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개악질 넷카마 참교육 3 (完)


누가 봐도 기상호 과실 백 퍼센트. 절묘하게 법의 울타리 안에서만 놀던 개악질 넷카마가 마침내 선을 넘고 만다. 형법 제347조, 사기.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351조, 상습범에 대한 조항. 상습으로 제347조 내지 전조의 죄를 범한 자는 그 죄에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오케이? 그러니까 이제는 법적으로 가도 할 말이 없다는 거다.

종수의 인벤토리에 아이템이 딱 하나만 남게 된 사연. 종수가 상호에게 자택 청소를 지시한 날이었다. 상호는 컴퓨터 책상을 닦다가 모니터 옆에 붙은 포스트잇을 발견한다. 휘갈겨 적은 숫자와 문자의 조합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상호라고 해도 발견 즉시 해킹을 시도한 건 아니다. 비밀번호가 떡하니 적혀 있든 말든 상호는 묵묵히 청소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러다 유리 광택제 때문에 미끄러진 손걸레가 그만 게임용 키보드를 눌렀고, 파란 빛을 웅장하게 쏘아 내는 윈도우 잠금화면 속 Stormchoi23이 드러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호는 별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최종수라고 해서 계정마다 아이디 비밀번호를 다르게 설정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런 감상이 전부였다.

종수의 <혈통> ID 해킹은 다름 아닌 상호의 무의식이 지시한다. 드넓은 방을 청소하다 지친 상호는 소파에 쓰러져 쪽잠을 잤는데, 꿈속에서 얼핏 스쳐 간 비밀번호가 마치 로또 번호라도 되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기상호는 어쩔 수 없이,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게 어떤 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퇴근 후 <혈통>에 접속해 본다.

Stormchoi23 님 환영합니다.

나이사~!! 이제 이 아이디는 제 겁니다. 로그인까지 변명이 많았던 것치고 상호는 지나치게 기뻐하며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일이 이렇게 힘든데 저도 보너스 좀 챙기자고요. 어차피 종수햄, 이제 <혈통> 접속할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실눈 뜨고 혀 핥짝. 인상 깊게 본 악역들의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상호는 종수의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미친, 와 이거 실제로 처음 본다."

일반적인 사람은 애초에 해킹을 시도하지 않는다. 설사 다른 사람의 계정 보안을 무장해제 시켰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남의 아이템을 털어 가지 않는다. 다 털릴 준비하쉐이. 기상호는 나사가 좀 빠져 있기에 그랬다.

전송 버튼을 누르느라 분주했던 마우스 커서가 그러다 제자리에 멈췄다. <크리스탈 러브 턱시도>. 두 사람의 결혼식 날 종수가 선물한 커플 아이템. 상호는 그 위를 한동안 맴돌았다. 그것까지만 전송해 버리면 됐다. 이제 캐릭터를 삭제해 버리면 완전범죄다. 계정을 삭제하면 접속이 안 되니까 종수가 상호의 범행을 알 방법은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의 커플 농장을 꾸몄던 장식품들은 팔아치운 지 오래. 종수가 선물해 준 드레스도 OO나라로 경매에 부쳐 버렸다. 그러니까 주저할 이유란 하나도 없었다.

"하, 씨. 우짜노."

전송이 머뭇거려졌다. 털어먹을 건 이미 다 털었는데 이거 하나 같이 판다고 무슨 문제 있겠나. 연봉 백억 최종수가 이깟 거 갖고 쪼잔하게 아까워 하겠나. 악마 기상호가 이야기했다. 아이다.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숨이 다 끊어져 가는 천사 상호도 반론을 펼쳤다. 끝내 승패를 가르지 못한 상호는 괜히 우편함에 들어가 본다. 어차피 삭제할 계정, 마지막으로 나눈 메시지나 읽어 보려는 생각이었다.

Puppyㅍvㅍ._: ㅈㄴ 심심행

Stormchoi23: 왜 안 자 ㅋㅋ

Puppyㅍvㅍ._: 잠이 안 와ㅇㅅㅇ

Puppyㅍvㅍ._: 오빠 니는 왜 깨 있는데요?

Stormchoi23: 그러게

Puppyㅍvㅍ._: 오늘 전화하고 시픈데 집에 가족들 잇어 ㅜ

"와 이거 밀당이 수준급인데?"

