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빵) 연애의 자격 02

전 피겨선수 쥬 X 배우 빵

연애의 자격
02

한창 촬영 중인 작품은 액션 스릴러 장르의 영화였다. 그리고 변호사인 여자 주인공의 사무관 역할로 함께 극의 중심이 되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역이었다. 후반부에 결정적인 증거를 전달하고 바로 악역에 의해 제거되는 캐릭터였다. 조연임에도 선택한 데엔 최근의 필모그래피가 냉정한 캐릭터들이 많았고, 주인공의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도 더불어 의심까지 받는 캐릭터였기에 이미지 환기에도 좋을 듯 해서 선택한 작품이었다.

오늘은 전체 촬영 크랭크업을 약 2주 앞둔 상황에서 먼저 혼자 촬영하는 영훈의 마지막 장면, 죽는 씬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여주인공이 원하던 증거는 전달한 상태에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장대비 속에서 운전하다 자신이 뒤를 밟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본인이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으슥한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주변을 살피면서 여주인공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이동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끝으로 조용히 다가온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마지막 씬이었다.

그렇기에 영훈은 오늘 살수차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계속 몸을 써야만 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머리로는 얼른 정신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근육통에 늘어져만 있고 싶었다. 요 며칠 사이 계속해서 주연과 마주하며 스트레칭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안무를 배우기 전에 해야 하는 몸풀기를 하고 있었다. 말이 몸풀기지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쓰자니 평소에 하던 운동이 있음에도 누군가한테 작신작신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괜찮겠어?"

"그래도 해야지. 지금 들어간대?"

막 메이크업 수정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인원에 섞여 앉아있으니, 매니저가 와서 상태를 체크했다. 손엔 너덜너덜해진 대본이 들린 영훈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니. 지금 장비 때문에 조금 촬영 지연된대. 조금 더 쉬어."

"응."

근육이완제를 먹고 나왔음에도 욱신거리는 근육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연과의 연습은 생각보다 배는 힘들었다. 주연과의 불편한 관계 덕에 쓰지 않아도 될 감정 소모가 큰 것도 있겠지만, 우선 영훈은 뻣뻣했다. 그냥 뻣뻣한 게 아니라 운동을 지도해주는 개인 트레이너조차 상당히 뻣뻣하다며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뻣뻣했다. 덕분에 단순히 몸을 푸는 과정이었음에도 힘을 주지 않아도 될 곳에 힘을 주거나 혹은 동작이 되지 않거나 해서 레슨 시간이 배로 길어졌다.

실제로 선수들이 하는 동작을 짧은 기간 내에 빙판 위에서 해내거나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카메라에 잡히기에 그럴싸하게 흉내는 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 때문에 몸 푸는 동작은 대부분 강도가 낮진 않다고 주연이 말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매니저가 허우적거리는 영훈을 보고 박장대소하니 한 말이었다. 그리고 끝엔 제법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이 묘하게 기분 나빴다. 그게 레슨 첫날의 일이었다.

그와 비슷한 나날이 일주일 정도 이어졌고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그동안 주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아지거나 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배로 기력을 쏟아야 했고, 덕분에 더욱 녹초가 되곤 했다.

"영훈씨, 이제 새 작품 들어간다면서?"

"네. 뭐 그렇게 소문이 빨리 나요?"

"에헤이, 저도 다 정보통이 있지."

"와, 뭐야. 막 기자 이런 사람이요?"

"농담, 농담. 거기 제작부에 우리 학교 선배가 있어."

아아.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건 사람은 곧 있을 촬영에서 저를 죽일 남자 배우였다. 배우 서진오는 독립 영화판에서 오랜 시간 연기를 갈고 닦은 흔히 말하는 실력파였으며, 과묵한 킬러 역이나 비서 같은 역으로 곧잘 캐스팅되는 배우였다. 일견 평범한 인상으로 메이크업 하는 대로 인상이 바뀌는 편이라 여기저기 안 나오는 데가 없는 느낌의 배우였다. 스타 배우는 아니었지만, 많이들 찾는 배우였기에 영훈과도 종종 같은 작품에 끼어있어서 그래도 조금은 친분이 있었다.

