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동인男의 감정 3

23번의 재발견


더플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농구화를 꺼내 신으면 그걸로 준비는 끝. 웬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덕에 연습 경기가 시작하기 전 여유가 있었다. 오늘은 땀이 살짝 날 정도로 코트 외곽을 따라 뛰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할 생각이다. 상호에게 특별한 루틴 같은 건 없다. 워밍업도 마찬가지로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다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으면 슛 연습을 좀 하면 되고. 목 끝까지 여몄던 지퍼를 살짝 내리고,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상호가 생각했다.

'네가 주인공인 게 아니고 내가 주인공인 거야, x신아.'

아무도 없는 적막한 코트 위에서 홀로 체조를 하고 있자니 절로 딴생각이 피어올랐다. 가령 어젯밤의 일 같은 게 말이다.

최종수는 제게 불만을 토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 보라고 애써 좋게 포장해 보기도 했지만 먹힐 리 만무했다. 최종수는 잔뜩 화가 난 채 전화를 걸더니, 또 갑자기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도대체 왜 심통이 난 거였을까. 비위를 맞춰 주기도 참 힘들었다. 이랬다저랬다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는 최종수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상호는 코트를 따라 뺑뺑 돌면서 전날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막상 욕을 먹었을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이제 와 억울함이 밀려든다. 꼭 그렇게 굴어야 하나. 솔직히 틀린 말은 하나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최종수 기상호 두 사람이 나오면 당연히 공동주연이지. 꼭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나.

잘 생각해 보면 오히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낸데. 어제의 일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던 상호가 생각했다. 나 잘생겼어? 나 잘생겼어어? 귀가 닳도록 듣는 말을 굳이 제 입으로 다시 묻는 행위라니 정말 괘씸했다. 늘 덤덤하길래 별 감흥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최종수는 제 미모를 확인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놈이었다.

농구 선수가 농구만 잘 하면 됐지, 반반해서 뭐 하는데? 얼굴 뜯어먹고 농구 하나. 최종수한테 쫄아서 그렇다고 대답은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원하는 대답이 있는 질문이라 더욱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지만, 정말로 기상호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종수는 좀 느끼하게 생겼다 아냐. 그런데 상호는 어쩐지 이유를 덧붙이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상호는 달리기에 속도를 더 높였다. 조금 숨이 차 왔다. 최종수의 농구 실력만큼이나 그의 외모 역시 왕왕 화제가 되곤 했다. 어떤 배우를 닮았고 또 어떤 가수를 닮았다느니 하는 것들. 기상호 역시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어쩐지 이쁘장하게 생겼더라 납득하기도 했고 말이다.

생긴 것 만큼 마음도 곱게 쓰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상호는 헉헉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가슴이 가파르게 부풀었다. 칫. 뭐가 어찌 됐든 그러한 기만은 확실히 제네바 협약에 의한 전쟁범죄로 규정되어 있는 일이다. 이마에 맺힌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동인男의 감정

"뭘 봐?"

"형 본 거 아닌데요⋯⋯."

공교롭게도 종수와 상호는 코트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제 쪽을 바라볼 때까지 상호를 가만 노려보던 종수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바로 으르렁댔다. 꼭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비켜 뒤지기 싫으면. 어쩐지 첫 만남이 오버랩된다.

연습 경기가 시작하기 전. 선수와 코치 몇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아무도 없던 체육관은 금세 분주해졌다. 코트를 몇 바퀴나 더 돌고 몸이 완전히 풀린 상호는 구석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앞으로 쭉 펴고, 발끝에 최대한 손가락을 가까이 보내면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고통을 인내하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리기를 몇 분.

콱.

"아아악!!"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게 등이 밟혔다.

"아파, 아파요. 하지 마세요. 아아악! 제발!"

신발까지 신은 발이 체중을 실어 세게 상호를 꾸욱 눌렀다. 근육이 확 늘어나면서 애써 유지하던 자세는 곧바로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란 상호가 꽥 소리를 지르자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허벅지 찢어질 뻔했잖아요⋯⋯!"

