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뭍의 경계에서

《침잠하는 늪》 역만 연작 해설

물과 뭍의 경계에서

― 《침잠하는 늪》 역만 연작 해설 ―

이런 도시 괴담이 있다.

물속에 잠긴 인간은 평온하다. 태아가 자궁 내 양수 속에서 보호받는 경험과 유사하기에 무의식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는 설명이 있다. 세계 어딘가에는 이러한 원초적인 욕구를 해결할 자금이 있는 소수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인간 수조가 있다고 한다. 희박한 확률로 거대 수조에 들어간 고객 중 일부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고.

내게 다소 ‘천경조’라는 인물은 마치 그 수조에 들어가 소멸하기를 염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공동 창작 프로젝트 《침잠하는 늪》(2024, 이하 《침늪》)의 등장인물들은 한 번씩 늪 아래로 가라앉았다 건져올려지는 경험을 한다. 늪의 밑바닥에서 외면해 왔던 진실을 마주하기도 하고, 같이 침잠하는 동료를 껴안고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경조만큼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아사리판이 났”다면서 자신은 참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twitter @1k1016zo, 2024.05.26) 시종일관 관찰자처럼 방관하는 태도를 보인다.

원인은 자명하다. 천경조가 태생적으로 늪의 주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뭍으로 나와 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여기 잠긴 채로 살고 있었는데, 이따금 늪 주위를 알짱거리다가 빠져드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며 관전할 뿐이다.

물 안에 잠겨 있을 때는 모든 감각이 왜곡된다. 액체를 매개로 전해져오는 파동은 공기 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멀리, 빠르게, 증폭된 상태로 전파된다. 이에 인체의 감각 기관 또한 환경 변화를 고려하여 확장되고 재구축된다. 물속에서는 몸 전체로 파동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물속에서의 감각이 더 폭력적인 감상을 유발하는 법이다. 경조가 자신을 ‘제정신’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 맑다’라는 느낌에 근거한 것인데,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감각이 과민해지는 것’은 헷갈리기 쉬우니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천경조는 왜곡된 물 아래 너무 오래 있었다.

천경조는 어쩌다 늪의 주민이 되었는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만이 남긴 5개의 연작 ― 「Show, Don‘t Tell」, 「pseudo journalism」(*경조>태랑), 「작용반작용의 법칙」(*경조>이지), 「알콜 중독자의 변명」, 그리고 「Anti Social ND Club」(*경조>윤수, 성빈)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테마, ‘감각 불응’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0. 대전제 - 감각 불응

인간 신체의 오감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개발하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아동 발달 단계에서 타인과 신체 자극을 주고받으며 피드백을 수용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데, 유아동에게 있어서 감각 발달의 적극적 조력자는 부모와 형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경조라는 아동은 상당한 악조건에 놓여 있는데, 가령 그가 가정사를 회고하는 장면에서 간접적으로 그러한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돌아오는 말은 없고, / 손은 다시 끌어당겨지지 않는다. / 나의 집에서는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말을 걸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손을 잡아도 끌어당겨지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있어서 특히 청각과 촉각의 경우 타인이라는 존재와의 피드백 교환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감각이다(반면 성인 천경조가 능숙하게 활용하는 시각, 후각, 미각은 타인의 협조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학습이 가능하다). 천경조라는 아이는 가족에게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요구한다. 아이는 영민하게 “입안의 혀처럼 구는 법”을 익히며 “한 뼘은 더 큰 비쩍 마른 아이의 손을 끌고 앞장서 걷”거나, 식사 시간에 “까르르 웃기도 하며 재잘재잘 떠”드는 등 시시각각 가족 구성원에게 청각과 촉각의 단초를 제공한다(「Show, Don‘t Tell」).

그러나 가장 가까운 관계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는 피드백이라고는 ‘무심함’, 심지어는 ‘몰이해’뿐이다.

