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After the rain

mcu 좋은 꿈을 꾸는 피터

- 퇴고 안했어용

- 의식의 흐름..

0.

그날 뒤로 피터의 일상은 비슷한 원들의 집합처럼 굴러갔다. 하지만 그 무엇도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지는 못하고 조금씩 일그러지거나 구불구불한 형태의 선이 겨우 형태를 유지한 것에 불과하다. 왼손이나 발로 그린다면 이 삶을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탄한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피터의 하루는거칠게 그어진 선이 만들어낸 동그란 하루일과표였다. 매일매일 다르지만 순찰을 돌고, 학업을 하고, 다시 순찰을 돌고, 일을 하고, 다시 순찰을 도는 그런 평범함으로 짜맞추어진 가짜 동그라미들은 아무리 열심히 해보아도 완벽하게 둥근 형태가 되지 못했다. 정말 완벽하게 부드럽고 다정한 둥근 원은 더 이상 피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피터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적어도 모난 파커의 귀퉁이를 타인에게 보이지는 말자고.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둥근 거미줄을 만들며 이웃들을 돕는 친절한 이웃이니까.

혼자서 할 수 있어요. 걱정마세요.

해가 지면 함께 가자는 맷에게 피터가 한 말이었다. 정말로 괜찮다며 웃으며 말했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모양인지 버릇처럼 입술을 혀로 훑는 맹인 변호사의 짙은 선글라스가 그의 눈을 가려주어 단호한 인상을 주었다. 꼭짓점이 없는 동글동글한 선글라스는 분명 다정한 생김새인데, 도톰한 입술에 힘을 준 탓에 꽤나 진지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마스크의 렌즈 너머로 그 입술과 수염이 올라온 턱을 보다가 다시 시커먼 안경알로 시선을 옮긴 피터는 정말 괜찮다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오히려 낮이 더 안전할 거예요. 맷은 밤이 좋겠지만 저는 낮이 편한걸요. 게다가 오늘은 수업도 없는 날이구요!”

아, 이거 너무 어려보인다. 잠시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매튜의 눈치를 살피던 피터는 결국 가볍게 튀어올라 천장에 제 발을 붙였다. 천장에 서 있으니 맷의 얼굴보다는 가슴께가 더 가까워져서 이상하긴 했으나 이 답답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서였다. 매앳—. 장난스러운 부름에도 진지하게 구둣발로 바닥을 차며 생각에 빠진 변호사 앞에서 스파이더맨은 결국 다시 창문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얼른 돌아보고 다시 과제도 해야하고 할 일이 많은 터라 차마 매튜의 결정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탓이었다. 창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다리를 밖으로 빼내어 창틀에 걸쳐 있던 사이에 뒤통수로 맷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터, 조심해.”

그 다정한 울림이 좋아서 마스크 아래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대답 대신 웹슈터 버튼을 눌러 건너편 건물에 거미줄을 고정해 창틀에서 엉덩이를 떼고 벽에 선 피터에게 창문 가까이로 온 맷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는 거야.”

허공을 향해 몸을 날리기 전에 피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끄덕임도 맷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라 믿으며 망설임 없이 얄팍한 거미줄에 의지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피터는 얇은 화학 섬유가닥에 제 체중을 온전히 싣고 몸을 날리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완성되지 못하는 원을 그리는 것과 비슷했다. 거미줄 끝이 중심으로 피터의 몸은 그 원을 그리는 연필이 되었다. 하지만 무수한 선만 반복되며, 구불구불 끝이 이어지지 않는 반원도 아닌 것을 누구도 둥글다 말해주지 않을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피터는 끊임 없이 거미줄을 만들어 제 몸을 더욱 멀리 더욱 크게 날렸다. 적어도 도시의 하늘 아래에서는 망가지고 모난 스파이더맨은 자유로웠다.

맷과 함께 알아낸 인신매매단의 정보는 늘 그렇듯 폐공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낡고 허름한 공장 지붕에 가볍게 톡 발을 대고 서 있던 피터는 벽에 몸을 붙여 작게 난 창문으로 얼굴을 힐끔 내밀었다. 더러운 창문으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내부는 먼지가 쌓여 오래도록 누군가의 손이 닿지 않은 모습이라 사실 가짜 정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맷이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주었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사람 냄새나지 않는 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 피터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보통 비명을 지르거나, 사람들이 몸부림을 친다거나 소란스러워야하잖아?

