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아, 정말로 이러기야?”

기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내밀어 툭툭 쏟아지는 비를 받아냈다. 오늘 꿈자리부터 영 별로였어. 엄청 커다란 괴물한테 쫓겨서 기운이 다 빠진 채 일어났지, 덕분에 학교는 지각. 컨디션 탓에 동아리 시간엔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왔고. 수업시간에 잠깐 존 것이 걸려서 혼자 벌청소 하다가 끝났는데… 이제는 소나기까지?

오늘 하루종일 참 별로다 싶었던 일들을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보면, 금방 한 손이 넘어갔다. 그동안 참았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빗물이 기원의 마음 같았다. 기원은 접은 손을 폈다 쥐었다 반복하며 그대로 신발장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고민스러웠다. 집에 늦게 가더라도 학교에서 비를 피할지, 아니면 교문부터 있는 힘껏 뛰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살지.

고민하는 사이 비가 멈추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듯 신발장에서 서성거리다 보니, 뒤쪽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바닥이 마모되어 미끄러지는 고무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

“어, 기원이네. 집에 안갔어?”

”엇, 형!”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기원은 반가운 듯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돌아봤다. 같은 학교 선배인 카이였다. 처음엔 여기서 만날 줄 몰랐는지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 특유의 부드럽지만 생기 있는 미소를 띄며 기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일찍 끝나는 날일텐데.”

”그게…”

기원은 쭈뼛쭈뼛 눈을 굴리면서 말을 흐렸다. 졸다가 걸려서 혼자 벌 청소를 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카이에게만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무지개

1

기원이 카이와 처음 만난 건, 3월 초 새학기, 동아리를 홍보하기 위해서 카이가 1학년 교실을 돌았던 때였다. 카이는 아직 진로에 뚜렷한 목표가 없는 애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모두 혹할 동아리의 부장이었다.

제과제빵부. 그는 신입 부원 모집 주간에 직접 쿠키를 구워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수업이 갓 시작했을 때 교실에 들어와서 홍보를 하며 줬으니 아마 1학년이라면 모두 제과제빵부 부원들이 피땀 흘려 구워낸 쿠키를 받았을 것이다. 딱 봐도 먹음직스러운, 그리고 실제로 엄청 맛있었던 쿠키를 보며 그들이 눈을 빛낼 찰나,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면 이런 걸 만들 수 있다고. 엄청 맛있는 레시피들을 가지고 있다고 카이가 신뢰가 가는 따뜻한 미소로 설명했다.

밴드부에 가입하기로 굳게 다짐했던 기원조차도 끌렸을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입부 신청서를 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한 사람들은 면접에서 깔끔하게 걸러내 제과제빵부에 소속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들었다.

카이가 기원에 손에 맛있는 초코 쿠키를 쥐어준 게 첫만남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카이가 기원의 머릿속에 깊게 박힌 일이 아니다. 보다 더 시간이 지나서… 한 5월쯤.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했지만 오늘처럼 기원에게는 영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넘어졌는데 흙바닥에 양손이 다 까지고 만 것이다. 밴드부에서 처음으로 외부 공연을 나가는 것이 며칠 안 남았는데, 이 상태라면 기타를 치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당장 아픈 것도 그렇고, 부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해 얼굴에 묻은 속상함을 숨길 수도 없었다. 혼자 무거운 발걸음으로 겨우 도달한 보건실은 문까지 잠겨 있었다. 그대로 문을 몇 번 두드리다가 한순간에 왈칵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것을 참을 수 없어 그 앞에서 쪼그려 앉아버렸다. 따끔거리는 것이 손바닥인지 마음인지 모를 순간, 옆에서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음… 들어올래?”

한 남학생이 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머쓱한 듯 기원을 내려다 봤다.

”보건 선생님은 급한 일이 생기셔서 나가셨어.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나 보고 문 잠그고 있다가 아픈 게 좀 가라 앉으면 돌아가라고 했거든. 근데… 노크 소리가 내심 신경 쓰여서.”

기원은 팔과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살짝 들어 말을 건네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원의 표정을 보고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하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들어와 있어!”

기원은 저항 없이 보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내에 따라 평소 보건 선생님이 앉는 의자엔 그가 앉고, 치료를 받는 학생의 자리엔 기원이 앉았다. 손이 까졌구나. 간단히 살펴보던 그는 서랍에서 조심스럽게 소독약과 연고, 밴드를 꺼냈다.

“내가 치료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야. 보건 선생님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혼잣말을 덧붙이며 그는 치료를 시작했다. 기원은 가만 손을 맡기다가 시선을 돌려 그의 조끼에 붙어있는 명찰을 보았다. 명찰이 노란색이면 3학년이라 그랬지. 이름은 카이…

“그러고 보니 소개도 안하고 손을 맘대로 하고 있었네. 나는 3학년 5반의 카이야. 그… 제과제빵 동아리 부장이라고 하면 명성을 좀 알려나.”

카이가 분위기를 풀려는 듯 농담했다.

”홍보 기간에 쿠키를 나눠줬던?”

”응, 맞아.”

”그거 맛있게 먹었어요.”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운 걸.”

대화를 하다 보니 처음 봤던 카이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학생들을 바라보며 지었던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금도 얼굴에 띄운 채 그는 기원의 손에 열심히 반창고를 붙여줬다. 카이는 기원보다 키가 작았다. 내려다 보이는 머리가 가지런하게 동그랬고, 눈을 깜빡일 때 덮이는 속눈썹이 제법 길었다.

“이정도면 됐겠지? 혹시 모르니 나중에 제대로 치료 받고!”

”네, 그럴게요.”

소독약 때문에 홧홧거리는 손바닥의 고통을 꾹 참아내니 곧 카이의 처치가 끝났다. 기원은 손목을 돌려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보건 선생님이 아니라서 밴드 끝이 구겨지거나 조금 엉성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다.

간단하게 농담을 나누고 있으면, 이제 현실로 되돌아갈 시간이라는 듯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퍼졌다. 카이와 함께 있으면서 기분은 조금 풀렸지만…

“혹시 쉬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음… 아니요.”

“그럼 잠깐 나 따라올래?”

카이의 뒤를 따라 기원이 도착한 곳은 카이의 반이었다. 잠깐만. 이라며 카이가 기원을 세워두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버린 바람에, 머쓱하게 쭈뼛 서있으니 금방 그가 무지개 패턴이 그려진 비닐 포장지에 투박하게 포장된 쿠키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직접 만든 사브레 쿠키야. 부원들하고 레시피 공유 겸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거라 예쁘게 포장하진 않았는데…”

“저 주시는 거예요…?”

”응,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잖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속상해보여가지고. 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네.”

“아….”

“조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이제 가봐도 돼!”

그 말을 뒤로 하고 반으로 돌아가는 카이가 기원의 눈에는 손에 쥐어진 선물처럼 보였다. 무지개 같은 분위기를 가진, 달콤하고 바삭한 쿠키 같은…

“선배!”

기원의 다급한 부름에 카이가 돌아봤다.

“저… 이번주 토요일에 외부공연을 하거든요. 혹시 시간이 된다면…”

문득 카이가 자신의 공연을 보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 없지만, 어쩐지 그랬으면 좋겠어서, 혹시 부담이 되었다면 어떡하…

”응, 그래! 보러갈게.”

잠깐동한 머릿속에 맴돈 걱정이 무색할 만큼 카이는 말갛게 웃으며 초대에 응해줬다. 기원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폈다. 마치 방금 받은 선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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