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매화도사 귀농일지 08.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비날공방 by 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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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 샘플은 8화가 마지막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에 겨울의 서늘함이 묻어나오기 시작할 즈음, 청명은 그동안 꼭 해보고 싶었던 김장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김장 뭐 어려운 게 있나. 그냥 배추 절여서 양념이랑 잘 섞어주면 그게 김장이지. 사랑방의 뜨끈한 아랫목에 모여 고구마를 까먹으며 하하 호호 수다를 나누던 마을 어른들은 조언을 구하러 온 청명의 등장에 순식간에 김장의 달인으로 변모해 인터넷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온갖 조언을 줄줄 쏟아냈다.

“김장한다면서? 고춧가루는 안 필요해?”

“새우젓이랑 액젓 아무거나 사면 맛이 없다, 내가 저 지인한테 구해다 줄 테니 허튼 데 돈 쓰지 말고 꼼짝 말고 기다려라. 알겠제?”

작은 시골 마을에 청명이 김장한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마을 어른들은 십시일반 숨겨두었던 재료들을 모아주었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다는 국내산 태양초 고춧가루,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로 만든 육젓, 직접 채집해 말렸다는 청각, 알싸한 맛을 내는 돌산갓… 어찌나 다양하고 꼼꼼하게 챙겨주는지, 청명이 준비한 것은 김장용 절인 배추와 김치에 넣을 굴이 전부였다.

넓은 마당에 깔아 둘 김장 매트와 김치를 보관할 장독대까지 마당 한쪽에 마련해두었다. 이제 더 필요한 건 없겠지. 김장을 시작하기 전에 매실나무를 둘러보고 비닐하우스에서 쌈 채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 청명은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기, 고기를 안 샀다. 김장하는데 어떻게 수육용 고기를 빼먹을 수 있단 말인가. 막 삶아진 뜨끈한 수육 두 점을 양념이 듬뿍 발린 김치에 돌돌 감싸 먹는 게 김장 날의 국룰이거늘.

청명은 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차 키가 있어야 할 신발장 위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저번에 차 타고 열쇠를 어디에다가 뒀더라. 평소엔 잘만 기억하면서 필요할 땐 생각이 안 난다. 머리를 쥐어짜 낸 청명은 마지막에 창고에 짐을 나르면서 열쇠를 꺼낸 걸 기억해내고 그곳으로 향했다.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선반에서 열쇠를 발견한 청명은 그대로 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바닥을 기어간 소리가 들렸다. 뭐지? 설마 쥐라도 들어왔나?

근처에 있던 빗자루를 집어 든 청명이 바닥을 기어간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창고의 조명 스위치를 켠 그 순간.

“키이잇!”

“너 이 자식 거기서 뭐 해!”

갑작스러운 불빛에 화들짝 놀란 백아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뚜껑이 열린 매실주 통과 끈적한 액으로 뒤덮인 백아의 발에 상황 파악이 끝난 청명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감히 내가 제일 아끼는 매실주를 훔쳐 먹어? 그것도 장기 숙성하려고 남겨둔 제일 좋은 술을? 점점 일그러지는 청명의 얼굴에 백아는 살기 위해 귀여운 척을 하며 청명의 발목에 머리를 비볐으나, 애교로는 해결이 안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잘못한 게 있어 반항도 못 하고 목덜미가 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린 백아를 보며 청명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슬슬 목도리가 되고 싶다, 그거지?”

“키, 키잇…!”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족제비도 남길 수 있지. 안 그래? 오랜만에 목숨의 위협을 받은 지상최강의 영물은 연약한 주인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잽싸게 손에서 벗어나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꼬리에 부딪힌 뭔가가 떨어져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청명의 분노 섞인 고함이 뒤통수에 따갑게 박혀왔으나, 끝내 돌아볼 용기가 없었던 백아였다.

“어딜 도망가! 당장 이리 안 와?!”

저녁 먹기 전까지 안 돌아오면 진짜 죽는다! 청명은 섬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백아의 뒷모습에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지고 깨진걸. 치우기나 해야지.

“아이고 내 술…”

황매실 중에서도 특히 굵고 좋은 것들로만 골라 만들어, 일 년을 묵혀 뚜껑을 딸 예정이었던 매실주가 창고 바닥에 엎어진 모습에 청명은 눈물이 찔끔 흘렀다. 향기만 맡아도 이렇게 새콤달콤한데 마셨을 땐 얼마나 끝내줬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어가며 깨진 유리병을 치우다 실수로 상처까지 입으니 이쯤 되면 허탈해서 웃음만 나온다. 다행히 얕게 베인 상처라, 집에 있는 구급상자로 대충 처치한 청명은 열쇠를 챙기고 운전대를 잡았다. 기억 저편의 두 당 씨의 잔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상처가 생기면 바로바로 치료하라고 몇 번을 말했소!’