"엄살은. 그렇게 뻣뻣해서 농구 어떻게 하냐?"

"종수 햄?"

"또 햄이라고 하네."

엄살 조금 보태서 다리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얼얼한 감각에 눈물까지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상호는 분한 얼굴로, 눈물을 쓱 훔치는 시늉까지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구단 내에 이런 장난을 칠 법한 사람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몇 있었다. 그리고 그중 결코 최종수는 없었는데, 기상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큭큭 웃고 있는 최종수였다.

"준비 단단히 해라. 넘어져서 어디 부러지지나 말고."

입이 귀까지 찢어진 것이 그 장난이 퍽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어제의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상호가 생각했다. 종수는 미소를 감출 생각은 아예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호를 내버려 두고 그를 홱 지나쳐 갔다. 어깨에 멘 보스턴백과 함께 흔들리는 뒷모습이 상당히 기분 좋아 보였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내가 기분 나빠야 할 이유가 있나?"

"왜 없겠어요?"

최종수의 복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 탓에 두 사람 사이에는 연습 경기에 결코 필요하지 않은 긴장감이 흘렀다. 아까 당한 앙금이 남은 상호는 평소처럼 종수에게 설설 기지 않았다. 최종수 같이 피곤한 인간에게 맞불을 지르는 게 얼마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인지 잘 알면서도 그랬다.

"기분 나쁠 이유, 많지."

기상호가 중얼거린 말 한 마디는 최종수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공을 한 번 쥐여주자 종수의 득점은 끝이 없었다. 따라붙는 상호를 제치고 풀업 점퍼. 매끄럽게 치고 빠지는 패스에 군더더기가 하나 없었다. 상호가 수비에 애를 먹고 득점이 계속되는 상황, 벌써 점수 차만 십 점이었다.

공을 뺏는 것도 힘들었지만 겨우 뺏고 나서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쉽사리 코너 슛을 쏠 공간도 만들 수 없는 상황. 결국 3점 라인 밖으로 패스를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슛은 연이어 빗나갔고, 득점원이 틀어막히자 자연스레 최종수의 팀이 다시 흐름을 가져갔다.

"넌 선수 생활 오래 못 하겠다."

"말이 너무 심하신데요?"

"네 3점 슛 성공률은 안 심하고?"

구단 내외를 통틀어 최종수를 막아 볼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중 수비 스페셜리스트, 락다운 디펜더 에이스 스토퍼 등등으로 불리는 기상호는 일단 한 번 달라붙었다 하면 뗄 수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빅맨은 물론이고 웬만한 가드들까지 다 미쳐 버리게 만드는 게 바로 상호다. 그런 상호인데도 종수만큼은 상대하는 게 아직 버거웠다.

"비켜!"

"아야야⋯⋯."

"기상호 넌 어차피 나 못 막는다니까? 팔십 키로도 안 되는 게 어딜 덤벼."

어느새 스크린을 힘으로 뚫은 최종수가 또다시 돌파했다. 포스트업. 통 손쓸 방도가 없었다. 종수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상호가 막기 힘들어하는 기술을 총동원했다. 평소보다 더 세게 밀치고 튕기고 난리가 났다. 연습 게임인데 상호는 실전 경기보다도 더 많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당연히 최종수는 최종수대로 득점을 해야 하고, 기상호는 기상호대로 그걸 저지해야 한다. 수비수를 밀치고 떨쳐내는 건 종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바닥에 넘어진 상호가 쓸린 팔을 문지르면서 인상을 구겼다.

"그냥 계속 거기 앉아 있던가. 넌 그게 딱 어울린다."

"저기, 햄. 우리 같은 팀이거든요?"

"같은 편은 아니지. 멍청한 새끼야."

