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동인男의 감정 4

노이즈 캔슬링과 주변음 허용


최종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눈썹 사이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감고 있던 눈이 신경질적으로 뜨였다. 평온함이 몇 초를 못 간다. 종수는 귀에 꽂아 둔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을 껐다. 그러자 웅얼웅얼 들려오던 주변 소음이 명확해졌다. 어웨이 경기를 앞두고 원정 지역으로 가는 길. 평소였다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 일마저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너 무슨 수학여행 왔냐?"

"오늘 멀리까지 가니까⋯⋯. 저번에 배고프더라고요."

"나 하나 줘 봐."

"와. 뭔데? 나도."

이를테면 앞자리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선수들 같은 것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특히 거슬리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이 기상호였다. 버스에 간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기상호. 주위 선수들에게 그걸 나눠주면서 헤헤 웃고 있는 기상호. 바로 기상호.

오늘 기상호는 뒤늦게 집합 장소에 도착했다. 출발 직전에 버스에 올라탄 상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였다. 통로를 비워 두고 창가에 앉은 최종수, 또는 통로를 차지하고 앉은 2미터 8센티의 센터. 그런 상황에서 상호는 굳이 센터의 비좁은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장장 다섯 시간이 걸리는 여정을 거대한 센터 옆에 앉아 구겨져 가기로 한 것이다.

괜히 기상호와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오히려 안도할 일일지도 몰랐다. 누군가 찍은 사진 귀퉁이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걸린다면 그것대로 골치 아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수는 이상하게 심술이 났다. 기상호 따위에게 선택받지 못했다고 해서 화가 날 이유란 절대 없었는데 말이다.

"별거 없고 그냥 견과류에요. 제 팬분들이 주신 거."

"푸하하하. 기상호 마이 컸네? 벌써 팬클럽도 생기고?"

"아, 햄! 와 자꾸 놀리는데요. 저 은근 인기 있다고요."

최종수는 어쩌면 자신도 인사 따위에 연연하는 꼰대 타입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사가 이렇게까지 뒤틀릴 수는 없었다. 평소 기상호가 하는 눈인사나 묵례도 성의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정도 아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만큼 신경을 긁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능이었다. 

기상호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웅얼거리는 기상호의 목소리가 노이즈 캔슬링을 자꾸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몹시도 거슬렸던 종수는 이어폰 설정을 주변음 허용으로 바꿨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한 번 들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싸 주신 거 아니냐?"

"그렇겠지. 기상호가 무슨⋯⋯."

"아잇 진짜. 여 스티커에 딱 써 있다 안캅니까. 상.호.팬.일.동."

앞자리에서 들려 오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그는 또다시 심통이 났다. 한층 선명해진 상호의 목소리는 아주 하찮은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팬들에게 받은 간식을 챙겨 온 기상호는 은근슬쩍 그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다. 친한 형들 앞이라고 자연스러워진 말투가 거슬렸다. 그래서 종수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내 거에는 베이글남 기상호라고 써져 있는데?"

"베이비 페이스에, 크흠⋯⋯. 글래머 몸매, 그거에요. 요즘 연하남이 인기잖아요."

"야, 설마 네가 직접 인쇄해서 붙인 건 아니지?"

온통 기상호가 잉잉거리고 또 쫑알쫑알거리는 소리만 귀에 꽂혔다. 웃기고 있네. 뾰루퉁해진 얼굴로 종수가 생각했다. 아마 그중 반 정도는 종상 때문에 네 존재를 알게 됐을걸? 몇 되지도 않는 기상호의 팬들 중에 순수하게 상호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아냥대고 싶었다. 입이 근질근질거렸다.

그 누구도 침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버스 안. 선배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종수는 단지 기상호가 앉은 자리를 뚫어지라 노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내내 기상호는 한 번을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상호는 최종수에게 그 실없는 스티커가 붙은 간식을 한 번도 권하지 않았다.

"야. 조용히 안 하냐?"

