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너머
음~ 좋은 사람 만나면 그냥 술을 나눠받을 수 도 있고! 이런 곳과는 전혀 다르지?
“무지개 다리를 건넜어.”
이서의 그 답변은 기어코 비웃음을 샀다.
야, 저걸 말이라고 하냐? 꼴에 둘러대는 말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학급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저들끼리 치받고 뒤섞이는 와중에도 이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과 이서의 충돌은 얼마전부터 빈번해진 사건이었다. 심각한 사건으로는 이어지지 않아도 그들은 최근들어 더더욱 이서를 거슬려했다. 실상 이서가 그 무리의 신경을 긁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이들은 이서가 새삼스럽게 태도를 바꾼 것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고, 고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둘 사이엔 친밀한 교류라는 게 없다시피 했으니까. 이유라면 있었다. 이서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주기적으로 모습을 감춘다는 것. 전학에서부터 불행한 사고까지 명목은 다양했지만 결과는 늘 하나였다. 이서의 곁에 있는 아이들은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 중에는 무리아이들과 친한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
시시덕거리는 웃음소리가 잦아들때까지도 이서는 그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껏 부풀리려던 몸짓이 헛된 허세로만 비춰졌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무리의 아이들 중 몇은 오히려 우습게 보였을지 모른단 생각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개 중 처음부터 이를 악물고 있던 채이는 기어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비명과 닮은 괴성을 지르며 이서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년아!”
“내 친구 돌려내라고, 니가 잡아먹었지. 니가 끌고간거잖아! 무지개다리는 씨발 사람이 죽은게 장난이야?”
채이와 친하던 유주라는 아이는 이서랑 잠시 같이다니다가 거의 3주째 등교도 안하고 집에서도 안보이고 있댔다. 유주의 집에 찾아갈때마다 우울과 눈물으로 채이를 받아주던 유주의 부모님도 곧 채이에게 전혀 문을 열어주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채이는 이 모든 좌절감과 공포, 분노를 이서에게 그대로 쏟아부었다. 감사하게도 멀쩡한 채이의 두 양 손이 이서의 머리채를 붙들고, 힘이 잔뜩 들어간 두 다리가 채이를 지지했다. 채이는 분에 못이겨 더 거친 폭력을 사용하고 싶어보였지만 사람을 때리는 법을 아직은 알지 못하는 태가 나서, 그저 주먹질과 할큄, 쥐고 흔드는 것만이 반복했다. 이서는 반항도 않고 채이가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제대로 된 대거리도 하지 않는 것이 채이를 더 약올리고 있었다. 이서는 그저 간간히 채이의 눈을 찾아 바라봤고 두어번 더 그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 순간 높게 치켜올라간 손이 이서의 뺨에 내리꽂혔다. 거센 파열음이 교실에 울려퍼졌다.
적당히 좀 하라니까,
다른 모든 아이들, 심지어 나조차도 둘 사이에 들러붙어 두 사람을 붙들고 떼어냈다. 단조로운 주먹질 뿐이었는데도 폭행은 폭행이라 그 아수라장 속에서 기어코 어느 날카로운 손톱은 이서를 긁고 지나갔는지 채이의 손톱과 바닥에 점점히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있었다. 많은 말다툼이 있었지만 몸싸움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이 단체로 술렁거렸다. 피야, 피… 선생님 불러야하나? 너 미쳤어? 여기서 선생님을 부르면 혼나잖아. 그치만…! 내 품에 안겨 퍽 거칠어진 숨을 색색 내뱉던 이서의 고개가 곧 들어올려졌다. 이마와 눈썹 선을 타고 한 줄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서는 대수롭잖게 그것을 훔쳐내곤 채이를 위 아래로 훑더니 툭 하고 다시 불씨를 던졌다.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무지개다리가 있어. 너넨 모르겠지만.”