상호는 참지 못하고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퍼피 완전 앙큼하네. 최종수가 빠질 만 했네. 정직하게 좋아한다는 티를 내는 종수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아양을 떨었는데, 그러기를 참 잘한 것 같았다. 이러니 개그 콘서트가 망하지. 기쌍호 이 쉐리 좀 치네 ㅋㅋ. 상호는 순간 느꼈던 불편한 감정은 다 잊고 실컷 웃다가 임시 저장함에 들어갔다.

임시 저장 메시지: 뭐해

임시 저장 메시지: 뭐해?

임시 저장 메시지: 뭐하고 있어?

보내지 못한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꿀잼 콘텐츠를 찾아 헤매던 한 마리 하이에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스크롤은 올라가는데 입꼬리는 점점 내려갔다.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상호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어 뭐고 이거. 뭔가 이상하다. 아까 느꼈던 그 감정이 또다시 상호를 괴롭혔다. 이런 기분은 게임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이다.

기상호의 넷카마 행보. 그 기원을 찾으려면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혈통>은 게임 속에서 결혼을 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초등학생 상호는 현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유료 기능인 결혼을 잠금 해제 할 수 있을지 궁리를 거듭한다. 그러다 상호가 찾아낸 방법은 여자 캐릭터를 선택하는 것. 여자인 척하면 왜인지 쉽게 결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진짜 여자인 건 아니니까 결혼을 하면 식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런. 결혼하면서 받은 아이템을 다른 계정으로 옮기고 토꼈다. 그 짓을 몇 년 반복하다 보니 머리가 좀 큰 상호는 꼭 바로 도망칠 필요도 없다는 걸 터득하게 됐다. 여자인 척 간 보기. 당신과 연애도 할 의향이 충분하다 넌지시 사인 주기. 게임에서 결혼만 해 주면 진짜 사귀어 줄 듯 굴기. 결혼한 후에도 줄타기를 이어가며 사냥과 농사 셔틀로 호의호식. 그거면 게임 생활을 훨씬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지존vㅊtm: 왜 ㅇ나랑 안놀아줘...

지존vㅊtm: 나 사랑하긴 해? 왜 웨딩드레스 안 입어?

지존vㅊtm: 너 나랑 템 때문에 결혼했지ㅜㅡ

귀찮아진다 싶으면 은근슬쩍 친구 차단. 어느 정도 아이템을 모았다 싶으면 아이템 전송 뒤 잠수 이별. 만렙 기상호의 <혈통> 플레이는 온통 징징거리고 질척거리는 남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말인즉슨, 게임 속에서 만난 남자가 제게 매달리는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종수의 반응은 지금껏 상호가 경험한 여러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미안하지?"

지금과 같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본 순간이란 없었다. 상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왜 미안하지? 실제로 최종수를 만나게 돼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지금까지 농락했던 사람들을 만난다고 해서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왜? 그냥 종수 형이라 그런가. 그치만 내가 게이도 아이고 최종수 갤러리 고닉 남고상언도 아이고. 최종수인 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호는 매우 난감해졌다. 아이템을 팔기에는 마음이 불편하고, 그렇다고 종수에게 도로 훔친 걸 돌려주기에는 알림이 가서 자수하는 꼴밖에 안 됐다. 상호는 하는 수 없이 황량해진 계정에 <크리스탈 러브 턱시도> 하나 남기고 게임을 종료한다.

개악질 넷카마 참교육 3

상호가 자신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무렵, 종수는 마치 그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듯 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얼굴을 보는 매 순간 가슴이 뜨끔한데 말이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종수는 상호에게 치댔다. 끌어안고,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고. 왜 갑자기 가까워지려고 난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호는 종수의 바람대로 인간 태풍의 불면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상호를 괴롭히려고 만지작거린 종수의 의도는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로 잘못 받아들여졌지만, 상호가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는 점에서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지, 종수 형이 이제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나 봐. 상호는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전처럼 계속 화만 내면 KIN 치고 아이템 시원하게 다 팔아 버리는 건데. 하필 종수가 다가오는 바람에 상호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사기극을 벌인 전적이 있다. 기상호 덕분에 최종수 연관 검색어에는 롤드컵 7번 우승이 아닌 넷카마, 게이가 따라붙었다. 이미 한 번 데이고도 취직까지 시켜 준 '그저 빛' 최종수. 사실 이것만으로도 무한히 감사해 야할 판인데 종수는 상호를 신경 써 주기까지 했다. 이런 시점에서 은혜를 원수로 갚으라니. 이건 아무리 기상호라도 어려웠다.

