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악질 넷카마 참교육 (실패)
오빠야를 보게 됐네?
“오빠야. 머해요?”
“내는~ 오빠야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피시방 컴퓨터 앞에 앉은 187센티미터의 장정. 캡 모자를 눌러쓴 그는 타자를 치는 동시 킥킥거리며 보내는 내용을 읽어 본다. 목소리를 가늘게 내느라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이름은 기상호,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는 취준생이다.
Puppyㅍvㅍ._: 오빠야 머해요??
Puppyㅍvㅍ._: 내는 오빠야가 너무너무 보고싶은데
Stormchoi23님이 입력 중입니다...
오늘은 답장이 평소에 비해서 늦다. 상호는 답을 기다리면서 턱을 괴었다. 빨리 반응을 보고 싶은데. 식은 라면 그릇을 뒤적이다 상호는 금세 지루해져 버렸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Stormchoi23: 너 진짜 남자야?
Puppyㅍvㅍ._: 엥;;;
Stormchoi23: 아니지?
Puppyㅍvㅍ._: 그럼 싫어요?
Puppyㅍvㅍ._: 내는 오빠한테 나 여자라구 한 적 없는뎅 ㅇㅅㅇ
띠링. 입력창이 한참이나 띄워져 있던 것치고 도착한 문장은 간소했다.
“푸하하하하!”
상호는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더니 웃음과 함께 토해냈다. 푸하하하하하. 큭큭큭. 웃음이 마구 토해져 나왔다. 상호는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대충 지져 끄고 서둘러 키보드에 두 손을 올렸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나. 웃겨 미치겠네."
여기 이 남자 기상호의 취미는 사이버상에서 여자인 척 하기. 그러니까 그냥 넷카마라는 거다.
그리고 그의 이런 취미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순진한 호구 하나 잡아 용돈 벌이를 하려는 것도, 여자인 척하며 귀여움 받는 것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상대를 조롱하고 데서 오는 기쁨. 그것을 누리고자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한편 화면 너머의 Stormchoi23은 키보드를 개 쎄게 내리쳤다. 최종수는 간지나는 닉네임과는 다르게 쿨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퍼피에게 지금껏 호구 짓만 몇 번째인지. 절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줄을 서는데 엉뚱한 랜선 연애에 목매다 결국 이 꼴이 났다.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대체 내가 뭐가 아쉽다고 ‘퍼피’ 앞에만 서면 아임 스튜핏 아임 바보 등신.
Puppyㅍvㅍ._: 내는 오빠한테 나 여자라구 한 적 없는뎅 ㅇㅅㅇ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퍼피가 같은 거 달린 남자 새끼일 수도 있다고?
종수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아니라고 하지. 거짓말이라도 믿었을 텐데. 그냥 지금처럼 속이지. 착잡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목이 바짝바짝 타 왔다. 망할. 손안에서 텅 빈 페트병이 구겨졌다. 진짜 문제는 퍼피가 남자인 게 아니었다. 이 넷카마 새끼가 남자인 걸 알고도 차단이 주저된다는 게 문제지.
“나 진짜 얘 좋아하나?”
x발! 최종수의 넓고 공허한 광공하우스가 절규로 공명했다.
개악질 넷카마 참교육 (실패)
상등신 개호구 Stormchoi23. 그는 대체 뭘 하는 인간이길래 이런 하찮은 수작에 코가 꿰인 것일까. 과하게 귀여운 아이디와 작위적인 말투. 신상이 불분명한 모니터 너머 상대에게 덜컥 간도 쓸개도 다 빼줄 듯 구는 걸 보면, 사회에서도 일 인분 못 하고 살고 있음은 뻔해 보인다.
‘인간 태풍’ 최종수, “금메달 목에 걸고…”
국내 대회부터 국제 대회까지 죄다 랭킹 1위를 석권한 리그 오브 레전드 MVP. 수많은 남자들의 존경과 자적자를 동시에 받는 일명 인간 태풍.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데뷔 이래로 최정상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프로게이머 최종수. 예상과는 다르게 절대 한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최종수가 바로 스톰최였다.