"크랭크인 한다고 바쁘다고 그러던데. 근데 그거 영훈씨가 피겨 선수라면서."

"맞아요. 선배도 들어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유독 지쳐 보여서, 뭐 힘든가 했지."

"하하, 그게 티가 나요? 얼른 익숙해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드네요."

티를 안 낸다고 했는데 주변 사람이 보기엔 죄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자, 너털웃음을 지은 진오가 등을 퍽퍽 치며 물어왔다.

"피겨 수업 듣는 건 어때? 그 국가대표 선수 안무가라던데."

"네에. 뭐, 꼼꼼하게 알려주는 편인 거 같아요."

사실 주연의 지도는 집요하리만치 꼼꼼했다. 그 무엇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연의 선수 시절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 저는 지망생 같은 것도 아니었고 하물며 그런 길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어쩔 땐 얘가 일부러 이러나 싶다가도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보자면 그 생각을 철회하게 된다. 둘 사이에 있던 과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담백한 태도를 보며, 이래서 주연이 선수로 그렇게 활약할 수 있었던 거란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한동안 영훈의 이야기를 듣던 진오는 자신이 예전에 액션스쿨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많아서 즐겁게 듣던 와중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우선 뽀송할 때 자동차 씬을 촬영하자는 말에 가볍게 후 숨을 내뱉었다. 영훈은 늘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의 이 시간이 가장 떨렸다. 기분 좋은 긴장을 안고 지금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훈씨 잘 부탁해."

"진오 선배, 살살 해주세요."

영훈은 점차 잡스러운 생각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촬영용 차량에 올랐다. 차에 올라타고서 살수차에 사인이 넘어가고 바로 차창으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꼭 정말 빗속의 차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의 촬영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 영훈은 여유롭고 개운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촬영의 시작이었다.

"컷! 오케이!"

감독의 외침과 함께 자신의 촬영이 종료되었다. 텅 빈 눈으로 물이 고인 바닥 위에 엎드려있던 영훈은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물을 훔쳐내었다. 매니저가 두터운 모포를 둘러주고 영훈은 입가에 고인 촬영용 혈액을 닦아내고 감독의 옆으로 다가갔다. 모니터링 중인 그의 옆에 서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앉으라며 의자까지 내주었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 옆에 앉아 함께 촬영분을 보다 영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감독님, 죄송한데 저 다시 한번만 더 가도 될까요?"

"왜?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어?"

"여기 앞부분이 조금 감정 과잉 같기도 해서…. 조금 아쉬워서요."

"으음, 그래? 괜찮겠어? 추울 텐데?"

"괜찮습니다."

좋아, 좋아. 고개를 주억거리던 감독은 다시 세팅해달라며 사람들에게 지시했고, 다시 한번 저로 인해 촬영 시간을 추가하게 된 데에 영훈은 주변 스태프들에게 사과했다. 이 장면만 찍으면 저의 촬영과 오늘의 촬영이 끝나는 타이밍이라 모두 지쳐있는 타이밍이라 더욱 미안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진오한테도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모포를 두르고 있던 진오는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영훈은 다시 빗속을 헤맸다. 예리하게 자신을 노리고 쫓아오는 발걸음을 외진 곳으로 유도한 다음에 잡아야 한다. 그다음엔 저 남자를 통해 세영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찾아내자. 그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영훈, 아니 극 중 캐릭터 정운은 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초조함에 입술을 혀로 축이고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겼다.

