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동인男의 감정 2

디나이얼 게이에 대해 아십니까


"있잖아요. 농구 왜 하냐고 물어봤죠? 혹시 동네 코트 같은 데서 농구 해 본 적 있어요?"

"⋯⋯."

"없구나."

경기가 판가름이 나기 몇 초 전. 기상호는 갑작스레 길거리에서 농구를 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농구를 왜 하냐고 물은 건 비아냥이었음에도 말이다. 최종수가 농구를 그만두게 만든 수많은 이들에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건 단지 트래시 토크였을 뿐인데. 

"전 몇 달 전에 한 번 해 봤는데 완전 재밌더라고요. 못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나만 재밌게 하면 그만이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 없었어요. 농구를 하는 이유는 그냥 제가 즐겁기 때문이었어요. 상호가 덧붙였다. 

쌍용기 역시 숱한 경기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경기일 수 있었다. 최종수에게는 어쩌다 한 번 패배한 게임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기상호의 그 말. 그 말 때문에 쌍용기는 최종수에게 쓰라린 상처로 남았다. 

"입 닥쳐. 다음에 만나면 개박살 내줄 테니까."

그래서 종수는 끝내 상호가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다. 기상호가 부러웠다. 진심으로 농구를 즐긴다는 것이. 기상호 따위가 저는 하지 못하는 걸 해낸다는 게 그렇게도 짜증이 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마주치기만 해도 상호에게 으르렁거렸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날의 기억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기상호의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동네 코트를 기웃거리기도 몇 번, 하루는 규칙도 제멋대로에 인원도 다 채우지 못한 게임을 하게 되었다. 기상호의 말대로 그 누구도 최종수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게임이었다. 

별거 아닌 동네 농구였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과 얼렁뚱땅 하는 농구는 제법 재미있었다. 종수는 그날 다시 농구를 좋아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도, 유학 생활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날의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계기가 종수에게 커다란 선택을 내릴 확신을 마련해 주었고, 그 바탕에는 당연하게도 기상호가 있었다. 

종수는 타지에서도 종종 상호를 떠올리곤 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잠이 들기 전, 아침 훈련 전 간단한 조깅을 할 때. 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에나 정말 너무나도 힘이 들 때. 그럴 때면 어김없이 미끄러운 동네 코트에서 넣은 덩크슛이 생각이 났고, 또 기상호가 생각이 났다. 드문드문, 갑작스럽게 또 그렇지만 꾸준히.

"다음에 만나면 개박살 내줄 테니까. 언젠가는⋯⋯."

언젠가 기상호를 다시 만난다면 꼭 이겨 주고 싶었다. 농구 한 게임 했으면 전부 다 친구라는 상호의 말처럼 또 언젠가는 그 녀석과 친구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 날, 최종수 자신조차 확신이 없어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또 아주 먼 곳으로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형체를 갖췄다.

동인男의 감정

오랫동안 기상호에 대한 생각을 해 왔다. 진지하지 않은 놈의 태도가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종수는 실없는 상호의 모습에서 흥미를 느꼈다. 물론 좌절을 안겨준 기상호가 아직 밉기도 했다. 상호는 종수가 미국으로 오고 나서도 고교 시절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하지만 종수는 열아홉의 최종수와 다르게 마냥 녀석을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어떤 날에는 문득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기상호 그 자식은 아직도 농구하는 게 재밌다고 생각할까. 혹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애와 농구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면 잘해 줘야지. 그땐 내가 이길 거야. 밤새 뒤척이는 동안 종수에게 스친 감정들은 하나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상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는 정말 잘해주고 싶었다. 상호와 가까워지고 싶었고 또 그 녀석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막상 재회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재계약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종수는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었던 상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상호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종수가 불편한 듯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종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관계에 변화를 꾀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인간관계에 여전히 서투른 종수는 상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둘은 한참 미지근한 사이를 유지했다. 사실 그런 상태로 지내는 것도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을 테다.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소한 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품고 있던 호감이 비뚤어져 버릴 만한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버릇처럼 종수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다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상호를 다시 예전처럼 미워하게 된 것 이유는 그 때문이 가장 컸다. 

