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빵) 연애의 자격 01

전 피겨 선수 쥬 X 배우 빵

연애의 자격
01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모습이 낱낱이 드러내는 건 금물이었다. 그렇기에 신인 때는 어디서든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입을 굳이 열지 않았고 지금에 와선 세간에 사생활이 베일에 감춰진 신비주의로 알려졌다. 배우 데뷔 7년 차로 접어들며 제 표정을 감추는 데 제법 능숙해졌다고 자부해왔는데, 그도 오늘은 무용지물이었다. 눈앞의 남자를 마주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기 때문이었다.

“어, 영훈씨는 모르지? 피겨 스케이팅 안무 맡아서 해주고 계신 이주연 안무가.”

함께 온 드라마 PD가 제게 말을 걸고 나서야 자신이 낯을 굳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영훈은 재빠르게 면을 바꾸었다. 대외적으로 늘 보여주는, 빙긋 웃는 얼굴이었다.

“아, 네. 정이준 선수 프로그램 소개에서 이름만 뵙고,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김영훈입니다.”

“그새 그걸 또 찾아봤어? 하여간 부지런하다니까. 내가 이래서 영훈씨랑 일하는 게 좋아.”

“유튜브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요, 뭘.”

평소였다면 그에 맞춰 더욱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지금은 그가 띄워주는 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지금 저와 마찬가지로 그럴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PD가 자기 말에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그에게로 돌리자, 주연은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TV만 틀면 나오는 게 김영훈 배우님인데 모르면 이상하죠.”

“하하. 왠지 부끄럽네요.”

공치사가 오가는 걸 보고 있던 그는 허허로이 웃기만 했다. 그러다 손뼉을 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그러면 갑작스럽겠지만,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우선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작품에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제가 나눠드린 자료 좀 봐주시면….”

그 말을 듣고 주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의 눈이 저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시선을 떨어뜨려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양을 관찰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영훈은 우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해 PD가 나눠 준 유인물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집중이 안 되진 않았다.

영훈이 이번에 맡은 역할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 그리고 부상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된 여자주인공과 엮이게 되며 진행되는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었다. 뛰어난 선수로 설정이 되어있는 만큼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선 빙판 위에서 자연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아마추어인 자신이 실제 선수만큼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두는 게 중요했기에 제작부에서는 지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섭외했다고 했다. 그에게 크랭크인 전까지, 모자란다면 촬영 사이 틈틈이 교육받기로 한 것이 바로 지난 달이었다. 그러더니 지난주에 섭외가 되었다며 바로 연습에 들어가자고 했다. 아마 그 지도해주는 사람이 이주연이라는 걸 진작 알았다면 영훈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거절하고 알아서 수소문했을 것이다.

“배우님이 스케이트를 탈 수 있을 만큼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 건가요?”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지상 훈련이랑 기본적으로 스케이팅을 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본격적 스케이팅 씬에선 대역을 쓸 생각이니까요.”

“네에.”

자신이 할 일을 체크하는 주연을 흘끗 바라본 영훈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열심히 하겠다고 한 것이 그 미팅의 전부였다. 자료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던 영훈은 한 시간가량이 걸린 미팅이 끝나자마자 방긋방긋 웃으며 제 선생이 되어줄 이주연과 악수를 하고 PD에게도 꾸벅 인사를 한 뒤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늘 왜 이렇게 서둘러? 아직 다음 스케줄까지 두 시간은 비는데."

"아, 형, 저 오늘 조금 졸려서 그냥 차에서 눈 좀 붙이다 가게요. 먼저 그쪽으로 이동해주시면 안 돼요?"

"그러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하긴 요즘 좀 스케줄이 많긴 했지?"

"네에."

평소라면 남아서 일 얘기라도 더 하고 왔을 영훈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려오니 근처에서 대기하던 매니저는 그저 의아해했다. 원래라면 제법 오래 볼 사이이니 일 얘기도 하고 사생활까진 아니어도 조금 더 편해질 수 있게끔 분위기를 풀어놓고 오는 영훈이었다. 신비주의인 주제에 주변에서 싫어하지 않는 비결도 영훈의 노력에 있었다. 그런 것도 마다하고 올 정도로 피곤했던 모양이라며 매니저는 서둘러 차 안의 온도를 적절하게 맞춰주곤 부드럽게 운전을 시작했다.