뒤로 남자가 바짝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인적이 드물고, 자신이 뒤로 쫓아오는 남자를 제압해 무언갈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제 체격이면 쉽게 누군가에게 당하지 않을 거란 자신을 갖고 뒤로 도는 순간이었다. 선뜩한 감각이 뱃속을 헤집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파악도 못 한 채 눈앞에 보이는 모자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을 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남자를 밀어낸다. 뿌리치는 행동에 남자의 모자마저 벗겨지고 이내 세영이 파헤치는 사건과 관련된 주요 인물임을 알아본 정운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는 배를 부여잡고 다시금 발을 옮겼다. 이번엔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느긋하게 사냥하는 맹수처럼 다시 모자를 고쳐 쓴 남자가 제 뒤를 쫓았다. 거리를 넓히지도 좁히지도 않은 채로 여유롭게 저를 몰이 사냥하듯 했다.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는 중,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세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세영은 현재 원하던 자료를 얻었기 때문에 가벼운 흥분과 기쁨으로 충만해 있을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붙든 정운은 근처 어두운 건물 사이로 들어가 등을 기대고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조금 전 오케이를 받았을 땐 그때부터 자기 죽음을 직감한 것과 함께 세영에게 자신이 죽어가고 있단 사실을 알리는 식으로, 어쩐지 서러운 느낌을 담아 연기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심 극 중 정운이 세영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것을 떠올린 것으로 그런 연기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잠시 돌이켜 봤을 때, 평상시 무척 다정하면서도 충실했던 정운이었다면 제 상태에 대해 알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정운을 생각하며 영훈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밭은기침을 콜록, 한 번 하면서 입에 머금고 있던 혈액을 조금 흘렸다.

"아, 자료, 받았어요? 제 말이 맞죠? 변호사님이 저 의심하셨을 때, 솔직히 저, 서운했어요."

킬킬, 부러 더 가볍게 말했다. 이다음 세영의 대사가 [미안해. 진짜 나중에 크게 한 턱 살게. 정운씨 한우 좋아하잖아. 일 마무리되면 먹으러 가자.] 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말을 들은 정운은 흐흐, 조용히 소리를 죽여 기침을 한 번 했다. 아까 내뱉은 혈액보다 많은 양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눈앞엔 제 뱃가죽을 쑤셔 놓은 남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정운은 말했다.

"약속하셨어요, 한우. 저 진짜 많이 먹습니다."

눈앞의 남자가 다시 한번 저를 찌르기 전, 정운은 서둘러 전화를 마무리했다.

"저 먼저, 끊을게요. 아, 정 변호사님, 몸,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끈덕지게 핸드폰을 붙들고 있다가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하자마자 손과 팔에서 힘이 빠졌다. 한 번 더 쿨럭 기침하자 입 밖으로 혈액이 더욱 많이 쏟아졌다. 냉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가물가물하지만, 애써 눈을 부릅뜨고 웃어 보였다. 변호사님은 괜찮다. 저 말고도 지켜줄 사람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지금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부터 처리하려는 것이다. 울컥한 남자의 칼이 다시 복부와 명치를 여러 차례 찔러왔다.

카메라는 물웅덩이에 힘없이 쓰러진 영훈을 바짝 클로즈업하여 찍었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가 세영의 미래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뜨고 입에는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차갑게 식어가는 연기를 보였다. 한참을 몸 위로 비가 뿌려졌고, 그 조금 뒤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영훈의 몸에 또다시 수건과 모포가 돌렸다.

"어우, 눈빛 좋은데? 이게 훨씬 좋다. 근데 그럼 아까 타이트 샷 찍은 거 중에 몇 개 수정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얼룩덜룩하게 피를 묻은 얼굴에 메이크업 팀에서 서둘러 다가와 고쳐주었고, 매니저는 미리 준비해 둔 따뜻한 차를 건네서 영훈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실제로 추위에 몸이 달달 떨리고 있어서 얌전히 그들이 해주는 것들을 받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비슷한 몰골의 진오가 제게 다가왔다.

"와, 영훈 씨, 이번 것 눈 마주쳤을 때 이렇게 웃은 거 진짜 좋던데. 잘 편집되면 좋겠다."

"하하, 고맙습니다. 진오 선배도…, 늘 섬뜩해요."

"고맙다."

다음 촬영을 준비하던 영훈에게 진오가 옆에 지나가던 감독을 붙잡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영훈 씨는 진짜 눈빛이 너무 좋은 거 같아. 그쵸, 감독님? 나 아까 눈 마주쳤을 때 소름 돋았잖아."

