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Don't Tell


1. 아파트 단지 (낮)
대여섯 살은 되어 보이는 경조, 두리번거리며 종종 달려간다. 한참 뛰었는지 통통한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검은 곱슬머리가 온통 흐트러졌다. 숨 고를 새 없이 쏘다니다 아파트 상가 계단참에 앉아 있는 어린 영조를 발견하자 반색하며 달려든다.
어린 경조
형아~ 오늘 아빠 오는 날인데 까먹었어? 선물 사온댔잖아!
곧 어린 영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잘게 찢긴 종이조각이 무릎에서 후두둑 떨어진다. 어린 경조, 아랑곳하지 않고 한 뼘은 더 큰 비쩍 마른 아이의 손을 끌고 앞장서 걷는다.
2. 경조의 집 주방 (낮)
4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다. 어린 영조,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어딘가 정신이 팔려있는 반면, 어린 경조는 까르르 웃기도 하며 재잘재잘 떠든다. 부모가 대화하는 사이 경조가 식탁 아래로 형에게 장난을 걸어도 무심한 표정일 뿐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경조 부
부임지 인프라가 그렇게 나쁘지 않아. 공기도 좋고, (눈치를 보며 운을 뗀다) 나름 학군도 괜찮아서…
경조 모
(단호한 어투로 가로막으며) 그래도 애들은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게 나아요.
3. 학교 (낮)
교복 차림의 경조, 교문을 나서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복 차림에 가방을 삐딱하게 둘러멘 친구들이 경쾌하게 달려오더니 경조를 툭 친다.
친구1
꼉조~ 오늘 피방 고? 오늘도 째면 진짜 경우가 아니지.
친구2
이 새끼 이거 그동안 시험공부한다고 실컷 쌩까놓고, 꼭 중요할 때만 없지? 죽일까?
고등학생 경조
(짐짓 난처한 표정) 아이 진짜, 공부 아니라 방송부 일 때문이었다고 몇 번을 말해…. 됐고, 오늘은 진짜 의리 지킨다.
4. 경조의 집 거실 (밤)
도어락 소리. 친구들과 놀다가 밤늦게 집에 도착한 경조. 집 안은 캄캄하나, 안방 문틈으로 빛이 조금 새어 나온다. 경조가 안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갈수록 어머니 음성이 뚜렷해진다. 어머니는 경조의 기척을 못 느낀 채 통화를 이어간다.
경조 모
…영조가 애기 때부터 워낙 말수도 적고, 너무 겉돌아서 걱정이 컸거든요. 클리닉 가서 지능검사도 받아보고 했는데, 다 기우였지 뭐예요. 하나에 몰입하면 주변이 잘 안 보이는 거래. 머리가 좋으니까 좋은 대학도 턱턱 붙고.
(수화기 너머 말을 듣는 듯 잠시 조용하다가 돌변한 목소리로)
…아, 경조? 평범하네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 눈치 설설 보면서 발을 뻗고 그러더니 줏대도 없고. 남자애들은 좀 주관도 뚜렷하고 우직해야 하는데, 미덥지가 않아.
가만히 서서 무표정으로 듣던 경조, 현관으로 되돌아간다. 이번에는 -다녀왔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경조 모가 재빠르게 -나중에 또 걸게, 마무리하며 통화를 끊는다.
5. 대학교 강의동 (낮)
강의 소리
언론은 가치 중립적일 수가 없다. 사실 보도와 특정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양립가능하다는 말이죠? 저널리즘의 가치 지향성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고,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칠게요.
경조, 자리에서 가방을 챙긴다. 노트 사이에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끼워넣은 것은 입영통지서와 휴학신청서다. 밖으로 나가자 복도 반대편에서 경조를 부르는 여자 목소리.
잠시 후 - 강의동 로비 카페에서 마주앉은 혜정과 경조
혜정
경조는, 단둘이 있을 때 좀 힘빼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경조
뭐지? 나 이미 충분히 편안한데? 왜 그래~
혜정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다가) 네 얘기는 속터놓고 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지. 전에 내가 가족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기까지 너한테 털어놨는데, 다른 때는 잘만 말하다가 조금만 깊은 대화 나누려고 하면 은근 피하는 거 모를 것 같아? 어쩜 너는 사귀는 사이에도 이렇게, 하….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끌리며 큰 소리가 난다. 경조를 노려보더니 자리를 뜬다)
경조
(주변 시선들을 의식하며 뒷목을 감싸고 있다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노트를 꾹 누른다)
이건 말도 못 꺼냈네….
6. 대학교 도서관 건물 뒤뜰 (저녁)
흡연 구역에서 혼자 담배 피우고 있는 경조. 연초를 태우고, 연거푸 또 하나 태운다. 그 뒤로 지나가는 후배들,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후배들 (소리)
-천경조 선배, 그래도 최종까지는 여러 번 가지 않았어? 같이 언론고시 스터디 하는 동기가 그러던데 논술도 모범 답안급이고, 모의 토론도 막힌 적 없다던데. 학교 방송국에 있었는데 카메라 테스트야 뭐, 껌이고.
