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악질 넷카마 참교육 2
“도착했어요?”
“어, 지금 옆 방에 있어.”
“꼭 계약서까지 다 쓴 다음에 누굴 담당하는 건지 말해 주세요.”
퍼피는 생각 외로 합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합격 전화가 가자마자 당장 다음 날부터 출근할 수 있다고까지 했단다. 악마치고는 좀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수는 실장에게 은밀히 지령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설욕전이다. 나 혼자 산다부터 전지적 참견 시점까지. 같이 방송에 출연시킬 거다. 그렇게 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넌 이제 죽을 준비해라 퍼피. 그런 생각을 하는 종수는 눈에 띄게 들떠 보였고, 실장은 그런 종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호가 간단한 준비를 마치는 동안, 종수는 혹시나 들킬까 안절부절못하며 캡 모자까지 눌러 쓰고는 옆 미팅룸에 숨어 있었다. 그는 너무나도 신이 난 나머지 내내 가만히 있질 못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무슨 말을 해서 나를 농락한 미친 넷카마를 겁에 질리게 할까.
"여기에 사인하시면 되고요."
흥분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난리를 치던 종수는, 결국 유리창 너머로 슬쩍 기상호를 훔쳐보기까지 한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안내에 따르고 있었다. 옆얼굴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종수는 예상과 다른 이미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나랑 키가 비슷할 것 같은데? 루저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넷상에서 여자인 척 할 것 같지는 않은 녀석이었다. 자기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흥, 그래 봤자지. 어차피 찐따 새끼니까 그런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종수는 새침하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상호가 미팅룸으로 들어올 것을 기다리면서.
”아, 엇. 아. 와. 아, 안녕하세요.”
계약서 작성을 마치고 실장이 상호에게 종수를 소개했다. 상호는 어수룩하게 고개를 숙이다 종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놀란 걸 애써 감추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 우와 최종수 선수 아니세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호는 속으로는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클난 거 같은데.
최종수는 어딜 가든 크다는 이야기만 듣는 상호에게도 위압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이목구비가 짙어, 풍기는 분위기가 확실히 범인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상호는 진지하게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맞을지 몇 초간 고민했다. 응~ 집가서 캐삭하면 그만이야 ㅋㅋ 그리고 금방 털어 버렸다. 어차피 최종수가 기상호를 알 리가 없었다. 흥미 없어 보이는 눈동자가 기상호의 인사를 대충 묵례로 넘겨 버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퍼피 안녕?”
“예?”
“퍼피. 너 맞잖아. 기상호.”
둘만 남겨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눈에 광채가 돌기 시작한 종수는 최대한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꺼냈다. 시작된 두 사람의 두뇌 게임에서 첫 승기는 종수가 쥐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이젠 소용없을 거다. 지옥의 매니저 생활을 경험하게 해 주지. 꼬우면 위약금 물어내던가. 종수는 팔짱을 끼고 애써 거만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아아앙~"
굳어 있던 상호의 표정이 바뀌었다. 씨익 웃는 얼굴을 보자 머리가 띵했다. 잠깐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도 같았다. 최종수, 다 좋았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골든 리트리버 느낌이 나는 인상의 기상호는 순한 강아지가 아니라 그냥 제대로 미친개였다.
개악질 넷카마 참교육 2
"'퍼피'. 너 맞잖아. 기상호."
"아아앙~"
'퍼피'는 싹싹 빌기는커녕 씩 웃으며 앙탈을 부렸다. '난 이제 죽었다'가 아니라 '우와, 최종수. 연예인 보는 것 같다'. 정체가 들통났다는데 상호는 태연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그의 넷카마 경력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런 경우의 퇴로도 분명히 존재했다. 네? 저 아닌데요? 예전에 피씨방에서 아이디 털려서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뺌하면 최종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야."
"예?"
기상호가 변명할 궁리를 하는 동안, 종수는 손안에 쥔 이력서와 녀석을 대조해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여기서 더 말을 꺼냈다가는 당황한 티를 낼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종수가 아예 입을 꾹 다무는 편을 택하자, 차렷하고 선 상호는 괜히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너."
낮게 깐 목소리로 상호를 부르고 종수는 잠시 침묵했다.
"너 스물셋인데 스물넷이라고 거짓말했네."