"그래, 내가 그래서 처음에 시나리오 왔을 때 영훈씨 소속사에 제일 먼저 물었잖아. 조연이긴 해도 이미지가 맞는 거 같아서."

"연기가 전공인 배우들도 그렇고, 경력 되는 배우들도 눈빛 안 만들어지는 사람도 많은데. 진짜 천직이야~"

하하, 감사해요. 자꾸 띄우는 말에 영훈은 이내 머쓱해져서 따뜻한 차를 입으로 가져가며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감췄다.

"아, 그랬지. 영훈 씨는 연영과도 아니었지? 어쩌다 연기 시작한 거야?"

"아, 하하, 음, 어쩌다 보니 관심이 생겼어요."

"하긴, 이 얼굴이면 나라도 관심 생길 거 같아요."

영훈은 그저 묵묵히 따뜻한 차를 다시 한 모금 더 들이켤 따름이었다. 연기자를 꿈꾸게 된 건 다름 아닌 이주연이 계기였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제 데뷔도, 꿈의 시작도, 모두 그가 시작점이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짜증 났다. 제 인생에서 깨끗하게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도려내려고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존재임을 떠올리니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타이트 샷 몇 개 찍고 끝낼게요. 힘내서 갑시다."

"네."

그렇게 영훈의 마지막 촬영은 원래 스케줄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끝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 스태프들이 준비한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홍보 영상용 촬영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촬영 다음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음 드라마를 위해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다. 작품 관련 홍보 일정 외에는 모두 드라마 관련 준비 스케줄이었다. 간만에 오전 스케줄이 몽땅 비어 버린 영훈은 간만에 늦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랬는데도 묘하게 몸이 늘어져서 매니저의 차에 실려 가는 중에도 거의 늘어져 있었다.

"그냥 오늘 좀 쉬자고 할 걸 그랬나?"

"으응? 괜찮아요. 무슨 조금 졸린 거 갖고. 어차피 운동하면 잠 깰 거야. 형 오늘 먼저 들어가요."

"무슨 소리야. 그래도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야지."

"아니야, 그냥 차 세워두고 그냥 먼저 가요. 어제 고생했잖아요."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도착한 게 새벽 3시였고, 그 후로 매니저는 또다시 본인의 집까지 돌아가는 데 더 시간이 걸려서 저보다 훨씬 수면이 부족할 게 뻔했다. 찜찜한 얼굴로 영훈에게 차 키를 건네준 매니저는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꼭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영훈은 등을 떠밀며 그를 집으로 보냈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터덜터덜 평소보다 더 힘이 없이 주연과 최근 들어 만나고 있는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요 일주일 사이에는 주연의 모든 것이 거슬려서 이곳에만 왔다 가면 체력이 쪽쪽 빨리는 탓에 늘 긴장한 채로 갔지만, 오늘만큼은 주연이 어떻든 딱히 신경을 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튜디오에는 아무도 없던 덕에 멍하니 보다가 탈의실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요가 매트를 깐 뒤 몸부터 가볍게 풀 요량으로 간단하게 스트레칭했다.

그러던 중 거울로 문 너머에 주연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딘가에 통화를 하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거울로 눈이 마주쳐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움직였다. 그래도 움직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조금 움직일 때마다 어째선지 그럴수록 몸이 더욱 늘어졌다. 평소보다 몸이 둔하고 한 번 엎드리면 일어나기 싫은 기분에 한동안 엎드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마에 닿은 요가 매트가 시원해서 한동안 그러고 있고 싶었다.

"이제 시작할까요? 근육통은 어떠세요?"

"어어, 괜찮습니다. 하죠."

평소보다 멍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일어난 영훈을 빤히 보던 주연은 늘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몸풀기부터 시작했다. 밤사이 침대에서 굳은 근육들을 먼저 풀어주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패턴이었다. 평소엔 그래도 여기까지 잘 따라주었는데 오전중이라 그런지 몸이 자기 마음처럼 따라주질 않았다. 조금 헤매는 게 눈에 보이는 건지 주연은 하던 동작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 저한테 뭐, 시위라도 하는 거예요?"