영훈은 정말로 그 자리에서 호흡이 가빠지지 않고 벌컥 화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호흡을 가다듬느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느라 한 시간이 꼭 하루 같았다. 기력을 모조리 그 현장에 빼앗기고 온 기분이었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고서 눈을 감고서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지금 가고 있는 촬영장에서 촬영할 장면은 대단히 침착한 장면이었다. 격양된 호흡 따윈 그 장면에서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하면, 저를 보고 웃던 이주연의 뻔뻔스러운 낯짝이 다시금 떠올랐다가 지금의 얼굴보다 앳되었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제 얼굴을 보고도 웃을 수 있다니 옛말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못 그런다는 말이 있었는데 다 틀린 말이다. 맞은 놈도 영훈이었고, 그를 보고 아주 손쉽게 동요하는 것도 영훈이었다. 그 사실이 영훈은 무척이나 거슬렸다. 영훈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애써 잠들려 해봤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탓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이주연과 김영훈은 사귀던 사이였다.

10년 전에 사귀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사귄 지 3년이 되던 해에 헤어졌다. 아니, 일방적으로 버려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김영훈이 이주연에게. 그리고 그해 김영훈은 우울함만을 가득 안고 가라앉느니 차라리 표현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지금의 김영훈이 있을 수 있었다. 너랑 헤어졌다고 무너지는 모습 같은 거 보이지 않겠다. 그게 김영훈의 각오이자 목적이었다.

그 당시 김영훈은 제법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에서 '뒤틀린 마음으로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철없는 재벌 3세'역으로 데뷔했다. 막장 주말 드라마였음에도 영훈의 연기에는 '순수'와 '음울'이 섞인 연기라는 등의 찬사가 쏟아졌으며, 인지도도 급상승했다. 데뷔작 이후에도 여러 작품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게 되었고, 그해의 연말 시상식에서는 빛나는 신인상을 손에 쥐기도 했다.

그 후 바로 소속사가 생긴 영훈에겐 다행히도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마치 다른 생각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일이 들어왔다. 소속사 대표와 매니지먼트 팀은 입을 모아 천운이 따른 거라고 했다. 특히나 배우 업계에서 이런 일은 흔하지 않은 거라며 지금이야말로 더욱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려야 할 때라고 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

어쩌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저를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이주연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 나,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하나. 영훈은 혼자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와 헤어진 뒤 영훈은 연애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만나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누군가와 만나더라도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짧은 연애를 반복하다가 이내 원나잇에 만족하게 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실 김영훈은 사랑에 빠지기 두려웠으며, 두 번 다시 그런 끔찍한 감정의 파도 속에 휩쓸려 너울거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이별을 겪고 난 김영훈은 지금 이주연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에 대한 미련 내지는 마음을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또 부아가 치밀어 올라 호흡이 거칠어졌다. 예정보다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지만, 매니저는 영훈을 일부러 깨우지 않고 조용히 시동을 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비로소 혼자가 되었고,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한 시간이나 비었지만, 그 고요한 차 안에서 영훈은 잠을 잘 수도, 일어날 수도 없이 과거의 기억을 헤매야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그날의 스케줄에는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게 그동안 연예계에서 굴러온 짬바가 있는 거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멍하니 차창 밖을 보며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좋든 싫든 누군갈 위해 멈추거나 천천히 가주지 않았다. 일상은 착실하게도 흘러갔으며 피하고 싶은 일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오히려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갔다. 휴대폰 캘린더 어플에 표시된 날짜, 이주연과 김영훈이 다시금 조우해야 하는 날짜가 어느새 오늘이 되었단 사실에 목구멍 어딘가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매니저에게 안내된 주소는 링크장 근처의 한 빌딩이었다.

'어, 저 건물 4층이래. 먼저 올라가 있어 차 대고 따라갈게.'

'알았어요.'

그리하여 뚱하게 건물을 노려보고 있는 현재의 상태가 된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영훈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1층에서도 엘리베이터 내부에도 건물의 4층엔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뭐 하는 데야. 혼자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뚱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위에 표시되는 숫자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내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 언젠가 보았던 무용과의 연습실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건물에 빙상장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고 오늘은 기본적으로 유연성 체크와 함께 드라마에 사용될 안무의 기초를 알려줄 거란 얘긴 듣긴 했지만, 이런 연습실에서 하는구나. 물론 대부분의 동작은 대역을 서 줄 실제 피겨 선수일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다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 두는 편이 아무래도 연기하는 데 있어선 도움이 되었다.

유리문 앞에서 안을 흘끗 들여다봐도 제법 넓은 규모에 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보이진 않아서 안심하고 들어가려던 때였다.

"안 들어가고 뭐 해요?"

"악!"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곳엔 이주연이 있었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는 걸 보고 흘끗 어깨 뒤로 보이는 화장실 팻말을 보아하니 알만 했다.

"아무도 안 계신가 하고, 요."