"아, 저 빠른."
종수는 한참 조용히 상호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말을 툭 던졌다. 상호는 변명할 말을 생각하고 있다가 그의 질문에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난 또 뭐라고. 그리고 상호는 대답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자신이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말을 뱉자마자 후회한 것은 종수도 마찬가지였다. 세세한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벌써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최종수에게 보통 이런 일은 잘 없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적수를 만난 것 같았다. 종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생각 없이 던졌던 질문이 퍼피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학력."
"고졸이요."
"군대는 갔다 왔냐?"
"아⋯⋯ 공익요원 복무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딱히 문제 잡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순 양아치인 줄 알았던 퍼피는 의외로 성실한 태도로 면접에 임했다. 종수는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질문을 이어 나갔다. 나도 고졸인데. 그러면서 은근하게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았다.
뭐 매니저로는 나쁘지 않네. 붙임성도 있는 것 같고. 날카롭게 생긴 얼굴이 서글서글 웃으니까 나름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종수는 의식 없이 고평가를 이어가다 아차 했다. 흥. 뭐가 어쨌든 이 자식은 사기꾼이야.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고.
누군가를 괴롭히기로 마음먹었다면 태도를 확실히 정해야 한다. 인격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일랑 말고 냉혹하고 집요하게 괴롭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종수처럼 일을 못 견디고 알아서 그만두게 만들 작정이라면 더더욱. 그러려면 일단 대상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 누굴 괴롭혀 본 적이 없는 종수는, 상호의 이력서를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오, 일본어 자격증은 좀 독특하네.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신발이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자기소개.”
“네? 아, 넵. 제 엠비티아이는 인팁이고요. 별자리는 염소자리고. 에, 취미는 게임. 그리고 특기는⋯⋯ 그, 제가 귀를 움직일 수 있는데. 보실래요?”
종수가 상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슬쩍 비뚜름하게 짝다리를 짚었던 상호가 서둘러 몸을 바짝 세웠다. 긴장한 그가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를 줄줄 뱉어내는 동안, 종수는 실물에 비해 훨씬 바보처럼 나온 증명사진을 뜯어내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 심판의 날 망신을 줄 때 이것도 포함할 생각이었다.
”됐어. 그딴 거 말고, 이전에는 뭐 했는지. 무슨 일 했는지 뭐 그런 거나 말해 보라고.”
“아, 넵. 알겠습니다.”
종수가 테이블에 이력서를 탁 소리 나게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상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상호는 쫄아서 움찔 떨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인물 정보에 따르면 종수는 상호와 키가 비슷해야 했다. 그런데 스산한 얼굴의 최종수는 기상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다 살다 자기 키 줄여 말하는 남자는 또 처음 보네. 상호가 생각했다.
"예, 예전에 딱히 이렇다 할 직장이 있던 건 아니고요. 편의점 알바하고, 상하차 하고 뭐 그랬습니다."
"의외네. 사기 안 치고 정직하게 돈 번 거. 사기는 나한테만 친 거야?"
"푸핫."
초장에 기선을 제압하려면 위압감 가득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수는 그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걸 입 밖으로 내보내고 말았다. 지레 겁을 먹었던 상호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 약간 얼빵한 면이 있네. 남자인 걸 밝혔는데도 줬던 게임 아이템을 도로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고, 친구 차단도 하지 않은 걸로 봐서 무른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웃어?”
“아뇨, 그게 아니라. 풉. 하흡. 형 요즘 접속 안 하지 않아요?”
“어. 왜. 뭐.”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크흐흑.”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커플 농장 살림살이 싹 다 갖다 판 지 오래인데. 최종수는 요즘 접속을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사기'는 퍼피가 남자라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순진한 소리에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인간 태풍이 이 꽉 깨물고 이야기해도 상호는 비식거리며 자꾸만 웃음을 토해 냈다. 처웃지 마라. 죽여 버린다. 대놓고 웃으면 몰라 그걸 또 참아 보겠다고 얼굴을 찌그러트려서 최종수는 배로 열받았다.