마스크를 쓰고, 슈트를 입고 있던 스파이더맨은 결국 폐공장 안으로 들어가 확인해보기로 했다. 데어데블이라면 진즉에 밖에서 사람들의 기척이나 숨소리를 읽었을 테지만, 스파이더맨에게 있는 것은 초인적인 힘과 거미와 같은 접착 능력. 그리고 피터가 여전히 피터 팅글이라고 마음 속에서 부르고 있는 위험을 예지해주는 감각 정도였다. 일단 들어가서 제대로 확인을 하고 맷에게 전화를 걸어 밤에 다시 살펴보거나 해야할 듯해서 스파이더맨은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오래된 창문은 창틀까지 깔끔하게 떼어내는 것도 간단했다. 힘을 주어 창틀 째로 그것을 떼어낸 피터는 거미줄로 대충 그 옆에 창문을 붙여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겠지만 적어도 몇 시간은 조용히 벽면에 창문이 붙어 있을 터였다.

“완전 유령의 집이잖아…! 유령 잡는 기계장치는 준비 못했는데.”

혼잣말로 농담을 뱉는 사이에도 주위는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피터의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먼지 쌓인 바닥은 정말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어서 역시나 잘못된 정보가 아닐까 싶었다. 일단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맷에게 연락할까 고민하던 피터는 잠시 발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무수한 먼지 속에 뒤덮인 짐상자들 사이에서 먼지 쌓이지 않은 부분을 발견해냈다. 보통 저런 상자들 사이에는 비밀통로가 짜잔하고 나오던데. 결국 상자를 조심조심 소리나지 않게 옮겨보기로 하던 피터는 그 일에 집중하느라 제 머리가 울리는 것도 눈치채질 못했다. 평소에도 뒤죽박죽으로 울리는 피터팅글의 감각에서 진짜 위협을 구분해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제 몸만한 상자를 하나씩 옮겨가던 피터는 문뜩 건물 위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피터팅글이 지독하게 울리고 있던 뒤였다. 분명 맑았는데. 천장이 있었는데. 캄캄해진 주변은 피터가 있던 폐공장이 아니었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높은 빌딩 사이의 유난히 낮아보이는 건물, 피터의 앞에는 몸보다도 커다란 전광판이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무거운 상자들은 어느새 보이지도 않았다.

비가 정말 많이 오던 날. 상처에 스며드는 빗물의 쓰라림보다도, 끝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빗소리보다도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더욱 크고 분명했다. 인물 뒤로 흐리게 보이는 부서진 건물은 피터가 알던 곳이었다. 여러 대학에서 보내온 불합격 통지서, 다 완성했는데 더미가 떨어뜨린 스타워즈 레고, 그래도 여전히 숨쉴 수 있는 따스한 공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둥글고도 부드러웠던 삶이 엉망이 되어버리다 못해 완전히 지워진 그날, 피터는 그곳에 있었다.

스파이더맨이 가는 곳마다 혼란과 참사가 잇따릅니다.

피터는 그 커다란 전광판 앞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얇은 천으로 이루어진 슈트를 적시고, 머리카락까지 모두 젖게 만드는 빗방울은 코끝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비명조차도, 몸부림조차도 보일 수 없는 깊고 안락한 구덩이었다.

1.

뉴욕에 이른 장마라도 시작된 모양인지 바깥에는 지독할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빗소리에 잠겨버린 골목은 작은 소리도 모두 삼켜버려서 시끄러운 동시에 참 조용했다.

헬스키친을 넘어 퀸스까지 떠들썩하게 했던 인신매매 사건은 빠르게 종결되었다. 몇 달을 범인조차 색출해내지 못하던 경찰이 갑작스럽게 수사종결 선언과 함께 범죄집단을 발견해내며 그 사건은 몇 주 만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뉴욕에는 범죄가 너무도 많았고, 실종자 대부분이 길거리를 헤메던 부랑자였던 탓에 그 사건에 큰 의미를 두는 이들이 많지 않았던 탓이었다. 구조된 이들은 여러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다시 일상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게 언론에서 전하는 유쾌하고 밝은 결말이었다.

