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
자캐커플/Dirt&Dust
진현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첫 문장
무적
눈이 나리면 개가 뛰는 법이다. 나드그로비에는 그 이치를 자연히 깨닫고 있었으나, 크게 의식하진 못했다. 인간 것이든 짐승이든 간에 그는 친교를 나누는 것에 큰 흥미가 없었고, 대개 개라면 열없이 치대는 게 일이라 성미와 안 맞았던 까닭이다. 차라리 그들 조상인 맹수가 야생과 서열을 닮아 근접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먼일이다. 이제는 친근히 개를 키운다느니 하는 말이 어설플 만큼 고적한 곳에 그는 살고 있었다.
마마가 사라진 지는 겨우 몇 시간째였다. 그 용이 나 나가고 싶어, 라고 할 만큼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겨울이었다. 이미 계절이 깊어 눈이 내렸고 그것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고, 말하는 바람에 나드그로비에는 그녀가 슬슬 이 비범한 유폐를 그만두려고 하는지에 관심이 갔다. 서둘러 데리고 나오자 눈을 보고 아주 기쁜 표정이었다. 그래 보아야 마력이 간당간당해서 겨우 말 몇 마디 하는 것도 힘에 부쳐 보였다.
그녀는 근 몇십 년간 인간과 접촉하는 걸 매우 꺼렸다. 정말 필요하지 않을 때는 마다치 않더니…….
이걸 기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슬슬 형용을 바꾸어 어리석은 용 정도로 생각해야 하는지. 그는 한숨을 뱉었다. 본체를 유지할 만큼의 힘도 없을 것 같고, 이동도 불가할 테니 역사에 무한정 앉아 기다리기로 했었지. 역무원은 자기 자리라는 듯 낡은 벤치에서 밤새우는 사내를 수상쩍게 지켜보는 듯했다.
귀찮아지기 전 자리를 뜰까. 나드그로비에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근접한 상태라면 미약하게나마 마마의 마력이 느껴졌을 터였으나 이제까지 그런 낌새는 없었다.
‘아니면, 더는 용이 아니게 될 만큼 지쳤거나.’
이례적인.
그는 이 수식의 무게를 알고 있다. 마마는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기행을 벌였으므로. 이것을 평범한 상태라고 보아도 되는 건지, 아니면 부엉이처럼 고개가 돌아 죽음의 자리를 되찾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허수아비를 목격한 건 역사에서 걸어 나와 새로 내린 눈을 밟아갈 때였다.
크고 무거운 발자국을 뒤로하며 앉아 있었던 만큼, 무기한으로 걸을 셈이었다. 밤새 축복처럼 퍼부어 댄 함박눈은 이제 날이 선 싸라기로 바뀌어 있었다. 나드그로비에는 눈을 게슴하게 뜨고 인형인지 인영인지 모를 것을 쏘아보았다.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는데, 솟대처럼 멀거니 선 모습은 짐승도 아녔다.
얼음에 뒤덮인 여울목처럼, 군데군데 드러난 어두운 자국을 제하면 눈송이나 끄무레한 햇살보다 희게 빛나는 그림자. 그것이 옆으로 풀썩 쓰러지는 게 보였다. 그럴 리 없는데 가슴이 뛰었다. 오래되어 주인마저 죽은 거미줄 한 자락이 손끝에 걸린 것 같았다. 불쾌했지만, 동시에 가련했다. 나드그로비에는 그게 미적 충동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그것은 흩어지는 마력의 반동처럼 느껴졌다.
거의 뛰듯이 걸어가느라 잘 신은 가죽 장화가 다 젖어 들었다. 나드그로비에의 표정과 호흡은 여상한데, 쭉 남은 혼자 걷던 길은 거칠게 헤집혀 있었다. 그는 얼른 손을 뻗었다. 마주 잡는다기보다는 겨우 들어 올린 듯한 손목을 낚아채자 그것이 힘없이 웃었다.
흰옷이 뭐라도 죽일 것처럼 아름다웠다.
“기다렸어.”
마마가 말했다. 그러면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는데, 다 풀어 내린 머리칼이며 살갗이 서먹한 추위를 못 이기고 전부 얼어 있었다. 나드그로비에는 자신이 그녀의 어떤 구석을 예쁘다고 생각한 건지 궁금해졌다. 마마가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다가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듯 긴 속눈썹에 눈 입자가 들러붙어 있었다.
할 말을 빼앗겼다, 는 것을 사내는 느지막이 깨달았다.
“나를?”
나드그로비에가 간신히 대꾸했다. 그는 마마의 몸을 거의 받쳐 들고 있었다. 인간 같은 몸의 무게가 으슥하게 느껴졌다. 마마는 본래도 가벼울 것인데 이 모습이 되면 승천할 것처럼 섧게만 보였다. 인간의 얼굴이란 건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다른 인간을 잃었다는 슬픔을.
어차피 곧이곧대로 돌아올 것인데, 어째서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용은 알 수 없었다.
마마가 말했다.
“너를. 이 옷을 찾으려고 조금 오래 돌아다녔지만.”
“옷?”