"아⋯⋯, 죄송합니다."

종상을 들먹이며 자신을 조롱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화풀이는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종수는 상호가 앉은 좌석을 발로 세게 찼다. 그러자 신이 나서 떠들던 상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잠깐의 정적이 있은 후, 상호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는 더 말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뒷자리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아앙~ 햄한테도 이거 하나 드릴 테니까 좀 봐주시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난스럽게 굴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뭐가 돼. 종수가 생각했다.

게다가 종수의 말에 버스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본의 아니게 모두에게 눈치를 주게 된 것이다. 귓바퀴가 화끈해진 최종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음악을 틀었다. 뭐라고 해명할 구석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버스 안은 조용해졌고, 종수는 더는 기상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슬려 하지 않아도 됐다.

그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 잠깐 잠들었나 싶더니, 종수는 하나둘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수들의 기척에 눈을 떴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어느새 버스는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로비에 도착해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누군가 종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버스에서 기상호와 농담 따먹기를 하던 선배들 중 하나였다.

"네가 기상호 싫어하는 건 알겠어."

아까 버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꺼낼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형들 다 있는 데서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너 선배가 우습냐 등등의 훈계까지도 각오했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던 것 같습니다 대꾸할 준비까지 마쳤는데 선배는 전혀 다른 주제를 가져왔다. 종수는 당황스러웠던 나머지 순간적으로 머리를 쳐들고 말았다.

"싫은 사람이랑 억지로 잘 지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래도 대놓고 티 내면 안 되지. 어저께 훈련만 해도 그래. 너 같은 선수한테 찍히면 걔 입장에서는 어떻겠어."

나 기상호 그렇게까지 안 싫어하는데. 종수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깔면서 속으로 말대꾸했다. 걔가 좀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찍어서 괴롭힌 적은 없는데. 훈련 경기 날에는 단지 전날 기상호가 제 성질을 건드린 것을 똑같이 돌려준 것 뿐이었다. 이제껏 무언가 액션을 취한 건 그날 하루 딱 한 번밖에 없었던 일이란 말이다. 최종수는 억울해졌다. 어느 정도 제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말이다.

"특히나 형들 다 있는 데서 그러는 건 예의도 아니고."

"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그래. 앞으로 좀 주의하자. 얼른 들어가."

내일 열심히 해 보자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선배에게 종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뒤로 도는 그 즉시,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기상호 그 자식이 먼저 그랬는데. 기상호 그 자식이 먼저 나보고 후회공이냐고 그랬는데⋯⋯. 종수가 속으로 그날의 일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최종수는 후회공이 무슨 뜻인지조차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대충 종상과 관련된 거라고 유추하고서는 잔뜩 화가 났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 호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막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완전히 닫혔던 문은 다시 천천히 열리고, 종수는 그 너머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하필 기상호였다.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최종수는 가오 빠지게 화들짝 놀랐고, 기상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

기상호는 호텔 엘리베이터에 제 카드키를 대지도 않았다. 다른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닫힘 버튼만 연타했을 뿐이었다. 눌려 있는 버튼은 오직 14층. 30층이 넘는 호텔에서 하필이면 두 사람이 같은 층에 배정된 듯했다. 엘리베이터 안이 조용했다. 종수는 우뚝 서서 정면만 봤다. 기상호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인사 안 하냐? 이건 지나치게 시비조다. 최종수가 방금 꾸중을 듣고도 안하무인 굴 개차반은 아니다. 그럼, 오늘 왜 내 옆에 안 앉았냐? 그래야 할 이유는 또 뭔데? 우리 둘이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럼 뭐? 나한테 왜 햄이라고 불렀냐고 물어볼까? 그렇게 불렀으면서 오늘은 왜 갑자기 모르는 척이냐고?

14층. 문이 열립니다.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결국 입을 떼지 못한 종수는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상호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종수의 등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와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복도 저 끝에 있는 방까지 가는 길.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싶었다. 기상호와 같은 방에 배정되기라도 하면 이 어색함은 얼마나 걷잡을 수 없어질까.

