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동인男의 감정 1

심연의 알페스에 대해 알아버린 23번


버저가 울리고 손끝을 벗어난 공이 코트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상호는 무릎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낼 수 있었다.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코트에 뚝 떨어졌다. 함성과 음악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성에 찬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늘은 하나도 활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긴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기상호는 팀에 민폐만 끼쳤다. 스스로 평가를 마치고 찝찝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커다란 손이 그의 등허리에 얹어졌다. 상호는 코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수고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최종수가 서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상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귀로 그 말을 직접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최종수였으니까 말이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종수가 상호에게 갑작스레 수고했다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종수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심하고 까칠해 보이는 인상도 평소와 꼭 같았다. 

"아. 으음. 네. 형, 형도 수고하셨어요."

"어. 그래."

상호는 얼떨떨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수고했다고 말한다고 냉큼 받네. 네가 오늘 수고하긴 뭘 수고해 x 새끼야, 죽고 싶어? 따위의 험한 말이 돌아올 걸 기대했는데 최종수는 기상호의 답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종수는 어버버 거리는 상호에게 대충 대꾸하고는 금세 관중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형이 갑자기 왜 이라지? 아무리 이겼다고 해도 이럴 사람이 아인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상호는 그의 뜬금없는 친절이 미심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최종수 오늘 뭐 잘못 뭇나? 상호는 그러다 아예 고장이 나 버리고 말았다. 갈색 눈동자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굴러갔다. 내 오늘 개 x 박았다 아이가? 뭔데? 대체 뭔데? 물음표가 머릿속을 온통 떠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최종수는 유별날 정도로 기준이 높았다. 성패의 기준이 단순히 승패에 달려 있지 않았다. 처음 그를 만났던 경기에서 짐작했던 대로, 종수는 확실히 눈이 저기 어디 성층권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최종수는 한 게임 이겼다고 해서 좋은 게 좋은 거지 다들 고생했다 그냥 넘어가는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만큼 남들에게 들이미는 잣대 역시 엄격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기상호라면 더더욱 심했다.

상호는 그 이유가 아무래도 그 해의 쌍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지나치게 잘못 끼운 탓일 게 분명했다. 그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버린 탓에 최종수는 아직도 기상호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농구 한 게임 하면 모두가 친구라는 신조와 달리 상호는 끝내 종수와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아직 고등학생일 때의 이야기다. 지상고는 여섯뿐인 농구부원으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 상대는 고교 최강의 장도. 돌아오는 반응들은 뻔했다. 장도고가 단체로 식중독이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이기지 못할 거다. 장도가 구 할의 승산을 가지고 있다면 지상은 일 푼도 안 될 것이다.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승자가 이미 정해진 것만 같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장도에게 지상은 상대가 안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던 때다. 그런데 종수는 안심하는 대신 소문으로만 들려오는 지상 6번의 존재를 심히 의식하고 있었다. 비켜 뒤지기 싫으면. 일부러 강한 태도를 보인 것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놈이 이름을 날리는 것이 내심 불안했던 탓이다. 

그런데 막상 결승에서 마주친 상호는 생각만큼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종수는 상호를 대놓고 낮잡아 보며 여유를 부렸다. 점수차는 어느새 크게 벌어졌고, 그날의 경기 또한 여느 경기와 다름없게 진행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상고는 끝까지 무섭게 장도고를 추격해 왔다. 

종수는 기세를 꺾으려고 상호에게 악담을 퍼붓기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전세는 역전되고야 말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지상고가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아무도 감히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최종수의 독주를 아무것도 아닌 일 학년짜리가 기어코 막아 세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종수는 상호만큼이나 그날의 경기를 결코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쌍용기의 기억이 큰 충격으로 남은 건지, 그는 상호와 어쩌다 한 번 마주치기만 해도 상호를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머지않아 대통령기에서 또 재회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골치가 다 아팠다. 종수가 쌍용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길에 올라 줘서 참 다행이었다. 

미국에 갔으니 당연히 미국에서 프로 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상호는 종수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미국 대학 농구팀에서 잘만 뛰고 있던 최종수가 돌연 귀국을 택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이면 그 시점이 기상호의 얼리 드래프트와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절망하기에는 일렀다. 비극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둘은 같은 구단에서 프로 생활을 함께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쌍용기가 끝나고도 몇 년이 지났는데, 종수는 고교 시절의 앙금이 아직도 남은 모양이었다. 이제 같은 팀에서 뛰는 사이라고 예전처럼 상호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살갑게 군 적도 없었다. 