"뭐? 아니, 네?"

"일부러 이러냐고요."

"내가 뭘요."

한 번 언쟁을 벌인 뒤로는 꼬박꼬박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존대만을 쓰고 짧게 말하고 있었는데, 어제 마지막 촬영으로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나왔다. 차가운 얼굴을 한 주연이 저를 빤히 쳐다보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웠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그 꼴을 보다가 다시금 눕고 싶어져서 매트 위로 엎어졌다. 뭐, 짜증 나면 깨워서 집으로 보내겠지, 라는 심정도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에 누군가가 저를 깨우는 손길에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주연이 보였고 저는 아마도 차가운 바닥까지 꾸물꾸물 옮겨가 거기에 얼굴을 대고 있던 모양이었다. 손 치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번 수마에 잠긴 몸이 좀처럼 쉽게 움직여주질 않았다. 이마를 짚은 손이 눈까지 훅 덮어왔다. 바깥의 기온을 머금고 있는 손바닥은 차갑고 기분 좋았다.

"아, 시원하다."

"대체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는 거예요?"

"…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주연은 영훈을 일으켜 앉히곤 물과 약을 손에 쥐어주었다. 얼떨떨하게 앉아 있으니 약간 짜증이 난 얼굴로 '얼른 먹어요.' 하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요가 매트를 정리했다. 아, 오늘은 더 안 하려나 보다. 손 안에 놓인, 주연이 손수 까서 손에 쥐여 준 약과 물을 힘겹게 삼키며 생각했다. 일단 집에 가서 잠을 자야겠다. 잠을 안 자서 이런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 탈의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주연은 아무 말 없이 저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입고 왔던 옷들을 도로 챙겨 입은 뒤, 철제 캐비넷에 머리를 잠시 대고 있었다. 빙빙 도는 걸 보니 그제야 어제 바깥에서 물을 맞으면서 뛰어다닌 여파가 오늘 온 거라는 걸 실감했다. 최근 몇 년간 이렇게 앓은 일이 없어서 알아채는 게 늦었다. 그러면 매니저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연락해서 병원에 들렀다가 내일까지 푹 쉬어야겠다. 느릿한 사고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떼려는데 갑자기 세상이 휙 도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뒤통수가 깨지려나 하고 있었는데 단단한 팔이 저를 휘감았고 곧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한 그런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곁에 서있던 주연이 휘청거리는 영훈을 붙잡은 것이다. 그는 여전히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득 영훈은 서러워졌다.

당장 아픈 것도 서러운데, 저를 버린 전 애인 놈은 자신을 보고 짜증을 내고 있다니. 힘없이 주연을 밀어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질어질한 기운에 이내 밀어내기도 포기하고 몸에 힘을 빼니 단단한 어깨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파묻은 꼴이 되었다.

"미안합, 니다. 지금 좀 어지러워서."

"지금 몸이 불덩이인 건 알아요? 대체 이렇게 될 때까지 모르고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오늘 매니저는 또 어디에다 뒀어요?"

세상에. 주연의 쏘아붙이는 말에 영훈은 머리가 왱왱 울렸다. 좋게 헤어지지도 않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전 애인 따위가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도 아픈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면박을 줄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에 또다시 한번 서러움을 느낀 영훈은 주연의 어깨를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 주리라 생각했지만, 주연은 더 단단히 영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집에 어떻게 가려고요."

"…차 있어."

"매니저는요?"

"오늘 쉬라고 했는데, 연락하면 올 거야…."

한숨을 쉬는 주연에게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려 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영훈을 탈의 공간에 마련한 의자에 잠시 앉혀두고 제 겉옷 주머니에 함부로 손을 넣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항변하려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곤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매니저한테 연락해 드릴게요. 잠깐 약기운 돌 때까지 눈이나 붙여요."

"아…."