"너 어제까지만 해도 장난 잘 치더니 왜 오늘은⋯⋯."

나 데면데면하게 대하냐? 이으려고 했던 말은 목구멍 너머로 쑥 들어갔다. 뒤를 돈 종수의 눈앞에 상호는 없었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문이 막 닫힌 옆 호실과 휑한 호텔 복도의 풍경 뿐. 그래도 종수의 말을 일부라도 듣긴 들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옆방 문을 두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종수! 왜 이렇게 늦었어?"

"어?"

"나 사우나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런데 마침 종수의 호텔 방 문이 활짝 열렸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선수가 그 안에서 나왔다. 최종수는 정신이 온통 옆방 문짝에 쏠려 있는 상태로, 동료 선수의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래서 끝내 기상호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너 햄이 무슨 뜻인지 알아?"

종수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마찬가지로 다리도 수건으로 덮은 채. 딱히 친하지는 않지만 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료와 사우나 안에 나란히 앉아서. 그러다 그는 불쑥 말을 꺼냈다.

갑작스레 태도가 변한 기상호가 아무래도 계속 신경 쓰였다. 원래 서로를 있는 듯 없는 듯 취급하던 사이에 새삼 기분 상해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요 며칠 대화를 나누면서 아주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종수가 상호에게 한 거라고는 화풀이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거 사투리잖아."

"친한 형한테 쓰는 거라던데. 맞나 싶어서."

"맞지 않나? 막 행님 햄 그러잖아."

인터넷에서 말했던 대로 그건 확실히 친밀함의 표시인 것 같긴 했다. 기상호도 저와 마찬가지로 조금 가까워졌다고 느꼈던 게 분명했다. 오늘 기상호의 행동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늘 상호는 종수를 보고도 못 본 척했고, 짜증을 내는 종수에게 응수하는 대신 죄송합니다 딱딱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최종수를 일부러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도 내가 기상호 싫어하는 것 같아?"

"좋아한다고는 못 하지. 다들 아는데 뭐."

"그 정도라고?"

"걔한테만 아는 체도 안 하고. 눈치 주고. 그러지 않았나?"

찝찝함을 떨쳐내지 못한 종수는 결국 가지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선배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이 돌아왔다. 솔직히 기상호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종수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상호는 너랑 좀 친해져 보겠다고 나름 노력했었던 것 같은데⋯⋯." 

"⋯⋯." 

"그래도 요 며칠 붙어 다니더니, 어떻게 화해했나 봐?"

"화해?"

"그런 건 또 아닌가."

나랑 친해져 보려고 노력했다고? 아닌데. 그런 적 없는데. 종수가 생각했다. 입단한 뒤로 제대로 말을 섞어보지 못했던 이유에는 기상호가 자신을 지나치게 무서워하고 경계했던 탓이 컸다. 처음에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고 했던 건 최종수 쪽이었단 말이다.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종수가 다시 부정적인 의견들을 찾아보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아예 단절되었었다. 그러는 동안 기상호는 단 한 번도 종수에게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나마 요즘 말을 나누게 된 것도, 먼저 최종수 쪽에서 종상 이슈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어?"

걔한테만 아는 체도 안 하고. 눈치 주고.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서 그런가. 본체만체하다 괜히 말을 걸어서. 요즘 기상호한테 화밖에 안 내기도 했지. 그 새끼 간 보다가 은근슬쩍 제 좋을 대로 굴긴 하지만 라커룸에서는 나한테 맞을 줄 알고 쫄아 있었잖아. 그래서 그랬나. 무서워서 나를 피하는 건가? 종수가 생각했다.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한테 먼저 손을 내밀었던 걸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는 늦었다는 거냐? 잘못을 저지른 건 거의 기상호 새끼였는데, 왜 뒤척여야 하는 건 최종수인지 이해가 안 됐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기상호가 참 싫었다. 하여튼 기상호.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종수가 눈을 감았다.