최종수는 정말로 단 한 번도 기상호에게 잘 대해 준 적이 없었다. 종수는 상호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해 왔다.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본체만체했다. 그런데 왜 오늘은 달랐던 것일까. 아무리 잘해도 기상호를 인정하지 않는 최종수가. 게임이 끝나도 기상호에게만 하이 파이브를 생략하고 지나쳐 가는 최종수가 왜. 무려 그 최종수가 기상호가 바보짓을 한 게임에서 수고했다는 말을 왜 갑자기 하는 것일까.

"왜 멍을 때리고 서 있어? 들어갈 거면 빨리 들어가지."

"아, 예 알겠습니다 형."

종수는 상호가 멍하니 서 있자, 심지어 그에게 대뜸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상호는 그쯤 되자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말도 안 되는 쪽으로 생각이 튄 것은 그때부터였다.

최종수가 죽을 때가 됐나? 아니 사실 이 세계가 이세계 전생물이라 누군가가 SSS급 농구선수 최종수한테 빙의한 건가? 아니면 내가? 이거 사망 플래그? 내가 오늘 퇴근길에 트럭에 치이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잖아? 물음표가 온통 떠다녔다. 뒷목에 솜털이 빳빳이 일어섰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최종수! 최종수! 최종수! 최종수!

상호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수에게서 몇 발짝 멀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평소에 팬 서비스에 큰 뜻이 없어 보이던 종수가 오늘은 살짝 미소까지 띄우곤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그러다가 최종수를 연호하는 소리가 커지자 제 쪽을 돌아보며 씩 웃는다. 그 꼴을 보니 의문이 더욱 증폭되기만 했다.

동인男의 감정

유례 없는 일이 몇 개씩이나 겹치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상호에게 큰 미스테리를 남긴 사건은 그걸로 종결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해서 최종수가 달라졌다면 큰 사건이 되었겠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시즌이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는 그날의 의문을 금세 뒤로하게 되었다. 최종수가 아니더라도 생각해야 할 것은 차고 넘쳤다.

또한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상호는 최종수의 격려를 한 번의 해프닝으로 취급하고 까맣게 잊게 되었다.

종수와 상호의 구단은 별 탈 없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아쉽게 놓친 우승을 올해는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팀의 분위기가 온통 들떴다. 곧 시즌이 막을 내리면 황금 같은 휴식기가 찾아온다. 프로 선수가 된 이후 처음으로 하는 전지훈련도 기다리고 있었다. 상호는 그런 이후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나 있었다.

"x발. 그 놈의 종상, 종상⋯⋯."

그런데 종수는 남들과 다르게 별로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중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처박고 중얼대는 최종수를 보고 몇 선수들이 수군거리며 라커룸을 나섰다. 최종수의 히스테리에 적응이 됐는지 새삼스레 놀라는 반응도 없었다.

"다 종상 때문이야. 이건 다 종상 때문이라고."

최근 여론에 의하면 최종수는 이제 와서 집중력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초반부터 쉬지 않고 풀타임으로 경기를 뛴 탓에 힘이 빠진 거다, 해외 리그에서 뛰다 한국 리그로 돌아오니 흥미가 떨어진 게 분명하다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게 맞는 말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호가 봤을 때에도 확실히 컨디션이 떨어진 것 같기는 했다. 평소에도 경기가 잘 안 풀린다 싶으면 히스테리 모드로 돌입한다지만 요즘 들어 상태는 더욱 심각하고 빈번해져 갔다. 유학 생활을 거치고 나서 전보다 여유로워진 듯 보였으나, 지금의 종수는 고교 시절과 다를 것이 없었다.

요즘 따라 공격적으로 변하기는 했지. 최종수는 원래 불안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상호는 라커룸 구석에서 종수를 몰래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벤치에 앉은 종수는 눈을 질끈 감고 열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면 잘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종상이 누군데? 그런 사람⋯⋯. 없다이가?

아. 그러고 보니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다. 최종수의 특이한 동기부여 방식. 그건 잊으려고 해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잠시 압도당하는 감각마저 느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컨셉 놀이를 열심히 하고 컨셉에 충실하려고 해 봤자 「진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었다.

와. 프로 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저러고 있노.

상호는 종수의 상상 속 라이벌의 이름이 종상이겠거니 막연히 추측했다. NCAA 디비전 1에서 관심받고 있다던, 협회장기 때에는 최종수가 이겼다는 그 실체 없는 엘리트. 그런 발상을 제정신으로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그 짓을 아직 이어가는 걸 보면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 모양이다.

"야, 뭘 봐."

"아, 아니에요."

상호는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관찰에 삼매경이었다. 종수는 노골적으로 뜯어보는 시선을 느끼고 홱 뒤로 돌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상호가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그렇지만 이미 한참은 늦은 뒤였다.