국내 리그로 입성함과 동시에, 종수는 한국으로 쫓겨 왔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음에도 인터넷 속의 최종수는 이미 미국에서 실적이 모자라 해고당한 선수였다. 허송세월하였다느니, 고등학생 때 이후로 발전이 전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지만 쌍용기를 들먹이며 상호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쌍용기 이후로 기상호는 단번에 수퍼루키로 떠올랐다. 예리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분석력,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수비 능력까지. 상호는 고교 넘버원 가드로 클 거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애매한 신장과 3&D 플레이어가 되기에 부족한 슈팅 능력이 그의 단점으로 꼽혔지만, 상호는 고교 졸업을 기준으로 2cm가 성장해 아슬아슬하게 189센티미터에 안착하더니, 대학 입학 이후로는 슛까지 보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종수의 귀국과 동시에 얼리 드래프트로 프로 구단 입단까지. 기상호의 프로 진출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몇 년간 벤치만 데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그래서인지 상호가 고교 첫 실적을 만든 경기인 쌍용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쌍용기를 기점으로 점점 상승세를 보이는 기상호와 점점 하락세를 보이는 최종수라는 구도로 비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종수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국내의 그 누구와도 비교가 어려운 선수였지만 쌍용기의 패배가 종수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듯이, 그 시기로 최종수를 평가하는 것은 종수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최종수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낸 말들에 종수는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몇 년간 일방적으로 품었던 감정들이 무색하게, 종수는 자꾸만 상호에게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이 모든 일에 기상호의 책임은 없었다. 괜히 괘씸하고 분한 마음을 그에게 전가했을 뿐이다. 

인터넷 속 이야기들은 보면 볼수록 스트레스를 받기만 하고 상호를 더 미워하게만 될 뿐인데, 종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잘 풀리지 않는다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악의적인 글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습게도 스스로 채찍질하고 동기 부여하겠다는 명목이었다.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피폐해진 정신으로 아예 '최종수 기상호'를 검색해서 자해를 반복하게 될 무렵. 종수는 <최종수 기상호 키스>라는 글을 발견하게 된다. 포스트의 제목은 <종상𝓀𝒾𝓈𝓈💋>. 검색 결과에 걸린 본문 내용은 '최종수 기상호 키스하면 좋겠다'. 

이게 뭐지? 기상호랑 내가 키스를 한다고? 이 사람 머리가 어디 잘못됐나? 

그 밑에는 종수와 상호 두 사람이 입술을 맞대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완전히 터닝포인트가 되는 사건이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우연히 주인공 이름이 겹친 거겠지. 그냥 나랑 기상호를 닮은 캐릭터인 거겠지. 

충격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처음에는 부정했다. 야한 걸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종수는 이상하고 무서운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그것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았다. 종상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되고, 몇 개 없는 포타까지 다 읽어갈 즈음에는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은 농구선수 최종수와 기상호가 맞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종상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종수와 상호 두 사람은 운동선수였으니 말이다. 연예인도 아이돌도 '가비지타임이라는 농구 만화'의 주인공과 최종 보스도 아닌 운동선수. 그러니 종상을 다룬 만화니 소설은 손에 꼽는 수준이었는데 종수는 도무지 그것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종숙이의 애절한 짝사랑... 상훈이 등짝 뚫리겠다

종상 혐관인데 개막장로코로 먹는이유 원래 혐관이야말로 로코의 근본임 이런 씨피는 괜찮음.. 발전가능성이 있는거같고 트래시토크 같은 거 해도 나중에 풀거같고 티키타카 되는 게 커여운거같아 *스가 가능해 얘넨

종숙상훈 사귀는 거 확실 종수존나아기고 상호존나개 

종수는 종래에는 숨어서 24시간 종상 이야기를 은밀히 하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단지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관음하다 보니 하필 많고 많은 선수 중 제 상대가 기상호라는 게 화가 났다. 내가 기상호 같은 새끼를 좋아할 리 없는데. 좋아할 수가 없는데. 남자끼리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보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최종수는 기상호를 열렬히 짝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게 그렇게도 열받을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 기상호에게 느껴 온 복합적인 감정은 글 몇 자로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서술해 놓은 것이다. 발가벗겨진 기분을 종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두서 없는 분노를 쏟아내고야 말았다. 