경기가 마무리 될 때까지 특별한 일은 없었다. 기상호가 원정 기간인 이틀 내내 최종수를 피한 것 외에는 말이다. 상호는 조식도 일부러 종수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먹더니, 훈련장에도 종수가 떠날 때쯤 느지막이 등장했다. 다행인 건 기상호가 코트 위에서 일부러 패스를 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괜히 기상호의 꽁무니를 눈으로 쫓게 되는 종수와 다르게, 상호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능력 하나는 탁월했다.

"최종수! 최종수!"

"종수 형님 오늘 경기를 완전히 찢어 버리셨습니다!"

팀이 순조롭게 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기상호의 돌발행동은 퇴근길에서 발생했다. 원정 경기가 있는 날이면 시간에 쫓기느라 손 한 번 흔들어 주고 버스에 올라타곤 하는데, 그날따라 종수는 셀카를 같이 찍어 준다거나 사인을 해 준다거나 하면서 한참 펜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 팬서비스에 그렇게 큰 뜻이 있는 편도 아닌 최종수기에 그것은 무척이나 특별한 경우였다.

"이것 좀 보세요. 오빠도 이거 찍어주시면 안 돼요?"

"푸핫⋯⋯. 안 돼. 바보 같아."

"에이, 둘이 같이 찍으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그날도 기상호는 최종수와 마주치기 싫었는지 경기장에서 뒤늦게 나왔다. 헐레벌떡 매직을 받아 든 상호가 구단 유니폼에 사인을 하는 동안, 상호와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종수는 팬이 보여준 기상호의 슬릭백 챌린지를 보고 있었다. 뭘 하는 건지 펄떡펄떡 뛰는 기상호를 보고 종수는 팬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했다. 이어서 들려온 말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혹시 너도 종ㅅ⋯⋯."

기상호랑 나랑 둘이서 슬릭백 챌린지를 찍으라고? 혹시 종상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지? 물으려고 한 찰나. 상호가 거의 날아와서 느닷없이 종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종수는 허우적거리면서 상호를 떼어 내려고 했다. 한 번 밀치면 바닥에 바로 넘어지는 놈이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촌극이 따로없는 광경이었다.

"조, 종신 연애 계약! 종신 연애 계약 아시죠? 그 드라마 보셨냐고요. 하하하. 종수 햄이 요즘 그 드라마를 억수로 좋아해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은 상호는 그래도 종수를 끌고 가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맨 뒷자리에 종수를 구겨 넣은 다음 도망치지 못하게 그 옆자리를 사수하기까지 했다. 입은 갑자기 왜 막은 거고, 드라마 얘기는 또 뭐고, 무엇보다도 모른 척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친한 척이야? 종수가 생각했다.

"너 미쳤냐?"

"죄송해요. 긴급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 그 드라마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면 어떡해."

"그게 문제였어요⋯⋯?"

상호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졸지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라마 애청자가 됐는데 받아들이라고? 종수가 툴툴거렸다. 상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마른세수를 하더니 앞머리를 탈탈 턴다. 최종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기상호를 빤히 쳐다봤다.

"아잇, 참⋯⋯. 형. 다름이 아니고요."

"이젠 '햄'이라고 안 부르네?"

"아, 그게. 불편하신 줄 알고."

"안 불편해."

"넵."

보아하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며칠간 피하다가 갑자기 할 말이 생겼다니 궁금했지만, 종수는 형이라는 단어를 햄이라고 교정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뻣뻣하게 끄덕이는 기상호는 이상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데도, 상호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음. 그러니까요. 햄 아까 팬분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하셨죠?"

"어떤 얘기."

"종상이요. 종상 이야기 하려고 했잖아요! 그러시면 어떡해요."

"왜 안 되는데."