이미 수사가 끝난 사건에 맷은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여러 피해자들이 다시 삶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피터의 소식은 없었다. 밝은 대낮에 정보를 믿고 먼저 그 장소로 갔던 스파이더맨의 소식을 아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교도소 철창에 들어가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범죄자의 멱살을 잡고 피터에 대한 소식을 묻고 싶었으나 교도소 내부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뉴욕 변호사면허를 지니고 있어도 법의 담벼락은 높고 높았다. 맷은 손끝으로 오늘자 신문을 더듬고 더듬으며 혹여 실종자를 발견했다거나 쓰러진 부랑자에 대한 작은 기사가 없나 살피고 있었다. 갓 인쇄된 잉크의 냄새를 풍기는 얇은 종이뭉치를 들고 사무실 문앞에 선 이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매튜는 계속 손을 움직였다.

“카렌, 오늘도 돌리러 갈 거예요?”

“당연하죠. 우리 사무실이 사람찾기도 특기라는 걸 보여줘야죠.”

전단지 뭉치를 품에 안은 카렌이 활기차게 답했다. 헬스키친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 한 장씩 받았을 게 분명해서 이제는 브루클린이나 퀸스에서 실종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카렌은 여전히 피터가 고의로 사라지지 않았음을 믿어주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맷이 그러했을 때처럼 피터의 낡고 작은 집의 월세도 감당하겠다는 그녀에게 그것만큼은 양보 못한다며 한 달치 월세를 대신 내어준 맷은 전단지를 돌리는 대신 신문과 기사를 매일 같이 살폈다. 아주 작은 기사로 인신매매 조직의 주요 인물들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 있을 뿐, 새로운 실종자를 발견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었다. 재판과정 중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 목을 매달거나 혀를 깨물어 죽어버리는 범인들은 평범하지 않다.

맷은 제 손을 거쳐간 다양한 범죄자들을 떠올리며 자살이라는 글자를, 거칠하고 질 나쁜 종이 위에 인쇄된 잉크자국을 한참 더듬었다.

“맷, 넌 나랑 교도소 가야하는 거 안 까먹었지?“

커피를 들고 카렌 옆에 다가온 포기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맷이 한참을 더듬던 글자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의 실종과는 별개로 넬슨 머독 앤 페이지 변호사 사무실은 여전히 굴러가야했다. 포기와 카렌에게는 성실하고 바른 아르바이트생이었던 피터 파커는 맷에게는 함께 길거리를 지키던 자경단원이었던 동료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매튜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였고, 포기와 카렌은 여전히 연고 없는 불쌍한 대학생이 납치되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잠적한 것으로 생각 중이었다. 흔적도 남아 있는 않는 피터의 억울함을 증명해주는 것은 그저 피터가 평소에 바르고 성실했다는, 고용주로서의 판단뿐이었다.

지독하게 쏟아지는 비를 우산으로 가리고 택시를 잡았다. 발걸음을 걸을 때마다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참방참방 물이 튀어올라 양말과 바지 끄트머리를 적시는 것을 맷은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갈라져야겠네요. 함께 나온 카렌은 오늘은 퀸스를 갈 예정이라며 버스정류장으로 방향을 돌렸다. 포기와 함께 택시에 오른 맷은 자동차 배기음과 빗소리 사이로 혹시나 놓쳤을지 모를 심장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몇 주째 이어진 맷의 정적에 익숙한 포기는 곧 만날 의뢰인의 정보가 담긴 종이를 팔랑이며 넘겨보고 있었다. 혹시나 피터가 정말로 자기 의지로 잠적한 것이라면, 그럼에도 그 아이는 여전히 스파이더맨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맷은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심박을 살피고 거미줄이 허공에 빠르게 쏘아지는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날 그렇게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맷이 한참을 감각을 택시 바깥으로 쏟아붓던 사이에 도착한 목적지는 어느 뒷골목보다도 냄새나는 곳이었다. 여러 죄를 짓거나 재판을 기다리는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교도소는 이제는 맷과 포기에게 법원만큼이나 익숙한 장소였다. 클라이언트가 늘 피해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세 사람의 변호사 사무실은 가해자를 위해, 혹은 정말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을 위해서도 열려 있었다.

교도관이 맷과 포기의 의뢰인을 데려오는 사이에 포기는 언제나처럼 냉정히 판단을 했다. 완전히 누명이라 주장하기에는 부족한 증거, 최대한 검사측과 협상하여 2년 정도로 받아보자는 이야기에 맷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여전히 웅성거리는 소리들. 맷에게는 교도소 안이 그 어느곳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비가 쏟아지는 밖과 완벽하게 불리된 두터운 벽은 빗소리를 견고하게 막아주는 동시에 내부의 소음을 가둬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도 죽게 될 거야.

