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같은

나는 by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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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로맨틱 에이섹슈얼.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레즈 그런 거야. 아~ 그거랑은 달라? 응, 여자랑 사귀고는 싶지만 자고 싶지는 않아. 그럼 너 X자야? 그건 아니고. 에이, 네가 아직……

“남자를 못 만나 봐서 그래.”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먹어 보지도 않은 반숙 계란후라이를 눈 앞에 두고 ‘나는 완숙만 먹어.’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말했고. 지금은 완숙보단 반숙 계란후라이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혹시 모르지. 내가 남자를 만나면 그와 입을 맞추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자고 싶을지도. 너 티발 씨야? 응, 나 인티제. 보통 그럴 때는 네가 뭘 아냐고 화를 내야 하는 거야. 틀린 말도 아닌데 내가 왜?

재밌는 일화가 생각났다. 때는 바야흐로 2019년 12월. 대입 수시 카드 6장을 모두 논술 전형에 올인한 미친 사람이 방금 세 번째 학교 시첨을 치고 나왔다. 캠퍼스가 좁기로 유명한 한국외대였다. 누군가 다가왔다. 제가 대학교 동아리를 하고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그건데. 그 때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순진했다. 그 사람과, 같은 동아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내 성적 지향성을 밝혔다. 그들은 당황한 것 같았다. 납득했다. 높은 확률로 헤테로로맨틱 헤테로섹슈얼일 그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남자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고 대답했다. 성적 지향성이라는 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들이 안심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나의 비밀 하나를 털어 놓았다는 사실이 기뻐 그들에게 내 속내를 술술 불었다.

“친구들이 신천지 조심하랬는데. 그런 거 아니신 것 같아서 좋아요.”

그 다음 날부터 그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웃기게도 그 사실을 이 주가 지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신천지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날로부터 한 주가 더 지나서였다. 그 때 내가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는 없다. 그냥 하나의 웃긴 에피소드일 뿐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퀴어 치고 너무 스트레이트들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도 소수자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상’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고 자신을 ‘비정상’으로 정의하는 것. 맞지, 나는 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지, 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딱히 나의 소수자성을 숨길 생각이 없다. 누가 너 레즈냐 하면 대충 그거 비슷한 거라고 대답한다. 호모로맨 어쩌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게 더 쉬우니까. 어쩌면 일종의 체념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딱히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지개 같은. 무지 개 같은. 퀴어인 사람 중에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아, X 됐다. 그럼 난 여자이면서, 아시아인이면서, 성소수자이면서, 저소득층인 거잖아. 인생 무지 개 같군. 일곱 빛깔 다채롭게 소수자스러워서 좋네. 딱 한 번 띄어쓰기로 의미가 정반대로 바뀌는 것이 마음에 든다. 그것이 꼭 우리 같기도 하고. 무지 개 같고 무지개 같은 인생. 어느 한 쪽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 테니까. 그러니까 가급적 무지개 같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무지 개 같은 날이 왔을 때 버텨낼 힘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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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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