요즘 종수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아니, 요즘이라고 칭하기에 그의 불면은 다소 만성적이긴 하다. 그래도 퍼피와 시간을 보내던 때와 지금의 불면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때는 설레서, 지금은 심란해서 잠을 잘 수 없으니까 말이다.
퍼피가 제 입으로 남자라는 걸 밝히고 나서부터는 게임에 아예 접속하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아직도 종수의 머릿속에는 ‘퍼피’와 ‘스톰최’의 게임 속 결혼식이 어른어른거렸다. 두 사람의 커플 농장과 귀여운 농장 동물들, 열심히 꾸며둔 정원 장식품들까지. 행복한 한때를 떠올리자 울컥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당장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도 종수는 미련에 한참이나 뒤척거렸다.
“종수. 많이 피곤해?”
“그냥, 좀.”
“이거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더 잘래?”
“아니. 뭔데? 이리 줘 봐.”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 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심연의 이름은 국내 최종수 마이너 갤러리. 일명 쫑갤이다. 일부러 모니터링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최종수의 최근 방문 기록은 전부 이 곳으로 도배되어 있다.
미드???: 바텀도 가려면 가요 ㅋㅋ
오늘자 존슨좌 요약.jpg
암컷이든 수컷이든 맛있으면 그만 아닐까
존슨좌 무지개짤 재평가 ㄷㄷ
오른쪽으로 가다가 멈춰서 궁극기, 막아봐.
인간 게이 신들렸누
팀 멤버가 건넨 휴대전화 속에는 어제 새벽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게시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컨디션이 그야말로 최악이었지만 무사히 경기를 마친 직후였다. 또 한 번 우승을 거머쥐었는데도 주르륵 뜨는 게시글들이 가관이다.
“인간 게이?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게이는 원래 인간인데. 머리가 어디 잘못됐나?”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열이 받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거 퍼피 때문이야?”
“종수야. 이제 그만해. 됐어, 괜히 보여준 거 아닌가 싶네.”
갓종수 빛종수에서 존슨좌로 전락한 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때 절대 지존 최종수였던 사나이. 그의 위엄이 이토록 무너져 내린 것에는 퍼피,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그 이름이 한몫했다.
“아, 그거 진짜야? 걔 남자라는 거 말이야. 신상 정보까지 인터넷에 돌아다니잖아.”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잘...... 그건 그렇고, 너 요즘도 <혈통> 플레이하냐?”
“아니. 우결 끝나고 관뒀지.”
“그래? 인터넷에는 너 아직도 접속한다는 이야기가 있길래.”
“몰라. 해킹당했나. 안 들어간 지 오래됐는데.”
종수는 뜨끔 놀라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혈통>. 스톰최와 퍼피의 사랑이 싹튼 게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바로 그 게임.
종수가 넷카마 논란으로 나락에 가기 전. 가장 영향력 있는 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한 것을 기점으로, 최종수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는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BTS 봉준호 손흥민 최종수 Let's Go. 스물여섯의 게임 국가대표는 손쉽게 국뽕 컨텐츠의 라인업에 올랐다.
미스코리아 어머니를 둔 덕에 미모까지 출중한 종수는 비단 e스포츠 선수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시점에서 그의 몸값을 높이려는 소속사의 입김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졌다. 결국 소속사의 등쌀에 이기지 못한 종수는 마지못해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게 되었다.
종수의 유튜브 채널은 여느 게임 크리에이터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남들처럼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리뷰하고, 남들보다 턱없이 부족한 입담으로 겨우 일상 이야기를 쥐어 짜냈다. 그 외에는 특별할 게 하나 없는 채널이었다. 그러다가 종수는 자신의 주가를 치솟게 하고 또 나락으로 보낸 <혈통>을 접하게 된다.