잠깐 내버려둔 사이에도 이렇게까지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며 영훈은 그가 시키는 대로 비밀번호로 걸어둔 핸드폰 잠금을 풀어주었다.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못 하겠는 상태까지 오게 되었다. 제 핸드폰 기종이 생소한지 낯선 얼굴로 핸드폰을 만져보는 모습을 가물가물한 시야로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대번에 날카로운 눈빛이 저를 쏘아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눈빛이었다.

"왜 이주연이 나 걱정하는 거 같지…."

"…."

"이상하네. 우린 걱정해 주고 그런 사이가 아닌데…."

"…늘 오던 매니저 이름이 뭐예요? 매니저가 여러 명인데."

"이상하다, 진짜.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던 것 같은데, 근데 반대였는데…."

"…딴 소리 하지 말고 이름 말해 봐요."

"난 그때, 진짜 엄청나게 걱정했었는데…."

중얼중얼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말에 주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안 그래도 짜증 난 사람한테 짜증을 더해준 모양이었다. 아픈 건 별로다. 별것도 아닌데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크게 코를 훌쩍 삼키고 눈을 감고 벽에 몸을 푹 기댔다. 금세 의식이 멀어졌다. 다시 저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영훈은 더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약을 가져온 거야, 대체. 진짜 엄청 잠이 잘 오네.

그런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말이 끝내 나오진 않았다. 주연은 잠든 영훈을 보고 조금 기가 막혔다. 조금 전까지 대화 비스무리한 걸 했는데,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영훈이 잠들어버렸다. 손안에 핸드폰에 매니저의 이름이 네 명 정도가 있었다. 대체 어디다 연락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자신이 선수 때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보니 영훈이 말했던 때가 언제인지 짐작이 갔다. 아픈 줄도 모르고 링크장에서 몇 시간을 허비했던 때였다.

"대체 형이 무슨 자격으로 그때 일을 생각하는 거야."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제법 깊이 잠이 든 영훈을 보다가 주연은 큰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이 있는 대로 뒤틀리고 있어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후우, 주연은 숨을 크게 내쉬고 제 옷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주머니 속으로 차 키를 만지작거리면서 머리를 굴렸다. 주차장에서 차로 우선 응급실에 데려간 뒤에, 그다음에도 정신을 못 차리면, 우선 그 후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못 깨어나면 응급실에 하루 정도는 입원해도 괜찮을 것이다.

어렵사리 영훈을 등에 업은 주연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급해졌다. 등에 얹힌 사람의 체온이 생판 남이라도 걱정할 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의 감정이 찌꺼기처럼 남아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영훈이 눈을 뜬 건 주연이 응급실로 저를 데려다 놓은 지 4시간 정도가 지난 때였다. 한결 가벼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이마를 짚으려 손을 들자, 링거 바늘이 꽂혀 걸리적거렸다. 그 움직임에 영훈이 깬 걸 눈치챈 매니저가 영훈을 다그쳤다. 

"야! 정신이 들어? 내가 왠지 이상해서 전화했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 형…."

"여태까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어서 내가 긴가민가했다, 인마!"

꼭 신기루라도 본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주연이 제 앞에 있었는데, 없어졌다. 매니저에게 연락한다더니 어찌어찌 성공한 모양이라고. 그래서 매니저에게 어떻게 오게 된 건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제게 쏟아지는 매니저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연씨 아니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냐. 의사 말론 내일까지는 푹 쉬래."

"응."

"아무튼 집으로 가자. 푹 쉬고 나중에 혼나."

"으응."

간호사가 링거 처치를 해주고서 집까지 가는 동안 내내 영훈은 조용히 창밖만 바라봤다. 정말 자신은 조금도 이주연이라는 존재를 제게서 지우거나 도려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을 뜨자마자 실감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기절하듯 잠든 그 사이, 영훈은 아주 예전 꿈을 꾸었다. 그 꿈에는 고등학생인 자신과 이주연이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 꿈은 영훈이 고등학교 2학년을 마무리할 때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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