짜증을 내느라 간과한 것. 몇 년간 동고동락하는 팀메이트들도 감히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최종수가 퍼피에게는 만난 지 십 분 만에 형이 됐다는 거. 종수는 씩씩거리다가 상호에게 차 키를 홱 던졌다. 놓치라고 던진 걸 기상호는 또 덥석 받아 들었다. 모기 잡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박수를 짝 치며. 종수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상호는 유리문을 어깨로 밀고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엇, 형 어디 가세요? 같이 가요!"
방금 만난 것 같지 않게 허물없는 태도다. 그도 그럴 것이 상호에게는 벌써 종수가 익숙했다. 인터넷 그리고 유튜브. 살아 있는 전설 인간 태풍부터 아무리 검색해도 알아낼 수 없는 스톰최까지. 종수는 오늘 상호를 처음 만났고 그의 반쪽짜리 페르소나 '퍼피'밖에 몰랐지만 상호는 이미 종수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
"왜 굳이 루이비통에서 감자탕을 먹는 거지."
최종수의 집. 정보전에서의 열세에 처한 종수는 열심히 뭔가를 알아보고 있었다. 때리는 건 할 짓이 못 되고. 사이드미러 접고 달리는 건 사고 날 것 같고. 폭언과 욕설. 이건 할 만 하겠네, 그 자식한테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호에게 한 방 먹이는 데 실패한 종수는 몇 번이고 같은 단어를 검색창에 쳐 봤다. <갑질>. 어떻게 해야 기상호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게 만들 수 있을까.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한다고, 아무리 찾아봐도 이거다 싶은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거란 생각에 종수는 약이 바짝 올랐다. 그래서 그는 그냥 할 수 있는 지랄은 다 해보기로 했다. 억까하다 보면 뭐라도 하나 얻어 걸리겠지. 그러다 이렇게 된 것이다.
"야. 정신 안 차려? 거기서 좌회전을 해야지 왜 이쪽으로 빠져."
"이쪽이 더 빨라요."
"개소리하지 마. 내가 여길 몇 년을⋯⋯."
매니저란 놈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을 굳이 굳이 돌아가길래 옳다커니 윽박질렀는데, 기상호 말대로 정말 오른쪽 길이 더 빨랐다. 경로를 재설정합니다. 내비게이션 시간이 정말 줄었다. 무안해진 종수는 상호가 이상한 노래를 틀어도 아무 말 못 했다. 아따시 뱀파이어. 그걸 가만 듣고 있자니 당하는 쪽이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 이 x발!"
"앗, 죄송. 이거 안 드세요?"
"이걸 왜 네 멋대로 처넣어. 뒤질래?"
"쏘리쏘리. 그럼 제가 먹을게영. 이모~ 여기 해장국 한 그릇 더 주세여!"
"하⋯⋯."
"엑. 횽, 섞박지를 가위로 잘라 먹어요? 아 이 먹을 줄 모르네. 마 남자답게 무라!"
먹는 걸로 까탈을 부려 보겠답시고 별것도 아닌 걸로 화도 내 봤다. 경기가 끝난 뒤, 들른 해장국 집에서 제대로 한바탕할 생각이었다. 종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역시나 본전도 못 찾았다. 기상호는 사색이 되기는커녕 남자답게 먹으라는 소리와 함께 최종수의 등짝을 퍽 쳤다.
종수는 황당해서 눈을 껌벅거렸다. 그의 일과는 열두 시간 가까이 게임이 차지한다. 온종일 앉아 게임만 하다 보니 이 시간쯤 되면 탈인간급 체력도 슬슬 한계를 보였다. 피곤하고 배고파 죽을 것 같은데 얄미운 매니저의 먹방을 1열에서 직관해야 한다니? 종수는 밥도 뺏기고 등짝까지 얻어맞았는데 상호는 그날 든든하게 등뼈 해장국 두 그릇 먹고 박하사탕까지 한 줌 챙겼다.
"지금이라도 잘라야 하나?"
종수가 지난 며칠을 회상하다 중얼거렸다. 스트레스로 밤을 지새우던 그는 문득 기상호를 해고하는 게 맞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연달아 갑질 시도가 실패하자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려고 집 청소까지도 시켜 봤다. 옆에 딱 붙어 감시하다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상호는 소파에 드러누워서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이걸 패 말아.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온 반짝거리는 바닥.