<혈통>. 혈통은 게임을 조금 즐긴다 하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만큼 유명한 RPG였다. 농장 운영, 친구 사귀기, 미니게임. 그리고 자유로운 캐릭터 커스터마이징까지, 아기자기한 부가 기능이 돋보이는 <혈통>은 종수가 지금껏 해온 전략형 전투 게임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Puppyㅍvㅍ._: 안녕하세용
Puppyㅍvㅍ._: 게임 첨하시나요ㅎㅎ
Stormchoi23: 네 초보입니다
Puppyㅍvㅍ._: 저 동행 찾고 있는데
Puppyㅍvㅍ._: 같이 다니실래요??
첫 촬영 날이었다. 조작법부터 낯선 게임의 튜토리얼을 겨우 끝마치고, 지쳐 버린 종수는 다른 초보자들과 함께 태초 던전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종수에게 퍼피가 한 줄기 빛처럼 내려왔다.
가히 세계 최고의 e스포츠 선수로 불리는 최종수도 낯선 게임에서는 그저 쪼렙 뉴비였을 뿐이다. 편한 길을 갈 수 있다는 유혹에 종수의 동공이 소용돌이쳤다.
어차피 방영분 대여섯개 내놓고 나서는 다시 플레이할 일이 없는 게임이었다. 며칠간 초보 던전에서 용쓸 바에야, 높은 레벨의 버디와 함께 돌아다니며 <혈통>을 알차게 즐기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 유혹이 달콤하지 않을 리 없었다.
네 잘 부탁드려요. 그래서 종수는 채팅을 보냈다. 바야흐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Puppyㅍvㅍ._: 근데 몇살이에여
Stormchoi23: 스물 여섯입니다
Puppyㅍvㅍ._: 아 오빠넹ㅋㅋㅋ 말놔요 걍
Stormchoi23: 그래
Puppyㅍvㅍ._: 낼도 할꺼죵? ㅎㅎㅎㅎㅎ
전혀 감이 잡히지 않던 플레이 방식을 겨우 이해하게 될 무렵이었다. 기본적인 컨트롤을 막 익혔을 쯤부터 퍼피는 슬슬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은근슬쩍 애교를 부리기도 했던 것이다.
"야, 이거 우결 각인데? 콘텐츠 나오네."
"우결이요?"
"우리 결혼했어요. 이 여자애랑 썸 타는 분위기 연출해서 좀 달달하게 가 보자. 막 받아줘 그냥."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PD는 귀신같이 냄새를 맡았다. 그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여성 팬을 긁어 모을 기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결혼했어요. 얼굴을 모르는 상대와의 말랑말랑한 썸 상황극. 인기가 없을 수 없는 소재였다. 아이돌 씹어먹는 비주얼의 최종수를 생각하면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다만 기획력 하나는 끝장나는 PD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최종수는 모태솔로라는 사실이다.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한 종수는 지금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커리어를 이어 왔다. 저 얼굴이면 여자 꼬시는 건 문제 없겠다며 수많은 남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그 최종수는 이제껏 연애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Stormchoi23: 채소에 물 주라니까 왜 안 줬어
Puppyㅍvㅍ._: 아아앙~ ㅜㅜ 잘못했어요
Stormchoi23: 이러면 우리 결혼 생활 힘들어
Puppyㅍvㅍ._: 제가 더 잘할게요...
모두가 알다시피 연애 상황극 따위를 하다 보면 한 쪽이 진짜 연애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 부지기수다. 둘의 경우에도 이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처음 기획에 대해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사심이 없었던 종수는 슬슬 실제로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얘 좀 귀엽네. 단지 PD의 지시로 퍼피에게 적극적으로 어울려 주다 보니 말이다.
그리고 우결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이 흥행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분량은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연장되었다. 인터뷰나 경기 도중에 늘 예민한 모습만 보이던 종수가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갔던 탓이었다.
“제가 사실 아직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게임을 플레이하다 지나가듯 말하는 장면은 클립으로 편집되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종수는 확실히 게임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어필이 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화제성에 힘입어 보려는 광고 제의와 방송 출연 제안이 물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매니저 필요하지 않겠어? 이래도 혼자 다니겠다고?”