법의 울타리 안에서 뒤섞인 수많은 목소리들 중에서 맷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괴롭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죽음을 눈앞에 둔 이의 목소리였다. 맷은 교도관에게 화장실이 있냐는 아주 단순한 말을 던졌다. 평소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변호사의 부탁을 맷이 맹인이라는 이유로 들어주고야만 교도관은 맷과 함께 접견실을 나와 화장실까지 친절히 안내를 해주었다.

포기가 분명 화를 낼 거야. 홀로 교도관용 화장실로 들어온 맷은 작게 한숨을 쉬고 주머니를 뒤져 얄팍한 검은 천을 꺼내어 눈을 가리고 머리에 둘러 묶었다. CCTV에 걸려서 잡히기 전에 끝내야 한다. 문앞에서 홀로 기다리는 교도관을 기절시키기로 마음을 먹는 매튜는 결국 넥타이까지 풀어 제 주먹에 감았다.

두터운 벽 안으로 들어온 데어데블은 두려울 게 없었다.

2.

피터.

맑게 개인 하늘은 정말 예뻤다. 구름이 살짝 껴 있긴 했지만 그 덕분에 반짝이며 그 사이를 가르는 햇살의 모습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피터는 그 모습을 괜히 휴대폰을 들어 사진으로 남겼다. 유리창에 여전히 빗방울 몇 개가 남아 있던 탓에 초점이 잘 맞지 않아서 결국 창문까지 열어야했다. 

“피터—!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아니?”

피터가 사진을 찍는 동안 결국 닫힌 문을 벌컥 열어버린 메이가 투명한 안경 뒤로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전히 웃음기가 스며든 표정이라 화가 나기 전이라는 것을 깨달은 피터가 카메라앱 셔터를 누르며 살짝 뒤를 돌아 외쳤다.

“죄송해요, 메이 숙모! 잠깐 하늘이 예뻐서요!”

“잠깐, 그건 아니야.”

다급하게 바닥에 던져진 티셔츠를 주워 입으려는 피터를 메이가 검지손가락을 내밀어 멈춰세웠다.

“피터 파커, 그 택시 티셔츠 입고 나갈 생각은 마.“

”안 어울려요?“

”잠옷 입고 다니는 애 같잖니.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허리에 손을 올리고 째려보는 메이의 눈치에 트렁크만 입고 있던 피터는 결국 옷장을 여는 체를 하며 메이를 힐끗 보았다. 그제야 미소를 짓는 메이의 모습에 피터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괜찮은 체크무늬 티셔츠를 찾아 입고, 편한 청바지를 찾아 입었다. 콜택시를 부르고 바삐 움직이는 메이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도 바빠보여서 피터는 조용히 창가 곁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다가 집앞 건물에 도착하는 노란색 택시를 발견하고 메이를 돌아봤다.

벌써 왔어요! 메이보다 먼저 집 계단을 급히 내려간 피터는 택시 뒤로 펼쳐진 하늘에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맑고 맑은 푸른 하늘 사이로 반짝이는 빛은 깨진 유리창을 닮아 있었다. 유리가 갈라지고 그 사이로 보이는 다른 빛깔들, 그것은 이 세상의 색이 아닌 것만 같았다.

“피터, 얼른 타렴. 늦었어.”

“네, 메이—!”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택시에 오른 피터는 빠르게 지나쳐가는 바깥의 풍경을 보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곁에 앉아 있는 메이에게 슬쩍 손을 건넸다. 에스코트 해드릴게요. 장난 섞인 피터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메이가 피터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올렸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을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것만 같아서 피터는 메이의 손을 꽉 쥐고 괜히 몸을 옆으로 숙여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피터, 이러면 내가 움직일 수 없잖니.”

“도착할 때까지만요…”

좁은 택시 안에 온 세상을 다 담은 것만 같다. 피터는 따뜻한 메이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살짝 돌려 메이를 보았다. 어깨를 내어주고 결국에는 한 팔로 피터를 감싸안은 메이는 불편한 자세로 택시 기사와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래도록 기다리던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메이의 목소리가 너무도 유쾌해서 피터는 그녀를 따라 웃음이 자꾸만 터졌다.

