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crossed Lovers
닿지 않는 우주의 긴히지
🍓🚬
원작 + 평행우주. NTR 요소가 있지만 어느 쪽도 긴히지입니다.
사망 소재가 들어있지만 해피엔딩입니다.
1.
어떤 계기로 꺼낸 말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악의 따위 없었다는 것 정도다.
히지카타와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나란히 앉아 피차 조금 지나치게 마셨고, 둘 다 약간씩 비틀거리며 돌아가는 길에 늘 하던 허튼소리를 주고받던 도중이었다. 입맛이 어떻다, 동공이 어떻다, 머리카락이 어떻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그다지 변하지 않은 영양가 없는 비방과 중상모략은 지금 와서는 항례 행사 같은 것이고, 거기에 진심 따위 들어있지 않다는 건 서로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긴토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뭐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알아? 나도 술 값만 아니면 너 같은 거 필요 없걸랑?”
히지카타 토시로는 의외로 다루기 쉽고, 다혈질이고, 눈물도 많고, 그렇지만 긴토키가 아는 다른 누구보다 프라이드가 높은 남자다. 뻔한 도발에 간단히 속아 넘어가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그런 주제에 화를 낸 직후에는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다는 척 애써 표정을 가다듬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어린아이도 알 법한 약점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이길 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겨우 그 정도냐며 허세를 부리는, 피투성이가 된 것은 적 때문이 아니라 백화점 자동문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런 전신이 온통 프라이드로 되어 있는 남자가 고작 자신이 한 말 따위에 상처받는다거나, 하물며 상처받은 얼굴을 내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완전히 상정 밖의 일이었다. 사카타 긴토키가 히지카타 토시로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건 나도 알아.”
울컥해서 내뱉은 폭언에 격이 비슷한 비방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새삼스럽게 의아해졌다. 대신 되돌아온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머뭇거리며 돌아본 곳에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한 히지카타가 있었다. 살짝 입술을 깨물고, 낯선 그림자가 진 눈을 살짝 내리깔고, 무언가 비참한 것을 억누르듯이, 혹은 서글픈 것을 끌어안듯이, 그러나 당황한 긴토키가 채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히지카타는 그 전부를 말끔히 지워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로지 담담한 표정을 눈앞에 두고 긴토키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단어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러나 그 아무것도 목소리로 나오지는 않아서--
다음으로 일어난 일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필요 없으면 나한테 줘."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노려본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러나 역시 기민하게 이변을 눈치챈 히지카타와 동시에 검을 뽑는 사이 히지카타의 바로 뒤에서 무언가가 빛나기 시작했다. 햇빛이 반사된 것인가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마저 어스름한 밤이다. 허공에 나타난 바늘구멍 같던 빛이 곧 세로로 길게 늘어나 불규칙하게 찢어낸 듯한 틈으로 변하고, 그 사이로 튀어나온 것이 사람의 손이라고 깨달은 순간--
“…히지카타.”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더없이 다정하게 불렀다. 공중에서 뻗어 나온 팔이 어안이 벙벙한 히지카타의 손목을 단단히 쥐었다. 보고 싶었어. 울먹이는 것 같기도, 환희에 찬 것 같기도 한 음색으로 중얼거리면 히지카타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해결사. 수천 번은 들었을 그것은 이름조차도 못 되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가볍게 입에 담는 상호일 뿐으로, 그러나 저 남자가 지칭하는 '해결사'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분노와 위기감이 전신을 감쌌다.
눈에 익은 구름무늬 소매의 팔이 히지카타를 세게 당겼다. 긴토키가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히지카타는 빛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미 늦었다고 직감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고, 어떻게든 손에 닿은 것을 아무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기다려, 안 돼, 히지카타. 손안에 있는 것이 생명줄이라도 된다는 듯 온 힘을 다해 당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무게 축이 옮겨지는 느낌에 성급히 안도하며 히지카타를 받아내려 무릎을 굽혔을 때였다. 양쪽으로 팽팽히 당겨져 있던 장력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내려다 본 손에 피가 흥건했다. 목숨처럼 쥐고 있던 히지카타의 검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남자는 이제 여기 없다.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검이 그 증거다. 히지카타도, 히지카타를 데려간 구름무늬 소매도, 두 사람이 사라져 간 빛의 틈새도,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적도 없다는 듯 주위는 온통 고요했다.
♪Official髭男dism - 日常
2.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터무니없는 악몽이다.