실전도 아닌 연습 경기에서, 그것도 같은 구단에 속해 있는 저에게 트래시 토크를 선보이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최종수는 노골적으로 기상호를 비웃었다. 이제는 사람 넘어가지 말라고 대신 화를 내 주는 선배도 없으니, 기상호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마터면 최종수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할 뻔했다. 최종수는 그냥 기상호를 괴롭히는 중인데 말이다. 최종수가 지금까지 기상호에게 한 일이라고는 카톡 테러와 밤늦게 전화해서 화내기, 또 발로 등짝 밟기 뿐인데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던 예전에 비하면 양반이라 저도 모르게 신이 났나 보다.

상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최종수의 도발에 속이 확 끓어올랐다. 침착을 유지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어찌 됐든 기상호도 남자고 농구 선수다. 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실실 웃기 시작했다. 요즘 탈 아시아 최종수가 폼이 떨어진 것도, 어젯밤 잠을 한숨도 못 자서 눈에 핏발이 선 것도 이유는 뻔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는 건 기상호 뿐이다. 상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후회공 최종수 나오는 글 감명 깊게 보셨나 봐요? 어째 말투가 똑같네?"

"이 새끼가⋯⋯."

최종수와 림을 마주 본 페이스업 상황. 최종수 녀석의 멘탈, 딱 고교 수준인걸? 종상을 언급하는 순간 종수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태풍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눈동자가 한층 더 험악하게 번들거렸다. 어떠냐, 복수다. 그 기세를 몰아 상호는 종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대로 깔끔하게 3점 슛.

실패.

연습 경기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게 안 들어가네? 머쓱해진 상호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종상 드립은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하필 이럴 때 하늘이 이 기상호를 외면하다니. 상호는 괜히 바닥에 공을 튕겨 보면서 종수를 흘깃 눈짓했다. 종수는 트레이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습 경기가 마무리되고 개인 훈련을 하거나 짧은 휴식을 취하는 시간. 상호는 다가올 심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뭘 또 힐끔거려. 진짜 뒤지고 싶어?"

당장이라도 상호를 죽이려는 듯한 얼굴의 종수가 머지않아 그에게 다가왔다. 상호는 종수의 말을 못 들은 척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피했다. 최종수는 점점 가까워졌고, 기상호는 연습 영상을 녹화하는 카메라에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담길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략적으로 계산한 결과 세 발짝만 움직이면 된다.

"야. 기상호. 대답 안 해?"

"⋯⋯."

"씹냐? 이젠 귀도 안 들려? 아깐 잘만 종상종상 거리더니 이젠 무서운가 보지?"

혹시 최종수가 목이라도 조르면 증거 영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화될 각도. 그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종수는 상호를 졸졸 따라오면서 틱틱거렸다. 기상호는 충동을 느꼈다. 아까의 업보를 청산할 두려움에 위축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과거의 실수는 뒤로하고 또 한 번 최종수에게 대들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게 누가 까불라고 했어. 어?"

그때. 기상호는 최종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래. '종상'한 게 맞았다. 과연 종상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건 다 최종수의 잘못이다. 종상이 그렇게 싫다고, 종상 때문에 미치겠다고 괴로움을 호소해 놓고는 그 약점을 쥐고 있는 기상호를 건드린 최종수의 잘못. 이건 자업자득이다.

그래서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종수를 확 끌어당겨 안았다. 종수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거친 욕과 함께 바닥으로 밀쳐질 거라 생각했으나 최종수는 단지 놀라서 제자리에 굳었을 뿐이었다. 화들짝 놀란 최종수는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야, 너, 너 뭐해. 뭐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최종수는 뻣뻣하게 굳은 채 겨우 기상호의 어깨를 밀어 제게서 떼 놓았다. 그 모습이 꼭 오이를 본 고양이 같았다. 꼬리가 펑 터져서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오르는 고양이. 아니 그건 최종수한테 갖다 붙이기엔 너무 귀엽나? 그런 생각이 들자 웃음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어제 햄이 보낸 글을 읽다 보니까 궁금해졌는데요. 거기서 제가 종수 햄 품에 쏙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게 진짠지 궁금해서⋯⋯."