상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주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아예 속삭이게 되었다. 최종수는 상호가 왜 속삭이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맨 뒷자리에서 다 큰 남자 둘이 귓속말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당연히 하면 안 되죠! 종상 같은 건 알고 있어도 아는 척하면 안 돼요. 그게 세계의 암묵적인 법칙이라고요."

"뭔 개소리야. 저번에는 종상 하는 사람들 다 우리 구단 팬이라며."

"아이, 그거랑 그거랑 다르다니까요. 뭘 모르시네."

최종수가 종상을 언급하는 건 마치 원작자가 동인지에 축전을 보내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최종수와 기상호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비유겠지만. 상호는 답답한 나머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말했다. 종수는 바보 취급 당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너는 별로 신경 안 쓰인다며?" 

"아니,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야. 네가 너랑 나랑 실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니까 됐다며? 네가 주인공이라서 재밌다고 했잖아?"

"자, 자, 잠깐만 진정해 보세요. 와. 아니, 화가 잔뜩 나셨네."

"하⋯⋯."

최종수가 말벌처럼 쏘아붙이는데도 기상호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거의 감탄하듯이 말하는 놈을 보자 종수는 순간 혈압이 치솟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완전히 달라진 상호의 태도에 고민했던 전날 밤의 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기상호를 싫어하는 티를 내지 말라던 선배의 훈계도 우스웠다. 이런데 어떻게 참아. 이런데 내가 화를 어떻게 참냐고.

"너 나 열받게 하려고 같이 앉은 거냐?"

"당연히 그런 건 아니죠. 제가 잘 생각해 봤는데, 종상이라는 게 좀 나쁜 것 같아서요."

"뭐?"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종상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햄이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시는데 그걸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그쵸."

최종수가 기상호에게 종상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부터 내심 바라왔던 반응이었다.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종상의 해악을 이해하는 것. 그런데 막상 그걸 상호의 목소리로 들으니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다. 상호가 뱉는 모든 구와 절이 흡족해서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거리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웬일로 정신을 차렸네."

"네. 햄 말씀이 다 옳은 것 같더라고요."

"누가 네 머리에 아령이라도 떨어트렸냐?"

상호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다 고개를 들어 종수의 얼굴을 봤다. 시선이 느껴져 눈을 지그시 맞추니까 상호는 다시 후다닥 눈을 피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기상호가 이렇게 나오니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종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겉으로는 이렇게 굴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 지 몰랐다.

"그래서 종상이 나쁜 거랑 그 얘기 하면 안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쪽팔리잖아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엮이는 거⋯⋯."

최종수는 종상이 정말 싫었다. 당연히 종상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기상호와 엮이는 것도 물론 거북했다. 기상호가 전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왜 이렇게 기분이 미묘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일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리고 햄이 알고 있다는 거 알려지면 그 사람들 더 신날걸요? 정말 그걸 원하세요?"

"아니."

"그러니까 모른 척 하자는 거에요."

"멍청아. 모른 척 하는 게 네 대책이야? 그런다고 종상이 없어지겠냐?"

지금이야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 무너질 지 모르겠는 게 최종수다. 이미 모른 척 하면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단 말이다. 최선을 다해 종상을 외면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점점 공격적으로 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다면서 또 모르는 척을 하자는 딴소리를 하는 기상호는 정말 최악의 아군이었다.

"저한테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요."

저 믿으시죠? 일산 SN의 브레인 기상호 믿으시죠? 종상을 없앨 뾰족한 수가 있으니까 한 번 들어보세요⋯⋯.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태도에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을 일삼는 기상호.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는 기상호는 여전히 속삭이면서, 제 말대로만 하면 반드시 종상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 있게 운을 띄웠다. 그런데도 종수는 지금껏 있었던 일에 대해 캐묻고 꾸짖는 것은 싹 잊고 그 말에 홀딱 빠져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종상을 없애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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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검색하는 꿀벌

    너무 재밌어요…그래서 그 방법이 뭘까요… 다음편 원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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