부모가 대화하는 사이 경조가 식탁 아래로 형에게 장난을 걸어도 무심한 표정일 뿐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Show, Don‘t Tell」)

그러니까 이건 조용히 하라는 말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아, 경조? 평범하네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 눈치 설설 보면서 발을 뻗고 그러더니 줏대도 없고, 남자애들은 좀 주관도 뚜렷하고 우직해야 하는데, 미덥지가 않아. (「Show, Don‘t Tell」)

1. 흉내 내기 전략

오감 개발의 골든 타임이 지나갔다. 기대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감각의 불모지에서 아이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오직 흉내내기 뿐이다. 아이는 원하는 것을 내어 주지 않는 목석 같은 부모와 형제 옆에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행동을 모방한다.

가령, 「작용반작용의 법칙」 에서 모방이라는 모티프가 무의식적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년 시절의 천경조는 “나는 여기에 있고 형은 우주에 있”는 관계를 경험한다. 그러니까, 닿으려고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일방적인 구애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인해 노이지와 천경조는 ‘노이지가 여기에 있고 천경조가 우주에 있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관계에 놓이게 된다. 형-동생 관계의 역전이다. 천경조는 “문 안과 밖”이라는 두 공간을 오가며, 닿을 수 없다고 여겼던 형의 발자취를 답습해본다.

유년 시절에는 모방의 원형인 ‘부모·형제’ 역할을 글자 그대로 부모와 형제가 수행했다면, 성년이 된 이후로는 가까운 관계의 대상, 즉 사귀었던 전 애인들이나 대학 선배와 같은 사람들이 대신하게 된다.

1-1. 감각 박물관과 박제 컬렉션

천경조는 흉내 내기 수행 중 마음에 드는 감각들을 모아다가 고고하고 이상적인 것들로만 구성된 결벽潔癖의 벽을 세운다. 표본 병에 정성스럽게 라벨을 붙여 장식장에 보관하듯…… 그러니까 이것은 일평생의 모방 행위를 통해 공고히 쌓아올린 궁극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자, 천경조의 ‘감각 박물관’인 것이다.

감각 박물관에 주로 소장되는 물품들은 이른바 그의 언어로 “알잘딱깔센”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이다. 천경조는 “모든 것이 오차 없이 정돈된 바 카운터”에서 “한 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차림새”를 입고 있는 바텐더를 품평하며 “움직임 면에서도 망설임이나 낭비가 없”는 태도를 극찬한다. 그는 “네롤리, 파츌리, 베르가못, 시더우드의 향”이라는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수집하는 사람이 된다. 천경조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은 감각 박물관의 일부가 되어 박제되고 전시된다. (「알콜 중독자의 변명」)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이 근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대학 선배다. 천경조는 선배의 모방에 성공했고, 이제 “바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서 꽤 능숙한 톤으로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알콜 중독자의 변명」)

1-2. 기브-앤-테이크 불가능의 문제

호감을 사기 위한 방법은 간결하다. 하나,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둘, 원하는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준다. (「알콜 중독자의 변명」)

격식이든 재치든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말을 늘상 연장처럼 들고 다닙니다. (「pseudo journalism」)

천경조는 완벽한 바텐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타인에게 감각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물품을 내어주는 행위는 마치 “무심함도 지나친 친절도 아닌 / 몸에 밴 능숙한 배려”와도 같다(「알콜 중독자의 변명」).

박물관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주 근사한 것을 고심해서 골라내어주는 행위는 오히려 유년 시절의 미성숙한 인정 투쟁을 방불케 한다. 마치 「Show, Don‘t Tell」에서 형에게 식탁 다리 아래로 장난을 치는 장면과 같이, ‘나 좀 봐 달라고, 이런 것도 알고 있는데 나 멋지지 않냐고, 제발 알아채고 칭찬해달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천경조는 감각 박물관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불문율처럼 꽤 친밀한 대상만 데려오는 가게”라는 순진한 꼬드김은 마치 어린이가 친근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초대장을 선물하는 행위와 같은 맥락을 지닌다(「Anti Social ND Club」 *각주 : 물론, 성빈과 윤수의 경우 예외긴 했다).