"들어가셔서 옷부터 갈아입어 주세요. 요청한 대로 갖고 오셨나요?"

"네. 편하고 몸 선 잘 보일만한 거."

네. 맞아요. 간단하게 대답한 주연은 영훈에게 무척이나 친절하게도 연습실의 문까지 열어주었다. 아, 거 참 고맙네. 이렇게 비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배배꼬인 마음을 꾹 삼키고 아무 말도 없이 탈의실로 들어가 챙겨 온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렇지 않게 사무적으로 저를 대하는 모습이 도리어 황당했다. 최소한 둘만 남게 되면 미안해하거나 아니면 동요라도 할 줄 알았다.

"뻔뻔한 새끼…."

어디까지 뻔뻔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이대로 그냥 일을 하기엔 좀처럼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매니저가 과연 어디까지 왔을지 가늠해 보던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응, 형. 미안한데, 커피 좀 사다 줄 수 있을까?"

[몇 잔?]

"뭐, 세 잔 정도?"

[알았어.]

영훈은 얘기를 안 하고는 이 연습을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매니저가 없는 틈을 타 조금이라도 얘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간 영훈의 앞에 주연이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아둔 채 몸을 풀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에 우뚝 서자 주연이 의아한 눈으로 영훈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앉으…."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

자신의 날 선 말에 앉아있던 주연이 고개를 들어 영훈을 바라본다. 여태껏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린 채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요."

"하도 아무렇지 않게 굴길래 나 같은 건 다 잊은 줄 알았지."

"…내가 뭐 어떻게 해줄까요?"

"아니, 할 말 없냐고."

서슬 퍼런 자신의 냉랭한 말투에 주연은 픽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올려 웃었다.

"있어야 해요?"

"…뭐?"

"그때 상황은 형도 알고 있었고, 그러면 대충 좀 이해하고 넘어가요. 어차피 잘 지냈잖아, 그동안."

"잘 지냈다고?"

"그럼, 못 지냈어요? 고작 나 때문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영훈은 못 지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잘 지낸 편에 가까웠다. 일이 잘 풀려 돈도 잘 벌고 인지도가 떨어질 일도 없으며, 웬만하면 구설수 생길 일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걸릴 게 있다면 김영훈의 연애 편력과 성적 지향성 정도일 것이다. 제 내면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만 보았다. 인생 핀 것 아니냐고. 

항상 불안해하고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영훈은 늘 꽁꽁 감춰 두었다. 여러 사람과 숱한 연애를 반복하면서도 오래가지 못했던 이유는 늘 저 이유였다. 그리고 그 불안과 불신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자신은 어딘가 그때 이후로 조금 망가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고작 나 때문에' 못 지냈냐는 말을 들으니, 머리가 하얗게 비는 기분이 들었다.

"네 말대로 어차피 풋내 나는 연애 조금 한 거 가지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되진 않았지만, 인간적인 예의가 있는 거 아니야? 그럼 넌 적어도 날 처음 봤을 때 미안하지 않았어도 미안한 척이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 알았어요. 미안해요. 됐죠? 그만하고 몸 풀죠."

"너 지금…. 아니다. 그래. 일이나 하자."

충동적으로 뱉은 말은 사실이 아니긴 했다. 영훈에게 주연과의 3년간의 연애는 풋내가 났을지언정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고, 그로 인해 지금의 인생은 그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주연에게 그대로 고하기엔 제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원래 머리가 복잡할 땐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기에 영훈은 요가 매트를 깔고 간단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작게 한숨 쉰 주연이 이끄는 대로 스트레칭을 시작한 지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쯤 매니저가 들어와 허허실실 대화를 꺼내지 않았다면, 이 레슨 시간 내내 둘은 일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

이주연은 장래를 촉망받는 피겨 스케이트 선수였다. 주니어 시절부터도 제법 주목받았던 것은 어린 나이임에도 안무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이 좋았던 덕이었다. 각종 무용과 지상 훈련, 빙상 훈련 등을 모두 소화하며 실패하더라도 묵묵히 일어나서 다시 도전하는 것은 선수 이주연의 아주 큰 장점이었다. 그렇기에 중학생임에도 답지 않은 침착함과 경기력에 모두 입을 모아 이 선수는 국내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 엄청난 중학생 선수 이야기를 고등학교 1학년 김영훈은 원하지 않아도 들어야만 했다. 같은 재단을 공유하는 사립 학교였기에 근처 유명인들의 소식은 듣기 싫어도 들렸으며, 학교 근처엔 늘 '이주연'의 수상 실적 등이 현수막 같은 것들로 낱낱이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네. 매번 별 감흥 없이 보고 지나치곤 했다. 사실 피겨라는 종목이 남 고등학생에게 크게 관심이 갈만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다.