종수가 무섭기도 했다. 구렁이 담 넘듯이 유연하게 대처했기에 망정이지 쉽게 넘어가지 않을 만한 상황들이 여러 번 있었다. 이미 감정이 좋지만은 않은 상황인데 여기서 뒤통수를 또 쳤다가는⋯⋯. 상호는 왠지 아득해져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침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이 들렸다.

"종수횽, 우리 도착했어요."

"⋯⋯."

"자요?"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도 종수는 대답이 없었다. 상호는 잠에 빠진 종수를 깨우기 위해 차 문을 열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기다란 속눈썹. 와 이리 이쁘장하노. 긴장한 나머지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까지 보이는 듯했다. 상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수를 뜯어보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종수를 흔들어 깨웠다.

"뭐해?"

"앗, 형 오셨어요?"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추워 죽겠는데."

"죄송해요. 저 못 찾을까 봐."

"뭐래? 추운 데 서 있어서 정신이 나갔나. 내가 왜 널 못 찾아?"

그때부터였을까? 가슴 속을 불안하게 채우던 감정은 꿈틀거리며 모양을 바꿨다. 봄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락가락했고 자꾸 그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전에 뉴스에서 흔들다리 효과라고 막 공포심을 설렘으로 오해할 수 있다 카던데. 죄책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일이 너무 오래 반복되어서 이제 그런 것까지 경험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종수 햄이 갑자기 의식되는 건가. 상호는 종수의 품에 안긴 채 생각했다. 이전에는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종수는 스킨십이 잦았다. 픽업을 위해 기다리고 있으면 확 끌어당겨 안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고, 방송 출연이나 화보 촬영 전, 대기실에서도 틈만 나면 상호에게 기대어 있었다.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귀를 만지작거리고. 그런 종수의 행동은 상호가 스스로 '남자도 가능'한지 묻게 만들었다.

뭐 종수 햄이라면, 쩝. 가능할지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상호는 여태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향으로 사고를 튼다. 햄이 내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래 치댄다 캐도, 갑자기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데? 일방적인 관용으로 이루어진 종수와 상호의 관계. 기상호는 항상 제삼자의 시선으로 남을 관찰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용인과 고용주. 그냥 딱 그 정도인 줄로만 알았는데, 조금만 주의 깊게 파고들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최종수가 퍼피를 붙잡고도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은 이유. 이 형 아직 퍼피를 좋아하는구나.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상호는 어쨌든 맞는 길로 진입한다. 그리하여 현재. 다짜고짜 새벽에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내는 최종수 때문에 새벽 두 시 반에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뛰쳐나온 상황.

종수는 계단을 뛰어 올라온 상호가 헐떡거리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얼굴을 틀어쥔다. 현관에 거칠게 상호를 밀치고 입술을 집어삼켰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종수는 형형한 눈빛으로 상호를 노려보며 입맞춤을 이어갔다. 여러모로 심각한 상황. '그' 최종수가 현실에서도 개악질 넷카마에게 빠졌다는 걸 알게 된 것 뿐만 아니라 키스까지 당했다. 아이템을 팔아먹은 걸 들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

기상호는 집중을 안 하고 있었다. 이 햄 진짜 LGBT가⋯⋯. 종수가 숨도 쉬기 어려운 억센 키스를 이어가는 와중에 상호는 의문에 대한 답까지 기어코 찾아내고 만다. 맞네. LGBT. 그리고 내 좋아하는 것도 맞네. 잠에서 덜 깬 몸은 피곤했지만 해답을 얻었기에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동시에 상호는 지난 시간 자신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도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형 뭐에요?"

입술을 뗀 뒤, 상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자신을 훔쳐내면서 이야기했다. 억지로 입맞춤을 당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상호가 제 가슴팍을 밀어내고 발버둥 쳐도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종수만 해골을 처먹었다. 상대는 기상호. 그래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그놈. 난 네 머리 꼭대기에서 춤춰 유 덤덤. 개악질 넷카마 기상호였다.