종수는 자리에서 일어서 성큼성큼 상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챙그랑 소리가 나게 라커 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 상호의 멱살을 붙잡았다.  상호는 꾸물거리면서 종수를 훔쳐보느라 아직 바지도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 

"조, 조, 종수 형님. 마, 마, 말로 하시죠⋯⋯. 말로."

어느새 라커룸에는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상호는 종수가 멱살을 붙들자 곧바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눈을 껌뻑거리며 위를 슬쩍 올려다보면, 살기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종수가 보였다. 최근 종수를 지켜보면서 저러다 언제 한 번 사고를 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상호는 올 게 왔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때린대?"

"아니, 갑자기 살벌하게 막 끌고 가시고 이러니까⋯⋯."

"뭐라는 거야?"

다행히도 종수는 주먹을 상호의 얼굴에 내리꽂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상호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실눈을 뜨고 앞을 봤다. 종수는 먼저 험악하게 굴었으면서 되려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여기 앉아."

"에? 저 집에 가야 되는데⋯⋯."

"앉으라고."

종수는 상호를 질질 끌고 갔다. 아까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 앞까지. 억지로 옆자리에 앉힌 상호에게 제 휴대전화를 가까이 들이댔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상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종수를 향해 슬쩍 눈짓했다. 상호는 이게 다 뭐냐는 표정이었다.

"x발. 야. 죽을래? 누가 앉으라고 했지 네 몸 나한테 비비래?"

"죄송합니다."

"하⋯⋯. 내가 이런 새끼하고."

땀에 젖어 축축한 다리가 어쩌다 맞닿자 종수는 오만상을 쓰며 둘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냈다. 자기도 땀범벅인 건 마찬가지면서 지랄이고. 어쩌다 닿은 것 가지고 불쾌하다는 티란 티는 다 내는 종수를 보면서, 상호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도 싫은 건 마찬가진데. 

"아무튼, 너 종상이라고 들어봤어?"

"네? 종상이요? 아뇨. 자, 잘 모르는데요."

"너랑 내 이름 한 글자씩 딴 게 종상이야."

"에?"

종수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답답한 표정을 짓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종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종수x기상호. 그러니까 두 사람을 엮는 모든 것을 일컬어 종상이라고 한단다. 종수는 다양한 앱과 다양한 사이트를 거쳐 수집한 종상을 전부 상호에게 보여줬다.

"진짜 미친 거지."

상호는 그러든지 말든지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차마 최종수에게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종수가 보여주는 '종상'들을 전부 봐야만 했다. 종수는 중얼거리면서 빠르게 화면을 전환했다.

"이게 말이 돼?"

"예? 아, 뭐. 안 되죠."

"이거 봐. 아, 이건 무슨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데 모르겠어서 못 보고. 너 이거 보는 방법 알아?"

"아뇨, 이런 건 저도 잘⋯⋯."

개중에는 최종수와 기상호를 소설 속 등장인물로 만든 것도 있었다. 최애가 도쿄돔에 가 준다면 난, 불면과 무기력의, 개악질 넷카마⋯⋯ 뭐라고? 그리고 무슨 만화 같은 것들도 있었다. 종상 동거하는 만화. 캣독 낙서 🔞 #poipiku. 기상호는 거기서부터 감을 잡았다.

대충 뭔지 짐작이 갔다. 상호의 전문 분야는 아닌 서브컬쳐. 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검색하다가 이런 것들을 우연히 접했던 적이 있었다. 아이돌로도 로맨스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팬덤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누나가 예전에 보다가 저에게 들킨 적이 있으니까. 웹툰 애니 아이돌 가리지 않고 커플을 만들어내는데 하물며 운동선수라고 못 할 것 있겠는가.

무슨 일인지 대략 이해한 상호는 이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딱히 이 주제에 관심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수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도 이해를 할 수 없었고, 그가 분기탱천하면서 보여주는 것들에 아무런 흥미도 들지 않았다. 별로 놀랍지 않았고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기상호는 그냥 집에나 좀 가고 싶었다.

"아무튼 너 이거 알고 있었냐?"

"뭘요? 종상 아카이브? 캣독 GIF? 아니면 형이랑 저를 엮고 그러는 거?"

"하⋯⋯. 어. 하여튼 이것들 전부."

🐱🐶 취향의 종상을 업로드합니다. 🏀국밥 스틸 모아보기🏀 💕종상 어시스트 모음💕 종상 스모크 챌린지🚬.. 뭔가 많았다. 상호는 코 아래를 슬쩍 쓸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구단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최종수와 제가 한 세트로 묶이고 있을 줄이야. 이거이거, 나도 제법 인기가 많은 선수였던 건가(쑻) 상호가 생각했다.