"뭐?"

"역시 그 정도는 아니네요."

웃음을 겨우 참아낸 상호가 말했다. 임기응변의 신이 따로 없었다. 상호는 종수의 허리에 손을 턱 얹으면서 청산유수 같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제 읽은 종상 소설에 실제로 있었던 구절은 맞았다. 기상호가 최종수 품에 쏙 안겼고 종수가 상호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었다나 뭐라나.

"당연히 아니지. 멍청아. 네가 키가 몇인데. 봐. 이만큼밖에 차이가 안 나잖아."

종수가 상호를 다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통을 맞대 비교해 봤자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지도 않는다는 걸 열렬하게 호소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도리어 민망해진 상호가 헛기침했다. 그 장면은 카메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탓에 목소리만 빼고 전부 녹화되었다.

"이런데 네가 나한테 한 품에 안긴다고?"

종수는 갑자기 달려들어 안긴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도 아까의 발언을 징벌하는 것도 이젠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최종수가 아무리 거인이라고 해도 기상호 역시 백구십에 육박하는 거구다. 당연히 말이 되는 소리일 리 없었다. 그런데 최종수는 끝도 없는 츳코미의 축복을 내렸다.

상호는 자신이 종수의 품에 안길 수 없는 101가지 이유를 흘려들으면서, 종수가 어쩌면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최종수가 성질이 더러운 것도 맞고 지난 몇 개월 찍소리도 못할 만큼 무서운 것도 맞았다. 그렇지만 지난 며칠간 은근히 간을 본 결과 종수에게는 은근히 빈틈이 있는 것도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최종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당연한 소리를 굳이 진지하게 다시 하는 점에서 웃기다는 생각마저 든다. 기상호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줬던 유일한 사람이 최종수였던 것만 생각해 봐도 그랬다. 최종수는 확실히 똑똑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지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호는 혀를 삐쭉 내밀고 실눈을 떴다. 크크크. 계획대로군.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아마 영상이 공개될 쯤에는 종상에 또다시 폭풍이 몰아치겠죠. 인간 태풍 최종수 씨. 그때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해 봐도 늦을 겁니다. 그러게 누가 저 괴롭히라고 했어요?

복수도, 훈련도 끝난 뒤. 다음날 어웨이 경기를 위해 상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으면 보스턴백을 멘 최종수가 그 앞을 지나쳐 갔다. 잔뜩 신이 나 보였던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가라앉은 듯한 눈치다. 운전석에서 몸을 낮췄던 상호는 어느새 시야에서 기다란 종수와 마찬가지로 길쭉길쭉한 그의 그림자까지 사라지자 멍하니 있다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복수에 성공해서 기분이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최종수의 뒷모습을 보니 덜컥 후회가 들기 시작한다.

"왜 그랬지? 내가 드디어 미쳤나?"

종수가 괴로운 것은 제쳐두고, '종상'이라는 게 인기가 많아져서 상호에게 나쁠 건 하나 없다. 왜냐하면 기상호는 아직 인지도가 낮은 신인이니까. 관심 하나하나가 고픈 입장이었다. 관심 한 번 받겠다고 강아지 머리띠를 쓰고 춤을 추면서도 기상호는 별로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런 판국에 최종수와 알페스 같은 걸 당한다고 수치스러울 리가 없었다.

계획대로긴 뭐가 계획대로야. 그건 기상호에게 아무런 손해도 가져다줄 리 없었고, 오히려 이 기회를 역으로 이용하면 좋을지도 몰랐다. 마치 오늘처럼 말이다. 오늘 상호는 '종상'을 직접 했다. 그건 분명 카메라에 녹화되었을 것이다. 최종수를 골탕 먹임과 동시에 종상 떡상까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상호는 인상을 구기고 한숨을 내쉬며 끊임없이 혼잣말하고 있었다.