최종수가 기상호를 좋아하는 게 말이 안 됨 최종수가 미쳤다고 기상호를 좋아하냐? 아무리 최종수 선수 깎아내리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런 글 쓰는 건 선 넘었다. 애초에 최종수는 여자 좋아하고

ㄴ종상계란밥 언니 이건 아니지예 ㅋㅋ

ㄴ캐치종상핑 상종하기 싫긔 꺼지시게

ㄴ종상간볼빨기 뒤질라고

ㄴ레츠고종상랜드 잘가게

종상을 찾아보면서 죄를 짓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변호를 하고 나니 그동안의 찜찜함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는 듯했다. 그렇지만 파고들 틈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준비를 마쳐 놓았는데도 말이다. 그 누구도 최종수에게 제대로 된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수고했다."

아니라고 미치도록 주장하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다. 상호와 사귀지 않는다고 증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건 정말로 최종수와 기상호는 아무 사이도 아닌 직장 동료임을 알리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일부러 거리를 둘 이유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상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종수는 어젯밤 밤새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동안 쌀쌀하게 굴었던 기상호에게 갑자기 치대는 것도 껄끄러웠고 말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상호는 갑작스러운 최종수의 친절에 대놓고 떨떠름하게 반응했으며, 종상은 그것을 계기로 말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최종수의 섣부른 행동 때문이었다.

마땅한 아이돌 RPS도, 재미있는 2D 장르도 가비지타임 같은 농구 만화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바야흐로 동인계에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이렇다 싶은 게 없으니 가능성만 보인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거대해질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하필 최종수가 기상호의 등에 손을 얹은 것이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탓할 거면 어머니가 미스코리아인 걸 탓해라. 탓할 거면 농구선수 주제에 자연 갈색모에 눈물점이 있는 것을 탓해라. 하필이면 얼굴까지 잘생긴 탓에 둘은 동인녀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이게종상이야 바이럴 마케팅은 크게 성공하여 종상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x발. 그 놈의 종상, 종상⋯⋯."

종수가 캄캄한 방에서 벌게진 눈으로 스크롤을 내리는 일은 점점 빈번해져 갔다. 종수가 화가 잔뜩 나서 악플을 단 소설이 하나 있다. 고소장 접수의 충동을 느낌과 동시에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했던 악마 같은 소설 말이다. '수고했다' 이후로 그 소설의 좋아요는 어느새 두 배가 되어 있었다. 

"다 종상 때문이야. 이건 다 종상 때문이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종상을 하고 있을 거란 사실에 뭘 먹어도 얹히고, 뭘 해도 집중이 안 됐다. 그나마 농구 코트 위에서는 집중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날이 있었다. 몇 번 실책이 있고 난 뒤 종수는 결심했다. 

"너 종상이라고 들어봤어?"

기상호에게 이야기하기로. 

나만 힘들 게 아니고 너도 좀 힘들어 봐라. 혼자 아무 것도 모르고 편안해 보이는 기상호가 얄미웠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고 아무 대책도 없을 게 분명한 기상호. 고통받을 거면 같이 고통받아 보자는 심보였다. 

"그러니까 종상을 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읽어야 하는 소설을 바이블이라고 한다는 거야. 성경 알지." 

"아, 바이블⋯⋯. 네."

"신성모독 같은 거지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윤리라는 걸 몰라."

창피해서 어디 가서 이야기도 꺼낼 수가 없는 일을 그나마 상호에게는 좀 토로할 수가 있었다. 기상호 역시 알페스라는 극악무도한 범죄에 함께 피해당하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하소연하고픈 마음도 좀 있었다. 