기상호의 뻔뻔함은 상상을 초월해서 상식인으로선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시켜 놓은 일은 다 해서 종수의 속에는 열불이 났다. 최종수가 원한 것은 절대 이런 게 아니었다. 상호가 자신과 있으면 매분 매초 긴장되고 두렵길 원했다. 자신의 불면을 반만이라도 경험했으면 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기상호는 매니저 생활을 너무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전부 그놈에게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종수는 상호에게 그만 나오라고 통보해야 할지 고민했다.
"너 담배 피우냐?"
"읏, 네. 피, 피워요. 냄새 많이 나요?"
"어."
"아. 죄송, 죄송합니다. 크흠."
막상 해고할 타이밍을 재고 있으니 기상호가 역린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날 종수는 화보 촬영 스케줄을 위해 탄 차에서 낯선 냄새를 맡았다. 담배 냄새인가? 긴가민가한 단내. 그래서 아무런 의식 없이 앞좌석에 앉은 상호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종수의 숨결이 상호의 쇄골에 닿았고 상호는 움찔 떨었다.
"앞으로 나 만날 때 피우고 오지 마라."
"냄새를 제가 뺀다고 뺐는데⋯⋯.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형."
상호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두 사람의 얼굴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상호의 뺨을 간질이면서 종수가 말했다. 상호는 곧바로 얼굴을 원위치시켰다. 평소처럼 깐족거리는 반응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안간힘을 써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던 난공불락의 기상호가 드디어 꼬리를 내린 것이다. 종수는 씩 웃었다. 아, 이 새끼 가까이 붙는 거 싫어하는구나. 드디어 일이 마음처럼 흘러갈 것만 같았다.
"출발 안 해?"
"네? 아, 출발, 출발해야죠. 네넵."
운전대를 잡은 상호가 멍하니 있자 종수가 발로 앞좌석을 팍 쳤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상호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괴롭힐 방법을 찾았으니 해고는 없는 일로 해야지. 종수가 결정을 물린 바로 그 순간, 모든 상황은 그의 의도와 정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뭐해?"
"앗, 형 오셨어요?"
종수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상호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귓가에 갑작스럽게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상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큭큭큭. 네가 아무리 까불어 봤자 넌 내 손바닥 안이야. 종수가 생각했다. 오늘도 회사까지 가는 길을 조용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수는 의기양양하게 밴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기상호가 최종수의 스킨십을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는 건 맞았지만, 그 감정은 괴로움과는 확실히 결을 달리했다. 종수가 창문을 내리고 '멍청아 빨리 안 타?' 핀잔을 줄 때, 상호는 붉어진 제 귓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손이 좆같이 차갑네."
"차가우면 차가운 거지, 좆같이 차가운 건 또 뭐에요?"
"닥쳐. 말이 많아."
앞의 일화들에 화룡점정을 찍는 행동이었다. 차에서 짐을 내리는 상호와 손이 닿았을 때에 차가운 손을 꽉 쥐지는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손을 붙잡고 입김까지 불어 주지는 말던가. 그때부터는 상호에게 종수의 뾰족한 말은 힘을 잃었다. 기상호는 최종수를 친절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스톰이 퍼피에 대해 모르는 사실 한 가지. 퍼피의 이상형은 친절한 사람이다.
"형 여기요."
"어."
"아, 여기에는 미역국이 있어야 되거든. 아쉽네! 그죠."
최종수가 못 잡아먹어 안달인 기상호와 썸이 형성되려는 시점. 상호는 슬슬 종수의 스킨십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얘를 괴롭히고 있는 게 맞나? 첫 예능 촬영이 끝나고 기상호가 밥차에서 받아 온 컵밥을 받아 들었을 때였다.
"잉? 왜요? 입맛에 안 맞으세요?"
상호는 밥은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종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상호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은 종수는, 아무 생각 없이 상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려다 멈칫했다. 뭐야, 지금 나 뭐 하는 거지? 종수는 자신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낀다.
"아니."
"전 또. 형 제육 좋아한다 그랬잖아요."
종수는 <제육> 컵밥 뚜껑에 적힌 글자를 노려봤다. <제육> 그 두 글자가 최종수의 기억 중추를 자극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김치니 떡갈비니 메뉴도 다양했는데 하필 골라온 게 제육 컵밥이다.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얘가 내가 좋아하는 '퍼피'지. 나 얘 좋아했지. 그리고 그 '퍼피'는, 자연스럽게 종수에게 안겨서 뜨거운 제육 컵밥을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둘 다 좋아하는 제육볶음이 들어간 컵밥을 말이다.
