하고 웃으면서 얘기는 했지만 역시 불안해 보였어.”
복수의 타인에게 심하게 거절당해 본 사람은 주변의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다. 자신의 취약성이 새로운 집단에게 흘러나간 게 아닌가 불안에 떤다. 성격이 아무리 호쾌해도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어떤 족쇄와 같은 것이다.
강 교수는 아주 오래 전에, 운이 좋게 트랜지션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 부모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을 그저 품어주었다. 신체는 트랜지션 수술을 잘 받아들였다. 성별정정을 마친 해 은율은 겨우 스물 한 살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운이. 지금도 은율은 술을 마시면 그런 말을 중얼거린다. 운이 좋지 않은 동료들을 은율은 수십 명도 넘게 알고 있다.
저는 운이 좋았으니까. 좀 더 당당하게 살아서 그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아. 너무 오랫동안 ‘보편적인’ 척을 하고 살았어요. 저는 언제쯤 세상이 무섭지 않게 될까요. 세상은 언제쯤 저를 받아들여 줄까요. 저는 벌써 사십 년 가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강은율은 계속 울었다.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유성 영화를 연우는 꺼야만 했다.
“아무튼 간에, 나는 여론의 시작점이 된 익명7 학생을 찾고 있어.”
“어떻게요? 익명이라고 하셨는데……. 찾을 방법이 있습니까?”
“다 방법이 있지.”
“애초에 강의록은…… 학생들의 손글씨는 왜 필요하신 겁니까?”
“그것도 알려줘야하나? 지금까지 상황 설명을 다 했잖아.”
“아니, 제가 알고 싶은 건 제가 갖고 있는 강의록의 손글씨와 대조할 대상이 있냐는 겁니다.”
익명7은 짤막한 댓글 하나만을 남기고 댓글창에서 사라졌다. 익명 커뮤니티의 특성 상 익명 개인의 공개프로필은 전무하다. 따라서 익명7을 추적하는 데에 남은 단서는 그 댓글 하나뿐이다. 댓글은 당연하게도 손글씨가 아닌데, 당신은 왜 학생들의 손글씨 모음을 대여하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천영은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연우는 바로 대답을 않았다. 잠시 의도적인 침묵을 만들어 바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앉은 천영을 빤히 바라보기나 한다. 진한 회색 눈동자에 서린 감정을 찬찬히 읽으면, 그곳에 있는 것은.
경악, 분노, 슬픔, 그리고 불관용.
역시 사람을 보는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하고 연우는 생각했다.
일일 녹화 아르바이트 며칠 뒤, 여전히 백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천은 하는 일 없이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집에서 쉬는 것도 한계가 있다. 교수가 출근한 이후 혼자서 집을 지키다 보면 공연히 우울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리하여 요즘은 아침부터 교수를 따라 학교에 출근하고 있다. 출근이라고 해 봤자 하는 일도 듣는 강의도 없이 괜시리 학교 부지를 어슬렁 댈 뿐이지만.
이전에 출근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출근할 연구실에 얼굴을 한 번 비추었지만 선배가 도와주실 일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박사도 따셨으니 가서 느긋하게 쉬세요 라는 배려의 표현이었을 테다. 서천은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끼고 연구실을 뒤로 했다.
강의실이 밀집한 4층에서 한 층 더 올라가면 교수 연구실 밀집 구역이 나온다. 서천은 도천영의 이름이 걸린 방의 문을 노크도 않고 휙 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서천은 이곳에서 천영과 노가리를 깠다. 전공 강의가 있다며 사라진 천영은 여즉 돌아오지 않았다.
서천은 잠시 바퀴 달린 푹신한 의자에 앉아 천장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천영이 늘 뿌리는 향수의 향이 강하게 났다.
눈을 감고 그의 잔향을 이십 초 정도 느끼다가 일어났다. 의자의 스프링이 괴로운 소리를 내며 늘어난다. 여기에 더 눌러앉을 생각이 있다면 의자를 바꾸는 편이 좋겠다.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교수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문에 등을 기대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에 가까워진 시각이 액정 위에서 번쩍인다.