"하하하.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이제부터 x나 막 살 거임."

그러다 상호는 실성해 버린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최종수 한 번 엿 먹여 보겠다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섣불리 한 행동은 경솔하기 짝이 없었다.

진작 남들이 보기에 커플처럼 보이는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냐면⋯⋯, 기상호는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둘이 사귄다는 말만 봐도 펄쩍 뛰고 아주 경기를 일으키는 종수와 다르게 상호는 지금까지 뭘 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던 걸 기억하는가. 기상호가 지나치게 무덤덤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호에게는 그게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최종수와 기상호가 엮이는 건 아무 문제 없는 일이지만, 오늘처럼 대놓고 의심 살 여지가 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는 것이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데, 오늘의 기상호는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을 직접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함정 카드에 발이 묶인 건 최종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아니, 사실 그건 또 다른 문제에 비하면 별로 큰 문제도 아니었다. 아까 품에 들어간다 어쩐다 하면서 옥신각신 할 때 손에 닿은 감촉이 어른거리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물론 최종수가 몸이 좋기는 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였을 수도 있었다. 상호는 애써 부인했다.

변태같이 귀가 빨개진 기상호는 속으로 열심히 변명거리를 찾았다. 부딪히면 아플 정도니까 말 다 했지 뭐. 턱 잡은 허리가 두껍고 근육이 단단한 게 부럽기도 했다. 나도 웨이트를 더 해서 몸을 키워야겠다. 중량을 몇이나 더 늘려야 하려나. 상호는 그런 잡생각으로 자꾸 떠오르는 종수를 머릿속에서 치워 버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태풍은 너무도 쉽게 그의 머릿속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종상이라는 건 지금까지 기상호에게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입할 틈이 없는 완전한 판타지였다. 그냥 주인공 이름만 종수상호인 로맨스 소설이었단 말이다. 종수와 상호가 물고 빨고 서로에게 사랑한다 울부짖는 창작물들을 보고 상호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감상을 읊었던 이유다.

주로 인기 있는 게헤(게이x헤테로) 종상은 애초 성립하지 않는 명제였으며, 기상호는 포지션을 별로 신경 쓰지 않기는 했지만 체격 탓인지 주로 탑을 하는 쪽이었다. 무엇보다도 최종수는 기상호에게 식 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기상호는 하얀 피부에 차갑게 생긴 얼굴을 좋아했고, 까칠하고 틱틱거리는 츤데레 캐릭터보다 그냥 대놓고 상냥하고 친절한 캐릭터에게 끌리는 남자였다. 

아, 왜 그런데 이렇게 간질간질하지. 돌았나? 다은햄한테 독도킥을 씨게 맞아야 정신을 차릴라나.

최종수는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기상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놀라서 쿵쿵 뛰었던 심장이 단지 놀라서만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지. 상호는 핸들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착각이겠지. 착각일 거야. 상호가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 최종수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기상호 미친 게이 새끼 다 됐네."

잘생긴 거 앞에 장사 없다고 해도, 그 최종수인데.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냐. 아까 그런 소리를 들어 놓고도 설렌다니 마조히스트 새끼냐. 설렐 사람이 없어서 같은 팀 선수한테 설렌다니 외롭기는 외로운갑다. 아니, 왜, 한창 혈기 왕성할 때잖아. 나도 좀 아무한테나 끌릴 수도 있고 그런 기지. 아니다. 이런 생각 하는 거 아~무 의미 없다. 최종수는 내 극혐하고, 괴롭히려고 안달이 나 있는데. 잘 될 수가 없잖아. 이런 생각 해 봤자지. 교통정리는 하나도 되지 못하고, 기상호의 머릿속은 퇴근길처럼 복잡해졌다.

그 어떤 트래시 토크도 아닌, 스쳐 지나간 행동 하나로 최종수는 기상호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아, 이건 정말 재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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