"필요 없어."
"매니저도 구해서 방송 활동 열심히 해 보자."
"됐어. 내가 무슨 연예인이야?"
"힘들지 않아? 쫓아다니는 팬들도 감당 안 되는 수준이고."
"그런 거 싫다고 했잖아. 혼자 운전해서 다니면 되는 걸⋯⋯."
소속사가 원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종수는 이미 프로게이머 중에서는 나이가 꽤 있는 편이었고, 본인에게도 은퇴 의사가 있기 때문에 소속사에서는 이제 그의 전직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고 있었다. 때마침 유튜브 데뷔까지 성공적이니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종수는 연예계 진출에 회의적이었다. 유튜브를 시작한 이후로 본업에 소홀해지지 않았냐는 비난들에 이미 완전히 질려 버린 채였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매니저까지 구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는 말을 거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좀만 더 생각해 봐."
"됐다니까."
종수가 매니저 지원서를 하나하나 다 읽어본 뒤 전부 퇴짜를 놓는 바람에,결국 소속사에서는 매니저 채용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무 의미 없었던 그 행동이이리도 거대한 태풍을 일으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최종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 이력서를 전부 읽어 본 자신에게 고마워하게 된다.
유튜브에 방송이 올라간 뒤 실시간 인기 동영상을 최종수가 지배할 즈음이었다. 그 소식을 기뻐한 것은 비단 최종수의 소속사 사장만은 아니었다. 순진한 아다 파오후인 줄 알고 스톰최에게 접근했던 퍼피 역시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아주 잘 걸렸다 싶어서. 생각보다 더 순진해서 뭔가 했는데, 완전히 대어가 낚였구나. 기상호는 구부정하게 숙인 채 모니터를 보면서 생각했다.
Stormchoi23: 연락처 주면 안 돼?
Puppyㅍvㅍ._: 시름 내가 뭘믿고 ㅡㅡ
Stormchoi23: 유튜브 안 봤어?
Puppyㅍvㅍ._: ㅋㅋ 봄
최종수의 유튜브를 보면서 기상호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그가 게임에서만큼이나 제게 빠져 있다는 것. <혈통> 우리 결혼했어요 시리즈는 두 사람의 게임 속 결혼식으로 막을 내렸지만 최종수는 게임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퍼피와 연락을 끊으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없어 보였고 말이다.
둘째로는 왜 유독 다른 사람이 아닌 최종수에게만 열폭하는 사람이 많은지. '제발 고추는 작길' 절규하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올라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최종수는 너무 잘났다. 생긴 것만으로도 질투가 날 정도로. 그런데 키도 크고 몸도 좋고 게임까지 잘 하니까 눈꼴 시려워서 못 봐주겠는 거지.
상호는 그 모든 사실이 흥미롭게만 느껴졌다. 연봉 추산치가 백 억이나 되는 남자가 넷카마에게 물려 허우적대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Puppyㅍvㅍ._: 연락처 받아서 뭐하게여
Stormchoi23: 당분간 접속 못 할 것 같아서
Stormchoi23: 가끔 전화하자
Puppyㅍvㅍ._: 쫌 생각해 보고
그냥 좀 골려주고 말까 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상호는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제게 완전히 흠뻑 빠진 최종수를 망가뜨리고 싶어졌다. 종수가 적극적으로 들이대기 시작하자 상호는 <혈통> 카페에 게시물을 하나 등록했다. Puppypvp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의 활동 내역. 누가 봐도 남자다 싶은 흔적이 적나라했다. 넷카마 논란이 터진 것이 그쯤이었다. 최종수의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나락 간 계기. 그 계기는 그러니까, 온전히 기상호가 마련한 것이었다.