전 부대가 동원된 큰 소탕 작전이 마무리된 직후였다. 평소보다 조금 많이 마셨고, 며칠이나 철야로 일한 탓에 안 그래도 피로가 쌓여 있었다. 그러니까 가게에서 나온 직후부터가 전부 꿈이고, 자신은 그대로 근처 자판기 위 따위에서 잠들어버렸다 해도 그렇게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현실이라고 가정했을 때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뺨이 조금 말랐고, 눈 밑이 약간 검은 것을 제외하면 익숙하기 짝이 없는 얼굴. 정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도, 유카타를 반만 걸친 묘한 복장도, 카레 냄새가 배면 홈쇼핑에서 새로 주문한다는 목검도 히지카타는 전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르다. 얼굴도 목소리도 몸짓도 해결사의 것이지만 저건 절대로 그 남자일 리가 없다.
“히지카타.“
약간 쉬고 갈라졌지만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더듬은 허리춤에는 검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었던 무라마샤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히지카타는 새삼 동요했다. 침착하자. 이건 아마도 꿈이고, 저건 분명히 해결사가 아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억에 하나 이 광경이 현실이라면, 저 남자에게 검도 없이 맞설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지?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말고 똑바로 얘기해.”
“보고 싶었어.”
동요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퍽 냉정하게 내뱉은 말에 '해결사'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절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역시 꿈이다. 그 자식이 나에게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기왕 꾸는 꿈이라면 마요링과 마요네즈 풀장에 다이브하는 꿈이 좋았다고 탄식하기도 전에 '해결사'는 성큼 다가와 히지카타를 한 품에 끌어안았다.
“뭐 하는—”
“보고 싶었어. 히지카타….”
다분히 소중하고 깨지기 쉬운 것을 대하듯 다급하고 간절한 손이었다. 끌어당기는 팔에는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검 없이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 자명해서 반대로 쉽게 밀어낼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남자에게서는 무척 익숙한 냄새가 난다. 시시한 말싸움을 하며 스쳐 지나갈 때, 붐비는 술집에서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앉을 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등을 맞대고 싸울 때마다, 거리의 매연보다 갓 나온 안주보다 전장의 바람보다 앞서 느껴졌던-- 싸구려 술에 단팥을 잔뜩 올린 밥, 커다란 개의 눅눅한 털, 이름 모를 누군가 남긴 핏자국, 그런 것들을 비누로 빨아 햇볕에 말린 것 같은, 사카타 긴토키가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다고 싫어도 깨닫게 되는.
“…해결사?”
망설임 끝에 입에 담은 호칭에 남자는 잠시 멈칫하다 조금쯤 몸을 떼어놓고, 초콜릿 파르페라도 바라보듯 잔뜩 달콤한 얼굴로 히지카타의 눈을 마주치며 응, 하고 환하게 웃었다.
3.
“여기란 말이지?”
겐가이의 말에 긴토키가 대답하기도 전에 무라마샤가 먼저 날을 떨었다. 수년 전의 그날부터 그 남자의 곁에서 절대로 떨어진 적이 없는 검이다. 그 주인은 지난 밤에도 바로 여기서 이 훌륭하게 날이 선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꽤 취해있었다고는 해도 히지카타의 실력은 진짜다. 나타난 것이 "아는 얼굴"만 아니었다면 그 어떤 상대라도 간단히 베어냈을 것이다. 아무튼 명색이 귀신 부장 주제에 무르기 짝이 없다. 방심하다 가짜한테 홀리기나 하고. 갈 곳 없는 원망을 담아 검지 끝으로 손잡이를 살짝 두드리면 요검은 키잉, 하고 공명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호오, 주인의 흔적에 반응하는 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끊어낸 탓에 게이트에 균열 같은 게 남아있는 거겠지.”
“영감, 나는 지금 삼류 SF 설정 같은 데 신경 쓸 여력이 없걸랑? 본론만 깔끔하게 말해.”
“꼭두새벽부터 선의로 도와주는 사람에게 태도가 그게 뭐야? 나는 바쁜 몸이야. 지금도 작업실에서 전자동 달걀덮밥 머신의 개량판을….”
“미안해!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 야망은 제발 거기서 멈춰! 것보다 당신 전부터 달걀이랑 무슨 원수를 진 거야?!”
역정을 내는 겐가이에게 평소처럼 사과인지 태클인지 잘 모르겠는 응수를 해 보지만 거기에 도통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마음이 온통 히지카타로 꽉 차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가 없다. 겐가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등을 돌리고 공명의 '흔적'을 스캔하고 있지만, 저 괴팍한 영감이 배려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은 뻔히 보이는 것인가 생각하면 다소 무 대륙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본 검은 등은 언제까지나 꼿꼿하고 반듯했다. 취한 상태에서 갑자기 기습당해, '모르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붙잡혀, 끝내는 수상한 빛 안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히지카타는 결코 칼을 놓지 않았다. 그 긍지 높은 무사가 목숨처럼 쥐고 있던 검을 억지로 붙잡아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긴토키 자신이다. 괜찮을 것이다. 검 따위 없어도 히지카타는 충분히 강하다. 그렇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주인과 이어지는 매개체가 있으니 어떻게든 추적해 볼 수는 있겠지만…. 난감하군. 아직 어느 별의 무슨 기술인지도 모르겠는 단계니 말이야.”
