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NGE

6월 1주 :: 무지개

OC

너도 긴장 같은 걸 하나 봐.

무대 뒤에서 숨을 고르던 마린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럴 때 긴장 안 하는 사람도 있어? 애초에 네가 그런 말을 할 형편은 아니잖아, 베르타. 너야말로 긴장 같은 건 조금도 안 하는 것 같고. 오히려 내가 비결을 묻고 싶을 지경이라니까. 베르타는 과연, 무감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마린이 푸념하듯 쏟아내는 말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대를 앞둔 얼굴로는 안 보였다. 그냥 무대도 아니고, 전국에 생중계되는 무대인데. 비결이랄 것도 없어. 그냥 하는 거지. 뱉는 목소리도 꼭 그렇게 침착한 것이 퍽 얄밉게 들렸다. 입을 삐죽 내민 마린이 제 팔짱을 단단히 꼈다. 입꼬리를 올려 웃은 베르타가 그 모습 보더니 물었다. 뭘 준비했는데? 마린이 퉁명스레 답했다. 안 알려줘. 베르타가 답했다. 아, 그래. 마린은 생각했다. 이거 정말 짜증나는 녀석이야. 베아트릭스만 불쌍하다니까. 결국 오만상을 한 채 다시 입을 연 건 마린 쪽이었다. 무지개. 간결하게 뱉은 단어를 덧그리듯 마린이 앞으로 손을 뻗는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둥근 호를 그려낸 손끝이 정면을 가리켰다.

무지개를 만들 거야.

무난하네.

이럴 땐 센스가 좋다고 하는 거란다.

그런가? 그렇다고 하자.

……. 노려보는 시선을 느낀 베르타가 뻔뻔하게 미소지었다. 무난한 게 낫지 않아? 물어오는 소리에 마린은 입이나 다시 삐죽 내밀었다. 아니지, 기왕이면 뭔가 특별한 걸 하고 싶잖아. 건국제는 1년에 한 번 뿐이고, 이 공연을 보려고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직접 보러 와 준 사람들도 있는데. 오래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종알대는 목소리가 맺어진 뒤에야 건조한 미소를 건 채 다물렸던 입이 벌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긴장하는 거야, 밀러. 사실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무난한지, 센스가 좋은지, 특별한지…… 그런 것들. 마린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베르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

말장난 같네.

하지만 사실이야. 며칠만 지나도 다들 잊어버릴 테니까.

안 그럴걸? 다 기록으로 남겨두잖아. 우리보다 훨씬 예전 것까지 다 있는 마당에.

그래서 넌 3세대 전의 물의 타이머가 건국제에서 어떤 공연을 했는지 기억해?

……. 마린은 입을 다물었다. 슬슬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직원이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향해 발끝을 돌린 채, 마린은 베르타를 향해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나 별로 안 좋아하지?

내가?

시치미 떼지 마.

별 생각 없어. 그냥 직장 동료 정도.

…….

꼭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 그러셔. 난 슬슬 네가 왜 나를 싫어하는지까지도 알 것 같은데. 마린이 퉁명스럽게 뱉었다. 내가 베아트릭스랑 친하게 지내니까 질투하는 거지? 베르타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그러나 머잖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설마. 마린이 고개를 돌렸다. 무대로 오르는 계단을 향해 옮기는 걸음에는 그 답이 영 불만스럽다는 기색이 선명히 서려 있었다. 베르타는 잠시간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내 한 켠에 설치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무대 위에 선 마린은 언제 찌푸린 얼굴이었냐는 양 파트너의 곁에서 웃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낸 손 끝에서부터 물방울이 만들어졌다. 그 궤적을 따라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커다란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석에 앉은 어린아이들이 웃으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MC가 건넨 마이크를 쥔 채, 마린이 그 앞에서 말했다. 무대를 보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여러분께 잊지 못할 하루를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베르타는 웃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다.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 별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 떨며 의미부여 하는 건. 카메라가 관객석의 아이들을 화면에 비추었다. 눈을 빛내며 웃는 얼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자 베르타는 모니터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냈다. 무대 위로 내려앉았던 무지개가 사라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억도, 기록도 결국에는 저리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베르타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정말로 이 순간을 제법 오래도록 기억할 거라고, 찰나의 신기루에 불과한 광경에 의미를 담아 소중히 간직할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고 보면 어쩐지 속이 메슥거렸다.

짧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샜다. 베르타는 언제나처럼 ‘편한’ 길을 택했다.

하나, 둘……

셋.

권능이 소리 없이 가위질을 한다. 기억이 비어버린 자리에 도주로가 열렸다. 베르타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졌다.

몇 주 뒤, 인터뷰에서 기자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좋아하는 걸 물어보는 건 식상하니까. 싫어하는 거 있어요?

베르타는 문득 무지개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 이유를 떠올려 낼 수는 없었다. 베르타가 알기로,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걸 굳이 떠올려내서 좋을 건 없었다. 베르타는 생각을 이어가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대체로 남들이 싫어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웬만하면 별 생각 없어요. 무난한 답변이었다. 그정도가 딱 좋았다. 느슨하게 깍지 낀 손이 아래로 기울어진다.

그럼에도 가끔은 다시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찰나에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뒤에도 기어코 흔적을 남기는 어떤 것들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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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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