공항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 놓인 차는 택시 한 대가 전부였다. 커브도 유턴이 없는 오직 직선으로 곧게 이어진 도로는 어디든 이어진 것만 같으면서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처럼 주위 풍경이 반복되는 것 같기도 했다. 늦으면 안되는데. 걱정이 들면 메이가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며 피터의 등을 토닥이고 공항에서 마주할 이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벤 삼촌, 엄마, 아빠. 피터는 오래도록 잊고 살던 이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혓바닥으로 그들의 이름을 굴렸다. 부드럽고 달콤한 단어들은 피터의 혀끝에서 녹아 무엇보다 행복한 마법을 부렸다. 좁은 자동차 안은 무엇보다 완벽한 기다림의 공간이었다.

“피터는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해.”

메이의 손을 꼬옥 쥐고 있던 피터의 손에는 어느새 크레용이 들려 있었다. 여러 빛깔을 가진 크레용이 주위에 늘어져 있고, 조금 젊은 모습의 메이가 피터의 작은 손을 쥐고 함께 그림을 그려주었다. 새하얀 도화지에 그려지는 곡선들과 직선들. 피터는 작은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인자한 얼굴의 삼촌은 피터의 그림을 보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사이좋은 부부의 목소리가 피터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부모님의 것임을 깨달았다. 도화지에 여러 색으로 그려지는 곡선들은 이어지고 이어져서 둥근 반원의 빛기둥이 되었다.

“피터, 이게 무지개란다.”

발음을 하지 못하는 피터에게 명확하게 발음을 알려주며 메이가 말했다. 무지개. 맞은편의 벤삼촌도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 발음하며 피터를 도왔다. 반원의 빛깔은 끝이 결국에는 끊어져서 완성되지 못한 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피터는 작은 손으로 붉은 크레용을 쥐고 무지개 위를 덧칠했다. 거칠고 엉망으로 그려진 선을 보고도 대단하다며 박수를 쳐주는 메이와 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리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아서 피터는 작아진 두 다리를 힘차게 흔들며 그저 무지개를 그렸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창밖의 하늘은 여전히 아름답게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날의 하늘이었다.

3.

교도소에 그나마 죽지 않고 남아 있던 이의 멱살을 쥐었던 보람이 있었다. 맷은 저 스스로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내해줄 사람이 오기 전에 멋대로 움직였다가는 보안 경보가 울릴 모양이었고, 아무리 초감각을 가진 맷이라지만 이런 살벌한 경비를 뚫고 모든 문을 열고 다닐 수는 없었다. 결국 기다림이 해결책이었다.

데어데블이 협박을 했던 범죄자는 또 다시 죽었다. 맷은 그에게서 얻은 정보를 조합해 본인이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스파이더맨이 있음을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거미. 대미지 컨트롤. 우릴 죽일 거야. 제대로 아는 정보라고는 그러한 단어들이 전부인 말단에게서 맷은 피터의 실종 상태가 범죄자들에 의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했다. 대미지 컨트롤 이야기에 고개를 휘저으며 그곳이랑은 잘 지낼 수 없을 것 같다던 피터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던 탓도 있었다. 정부기관과 접촉해야한다는 것은 일개 변호사의 능력 권한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고해서 이대로 피터를 찾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교도소에서 길을 잃은 맹인 변호사를 연기하며 다시 포기의 곁에 돌아온 맷은 피터에게 다가갈 방법을 한참 고민해야했다. 그래서 향한 곳이 스타크 인더스트리였다.

피터와 스타크에 대한 관계는 모르지만, 스파이더맨이 어벤저스와 함께 일했다는 것은 꽤나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지던 사실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이는 누구도 없었지만 사라진 사람들을 되찾던 그 날, 그 자리에 피터도 있었음을 자주 그의 농담을 통해서 알고 있던 맷은 변호사 차림으로 당당히 스타크 인더스트리 CEO를 찾기로 했다. 헬스키친의 작은 사무실 변호사 따위가 만날 사람이 아닌 것이 당연했으나, 다행이도 맷에게는 해피의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토니가 스파이더맨의 슈트를 만들어 줬다는 흔적은 있지만, 정체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아요.”

페퍼가 말했다. 맷은 고개를 끄덕이고 접어둔 케인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명확한 것은 스파이더맨이 사라졌고, 그가 정부기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욱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미스터 머독.”

“…스파이더맨에게 가끔 스타크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이는 아니지만요. 적어도 함께 싸웠던 사람을 위해 조금의 친절을 바랄 뿐입니다.”