사실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면 상호가 남자라는 걸 종수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테다. 최종수는 직업 특성상 주변에 남자밖에 없는 게임 산업 종사자니까. 자기 자신을 포함해 남자가 어떤 생물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은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에는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히 존재한다. 최종수는 남자는 잘 알았는데 여자는 어떤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단독 커버가 실린 GQ 1월호 에서 알 수 있듯, 최종수는 ‘취미’라는 게 없다. 본인 경기 모니터링이 아닌 이상 유튜브도 잘 보지 않았다. 집에서 뭐 하세요? 생각이요. E 스포츠라는 문명의 이기에 몸담은 동시에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했다. 이 시대 홀로 옳게 된 청년은, 자연히 마라탕 엽떡 허니콤보 등등 여자들이 꼽는 최애 음식에 무지했다.
Stormchoi23: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Puppyㅍvㅍ._: 엄...
Puppyㅍvㅍ._: 제육볶음? ㅎ
Stormchoi23: ㅋㅋ 나도
기상호는 상대를 관찰해 교묘하게 파고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었다. 하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 질문하면 그는 이면의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퍼피에게는 분명 빈틈이 있었다. 그의 목적이 주류의 넷카마와는 확실히 결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방송 촬영용도 아닌데 밤새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 번쯤 의심을 해 봤어야 했단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제육볶음인 여자는 솔직히 드무니까.
Stormchoi23: 라면은
Puppyㅍvㅍ._: 신라면
Puppyㅍvㅍ._: 블랙이 마이떠
제육볶음에 이은 신라면 블랙. 그건 어쩌면 상호가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을 지도 모른다. 딱 한 번만 주의 깊게 봤다면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졌을 텐데. 그랬다면 종수는 머릿속으로는 천생연분을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덤덤한 척 '나도'라고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다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 아뿔싸. '사색을 즐기는 워커홀릭'(마리끌레르 인터뷰 제목에서 발췌) 최종수는 잠을 못 자는 바람에 이런 징조를 꿈에도 몰랐다.
Puppyㅍvㅍ._: 오빠 껨하장
종수의 <혈통> 시리즈의 인기만큼 논란은 날개 돋친 듯 뻗어나갔다. 상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계속 종수와 연락을 이어갔다. 언제쯤 남자냐고 물어보고 배신감을 느낄 지 기대가 적지 않았다. 화를 내고 분개하는 최종수를 보면서 웃을 준비까지 마쳐 놨는데 최종수는 퍼피를 곧바로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퍼피는 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종수는 퍼피를 정말 정말 많이 좋아했다. 메시지 하나에 다음 날 국제 대회를 앞두고도 농작물에 대포를 발사하는 바보 같은 미니 게임을 밤새 함께할 정도로.
“너 이거 계속 돌아다녔으면 좋겠어?”
"아뇨."
"그냥 방송 한 번 나가자. 그럼 화제가 달라져서 묻힐거야. 대표님도 엄청 원하셔."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왜요. 이게 무슨 논란이라고."
매니지먼트. 종수는 실장을 앞에 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하는 내내 눈이 휴대전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퍼피 신상 떴다 ㅁㅊ' 게시글.
종수는 퍼피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그러다 이렇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말았지만. 그에게 직접 남자라는 걸 확인받고 나서도 반신반의하던 종수는 퍼피가 신상까지 털리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종수야. 너 은퇴 생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정말 이렇게 불명예 떠안고 은퇴할 거야?"
"알겠어요. 방송 나갈게요."
"정말?
"대신 매니저 제가 원하는 사람으로 뽑게 해 주세요."
휴대폰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종수는 번뜩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들어 맞기만 한다면. 어떻게 설득해 봐도 안 된다는 말만 하던 종수는 별것도 아닌 조건을 내걸고 제안을 수락했다. 실장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종수는 대화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종수는 다급하게 이력서 뭉치를 뒤졌다. 눈에 빛을 잃고 집념 끝에 찾아낸 '기상호'. 신상 털린 퍼피와 이름이 같다. 취업 준비 중이라는 퍼피의 이야기와도 꼭 들어맞았고. 마지막으로 이메일, puppypvp@garbage.kr. 잡았다.
미안한데 이제부터 조금 비겁하게 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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