-야~ 최탈만 몇번이면 거의 인성에 문제 있는 거 아냐?
7. 경조의 집 (아침)
첫 출근을 앞둔 경조, 거울 앞에서 한참 머리를 매만진다. 가르마 방향을 바꾸거나 안경을 썼다 벗기를 반복한다.
(인서트- 경조에게 온 문자)
[안녕하십니까. 천경조 님, ND생활건강 직원 채용에 합격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래 안내 사항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경조
(혼잣말)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경조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슬슬 나가야 할 때. 마지막으로 옷차림 점검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영조. 입사 축하한다- 하며 경조 앞에 쇼핑백을 내민다.
경조의 상상 -
경조
축하? (헛웃음) 난 이런 변두리 회사라도 감지덕지하고 다니라는 말인가? 아, 잘난 반도체 연구원 얼마 안 가서 때려치고, 약국도 개원했겠다. 이제 뭐라하는 고용주도 없으니까 동생한테도 주제파악 하라고 훈계질하고 싶나 본데. 형이야말로 예전부터 부적응 문제로…
- 다시 현실
경조
(잠시 굳은 표정. 뒤늦게 웃으며) 뭐야~, 선물 고른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현금으로 주면 더 고마울 것 같은데?
8. 길거리 (밤)
경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문어숙회처럼 흐물거리는 거래처 임원을 질질 부축해 택시에 태운다. 아예 차 안에 불쑥 머리를 들이밀고는 택시 기사에게 단단히 당부한다.
경조
흑석동까지요. 안전하게 모셔다주십쇼, 기사님.
임원
아이, 더 마실 수 있다해도 그러네… 젊은 친구가 눈 하나 깜빡 않구, 술을 궤짝으로 마셔.
경조
상무님, 다음을 기약하시죠. 안전 귀가하시고. 앞으로도 저희 좀, 잘 부탁드립니다아.
경조가 차 문을 닫자, 주정뱅이의 고성이 멀어진다. 경조, 한숨을 푹푹 내쉰다. 몇 걸음 못 가 아무 건물 앞 화단 턱에 털썩 쪼그려 앉더니, 달달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문다. 라이터 부싯돌이 손에서 계속 헛돈다. 짜증 섞인 숨소리.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다. 은행 어플 알림을 멍하니 확인한다.
[(**은행) 입금 1,000,000 원 천영조 09.11 2:21]
경조
(담배 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린다. 빈정거리는 투) 천 씨면 천은 보낼 것이지. 생일인 것도 까먹었네….
9. D식물원 푸른홀, 무대 위 (시간 미상)
(페이드 인)
홀은 비어있고, 단차가 높은 무대에 홀로 올라서 있는 경조. 스포트라이트가 경조를 비춘다. 경조, 조명을 멀거니 쳐다본다. 눈 앞에 전짓불을 들이댄 것처럼 경조시점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경조
(심호흡 하고) 차남이어서 그런 걸까요? 아버지 은퇴하기까지 주말부부로 거의 삼십 년, 아들 둘만 바라보며 산다는 엄마 속을 우리 형이 어지간히 썩였어요. 더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나는 입안의 혀처럼 구는 법부터 익혔어. 말썽도 안 부리고, 허구한 날 사라져 있는 형 찾아내서 집에 끌고 오고.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님은 나보다 형을 더 좋아하시더라고….
아무튼 어릴 때부터 눈치가 터서요. 사람 마음이 진심인지 꾸며낸 건지 금방 견적이 나오고, 기민하게 느낀다고 할까. 또 노력이 반드시 호감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일찍 수긍했네요.
누구에게도 1순위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나는 이게 오히려 편하고 만족합니다.
그래도 살면서 적잖이 호의를 받았고, 그만큼 돌려주면서 만족해요.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진심을 말하래…. 이런 말하는 사람들은 꼭 선심 쓰듯 말하거나 겁박하거나야….
경조, 말을 마치고 무대 뒤로 간다. 경조 뒤로 커튼이 내려온다. 삽시간에 나무 뿌리들이 몰려와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경조 (내적 독백)
언제나 마찰 없이 매끄러운 길만 선택한 것도 나지만, 조금은 진심으로 살고 싶다고 바라고 마는 자신이 있다. 전력으로 부딪치고 서로를 침범하고 상처줘도 떠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사람들과 묶여있고 싶다.
경조
누가, 나 좀…….
나무뿌리가 경조의 숨통을 짓누른다. 그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 나무가 뒤틀리며 뚜둑뚜둑 부러지는 소리.
(페이드 아웃)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