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찌뽕
6월 1주차 주제 「무지개」
““그런데 어제 말이야… 아!””
대화를 하다 동시에 말이 겹치는 경우, 상대보다 먼저 외쳐야 하는 말이 있다.
“찌찌뽕! 무지개!!!”
“아, 늦었다! 아, 아파 좀 살살해! 아으아, 빨강빨강…”
“얼른 찾아~”
친구가 무지개색을 찾는 걸 여유롭게 기다리며 있는 힘껏 팔을 꼬집는다. 어린 시절의 놀이 중 하나였다. 핸드폰이 없어도, 게임기가 없어도, 이런 별것도 아닌 걸로 우리는 온종일 웃으며 지낼 수 있을 만큼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건~ 절대 없어~ 라고.
초등학교 때는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각별한 사이였던 우리는 다른 중학교에 가며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우연히 같은 고등학교에 온 현재에 이르러서는 생판 모르는 남인 것처럼 지내고 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 하나 나누지 않는, 남처럼. 인제 와서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고…
옛 추억은 저 깊숙한 곳에 묻어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하교 중 톡톡 떨어지던 빗방울이 손을 쓸 틈도 없이 굵어져 소나기가 되어버린 그 어느 날. 우산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머리 위에 두 손을 모아 만든 간이 우산에 의지하며 발걸음을 서두르던 나는 눈앞에 이제 더는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버스 정류소를 발견해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역의 간이 대기실을 떠올리게 하는 사방이 막힌 그 정류소는 비를 피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후… 응?”
물기를 털며 안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애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어렴풋이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간신히 교복을 보니 우리 학교 학생이다. 이어폰을 낀 상태로 벤치에 누워있는데 아주 편해 보인다.
젠장- 하나밖에 없는 벤치를 뺏기다니!
사실 뺏긴 건 아니지만, 자신에게 그런 지적을 하며 문 바로 옆의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았다. 차갑긴 했어도 물기가 없는 것만으로도 땡큐였다. 바닥에 앉은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엄마한테 문자를 했다.
[움맘망~ 나 지금 은별 아파트 앞에 안 쓰는 정류장 안인데 우산이 없어서ㅠㅜ 데리러 와줄 수 있어??]
잠시 뒤 답장이 온다.
[엄마 오늘 금요일이라 성당~ 소나기라 금방 그친다고는 하는데 친구 있으면 우산 씌워달라고 해~^^]
씌워줄 친구가 있었으면 이런 문자 안 했겠지… 한숨을 한번 쉬고 문자 앱을 종료한 뒤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본다. 금방 그친다는 소나기는, 마치 자신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아직도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
빗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말소리가 들렸다. 전화라도 하나? 힐끗 벤치 쪽을 쳐다보니 그 애는 일어나 앉은 상태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설마 나?
“왜 바닥에 앉아있어. 말했으면 일어났을 텐데.”
듣기 좋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 내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옛 추억이었다.
“어, 어… 응…”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애의 옆에 가서 앉는다. 설마 옛 추억이랑 이렇게 재회하게 되다니… 아니지, 매일 복도에서 마주치고 있으니까 재회라고 하기는 어려운가? 아니, 아니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어색하다.
어느새 그 애는 귀에서 이어폰도 빼고 핸드폰도 쳐다보지 않은 채 내 옆에 얌전히 앉아서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만이네~ 잘 지냈어? 하하…ㅎㅎㅎㅎ…”
어색함을 날리기 위해 어버버 웃으며 말을 걸어봤다.
“오랜만인가? 오늘도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그,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지 않나~ 해서…”
“…누가 일방적으로 씹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윽…”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소원해진 우리 관계는, 나의 일방적인 선긋기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쪽도 그걸 눈치챈 것 같다.
“나는 같은 고등학교인거 알고 기뻤었는데 너는 아니었나봐.”
“그건, 아니었어…”
“그럼 왜 피했던 거야?”
“…미안.”
“됐어, 사과받으려고 하는 말 아니었어. 그냥… 그냥 나는 아직 널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엄마를 통해 같은 고등학교라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뛸 듯이 기뻤다. 예전처럼 다시 같이 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 후 반에 찾아가 마주한 그 모습은 내가 알던 몇 년 전의 그 아이와 너무 달랐기에 위화감이 들었다. 나와 비슷했던 키는 거의 머리 하나보다 더 차이가 날 만큼 커져 있었고, 높았던 목소리도 그때에 비해 많이 낮아져 있었다. 얼굴의 윤곽 같은 건 거의 비슷했지만, 아무튼 이것저것 많이 달라진 모습에 혼란스러웠던 나는 그날로 그 애를 피하기 시작했다.
어색했으니까.
“미안하면 앞으로 복도에서 마주칠 때 정도는 인사해줘라”
잠깐의 침묵 속 그 아이가 먼저 그렇게 말했다.
“ㅇ, 응…”
내 대답에 그 애는 한번 피식 웃고는 다시 핸드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도 들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봤다.
*
그렇게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고 서로 핸드폰만 바라본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아.”
하고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밖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 따라 나도 밖을 쳐다봤다. 비가 그쳤다.
““비 그쳤다.””
겹치는 목소리.
“찌찌뽕, 무지개!”
이어지는 팔의 통증. 그 애는 말이 겹쳤다는 이유로 내 팔을 꼬집으며 어린 시절의 장난을 쳤다. 아, 잠깐 진짜 아픈데 이거 완전 진심이잖아?
“아, 아 좀 살살, 아, 아니 여기서 어떻게 무지개를 찾으라ㄱ, 아 아!”
“ㅋㅋㅋㅋㅋ 얼른 찾아~”
비가 그치고 구름도 사라졌는지 여름의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며 어두웠던 정류장 안을 밝게 비춘다. 그 덕에 그 애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는데 장난을 치는 그 애의 표정은 어린 시절의 장난기 있는 표정 그대로였다.
왠지 조금, 안심된다.
“무지개 못 찾겠어?”
“아무래도?”
“그럼 좋은 거 알려줄게”
다시 한번 밖을 쳐다보는 그 애의 시선을 따라 밖을 쳐다보니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선명하고 커다란 무지개가 하늘에 걸려있었다.
“저기 다 있다.”
“아, 아악 갑자기 쎄게 꼬집는 게 어딨어? 아 잠깐잠깐 아 알았어알았다고 빨주노초파남보!”
“한 곳에서 다 찾는 건 반칙 아니던가?”
“아 네가 괜찮다며!”
“ㅋㅋㅋㅋㅋㅋㅋㅋ 완전 필사적이네, 알았어.”
드디어 팔의 통증이 사라졌다. 사실 아직도 얼얼하다 두고 보자 다음에 걸리면 두 배로 아프게 꼬집어주마.
“이제 비도 그쳤으니까 집에 가야겠다.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그 애는 용무를 마쳤다는 듯 옆에 놔뒀던 배낭을 메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에 응, 하고 작게 대답하며 손을 흔들자 내 대답이 들린 것인지 고개만 뒤로 돌려 그 애도 손을 흔들어줬다.
겉모습이 많이 변해서 어색했는데 이제 보니 속은 내가 알던 그대로다. …내일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내가 먼저 인사해야지. 하는 김에 연락처도 받고. 예전처럼 다시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배낭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정류장을 뒤로했다. 하늘 높이 걸린 무지개는 옅어질 기색 없이 자신의 찬란한 일곱 색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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