그렇게 영훈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그냥 이주연'이 있었다. 별일 없이 고등학교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었을 때, 그 '이주연'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당연히 별생각이 없었다. '이주연'을 '엄청난 선수' 이외에 다른 것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봉사활동 점수 필요한 놈들 있냐?'

'쌤, 저요!'

'이번 주 토요일에 신청해서 갔다 오면 봉사활동 점수 8시간 인정되는 활동 있으니까 신청할 놈들은 교무실로 와라.'

'네!'

마침 봉사 시간이 필요했던 영훈은 뭔지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도 안 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갔다. 국내 피겨 대회에 참석해서 동문인 선수들을 응원하고 오면 된다고 했다. 어려운 것 없는 일이었으니 봉사 시간을 거저 얻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마냥 신이 났었다.

그날의 기억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쨍쨍하게 햇빛이 부서지는데도 뼈를 파고드는 맹추위에 엄마가 챙겨준 목도리까지 꼼꼼하게 챙겨서 경기가 진행되는 장소로 향했다. 링크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영훈은 그 근처 구석에 있는 곳을 물색했다. 마침 적당한 곳이 있어 슬금슬금 들어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대한민국 입시생의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부모님 몰래 야금야금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담배 피시면 안 돼요.'

뒤통수에서 들리는 말에 화들짝 놀란 영훈이 뒤를 돌아봤을 땐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보였다. 키는 제법 크고 잘생긴 애였다. 인기 좀 있겠는데. 영훈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다른 학년에서 응원 온 사람인 모양이었다. 영훈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학주 선생님한테 이르면 안 돼?'

'…안 일러요.'

'나 막 불량한 학생 아니야. 그냥, 스트레스 풀려고 그랬어.'

'저한테 변명 안 하셔도 되는데….'

'진짜 안 이를 거지?'

'속고만 살았어요? 일러서 뭐해요.'

그 남자애는 날카롭고 다소 불량해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었지만, 교복은 정갈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 그냥 조금 느긋해 보였다. 무언가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연을 흘끗대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다 담배를 안 피는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는 게 제법 비매너로 느껴져서 영훈은 잠시 갈등하다 남자애에게 물었다. 약간 다른 데로 가라는 의향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근데 넌 몇 학년이야? 왜 여기 있어?'

'1학년이요. 잠깐 바람 쐬러요.'

'담배 냄새 날 텐데.'

'여기가 제일 조용해요.'

아무래도 그 눈치가 통하진 않을 모양이라 입에까지 물었던 담배를 빼내어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텄다. 얘도 저와 같은 처지로 봉사 시간이나 채우러 온 거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아침에 혹시 몰라 챙겨온 게 있었다.

'자.'

'저 담배 안 피워요.'

'누가 담배 피우래?'

제 손은 쳐다도 안 보던 남자애는 흘끗 저를 보곤 얼떨떨한 얼굴로 간식을 받아서 들었다. 조그만 사탕과 초콜릿이었다.

'나 비흡연자 앞에서 담배 피우는 개매너 아니거든. 사탕이나 먹구 들어가야겠다.'

'상관 없는데요.'

'…내가 상관 있어.'

'…잘 먹을게요.'

그러더니 그 남자애는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영훈도 담배를 다시 물까 고민하다가 이내 남자애에게 건넸던 사탕 중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굴리다가 링크장 안으로 들어갔다. 링크장 안에서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 제 출석 여부를 체크하고 자리에 앉아 아까 본 학생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찾았다. 제법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이라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 보이질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영훈은 학교에서 챙겨 주었던 슬로건을 그제야 열어 손에 들고서 지루한 얼굴로 앉아 응원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몇몇의 학교 선수들이 나왔을 때 의무적으로 박수를 치다가 이윽고 마지막 선수 차례가 되었을 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왜 쟤가 저기에….' 말하고야 말았다. 

'너 이주연이랑 알아?'

'엥? 아니?'

'주연아! 힘내!'

함께 봉사 시간을 벌어보고자 참여한 같은 반 친구가 의아하게 물었고 그에 똑같이 의아하게 대답하는 순간 같은 객석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소리 쳤다. 그제야 자신이 그 유명한 선수, 이주연의 얼굴조차 궁금해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만났던 제법 불량했던 인상의 남자애가 성실하고 묵묵하게 운동한다는 그 유명인이었다니. 어안이 벙벙하게 앉아있던 사이에 주연은 얼음 한 가운데 섰다.