상호는 얌전히 키스를 받고 있었다. 거부감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종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키스를 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본인의 행위에 확신이 없었다. 언제 입술을 떼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이런 순간에 망신살을 뻗칠 수는 없으니 상호가 자신을 밀쳐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

"뭐? 야. 너부터 해명해.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순순한 상호의 반응도 나름 마음에 들었고, 다행스럽게도 원만한 마무리를 했지만, 종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횡설수설하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종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위엄있는 남자고 최종 보스 격인 인물로, 쉽게 속내를 내비치지도,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는 인간도 아니다. 기상호를 앞에 두기만 하면 자꾸 이렇게 되는 것뿐이다.

"아. 그거요? 갑자기?"

"하⋯⋯."

"아잇. 죄송해요. 돈이 좀 급해서. 덕분에 수도세랑 휴대폰 요금 냈어요."

"야.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든가. 그걸 왜 팔아, 말도 없이."

"진짜 죄송해용. 형."

얼굴이 불그죽죽 상기된 종수는 상호를 앞에 두고 무력했다. 그는 여전히 순진해 빠져서 의심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려하게 상호의 입 밖을 빠져나오는 개구라에 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씩씩대던 최종수가 시선을 피하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자, 간악한 기상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애교를 가득 담아 파고들었다.

"농장은 또 왜 그 꼴인데?"

"아 그건 전기세요."

"알뜰하게도 썼다. X발.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받은 선물을 팔아 버리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딨어?"

"헤헷⋯⋯."

키스한 탓에 미묘해지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대화 사이의 공백이 지나치게 길었다. 상호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종수는 그런 상호를 노려봤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

"야. 넌 그렇게 사랑이 쉽냐?"

몇 초간의 정적 끝에 대뜸 종수가 말을 던졌다. 이번에는 잘못 말했다는 티까지 내면서. 최종수는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불쑥불쑥 입 밖으로 내보내는 때가 있다. 그가 평소에 침묵하는 이유다. 그런 종수가, 키스까지 한 이 상황에 상호의 앞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기상호와 함께 있기만 해도 당황하는 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순간 주사위는 또 던져지고 말았다.

"형 저 좋아해요?"

"닥쳐라."

"와. 아니 진짜 장난이 아니고 남자도 가능?"

토마토지롱! 시뻘게진 종수가 얼굴을 가렸다. 상호는 짓궂게 종수를 놀려 놓고는 숨을 죽였다. 좋아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굴기 힘들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가 마음을 토로하는 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피차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닥치라고 했어."

촌철살인. 최종수의 짜증은 완전한 확신이었다.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었으나 헷갈릴 여지가 없는 대답이었다. 상호나 종수나 그로부터 한참 말이 없었다. 상호는 종수의 고백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 혼란스러웠고 종수는 예정에 없었던 고백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종수횽 정도면 나쁘지 않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한 번쯤 남자도 만나 볼 수도 있는 거지. 상호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종수는 상호를 책임질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이젠 엎질러진 물. 이미 내뱉어 버린 말을 무를 수는 없고,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현관에서 할 수도 없다. 종수는 상호의 팔을 어색하게 붙잡고 거실로 향하려다 충동적으로 뒤를 돌았다.

"키스해도 돼?"

"어⋯⋯."

"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누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아휴. 해, 해도 돼요."

하필 스포트라이트처럼 빛이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 선 최종수. 스스로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납득하지 못한 채 상호에게 묻는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상호는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자리에 굳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노려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상호가 허락하자, 종수는 말이 끝나는 동시 입을 다시 맞췄다. 입가를 침 범벅으로 만드는 서투른 키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로 흥분이 됐다. 상호는 조심스럽게 종수를 끌어안아 보았다. 뜨거워진 몸이 손끝에 닿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마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상호는 그런 증상이 감염될 것만 같아 종수를 슬쩍 밀어냈다. 종수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떼고 상호를 보았다.

"저 경찰에 신고 안 할 거죠?"

"어."

"와~ 감사합니다. 형."

"대신 나랑 사귀면."

"넹."

"무르기 없기다."

상호는 일부러 킥킥거리면서 눈치 없는 척 분위기를 깼다. 종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기상호를 당해낼 방법은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개악질 넷카마랑 연애하는 건 진짜 바보나 할 짓이 맞다.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퍼피는 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종수는 상호를 정말 정말 많이 좋아했다. 사기 치고 이미지 나락 보내고 아이템 다 털어 먹고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게 굴어도, 또 한 번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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