순식간에 두 가지 안을 생각해 냈다. 하나, 다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 도 교수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둘, 이대로 다시 학교 안을 방황하다가 아는 사람을 마주쳐 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운다.
복도 저 반대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박연우 교수의 연구실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박 교수는 아니다. 그녀의 치렁치렁한 곱슬머리는 백 미터 밖에서도 눈에 띄니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다.
아직 풋풋한 기가 남아있는 남학생이 연구실의 문을 닫고 씩씩대며 복도를 가로지른다. 순간 서천과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서천은 두 가지 안을 모두 폐기하고 그대로 박연우 교수의 연구실 문 앞에 섰다.
“끝났습니까?”
날씨에 알맞은 검은 반팔 셔츠를 입고 나타난 윤서천이 대뜸 물었다. 책상 앞에 앉아 안경알을 닦고 있던 연우는 맨눈을 찌푸려 침입자를 바라본다. 목소리만 들어도 사람은 분간할 수 있으니 실은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뭐, 그렇지.”
서천은 방금 전까지 다른 학생이 앉았던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 앉았다. 다가온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도 교수의 냄새가 났다. 실은 근 몇 년 간 그의 몸은 이와 같은 향을 풍겼다. 안경을 도로 쓴 연우는 한 층 깔끔해진 시야로 시커먼 백수를 살폈다.
“어떠셨어요?”
“뭐가?”
“방금 왔다 간 그 애 말입니다.”
“어떠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눈을 가늘게 뜬 서천이 심술궂은 얼굴로 책상 북엔드에 늘어선 도서 중 하나를 뽑아들었다. 나름 최근에 나온 추리소설이다. 하드커버에 홀로그램박이 들어간 표지를 살피더니 페이지를 펄럭펄럭 넘겨댄다. 새 책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는 인간은 처음 봤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책 읽어 봤습니다.”
“윤 조교가 소설을 읽다니……. 요즘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지?”
“그렇죠. 흘러가는 시간을 주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수님의 수사에 어울려드린 거고요.”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더니 그대로 닫는다. 펑 소리를 내며 닫힌 책을 서천은 있었던 자리에 도로 꽂지 않고 책상에 올려두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금단의 마술》.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관성으로 읽게되는 맛이 있는 작가다. 이번 책도 그답게 무난했다.
“한동안 대학 커뮤니티만 보느라 심심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감사드리죠. 하지만 저도 저대로 시간을 써서 어울려드린 건데……. 결과를 공유받을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일리는 있군.”
연우는 팔을 뻗어 책상 위에 표지를 보이고 누운 책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대학 커뮤니티는 익명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 익명의 누군가가 글을 올리면 익명의 또다른 사람들이 댓글을 단다. 댓글창에서 댓글을 작성한 이들은 댓글을 작성한 순서에 따라 익명1, 익명2 등으로 구분되어 불리고, 글작성자는 작성자라는 명칭이 붙는다. 이것이 익명 시스템에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소다.
글 A에서 익명2였던 사용자는 글 B에서는 익명4로도 불리고 글 C에서는 익명1로도 불린다. 익명2는 글 A에서나 익명2인 것이지 다른 글에서도 익명2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 A의 익명2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될까? 그에게 익명2 외의 라벨을 붙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하다. 사용자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 원래는 공격적이거나 해로운 사용자를 제 시야에서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 기능을, 연우는 반대로 사용자의 라벨링을 위해 사용했다.
글 A의 익명2를 차단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가 다른 글에 댓글을 남겼을 때 어떻게 보일까? 답은 ‘잘 보인다’다. 차단을 해도 보인다니, 그럼 차단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아니, 다른 효용이 있다. 그가 작성한 ‘글’은 보이지 않게 된다.
강 교수의 트랜스젠더 논란이 (논란이라고 일컫기에도 괴상하지만) 촉발된 후, 대학 커뮤니티에는 하루에 두 번 이상은 꼭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말이 두 번 이상이지 한 번 흐름이 시작되면 게시글은 열댓 개도 넘게 올라온다. 트랜스젠더가 뭐가 문제냐는 글도 있지만 우리 솔직해지자며 징그러운 건 사실 아니냐는 글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 시끄러운 흐름 안에서 여론의 시발점인 익명7은 분명 글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익명7은 문제가 된 댓글을 지우지 않고 있었으니까.