그러나 천경조의 감각 박물관에는 “올드 패션드”가 전시되어 있을지언정, 그 감각의 본래 소유자인 “대학 선배”나 친밀했던 사람들은 여기에 없다. “찡그려서 웃던 눈”, “껴안았을 때와 같은 / 그 따뜻함”…….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생명력을 잃은 허물들 뿐이다(「알콜 중독자의 변명」).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죽은 것을 부여잡고 말을 거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 이것이 감각 박물관의 실체다. 천경조가 아무리 능숙하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근사한 것들을 나열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그것은 흔적의 모방에 불구하고, 유물의 원형은 경조의 세상을 떠나갔으며, 원형의 진의는 영원히 물어볼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천경조의 노력을 전달받는 사람들(이를테면 전 애인)이 쉽사리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던 원인이 된다. 죽은 자가 남긴 유품에서는 필연적으로 시체 냄새가 난다.

2. 가짜 저널리즘

천경조의 곁에 잠시 머물렀던 원형들은 모두 떠나갔다. 그는 물어볼 대상이 없어 불확실한 추측만 남은 상상의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선험적으로만 이해하려고 든다. “어릴 때부터 눈치가 터서”, “사람 마음이 진심인지 꾸며낸 건지 금방 견적이 나오고, 기민하게 느”끼는 관찰력 덕분에 짐작은 높은 확률로 들어맞는다(「Show, Don‘t Tell」). 그리고 타율 좋은 추리력은 되려 천경조를 더욱 고립시키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게 된다.

예컨대, 이 문단을 살펴보자.

우리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요? …머저리 같은 질문이고. / 근데 이거 무슨 담배입니까, 쎈 거 피우시네. …이것도 아니지. 혹시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장난하냐? // 천경조의 뇌 내 편집국에서 그의 말은 빠르게 검열된다. (「pseudo journalism」)

결과가 빤히 예측되는 것에 대해서는 구태여 물어 신경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는 것이 그의 기본 논조다. 그러나 사실 이 질문들은 검열하지 않았어도 딱히 문제 되지 않았을 질문들이다. 아마 독자가 가장 궁금해할 지점은, 사실은 대답이 궁금했을 텐데 어째서 천태랑에게 끝끝내 물어보지 않았냐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자명해 보이는 것을 굳이 찾아가서 묻는 것은 기자의 기본 소양이다. 천경조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언론고시에서 몇 번이고 낙방한다. 그의 기민한 관찰력으로 99.9%까지의 심상을 추리해 낼 수 있을지언정, 현장에 침투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남은 0.1%의 진실에 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도 이미 알고 있듯이, “언제나 면밀한 검토를 거쳐 내어놓는 그의 말은 상대의 윤곽만 겨우 스쳐 안전하게 우회해 왔으므로”― “생의 마지막을 목전에 두고 마주 보고 있”음에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인간으로 성장해 왔기에 ― (「pseudo journalism」)

나도 당신들도 서로 간에 잘 모르는데

이렇게 막연하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송구하고

미안함 외에는

잘 느끼지도 못하면서

불감의 날을 보내면서

(「알콜 중독자의 변명」)

3. 수조 안의 인간

“언제나 마찰 없이 매끄러운(「Show, Don‘t Tell」)” 결벽적인 감각 박물관에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천경조는 “같이 잠겨서 웃고, 울고, 진흙탕 싸움도 좀 하면서, 엉망이 되더라도 있는 대로 보여주면서 그렇게 관계를 맺”기를 거부했다(「알콜 중독자의 변명」). 자신의 열등감을 건드리는 형에게 “난 이런 변두리 회사라도 감지덕지하고 다니라는 말인가?”라고 툭 쏘아붙이는 것마저 그에게는 상상 속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Show, Don‘t Tell」).