"그렇게 싫으세요?"

물꼬를 한 번 트자 억울한 마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끝도 없었다. 그런데 기상호는 최종수에게 공감하기는커녕 영 시원찮은 반응만 보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신경이 별로 안 쓰인다고 했다. 저 갈색 머리통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분명 텅텅 비어 있겠지.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감정도 없고 아무 대책도 없는 놈. 종수가 생각했다.

"어. 당연히 싫지. 이 사람들은 너랑 나랑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한다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기상호는 사람을 뻘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음이 분명했다. 악마 같은 종상러들이 사실은 우리 구단의 팬이라고 말하지를 않나, 말 몇 마디로 순식간에 최종수를 팬들을 고소하려고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으로 둔갑시켰다.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기상호가 자기는 농구하는 게 재밌다고 말했을 때보다도 더 화가 났다. 

"일단, 형, 저 이제 집에 좀 가보겠습니다."

"야, 어디 가! 아직 말 다 안 끝났다고!"

기상호는 공감 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말주변도 없었고 싸가지도 없었으며 심지어 참을성까지 없었다. 예의 밥 말아 먹은 기상호는 대화를 하다 말고 도망쳐 버리기까지 했다. 천하의 나쁜 놈. 이런 새끼랑 엮여서 비교당하고 사귄다는 종상모략, 아니 중상모략에 휘말리다니 너무나도 분했다. 

기상호가 그렇게 도망쳐 버리고 나서, 종수는 지금껏 보고 고통받았던 것들을 전부 모아 상호에게 보냈다. 그가 실상을 제대로 알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기상호와 개인적으로 메신저 한 번 해본 적 없던 대화창이 금세 종상으로 가득 찼다. 

너 강아지라고 별명 붙인 것도 캣독의 일환이야

틱톡에 종상 유행한다

아주 난리가 났어

그날 경기가 끝나고 나서 기상호에게 종상을 이야기하고 상호가 도망치고 나서 링크를 잔뜩 보내고도 모자랐다. 그날 밤에도 다음 날 아침에도, 종수는 이틀 동안 꼬박 상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기상호는 카톡을 읽었지만 무시하려는 건지 종수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해 봤자였다. 내일 훈련에서 만날 거라 무시해 봤자 소용은 없었다. 그런데 답장이 한 통 없자 호승지심이 끓어올랐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종수가 빠득 이를 갈고 있을 때쯤이었다. 

카톡! 오 재밌네요

카톡! 근데 이거는 문체가 좀 이상한 듯요 왜 조사가 없지

카톡! 이거 말고 다음 거 봐보세요 500원 내고 사야하기는 하는디

카톡이 몰아쳤다. 기상호 자식은 보낸 걸 또 다 하나하나 읽어본 모양이었다. 그러느라 답장이 늦었는지 메신저 알림이 끝이 없었다. 종수는 냉큼 상호가 보낸 메시지를 읽어 보았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기상호의 답장이 그냥 감상평이라는 거였다.

종수는 최종수와 기상호가 세기의 사랑을 하고 절절한 애정에 피를 끓이는 걸 보면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특히나 제가 기상호에게 죽고 못 살고 기상호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묘사만 보면 자존심이 상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기상호는 그런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어디에도 이 사람들 진짜 나쁜 사람들이네요 형 마음고생하셨겠네요 저도 같이 신고하겠습니다 같은 말은 없었다.

"와⋯⋯. 이 새끼 진짜 뭐지?"

또 하나가 더 있었다. 기상호가 보낸 포스트는 성인 인증을 해야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종수는 소심하게 신고 버튼을 눌러 포스트 신고를 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최종수라는 게 밝혀질까 봐 본인 인증은 차마 하지 못했다. 노란 딱지라는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매우 궁금했지만 참아야만 했다는 이야기다. 

보아하니 기상호는 그딴 걱정도 없는 모양이었다. 보낸 링크를 타고 들어가더니 바로 성인인증을 해서 유료 결제까지 한 것이다. 황당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골때리는 새끼. 이 자식 미친 거 아냐? 기상호는 고교 시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기상호: 근데 이거 다 읽으신 거에요? 되게 재밌었나 보네

최종수: 재밌긴 뭐가 재밌어 미쳤냐?