최종수의 불면과 혼란은 손써볼 틈도 없이 다시 시작되었다. 기상호를 괴롭히고 농락하는 데 집중하느라 흘려보냈던 모든 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 기억들은 빔 프로젝터라도 켜놓은 것처럼 종수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펼쳐졌다. 저희 종수 형 잘 부탁드립니다! 분위기 얼어붙은 촬영장에서 벌벌 떨면서 인사하던 기상호. 대체 지가 뭔데. 횽이 옆자리 앉은 아이돌보다 잘생겼던데요? 역시 빛종수. 치대기는 또 엄청 치대요. 그때는 그 아부성 멘트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막상 곱씹는 시간이 되니 의미가 새로워졌다.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한 건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왜 기억하고 있어. 하⋯⋯. 나 진짜 얘 좋아하나? 핏발이 선 눈이 멍하니 천장을 향했다. x발. 좋아하네. 종수가 조용히 읊조렸다. 기상호는 '퍼피'였고 최종수는 '퍼피'를 좋아했다. 그러니 삼단 논법에 의해 이러한 결론의 도출은 자명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수는 기상호를 좋아한다.
Stormchoi23 님 환영합니다.
종수는 그래서 다시 <혈통>에 접속했다. 상호에게 화밖에 내지 않는 카톡으로 갑자기 '뭐해?' 보내기에는 민망했던 탓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종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퍼피'는 물론이고 커플 농장까지 휑했다. 내가 선물해준 옷 왜 안 입고 있어. 종수는 급하게 미리 사 뒀던 아이템이라도 선물하기 위해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어, 뭐야. 내 아이템 다 어디 갔어."
엥?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아이템 인벤토리에 <크리스탈 러브 턱시도>를 제외한 모든 아이템이 다 사라져 있었다. <크리스탈 러브> 세트는 종수가 사비로 선물한 아이템 중 하나로, 스톰과 퍼피의 결혼식 날 예물 개념으로 준 선물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던 아이템이기도 했다.
Stormchoi23: 드레스 왜 안 입었어
Puppyㅍvㅍ._: 맨날 똑같은 거 입기 시러서
Puppyㅍvㅍ._: 매일 같은 거 보면 질리잖아용
Puppyㅍvㅍ._: 오빠한테는 이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언젠가부터 '퍼피'는 <크리스탈 러브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주마등처럼 종수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 그때는 그 말이 진짜인 줄로만 알았다. 형 요즘 접속 안 하지 않아요? 기상호가 뿌린 떡밥이 퍼즐처럼 꿰맞춰지면서 종수는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된다. 이 새끼는 진짜 미친 새낀가?
"여보세요."
"미쳤어?"
"네? 뭐가요?"
종수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을 백번 이해하며, 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이 잔뜩 묻은 상호가 신호음 몇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종수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상호는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기상호는 연기를 아주 잘하거나 죄책감이 아예 없는 사이코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순진한 목소리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탈 러브 드레스. 너 그거 팔았지?"
"그건 판 지 오래됐죠. 형 <혈통> 들어갔어요?"
"그건? 너 당장 우리 집으로 튀어 와. 십오 분 준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사이버 수사대에 빙의해 상호를 추궁하던 종수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상호의 목소리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단순히 분노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당장 우리 집으로 와. 뚝 전화를 끊고, 종수는 뜨거워진 이마를 짚었다. 기상호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인정한 이상, 이제 잘 해보려고 했다. 일부러 모난 말을 하고 괴롭히는 건 여기서 끝내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네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네가 먼저 나 등쳐먹고, 가지고 논 거잖아.
정확히 십오 분 뒤. 초인종이 울리자 종수는 상호를 현관으로 붙잡아 끌고 들어오면서 입을 맞춘다. 난 너를 좋아하고, 너는 스킨십을 안 좋아하니까 모든 목적에 부합하네. 종수가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으로 뛰어온 상호는, 헐떡거리다가 입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혀에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햄 진짜 LGBT가⋯⋯.
*계속
*ヴァンパイア, DEC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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