케인을 제 무릎 위에 두고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둔 맷이 페퍼를 향해 말했다. 토니 스타크가 죽은 뒤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어수선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분위기처럼 지쳐있는 그녀에게 맷이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에 대한 호소가 다였다. 슈트를 만들어줬다는 것말고는 스파이더맨이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가 남아 있지 않아서 피터가 아닌 스파이더맨의 영웅적인 부분에 대해서, 그리고 어벤저스와 함께 싸우지않았느냐는 신문과 뉴스로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재판에서 그러하듯 설득해야만 했다.

피터 파커를 지웠어요.

여러 밤을 함께 범죄자를 소탕하며 겨우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스파이더맨이 문뜩 말했다. 뉴욕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이런 사연은 처음이라 맷은 한참동안 말을 골라야했다. 피터는 맷의 사무실에 착한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스파이더맨은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다. 스파이더맨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즐겁게 하던 피터는 언제나 피터에 대한 부분에서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숙모가 계셨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혼자라는 게 피터의 설명의 전부였고 맷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넓은 도시에 고아는 많았다.

쏟아지는 비, 젖은 슈트. 비가 그칠 때까지는 있으라는 맷의 말에 마스크를 벗지 않고 있던 피터가 문뜩 제 이야기를 꺼냈다. 갈아입을 만한 옷을 꺼내어주는 사이에 피터는 젖은 몸으로 그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젖은 마스크에서 턱끝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과 부딪혀 더욱 잘게 부서졌다. 쏟아지는 비는 두꺼운 벽과 같아서 맷의 집안을 고립시켜주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피터의 체온과 물기어린 목소리, 아래로 흘러 쪼개지는 물방울. 피터의 심장 소리만큼은 크고 강인했다.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 단단한 마음, 잠깐 위로가 필요할 뿐이다. 피터는 조용히 맷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피터의 젖은 슈트의 물기가 맷의 옷을 더럽히고, 턱끝에서 흐른 짜디짠 물방울은 맷의 어깨에 떨어졌다.

괜찮아, 피터.

젖은 마스크가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을 가득 머금은 머리칼이 맷의 뺨의 간질이고, 피터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피터의 밑바닥이었다.

4.

저렇게 아름답게 무너질 수 있을까. 이제는 완전히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버린 하늘을 보며 피터가 생각했다. 저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이곳에서는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어서 피터는 그저 제 삶이 찬찬히 망가지는 것을 감상하길 택했다. 여전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벤삼촌은 신문을 읽고 계셨고, 곁에 앉은 메이숙모는 피터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뜬 피터의 세상은 여러 색으로 가득했다. 손 닿으면 부서질 것만 같던 빛깔을 지금만큼은 마음껏 만질 수 있었다. 스파이더맨이 부서뜨린 것도, 망가뜨린 것도 여기서는 모두 돌아와 있었다.

절로 새어나오는 웃음에 피터가 웃음 소리를 내면 메이도, 벤도, 얼굴 모를 부모님도 함께 웃었다. 행복한 소리로 가득 차서 다른 것은 끼어들 틈이 없는 세상은 아주 작고 완벽한 피터의 집이었다.

피터.

손에 닿는 온기가 따뜻해서 문뜩 제 손을 내려다본 피터는 메이의 부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피터.

눈꺼풀을 뜨고 있는데 자꾸만 무거워지는 몸이 이상해서 피터는 곁에 앉은 메이를 보았다. 메이의 뒤편으로 펼쳐진 지독하게 아름답게 무너지는 하늘, 그리고 메이가 죽었던 건물.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피터가 고개를 젓자 다시 세상은 원하는 빛깔을 건네주었다.

피터, 일어나.

“엄마아빠, 나쁜 꿈을 꿨어요.”

깨어나고 싶지 않아서 피터는 목소리를 모른 체하며 부엌에 있는 부모님을 불렀다. 괜찮을 거라며 말해주는 목소리가 지독하게 따스하고 그리워서 오래도록 잊었던 것들을 모두 품에 껴안은 기분이었다. 침대 아래에 굴러떨어져서 사라졌던 인형, 처음으로 스타크씨에게 받은 슈트, 벤삼촌의 오래된 가방. 아냐, 슈트는 빼자. 그건 스파이더맨을 위한 거잖아. 피터는 다시 제 세상을 그려나갔다. 완벽하게 곡선이지만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허상의 집, 빛의 굴절로 만들어진 아늑한 구덩이는 피터에게 딱 어울리는 무덤이었다.