어떤 말을 했어도 채이는 참지 못했으리라. 다시 왁왁거리는 소란이 재개되었다. 마구잡이로 발버둥치는 채이를 진정시키느라 서너명이 더 달라붙었다. 움직임을 구속당한채 울부짖는 사람은 얼굴까지 뜨겁게 열이 올라 눈물을 줄줄 흘렸다. 흡사 짐승이라고 보일 정도로 믿을 수 없을정도로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반면 이서는 온순하게 나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고 기대어있었다. 채이가 다시 달려들던, 달려들 지 못하던,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시선 한 줌을 주지 않고 터진 볼 안을 혀로 쓸고있었다. 볼 밖으로 불룩한 것이 움직이는 게 눈에 보였다. 자기 피도 맛보는 걸까.
“보건실… 가야하는 거 아냐?”
주변에서 우물쭈물거리던 친구 하나가 얘기했다. 그 소리에 친구들을 다시 보니 그제야 은근히 이서가 이 교실을 나가길 바라는 눈치가 느껴졌다. 이서랑 한 공간에 있는 한 채이가 진정될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하고 싶지 않았던건 이서와 더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신 데리고 가주길 바랐는데. 난 최대한 무뚝뚝하게 보이기를 의식하며 이서를 밀어냈다. 야, 가자. 이서는 순순히 밀려나 제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섰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는 시점의 복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리 조용한 분위기가 될 수도 없고 교실 안과 달리 평화로운 소란이었음에도 나는 이서가 따라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추위를 느꼈다. 이윽고 수업 종이 칠 때 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중간에 이서가 사라지길 바랐지만 박자를 맞춰 뒤에서 울리는 규칙적인 발소리는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너랑 더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일부러 그래?”
그 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 좀… 제발 내버려 두라고.”
이서의 소동주기는 친구가 사라지는 주기와 거의 일치했다.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채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곧 채이도 사라지겠구나라는 직감이 스쳐지나갔다. 무지개 너머에 소중한 것이 가버렸기에 가는 길을 알아버린 사람은 발을 들일 수 밖에 없다. 처음의 이서는 무지개 너머에 개도 고양이도 들여놓지 않았었다. 이서는 아닌 것을 파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 다리는 동물들이 건너는 다리가 아니었으니까. 이젠 아무것도 없다는 말 대신 명확히 있는 사람을 제시할 수 있게 된 이서는 기뻐보였다…. 조금 더 가치있는 장소가 된 무지개너머. 설핏 보이는 얼굴은 부어터진 주제에 행복해보여서 저도 모르게 이에 힘이 들어갔다. 이서의 말은 좀 늦게 돌아왔다. 이서는 조금 수줍은 듯 머리를 살짝 꼬며 웃었다.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 게 기뻐… ”
솔직해져도 솔직해져도 날 비웃지않고, 믿어주고…
그래서 두려워하고 사람을 걱정하고… 나도 남도 내버려두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네 탓인 걸… 날 탓하고….
나는 채이처럼 이서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마음을 억눌렀다. 충동에 몸을 맡기지 못하는 것이 제 성격의 장점이라 믿고 살아왔는데 이서의 앞에 마주할 때면 그러한 특징이 다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당장 지금도 네가 끔찍하게 싫다고 외치고 싶은 동시에 이서가 그 말에 상처받을 지 모른다는 예감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억지로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하지 않고 삼켜내는 건 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서는 다시 한참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고르더니 결국엔 항상 하던 소리로 끝을 맺었다. 하. 소통할 수 없는 상대와 함께하는 곳은 보증된 낙원이래도 끔찍하게 변할텐데 난 결코 이서와 더 깊이 엮일만큼의 바보는 아니었다. 정말로 그러했다.
거기가 꽤 아름다웠나봐, 돌아오질 못하는 걸 보니까. 어련하겠어.
왜 나한텐 보여주지 않는걸까.
하지만 넌 돌아올거지? 같이 가자. 돌아올 사람은 분명 너 뿐일걸.
나한테 무지개 너머 풍경을 알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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