논란이 될만한 말을 한 마디 던지곤 그에 관심을 갖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런 기질을 가진 사용자가 겨우 댓글 하나로 만족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일리는 있네요. 익명7을 차단하면 익명7이 새로 작성하는 글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익명7을 차단하지 않은 계정과 비교하여 익명7이 어떤 글을 작성했는지 알 수 있다.”
일주일 전, 하는 일 없이 학교를 어슬렁거리던 윤서천을 보쌈이라도 하듯이 연구실로 끌고 왔다. 연우의 짤막한 설명을 듣고 그는 사건의 모든 개략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즉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수사’를 위해서는 학교 커뮤니티의 계정이 두 개 필요하다는 거죠. 계정 두 개를 오가며 올라오는 글들을 크로스체크할 사람도 필요하고요.”
“이해가 빨라서 좋은걸.”
스마트폰을 꺼내 학교 커뮤니티의 앱을 기동하던 서천이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왜 접니까? 교수님 학생한테 시키지 않고.”
“윤 조교만큼 인간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사람은 없거든.”
“잠깐 백수 좀 됐다고 이렇게 심한 말을 들어야 한다니 억울하네요.”
“농담이야.”
책상 서랍에서 공기계를 꺼냈다. 이번 수사를 위해 중고장터에서 얻어온 싸구려 모델이다. 대학 커뮤니티 앱 외에는 아무 것도 깔려있지 않다.
“윤 조교는 윤 조교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지?”
“정의?”
공기계를 받아든 서천이 새카만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했다. 정의라는 단어가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 건지를 묻는 듯했다.
“도 교수랑 몇 년 째 함께 살고 있지 않아.”
“…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성을 사랑하게 됐는데, 어떤 기분을 느꼈지?”
“처음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럼, 처음으로 남성을 사랑했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냐고 묻고 싶네.”
“…꼭 말해야 합니까?”
서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으로 대답은 되었다. 연우는 느긋하게 웃었다.
“윤 조교는 분해능이 좋아졌어. 그러니 믿고 맡기는 거야.”
익명7은 글을 계속 올리고 있었다. 혐오글 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글까지도. 이를 테면 과제가 어려운데 도와줄 사람 있냐고 묻는 글 같은 거. 계정 두 개를 오가며 학교 커뮤니티를 모니터링하던 서천은 해당 글을 보고 접근을 시도했다. 학부생 수준에서 어려워봤자 거기서 거기인 문제였으므로 오픈채팅에서 과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익명7은 자신의 분석화학 풀이 과정이 적힌 종이를 찍어보냈던 것이다.
대놓고 이름을 묻는 방법도 있기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의심을 느끼고 도망칠 우려가 있었다. 무사히 과제 도움을 마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프티콘까지 받은 서천은 익명7의 손글씨를 연우에게 전송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도 교수가 손글씨 과제를 내 주는데 그거랑 대조분석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연우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안면인식장애다. 자주 보는 사람이야 어찌어찌 구분은 할 수 있지만 일주일에 세 번도 보지 않는 학생들의 경우 학기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때문에 그녀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학생들의 얼굴 외 특징을 익히고는 한다.
그런 그녀에게 손글씨 대조야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여러 강좌를 떠맡은 도 교수는 그만큼 많은 학생들의 손글씨를 보유하고 있다. 도 교수는 연우에게 상황 설명을 듣곤 흔쾌히 손글씨 과제 건넸다. 연우는 그 중 분석화학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손글씨만을 추려내 서천이 얻어낸 손글씨 화상과 비교했다.
“정말로 같은 필체가 있더군. 만약 없었으면 윤 조교가 좀 더 수고해줬어야할 텐데, 다행이지.”
“다행이네요. 그래서 방금 호출하셨던 겁니까?”
“그래.”
익명7은 화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학점은 나쁘지 않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다. 연우가 맡은 유기화학 강좌를 수강한 적도 있었다. 기억에 없는 걸 보니 크게 인상적인 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연우의 호출을 받고 연구실로 들어온 그는 여느 학생이 그렇듯 약간 긴장한 채였다.