5.

 평범한 병실이지만 동시에 다른 공간이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닌 매튜는 이곳의 벽이 무엇보다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피터가 깨어나더라도 이것을 제 힘으로 열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안내를 위해 팔을 잡아주는 친절한 의사가 문 옆에 있는 키패드를 두드리는 소리를 유심히 들으면서도 그저 보이지 않는 듯 빙긋 웃어보였다. 보안이 상당한 시설답게 벽 안의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꽤나 큰 집중이 필요할 듯했다. 혹시나 모를 또 다른 일을 대비하기 위해 맷은 주위를 괜히 감각으로 훑어보며 의사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아주 느긋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 옅은 호흡. 소독약 냄새와 뒤섞인 체취는 마지막으로 느꼈던 때보다도 더 옅고 희미했다. 맷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가 피터라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보다도 더 마른 체형이나 흐린 심장 소리가 피터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아서였다. 부스스한 머리칼 아래로 천천히 끔뻑이는 두 눈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피터의 심장 소리에는 변화가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걸까. 피터에게 다가간 맷은 피터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장치를 알아차렸다. 수갑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두껍고 튼튼한 것이었다.

“스파이더맨이 깨어 있긴 하지만 대화는 안 될 거예요.”

맷의 손이 피터의 손목을 묶고 있는 장치에 가 있는 것을 본 의사가 차분히 말했다. 장치를 지나 닿은 손끝은 얇고 차가웠다. 피터의 체온이 평소에 높은 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저체온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여서 맷이 의사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그저 덤덤히 상태를 설명할 뿐이었다. 발견되었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결국 약물로 재워서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말이었다. 히어로, 혹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사고라도 쳤다가는 다시금 언론의 몰매를 맞을 것을 인식한 기관의 대응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맷은 피터의 팔뚝에 꽂힌 여러 주삿바늘과 그것과 이어져 있는 여러 약물이 피터가 정신차리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건 불법입니다. 게다가 아직 어린 나이라 알려지면 조용히 넘어가지 못할 텐데요.”

“제 권한이 아니어서요. 저는 명령 받은 대로 할 뿐이죠. 이게 최선입니다.”

안내를 해준 이는 이제 제 역할을 마쳤다는 듯 병실을 나가버렸다. 보안을 자신하고 있는 게 틀림 없는 태도였다. 맷은 피터의 팔에 꽂힌 바늘들을 조심스레 더듬어 보았다. 뚝뚝 떨어져서 조금씩 몸속으로 흡수 되고 있는 다량의 진정제와 진통제는 일반인이라면 사경을 헤메게 만들 것이 분명한 양이었다. 손목뿐만이 아니라 발목에도 족쇄 같은 것이 있는 게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맷은 스타크인더스트리의 이름을 달고 왔음을 애써 상기하며 주삿바늘을 모두 빼내지 않기 위해 제 성질을 눌러야만 했다. 맷이 제 앞에 서 있는 동안에도 피터는 그저 눈을 천천히 뜨고 감을 뿐이었다.

“피터. 피터, 일어나.”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으며 맷이 말했다. 거칠어진 피부는 매튜가 기억하던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표정 없이 굳어 있는 입매도 평소의 피터답지 않았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혈류와 느린 움직임을 따라 살랑이는 머리칼. 체온이 낮은 두 뺨은 파리하게 시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이대로 피터를 데리고 나갈 수도 없다. 맷은 하얗게 질려 있는 피터의 손을 꼬옥 쥐고 고개를 숙였다. 세계적인 대기업, 동시에 세상을 위해 희생한 영웅의 회사라는 것은 꽤나 큰 위치였지만 정부기관보다 더 위에 존재할 수는 없다. 공포가스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몇 년 전 건물 폭파 사건에 연관 있을지 모를 스파이더맨을 안전히 체포해 데리고 있을 뿐이라는 변명 앞에 법은 무너질 뿐이었다. 피터가 제대로 말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포기와 카렌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맷은 스파이더맨을 빼고 피터가 이곳에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보았으나, 이 기관에서조차 피터는 스파이더맨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환자를 감금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능력을 가진 이를 사회의 위협이 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논리 앞에서는 인권도 무엇도 통하지 않는 게 최근의 망가진 법망이었다.

겨우 미성년자를 벗어난 피터는 이 삶에서는 영원히 스파이더맨이었다.

6.