"몰랐죠. 근데 별로 놀랍지는 않은데요. 원래 이런 거 많아요."

"뭐?"

"우리 누나도 이런 거 보다가 전번에 저한테 들켰어요. 연예인들로도 이런 거 많다 하던데."

종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했다. 상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종수는 휴대폰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끄더니 말없이 휴대전화를 벤치에 내려놓았다. 긴장한 상호가 침을 꿀꺽 삼키자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종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이게 종상, 아니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그, 저는 별로 신경 안 쓰이는데요."

상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오늘 경기 때문에 빡친 게 아니고 이거 때문에 빡친 거라고? 종수는 상호에게 마치 공감이라도 바랐던 듯했다. 상호는 전혀 그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원했던 것과 전혀 딴판으로 돌아온 대답에 다시금 혈압이 치솟은 건지 종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싫으세요?"

"어. 당연히 싫지. 이 사람들은 너랑 나랑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한다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의도치 않게 종수를 자극했다는 걸 알게 된 상호가 주저하다 말을 덧붙였다. 종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답했다. 그는 종상이 정말 너무나도 싫은 모양이었다.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누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한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관계인 두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내가 싫은가? 이렇게까지 내하고 엮이기 싫어한다고? 상호는 떨떠름해진 표정을 지었다. 누군 좋은 줄 아나. 그 말은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난, 난 이거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어."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 사람들 다 우리 구단 팬인데."

"팬이라고? 팬인데 이런 짓을 해?"

"경기 영상 하나하나 다 클립으로 땄잖아요. 그리고 이 분은 맨날 퇴근길에 기다리시는 분 같은데⋯⋯."

종수가 이어서 꺼낸 말에는 상호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까지 사인회니 이벤트니 춤도 추고 머리띠 쓰고 엉덩이 흔들면서 팬을 끌어모으려고 했던 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될 뻔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이랑 다르게 저는 간절하거든요. 상호가 생각했다.

"아무튼 괜한 짓인 것 같아요. 저희한테 다 애정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죠.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면 신경이 안 쓰여? 난 이것 때문에 며칠간 잠도 못 잤어."

종수는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그런 극악무도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제 팬일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종수는 기상호와 자신이 동성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불법 도박 찌라시, 불륜 의혹과 같은 카더라 루머의 유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반박하려고 댓글도 달아 봤는데 아무도 진지하게 반응 안 해."

"글쎄요. 그냥 무시하면 알아서 사라지지 않을까요."

"계속 거슬리고 미칠 것 같은데 어떡하라고. 이 사람들 말로는 너랑 나랑 사귀는 사이라서 공식 석상에서 일부러 거리 둔대. 그래서 대놓고 너한테 말도 걸고 친하게 대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역효과만 났어."

"아무래도 그렇겠죠⋯⋯."

원래 장르 불문 오타쿠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그게 뭔데 씹덕아 같은 반응이 돌아올까 봐 상호는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상호는 그러려니 하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종상이라는 것은 종수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았다. 최종수의 경기력은 이제 기상호에게도 중요한 문제였고 말이다.

"여자친구 있다고 할까?"

종수는 이 종상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없애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구단 내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여성 팬 넘버 원 최종수가 연애 선언을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형이요? 난리 날 걸요. 그냥 제가 있다고 말할게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상호가 생각했다. 어차피 종상이라는 것은 최종수 기상호 두 사람을 엮는 거니까⋯⋯. 

"네가 하면 화제가 안 돼."

종수가 딱 잘라 말했다. 경기가 끝나고도 집에 가지 못하고, 불편한 상대에게 한참 붙잡혀 있으면서 이런 취급이라니. 상호는 씁쓸해졌다. 

"아, 정말 없애야 하는데. 뿌리를 아주 뽑아야 되는데⋯⋯."

"일단, 형, 저 이제 집에 좀 가보겠습니다."

"야, 어디 가! 아직 말 다 안 끝났다고!"

상호는 종수가 고개를 푹 숙임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냅다 도망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끝이 없다. 최종수도 팬들이 하는 거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제 됐겠지. 얼마 남지 않은 플레이오프를 종수 형도 다시 기운을 차려서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상호가 빠르게 달렸다.

카톡! 그럼 종상을 해

카톡! 중3 (@stormchoi236)

카톡! 종상해서 미안해 remix

카톡 알림이 미친 듯이 울렸다. 상호는 그러든 말든 종수에게서 당장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라커룸에서 종수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은 업보를 곧 받게 될 지도 모르고. 

'종상'에 지대한 악의를 품은 악성 농선 최종수의 기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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