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생을 덮칠지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너는 바다가 깊다는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이 어둡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어.

여느 때처럼. 고개를 처박고 시커먼 물만 들여다보던 나처럼.

사랑아, 너는 깊이 사랑하던 것들로도 잡히지 않는 사람이라서

팝콘처럼 쏟아지는 벚꽃을, 가장 좋아하는 수박을, 가을 중간쯤의 생일을,

크리스마스와 설과 달력에 흩어놓은 작은 빨간 날들 같은 것을.

깍지껴 잡았던 손과 품에서 품으로 나눴던 온기들을 하나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사람이라서

나는 어떻게 너를 잡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무엇이 너를 붙들 수 있을까. 무엇으로 너를 붙들 수 있을까.

바닥에서 바닥까지 뒤져도 여기엔 잡살뱅이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글 몇 자와 미지근한 숨. 네 걸음을 멈추기엔 한없이 초라한 것들.

그러나 사랑아, 네가 먼저 무지개를 보러 가자고 했잖아.

살면서 한 번도 무지개를 본 적이 없다는 말에 그럼 이번 여름은 함께 무지개를 보러 가자고 했잖아.

유채꽃 대신에, 귤이나 노을 대신에 태연하게 거기 없는 것을 말했잖아.

바다가 너무 깊다고 하늘이 너무 어둡다고 말하는 나를 네 가는 손가락으로, 솜털 같은 목소리로 단단히 움켜쥐었잖아.

촘촘한 속눈썹으로, 서늘한 품으로, 구부러진 두 팔과 뜨거운 입술로, 모든 것으로 힘껏 끌어 안았잖아.

내내 사랑으로 내리눌렀잖아.

여름을 여덟 번 보내도 나는 여전히 무지개를 본 적이 없어.

그러니 사랑아, 여름엔 무지개를 보러 가자.

나란히 서서 하염없이 하늘을 보자. 날 닮은 구름을 찾고 널 닮은 무지개를 찾자.

땡볕 아래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자. 땀에 젖은 옷자락이 팔락일 때까지 둘이 한참을 그러고 있자.

마당에 고양이를 쓰다듬어주자. 비어버린 통장을 보며 투덜대다가 그래도 오길 잘했다고 웃어버리자.

바다가 보이는 평상에 드러누워 입을 맞추자. 까슬한 살갗을 어루만지고 뺨과 목덜미를 맞대며 숨을 나누자.

비가 주룩주룩 오면 찬 마루에 엎드려 귤을 까먹자. 네가 좋아하는 재즈를 크게 틀고 나는 시를 쓸게.

서로 손가락을 얽고 파도가 살랑이는 바위 끝에 앉자. 짠 물에 쓸려가면 잡은 손을 힘껏 당길 수 있도록.

떠밀리고 부서지고 잠겼다가 함께 떠오르자.

떠오를 때까지 내내 함께 있자.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그러자.

다시 여덟 해가 지나도록 무지개를 보러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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