오른팔을 들고 다리를 우아하게 자리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음악이 시작하자마자 박자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나른하게 보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작부터 격렬한 음악에 몸을 맡겼다. 선율에 몸을 맞춰 그림 그리듯 움직이고 공중을 가르고 날아오르는 모든 장면 장면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영훈은 난생처음으로 남자에게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격렬하다가도 애절하게 이어지는 음색에서 보여준 표현은 멀리서, 초심자가 보아도 가슴 안의 어떤 것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입을 헤벌린 채로 얼음 위에 무너져 내린 남자를 표현한 주연을 바라만 보았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영훈의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모든 것이 소거되고 주연만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 위에서 숨을 고르던 주연이 일어서서 관객석 곳곳에 인사하고 키스앤크라이존으로 들어갔다. 코치가 어깨를 두드리고 주연의 표정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초심자가 보기엔 전혀 모르겠지만, 그다지 성에 차는 결과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최종적으로 1등의 점수를 받고도 주연은 고개만 끄덕일 뿐 눈에 띄게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응원하러 와 준 사람들을 위해 카메라에 손을 흔들어주는 게 다였을 뿐이었다.

모두가 객석을 빠져나가고 친구가 어깨를 두드릴 즘에야 정신을 차린 영훈은 주섬주섬 제 짐을 꾸리고 링크장을 나섰다.

'모두 20분 후까지 버스로 집합해. 체크하고 출발할 거야.'

'네에~'

각기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할 때 영훈은 슬쩍 뒤로 빠져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중 주연을 만났던 그곳이었다. 왠지 거기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건물 뒤에 숨어 빼꼼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없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던 영훈은 제 행동에 화들짝 놀라야만 했다.

아니, 만나서 뭐 어쩌려고.

황당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 영훈이 제 볼을 짝 두드리고 뒤돌아선 순간 정말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코앞에 그 당사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깜짝이야!'

'여기서 뭐 하세요?'

'아니! 그! 그냥.'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영훈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런 영훈을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주연은 근처 벤치에 털썩 앉았다. 마치 영훈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에 더욱 머쓱해진 영훈은 얼굴을 긁적거리다 이내 돌아섰다. 기분이 저조해 보인 탓에 더 말을 붙이지 말까하는 고민에서였다.

'야.'

'네?'

'나 피규어? 정말 하나도 관심 없거든.'

'…피겨요.'

영훈이 잘못 말한 부분을 무덤덤하게 고쳐준 주연을 슬쩍 흘겨본 영훈이 그의 옆에 같이 앉았다.

'그러니까, 피겨. 관심 없었는데, 네가 이렇게 휙 날고뛰고 막, 슉슉 하니까.'

'어, 네.'

'나 뭔가, 되게 뭉클했어. 그러니까, 음, 오늘 너무 잘 봤다고. 나 이제 네 팬 할래.'

'…감사, 합니다?'

영훈이 하는 말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눈만 껌뻑이는 모양새가 첫인상과 빙판 위와는 영 딴판이라 영훈은 저도 모르게 푸핫 웃어버렸다. 까칠하게만 보이더니 이런 둥근 얼굴도 가능하구나.

'너한텐 뭔가 안 좋아 보였을지 모르겠는데 난 진짜 좋았어! 그러니까, 어, 앞으로도 힘내라고! 헉! 나 가야겠다!'

'아, 저기.'

'안녕! 나중에 학교에서 봐!'

그때 영훈은 주연이 학교를 얼마만큼의 빈도로 오는지 잘 몰랐으므로 태연히 말했다. 그냥 1학년 교실에 가면 볼 수 있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저 혼자 와다다 할 말만 하고 가려는 자각조차 없던 영훈은 그대로 학교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못해 손목이 주연에게 붙잡혔다.

'저 학교에 오래 안 있어요.'

'어?'

'훈련해야 해서.'

'아, 그렇겠구나.'

주연은 무언가 망설이는 눈치였다가 파카 속을 한참 뒤져 작은 기기를 꺼냈다. 핸드폰이었다.

'번호, 주세요. 제 팬 해주신다면서요.'

'네 팬하려면 번호 줘야 되는 거야?'

'…싫으면 안 주셔도 돼요.'

'으하하, 아니야, 그런 거. 우리 학교 애들 번호 다 갖고 있나 해서. 자!'

영훈은 제 번호를 입력해서 이름까지 [2학년 빵훈선배]라고 지정해 두고 주연에게 핸드폰을 다시 넘겨주었다. 주연은 가만히 그걸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했다. 그 동그란 머리를 영훈은 저도 모르게 흩뜨려 놓곤 다시 가던 길을 서둘렀다.

이상하게도 그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만진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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