“진로 상담을 신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 그 학생은 물론 그런 건 하지 않았어.”
전산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신기한 노릇이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상담이나 좀 하고 가라고 연우는 말했다. 그는 교수의 말은 고분고분 들었다. 연우가 냉장고에서 꺼낸 페트병 녹차를 마시기도 했다.
긴장이 좀 풀리고 학생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가려고 하는데, 자교로 갈지 타교로 갈지 잘 모르겠다. 자교도 충분히 좋은 분들이 많으시지만 관심이 가는 연구 분야는 타교에 많다. 연우는 십몇 년간의 교수 생활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에서 적당한 말을 골라 대답해주었다. 학부생이란 겨우 이 정도 말로도 안심을 갖는 허약하고 작은 존재들이다.
“그리고 정말로 하려던 말을 꺼냈지. 최근에 강 교수 관련해서 말이 많은데 뭐 아는 거 없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군.”
“실토하덥니까?”
“좀 쪼아댔더니 뭐라 어물어물 말은 했는데 잘 안 들리더라고.”
“그래서요?”
“교수의 얄팍한 권위를 사용했어…….”
네가 지금 학과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동의 시발점이라는 건 다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 이후로도 틈만 나면 강 교수에 대한 비방중상을 서슴치 않았던데.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아는 경찰이 있거든. 이건 명예훼손이나 모욕으로 충분히 송치될 만한 건이래서 물밑조사를 좀 해 봤다. 아무리 익명 커뮤니티라도 공권력이 개입하면 데이터는 다 주게 되어 있어.
되도 않는 거짓말에 학생의 낯빛이 퍼렇게 물들었다.
앞으로 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충고를 하나 하겠다. 학계는 생각보다 좁아. 그리고 나는 학계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편이고. 네가 과연 어떤 교수 밑으로 들어가길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남을 헐뜯는 짓을 관두지 않는다면 넌 사전 컨택조차 성공할 수 없을 거다.
“얄팍한 혐오로 남을 비방하는 녀석은 말이지. 유치하지만 얄팍한 권위를 사용해서 짓누르는 수밖에 없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녀석이니만큼 직설적인 권위가 보다 효과적이기도 하고.”
“무서우시네요.”
서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서 그 학생은 납득한 것 같았습니까? 연구실에서 나오는 걸 보니 화가 잔뜩 난 것 같던데요.”
“학교 커뮤니티에서 또 강 교수와 관련된 말이 나오면 전부 네 책임으로 알겠다는 엄포를 놨거든. 그거 때문에 화가 났으려나?”
그 학생이 자신이 겪은 일을 남에게 말한다 쳐도 별일은 없을 것이다. 교수가 학교 커뮤니티를 확인하고 있다. 트젠 좀 욕했더니 공권력이 개입해서 수사를 벌였다. 그렇게 심한 욕을 쓴 것도 아닌데. 이런 소문이 교내에 퍼지면 결과적으로 학교 커뮤니티에는 남을 비방하는 글이 덜 올라오지 않겠는가.
간이 의자에 걸터앉은 서천은 잠시 책상을 내려다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북엔드도, 공기계도 없고 그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책상의 나뭇결이 있을 뿐이다.
“강 교수님은 이걸로 만족하실까요?”
서천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게 비방중상이 된다면, 당사자인 강 교수님은.”
새카만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렸다.
“‘이상한 사람’들은…….”
그러니까, 그를 포함한 사람들은.
연우는 생각했다. 분해능이 떨어지는 세계를 이미징했다. 그곳에는 촘촘하게 펼쳐진 스펙트럼이 없다. 기껏해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에 모든 사람을 대입하고자 하는 압제만이 존재한다.
단순한 모양의 원자조차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아주 좁은 범위의 파장만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인간은 서로에게 그런 배려를 베풀지 않는다.
왜 이런 진화를 거치게 된 걸까?
“수고했어. 윤 조교.”
닫힌 연구실 문 너머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천영의 파장이다.
“돌아가 봐…… 네 연구실로.”
서천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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