그러고 보니 본 적 없던 드레스였다. 섬나라에서 지은 듯 가벼웠고 새겨 놓은 은사는 품질이 좋아 보였지만, 어울리지는 않았다. 마마는 늘 검은 옷을 입었다. 사람이 상을 치르듯이 그랬다. 흰 것을 시체에 입히거나, 아니면…….
“신부 같지 않아?”
마마가 중얼거리며 한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널찍한 소매가 날카로운 바람에 휘말렸다. 펄럭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니 걸치기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드그로비에는 그냥 앉을까, 생각했다. 보통 그는 서 있었고 마마는 앉았는데 요새는 마마가 서려고 들고 그는 앉으려고 들었다. 마마는 몸이 풀리면 흐드러지듯 드러눕기가 일반적이었으나 근래에는 자꾸 꼿꼿해지려고 하는 데에 신경이 쓰였다.
말의 뜻은 뒤늦게 돌아왔다. 나드그로비에는 찡그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시체 같다.”
“이런, 몹쓸 농담을.” 웃음소리. “시체가 좋은 거야, 아니면 신부가 좋은 거야. 둘 중 하나만 한다면.”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썰매견일 것이다. 여기선 털이 수북한 것들을 집안에서 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늑대의 후손이라 어린아이를 곧잘 물어 죽이곤 한다.
“글쎄.”
“답잖게 굴지 마, 나드그로비에. 내게 이름을 줬잖아.”
“그렇다면 답은 네가 알지 않나.”
“맞아. 그래도…….”
네 입으로 들을래. 마마가 평소처럼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훌쩍 사라졌으면서, 그렇단 사실도 잊고 졸라오는 건 다섯 살배기 인간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드그로비에는 잠긴 문을 생각했다. 식품 저장고였던 곳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고 집의 주인인 그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불길한 족쇄가 들어 있었다. 그는 흉측한 물건을 손으로 들어올리기도 싫어서, 계단 위에 선 채 발로 차 집어넣었다.
나드그로비에가 말했다. 여간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마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침으로 무마된 웃음소리가 딱하게 들썩이는 가슴을 울리다가 공기 중에서 쨍하니 얼어붙었다. 낮게 지나가는 비행기 소음이 이 모든 소리를 지우고 말았다. 있잖아, 하고 마마는 웅얼거렸다.
“네 목소리가 듣기 좋아. 전음보다도.”
“마력도 담겨 있지 않은데.”
“그래서 그런가 봐.”
“언제든 바꿀 수도 있고.”
“나는 알아볼걸.”
“당연한 소리를, 너는…….”
너는 용이니까.
나드그로비에는 자기가 뒤끝을 흐렸다는 걸 깨닫고 비늘이 돋았다. 그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마마는 얼결에 그 위로 쓰러졌다. 한 사내가 걷느라 헝클어진 잿빛 눈밭은 이미 새로 내린 결정이 뒤덮여 하얗게 바래고 있었다.
“나는 용이니까.”
“변치 않는 사실이지.”
“좀 퉁명스러운데, 그 목소린.”
“잘못 들었겠지.”
“나는 네 신부가 되고 싶었어.”
어째서 과거형인가 고민하는 사이 마마는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예쁘게 봐주면 좋겠어서, 이 옷을 입고 싶었어. 꼭.”
눈매가 나긋하게 접히는 게 보였다. 마마는 그대로 다른 용을 끌어안았다. 추위에 익숙지 않아 시허옇게 얼어버린 살갗이 투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문득 나드그로비에는 마마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죽음일까, 삶일까? 인간일까, 사랑일까. 그건 축복인가 저주인가에 관해.
미리 답을 구하자면 그중 무엇도 아니었다. 나드그로비에는 마마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마마의 눈꺼풀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살얼음 엉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는 게 보였다. 숨결이 가까웠지만 따스하지는 않았다.
개가 아이를 물어뜯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것들은 익힌 고기를 먹고 자라 날것을 보면 당혹한다.
“너에게도 내가 아름다워?”
대답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뭉그러졌다. 입술이 마주쳤다. 그때 마마가 고개를 휙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나드그로비에는 한쪽 귓불에 달린 작은 호박 귀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아올 옛 제자가 떠오른 탓이다.
마마가 물었다.
“저게 뭐지?”
“비행기군.”
“전투기 같은데.”
“아니, 작은 비행기일 뿐이야. 전용기인 모양이군.”
“그래?”
마마는 그대로, 비행기가 하늘에 뿌연 궤적을 남기는 걸 찬찬히 좇아보았다. 하늘이 우유처럼 깊고 멀게서 비행운은 금세 흩어졌고 마마는 그 비행기의 꼬리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마마는 보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나드그로비에는 문득 말했다. “보고 싶군.”
사위가 적요했다. 부정도 긍정도 않는 소리에 그는 슬며시 웃었다.
“보고 싶은 거지, 너는.”
“아냐.”
“그럼?”
“지금은 그냥. 있을래, 너랑.”
하며 너른 하늘 속으로 파묻혀 간 기체가 무너지기라도 했다는 듯, 마마는 눈을 감았다. 하얀 옷이 점점 젖으며 수은처럼 짙어지고 있었다.
한 점의 전운 없는 세태였다. 계절이 말갰으나 나드그로비에는 아직 끄무레한 여름 속껍질을 느끼고 있었다.
씁쓸하고 푸른 자몽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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