그는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중략) 내가 물가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날 거면서. (중략) 관계에는 어느 정도 보험이 필요하다.”라고 변명했는데(「Show, Don‘t Tell」), 이 발언으로 인해 마치 천경조는 비위생적이고 축축한 공간에서 벗어나 완전무결 인간의 위치에 선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 문장은 발화함으로써 완성되는 ‘서술 트릭’처럼 느껴졌는데, 어째서 경조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물가에 서 있는’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일 한 인간이 수많은 인간관계로부터 한 걸음씩 도망쳐왔다면, 그리고 그 고립 상태가 이상하리만치 “편하고 만족”스럽다면(「Show, Don‘t Tell」), 언젠가는 본인이 서 있는 곳이 무결하고 쾌적한 ‘물가’가 아닌 축축하고 어두운 ‘수조 안’, 또는 ‘늪’임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당시의 천경조에게는 그럴 정도의 객관화 능력이 없었다.

4. 관통(penetration)으로 무너지는 불감의 벽 *천경조는 역시 른이다.

여기, 견고하게 세워놓았던 자기방어의 수조를 부수러 온 자들이 있다. 누군가는 “똑 똑 하고 두 번, / 문 안과 밖을 확인하듯” 연약한 노크로 수조에 섬세하게 균열을 낸다(「작용반작용의 법칙」). 마침내 수조는 두 손바닥에 말뚝을 박아 넣는 십자가형(crucifixion)에 의해 산산히 부서진다.

《침늪》의 엔딩 시점 이후의 이야기는 감각적으로 침잠해 있던 천경조라는 인물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야기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한동안은 왜곡된 감각을 정상 상태로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둔감함’을 경험할 순 있겠다. 예를 들면, 신경 손상 탓에 “단추를 잠그기가 어려워 팔다리를 꿰기 용이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거나, “신체의 에너지 안배를” 늘 신경 써야 한다거나, 낑낑대며 간신히 전자담배를 피우는 데 성공한다던가……(「알콜 중독자의 변명」).

감각 박물관의 벽이 깨지자 드러낸 세상의 실체는 초라하고 볼품없다. 그의 전 애인이 언급한 진흙탕 같은 세상의 시작이고, 아직 경조는 뛰어들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천경조는 어린아이처럼 형편없는 것을 시도했고, 엉망이긴 하지만 어쨌든 완성이 되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다(「알콜 중독자의 변명」). 누군가는 “먼지 묻은 텀블러”에 “싸구려위스키에 졸인 불어터진 과육”을 담아올 것이고(「작용반작용의 법칙」), “판판한 플라스틱 귀퉁이와 거즈 면의 감촉”을 되짚어보며 언젠가 다시 만나 물건을 돌려줘야 할 정신병자 동지들을 떠올릴 것이다(「Anti Social ND Club」). 그리고 그 대상은 《침늪》의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새로운 감각의 개막이다.

우리는 몸과 영혼에 비슷한 상처가 남았지만, 저마다의 세계를 재건하려고 뿔뿔이 흩어졌다. 단지 같은 모양의 자국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기로 했다. 다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때는 서로 연락하기로. 그래서… (twitter @1k1016zo, 2024.06.01)

그래서… 뭍으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Thanks To 역만…

다시 글 쓸 수 있는 용기를 줘서 고마웠어요.

덕분에 재밌었습니다.

「Show, Don‘t Tell」

https://withglyph.com/1k1016zo/1791399481

「pseudo journalism」(*경조>태랑)

https://withglyph.com/1k1016zo/1823207849

「작용반작용의 법칙」(*경조>이지)

https://withglyph.com/1k1016zo/988752276

「알콜 중독자의 변명」

https://withglyph.com/1k1016zo/1309235176

「Anti Social ND Club」(*경조>윤수, 성빈)

https://withglyph.com/1k1016zo/837427331

[번외편] 막간을 이용한 내 글 홍보

삼직인, 「집 지키기 놀이」 (*이지>경조)

https://withglyph.com/samzick_1/16861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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