‘다쳤으면 제때 치료 좀 받으라고 이 말코 사형아!’

알았다, 이놈들아. 죽어서까지도 잔소리를 퍼붓네. 청명은 트럭의 속도를 높였다. 아무래도 정육점보다는 병원에 먼저 들러야 할 듯싶었다.

시내에 도착한 청명은 병원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구칠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데, 청명을 발견한 구칠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돌연 화들짝 놀라며 달려오는 게 아닌가. 뒤늦게 피투성이가 된 소매를 발견한 청명이 다급히 상황을 설명하자, 구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미안, 내가 너무 호들갑 떨었네.”

“괜찮아. …솔직히 이건 딱 봐도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잖아.”

깨진 유리병을 치우면서 옷에 튄 매실주는 대충 보면 피가 흘러 젖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병원에 들러 다친 손목을 제대로 치료받고, 약국에 들러 텅 빈 구급상자를 채울 약품과 정육점에 들러 수육용 돼지고기 다섯 덩이, 떠나보낸 매실주 대신 밤 막걸리까지 구매한 청명이 주차장으로 향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시장 상인들과 관광객들이 화들짝 놀라 무슨 일인가 하고 당황하고 있으니, 시장 곳곳에 붙은 스피커에서 주차장에 화재 사고가 났으니 안전을 위해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터져 나왔다. 혼란에 빠진 인파를 피해 샛길로 빠져나온 청명의 눈앞에 맹렬한 화마에 잡아먹혀 모조리 불타는 공용주차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화산은 쳐들어온 마교의 손에 모조리 불타버렸다지. 오래전에 완전히 사라졌으리라 생각했던 악몽이 실체를 갖추고 눈앞에 나타난 듯한 상황에 청명은 속이 울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 대피는! 어떻게 됐어?”

“전부 반대쪽 출구로 유도하고 있어요!”

시장 연합회 상인들이 손님과 관광객들의 피난을 유도하던 중 누군가 주차장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안에 사람이 있어요!”

좌중이 웅성거림에 휩싸였다. 목격자가 가리킨 주차장 정중앙의 검은 승용차의 유리 너머로 누군가의 인영이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아직 구출의 여지는 있으나 그곳까지 들어가는 길은 이미 불길에 막혀버린 지 오래다. 이걸 어쩌면 좋아, 소방차는 아직인가?!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였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친 한 사람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시장 횟집으로 달려가 수조에서 물을 퍼 온몸에 뿌린 청명은 근처에 나뒹굴던 쇠막대 하나를 손에 쥔 채 그대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매화검존만 살아서 돌아왔더라면. 어쩌면, 무사히 구해 낼 수 있었을 기회를 두 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젖은 소매로 코와 입을 막은 채 달려간 청명은 연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검은 승용차의 창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정신 차려! 당장 일어나!”

그러나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연기를 마신 것인지 도통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었다. 불길이 점차 거세지는 걸 본 청명은 손에 들고 있던 쇠막대의 얇은 부분을 창문과 문 사이에 끼워 넣고 힘껏 눌렀다. 멀쩡하던 창문에 순식간에 금이 생기더니, 산산이 조각난 유리창이 파편이 되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여니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청명이 남학생을 끌어당겨 황급히 차에서 멀어지자, 지척까지 다가온 불꽃이 기다렸다는 듯 기어코 마지막 남은 차마저 집어 삼켰다.

“헉, 헉…”

불이 붙은 차량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청명은 학생을 품에 끌어안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단련한 신체나 막대한 내력이 없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굳건한 정신력만큼은 여전히 청명의 안에 남아있었다. 예전엔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많이 겪어봤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할 수 있어. 청명은 악물고 불타는 차량을 등진 채 학생을 완전히 제 품에 끌어안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청명이 뛰어 들어간 걸 보고 근처의 소화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길을 뚫은 사람들이 이리 오라고 소리쳤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그러나 혼자였으면 몰라도 사람을 안고서 달린 청명의 걸음은 차량의 폭발범위에서 벗어나기에, 딱 한 발자국이 부족했다.

한참을 불타던 다른 차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폭발에 청명은 제대로 휘말리고 말았다. 무릎이 휘청이고 한순간 숨이 막힌다. 기적적으로 도착한 소방차가 물을 뿌리는 것이 아주 조금만 더 늦어졌어도 학생뿐만 아니라 청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주차장 입구까지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청명은 안전한 곳까지 나온 걸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가, 이 사람 좀…”

눈앞이 핑핑 돈다. 온몸을 작신작신 두들겨 맞은 것만 같았다. 검은 연기와 새빨간 불꽃으로 가득하던 시야가 서서히 멀어진다. 달려온 누군가에게 품 안의 사람을 넘긴 청명은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청명아!”

“청명 사형!”

아, 오랜만에 듣는 장문 사형 목소리네. 그 옆은 청진인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떠오른 반가운 목소리들에, 의식을 잃기 직전의 청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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