기상호: 전 재밌던데요 ;;; 

기상호: 특히 이게 진짜 종수햄 같아요 [link]

충동적으로 보이스톡 버튼을 누른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게 진짜 종수햄 같아요? 종수는 종상 팬픽 속의 자신이 실제의 자신과 닮아 있다는 말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예민하고 속이 좁은 놈 같다고? 내가 너를 내심 좋아하면서도 아닌 척 한다고?

"야. 너는 화도 안 나냐?"

"갑자기 왜 전화했나 했더니⋯⋯."

"기분도 안 나빠? 너 사이코패스 새끼야?"

메시지를 나누는 도중이라 상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상호가 전화를 받자마자 종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호는 말을 흐렸다. 화면 너머의 기상호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모습이 선했다. 그렇지만 종수는 상호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왁왁댔다. 

"그치만 햄도 저거 다 읽었잖아요."

"뭐, 햄? 뭔 소리야?"

"아, 그. 아이다, 됐다. 별거 아니에요." 

"⋯⋯."

"아무튼 기분 나쁘실 수 있는 건 이해한다고요 저도."

기상호는 최종수를 햄이라고 불렀다. 가끔 경기장에서 만나는 다른 선수들에게 준수햄 병찬햄 태성햄 하던 것처럼. 최종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물어봐도 기상호는 명확한 대답을 내어 주지 않았고 우물쭈물거리다 다른 주제를 꺼낼 뿐이었다. 

"전 별로 화 안 나지만. 거 다 판타지다 아니에요. 제가 뭐 언제 의사니 아이돌이니 해보겠어요." 

"아무리 판타지여도 그렇지⋯⋯."

"그니까 저런 거 마냥 싫게만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상호는 툴툴거리는 종수의 말을 가로막고 말을 꺼냈다. 말문이 막힌 종수는 침대에 누워서 쫑알거리는 기상호의 목소리를 가만 들었다.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 신경이 안 쓰이나 생각하면서. 

"제가 얘기했잖아요, 다 애정이 있어서 그카는 거라고. 글고 햄이랑 저 엮는 것도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사귈 바에야 차라리 잘생긴 남자랑 사귀는 거랑 낫다, 뭐 이런 마인드일걸요. 있잖아요. 가지지 못할 바에 부숴버리겠어. 그런 거요."

기상호 목소리가 원래 이랬나. 상호와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듣기 좋은 저음에 사투리 억양이 조금 묻어났다. 맨날 징징거리기만 하더니 생각보다 덤덤하네.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느라 종수는 상호의 말을 흘려들었다. 상호는 별로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소리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나 잘생겼어?"

"예?"

상호가 나름대로 위로를 해 보려고 했지만 그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종수는 그가 뭐라 좋게 포장하든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종수는 상호의 말에 하나도 집중하지 않고 있다가, 대충 꽂힌 단어를 생각도 거치지 않고 되물었다. 

"아⋯⋯. 어, 뭐. 예, 그죠. 잘생, 잘생겼죠! 인기 많으시잖아요. 하하. 쓰읍."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반문 다음에는 잠시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몇 초 지나 애써 수습하려는 듯한 말이 돌아오는 것이다. 종수는 찬물을 맞은 듯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너무 힘들어하진 마세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 저게 현실이 될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저는 제가 주인공인 거 재밌는데요?"

"네가 주인공인 게 아니고 내가 주인공인 거야. x신아." 

갑자기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오늘 밤에 이불을 차게 될 건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수치심은 다 기상호 때문인 것만 같았다. 종수는 상호에게 화풀이를 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홱 돌려 누웠다. 분노인지 무엇 때문인지 심장이 쾅쾅 뛰었다. 

저게 현실이 될 것도 아니고? 

기상호가 한 말을 곱씹어 보고 있으면 왠지 화가 더 났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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