붕 떠 있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피터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메이를 불렀다. 아늑한 집은 무너지고 주위는 부서진 건물 잔해로 가득했다. 안돼요, 메이. 다급히 찾아보지만 늘 그렇듯이 이미 다친 뒤였다. 스파이더맨이 손대는 것은 망가져버린다. 떨어져가는 약기운은 다시금 피터를 그곳으로 끌어당겼다.

넌 재능이 있고, 힘이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여기였다. 차라리 제가 대신 죽을게요. 몇 번이고 말해보아도 메이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다시 돌아온 그곳에서 피터는 메이를 껴안고 눈물만을 흘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메이의 뺨에 닿고 흐르지만 늘 들리는 말은 같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거란다. 차가워지는 메이의 앞에 머물고 싶어서 애써보지만 다가오는 발걸음에 저절로 제 몸은 메이를 그곳에 두고 도망치고 있었다. 무엇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은 허상보다 차고 날카로웠다. 커다란 전광판으로만 볼 수 있던 메이를 두고 온 부서진 건물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았다. 피터는 여전히 그날에 갇혀 있었다.

“나 때문이야.”

피터는 제 분노가 향해야할 방향을 알았다. 잘못한 것은 메이도, 빌런들도, 아이언맨도 누구도 아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은 피터 벤자민 파커 본인이라고, 피터는 생각했다. 거미에 물린 순간부터 주위에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쏟아지는 빗물에 젖은 뉴욕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피터는 비가 그친 뒤에 결국엔 혼자 남을 것을 알고 있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색의 하늘은 스파이더맨만이 남은, 피터 파커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모난 파커의 귀퉁이는 언제나 제 몸을 찌른다. 나만 희생한다면, 없어진다면 모두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피터가 뜯어낸 링거 바늘로 제 목을 찌르기 전에 다행히 약효가 들었다. 매튜는 다시 조용히 눈을 끔뻑이며 얌전해진 피터를 꽉 안고 병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주삿바늘을 쥐어뜯고, 제 몸에 바늘을 쑤셔넣으려던 괴력은 사라지고 다시 얌전해진 피터는 맷의 품에서 쌕쌕거리며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대로면 결코 피터를 빼낼 변명조차 만들 수 없다. 진정제가 몸속으로 흡수되며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던 피터는 다시 얌전히 제 몸을 맷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아까까지 흘리던 눈물은 뺨에 말라붙고, 맷의 셔츠에 닦여서 붉은 자국만을 남겼다.

“피터…”

거칠게 바늘을 뜯어낸 팔뚝에는 핏방울이 흘렀다. 날카로운 끝을 타인에게는 대지 못하면서 스스로에게는 겁없이 향하는 피터를 말릴 수 없던 맷은 그저 무너지는 피터를 눈앞에 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스파이더맨이 공포가스 몇 방울로 망가졌다 생각할 것이다. 가볍고 금방이라도 부러질듯 약해진 피터의 몸을 두 팔로 감싼 맷은 한참을 그렇게 바닥에 앉아 있었다.

“맷…?”

다시 아름답게 변하는 하늘을 보며 피터가 문뜩 그 이름을 불렀다. 분명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을텐데, 몸을 감싸주는 온기에 맷을 떠올렸다. 분명 곁에는 메이 숙모랑 벤 삼촌이 있는데 참 이상한 일이지. 피터는 다시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메이도, 벤도, 보이지 않는 부모님도 모두가 미소를 지어주는 지독하게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피터가 만들어낸 무지개의 반쪽은 현실에 있지만 이름을 부르면 그래도 곁에 존재하는 기분이 들어서, 피터는 몇 번이고 맷의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따뜻한 그런 곳, 피터는 아름다운 하늘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피터.”

맷은 피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피터를 껴안고 있었다. 힘 없이 무너진 피터를 어떻게 일으켜 세워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을지 그 무엇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미 부서진 피터를 두 팔과 몸으로 감싸 안는 게 전부인 맷은 두꺼운 문너머로 다가오는 이들의 발소리와 쌕쌕거리며 잠에 빠져들려는 피터의 여린 숨소리를 들었다. 다시 보러 올게. 거친 뺨에 입술이 닿은 줄도 모르고 피터는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몇 번이고 매앳, 하고 이름을 불렀지만 그뿐이었다.

표정을 보지 못하는 맷 앞에서, 온전히 맷을 향해 있는 피터의 시선은 지독하게 아름다운 빛을 보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에는 꼭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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