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것이 부서지면
룸메이트가 자살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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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은 오늘 새벽 늦게 잠들었다. 다미가 인생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다미가 울면 그 틈을 타 우선 오늘은 자고 내일 생각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멍하게 주절거리기만 하는 탓에 거의 아침이 되어서야 쓰러지듯 잠들게 되었다. 다미는 지은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의 우울을 넘겨 버리는 노하우를 아는 것은 다미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에 얼굴을 박고 마른 먼지 냄새가 젖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고르다 죽을 준비를 시작했다. 자살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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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온 뒤 하루도 잠자리가 편했던 적이 없다.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 복층의 낮은 천장과 싼값에 장만한 이부자리 탓도 있겠지만 주된 원인은 정신병이 심한 룸메이트 때문이다. 지금 느껴지는 손목의 구속감은 또 어떤 창의적인 발상일까. 조금 움직여 보니 바란다면 금방 풀릴 것 같아 어울려 주기로 했다. 길게 한숨을 쉬고 눈을 뜨니 미친 신다미가 두 손으로 식칼을 쥐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미안해, 지은아. 나는 너를 죽여야겠어.”
“정말 기막힌 발상이다.”
제대로 먹지도, 운동은 커녕 움직이는 일도 드물어서 밧줄을 묶는 힘도 시원찮은 애가 토마토 하나 제대로 안 썰리는 뭉툭한 칼을 들고 내 살을 가르고 쑤시겠다니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진심일까? 시선을 맞추고 싶었지만 고개를 푹 숙여 눈이 보이지 않았다. 손과 호흡이 떨리고 있는 걸 보면 진심일지도.
“나는 내 나름대로 너한테 최선을 다해 잘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네.”
“그럴 리가 없잖아! 착각 같은 말 하지 마.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더 속상해.”
“그럼 너무 잘해 줘서 죽이겠다는 거야?”
“비슷해.”
2
그 세 글자를 뱉을 때 다미의 몸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은의 손목을 묶을 때 삼킨 알약의 젤라틴 껍질이 내장 속에서 거의 녹은 것이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파란 액체 같은 게 퍼져 피가 자주색이 되는 광경이 다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무지개의 끝에 보물이 있다는 말이 있잖아.”
다미가 그렇게 운을 떼자 지은은 익숙하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역시 익숙한 정신병 필리버스터의 변형 버전이었다는 확신이 섰다. 보통 다미가 갸륵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적당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동조하는 몇 마디를 얹어 주고는 했는데, 지금도 그래야 하나? 나는 손목이 묶인 채 살해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야 하나? 다미는 지은이 고민하는 중에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이야기에 집착했어. 무지개의 끝이 어디지? 왜 사람들은 무지개의 끝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지은아, 그거 알아? 무지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흔해. 지금 당장도 바란다면 무지개를 만들 수 있어.”
“그것참 잘됐네, 다미야. 결국 보물은 우리의 평범한 삶 안에 녹아 있다는 뭐, 그런 결론인 거지? 이제 이것 좀 풀고 같이 무지개나 만들어 보자.”
그때 다미도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지은이는 정말 착하단 말이야. 금방 풀 수 있으면서 내가 속상해할까 봐 묶여 있는 시늉을 내 주고. 아쉽게도 우정, 감사, 이런 따뜻한 마음과 생각은 장기의 고통 참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지러웠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자유로워졌다. 물에서 뭍으로 빠져나오는 것처럼. 무거운 목욕탕 증기와 맞바꾼 창밖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는 듯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래. 무지개의 시작과 끝은 아주 깨끗한 것이야. 공기에 있는 물방울이나 투명한 유리 같은 거 있잖아. 그게 완벽하게 배치되어 있으면 무지개가 만들어지지. 아니면 아예 부숴 버리거나. 깨진 유리 파편이 놓인 바닥에 작은 무지개가 그려지는 걸 본 적 있지? 나는 그런 걸 하고 싶어.”
다미는 우느라 호흡 조절이 되지 않았던 어느 밤처럼 헐떡이고, 버벅거리고, 몰아쉬듯 이야기했다. 지은은 그제서야 조금 두려워졌다.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는 이 좁은 복층 침실 안에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나를 깨트리겠다는 말이지? 내가 너에게 물방울이나 유리처럼 아주 깨끗한 것이니까?”
“너를 만난 건 내 인생의 기적이야.”
“그럼, 그렇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묻는 지은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가는 몸을 달구는 체열과 구별되어 부드러운 온도로 다미에게 가닿았다. 그 온기의 정체는 기쁨이었다. 지은은 그게 무엇이든 다미가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는 것이 기뻤다. 여기에 온 뒤로 하루도 잠자리가 편했던 적이 없지만 다미가 곁에 없었더라면 아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지은은 기뻤다. 다미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지낸 모든 날 중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때 다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3
무지개는 깨끗한 것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기름 섞인 구정물에 무지개가 떠다니는 걸 본 적 있지? 더러운 유리 문 틈새나 심지어는 투명하지 않은 CD 뒷면에도 무지개가 생겨. 중요한 건 빛 아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어떤 것이든, 아주 밝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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