답지 않게 말을 흐리는 겐가이에게 역시 답지 않게 초조해하는 꼴마저 전부 들킬 것만 같아 긴토키는 그런가, 하고 짧게 응수했다. 하여튼 그 멍청이 때문에 무슨 고생이래. 평소처럼 억지 험담을 꺼내려던 순간 어제 본 히지카타의 잔뜩 상처입은 표정이 눈앞을 스쳤다. 그런 건 나도 알아,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남자가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4.
“좀 진정했냐?”
“전혀 진정이 안 돼. 어느 쪽이냐면 불끈불끈해. 주로 하반신이. 만져볼래?”"
사람이 기껏 신경을 써 줬는데. 거침없이 천박한 농담을 되돌려주는 남자에게 히지카타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렸다. 명치를 얻어맞고 으윽, 하고 주저앉으면서도 실실 웃는 표정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실없는 말만 해 대는 주제에 해결사는 생각보다 자주 웃지 않는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히지카타 군은 역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구나. 그런 점이 귀여운 거지만.”
“...너 누구야? 바라는 게 뭐야?”
“그러니까 '해결사'라니까. 그 부분은 아까 납득 끝난 거 아니었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힌 그대로 남자가 팔을 뻗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내려다보는 히지카타의 뺨에 손 끝을 가져다 대더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썩을 인연의 싸움 상대를 대하는 태도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아 히지카타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 지조차 모르게 된다.
"네가 아는 '해결사'는 나하고 달라?"
당황한 히지카타를 눈치챈 듯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르냐고? 그야 얼굴도 목소리도 뻔뻔한 태도도, 내친 김에 솜사탕 같기도 민들레 같기도 한 은발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해결사는 나한테 이런 짓 안 해."
“내가 알던 히지카타 군은 너랑 똑같아. 다혈질에 입이 험하고 미각이 바보야.”
“누가 미각 바보냐?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이 당분 바보가!”
“아, 역시 그 부분이 제일 화 났어? 정말 우주를 건너도 너는 너구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더없이 다정해서 어쩐지 몹시 가슴이 시렸다. 내가 알던 히지카타 군. 익숙하고 생소한 단어들을 입 안에서 곱씹던 히지카타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너는 설마...”
거기까지 내뱉고 차마 이을 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면 남자는, 그러니까 다른 우주의 사카타 긴토키는, 보는 것만으로 이쪽이 괴로워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죽어버린 우주에서 왔어.”
죽어버린, 저도 모르게 혀 끝으로 반복한 음절에는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다. 다른 우주라거나, 그 다른 우주의 꼭 닮은 자신이나, 그 꼭 닮은 자신이 이미 죽어버렸다거나,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꼭 닮은 사람들이 있는 평행 우주보다 훨씬 말도 안 되는 일들도 셀 수 없이 봐 왔다. 그런 우주를 여행해 왔다는 것도 천인의 기술력을 사용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가장 납득하기 쉬운 대목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히지카타에게 있어 현실감이 없는 부분은 이 남자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너하고 나는. 내가 죽어도 너랑은 상관 없잖아.”
지금 당장 죽는다면 그야 상당히 원통할 것이다. 아직 하지 못한 것, 꼭 하고 싶었던 것, 언젠가는 해야만 했던 일들이 산처럼 있다. 그러나 후회로 점철된 인생이었냐면 그렇지도 않다. 스스로 정한 길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여기까지 왔다. 원하는 삶의 방식을 위해 신념을 만들었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시 삶을 바쳤다. 그것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은 산처럼 있지만, 뜻에 공감해 준 이들도 충분히 많다고 자부한다. 부슈에 홀로 남겨질 형수도, 인생을 걸고 따랐던 대장도, 고락을 함께한 대원들도,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히지카타의 죽음을 애도해 줄 것이다. 실컷 울고, 애통해하고, 어쩌면 누군가는 마지막으로 독설과 함께 바주카포를 날리고, 그러나 한동안 둔소 전체에 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완전히 빠져나오는 데에는 시간과 품이 들겠지. 그 정도로는 단단한 인연을 쌓아 왔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남자만큼은 거기에 들어있지 않다.
그야 조금은 슬퍼하겠지. 그렇게 보여도 무척 정이 깊은 녀석이니까, 만나면 싸움만 하던 썩을 인연이라도 아는 얼굴이 하나 줄었다면 약간은 쓸쓸해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다. 히지카타는 그 남자의 "지켜야 할 것"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히지카타가 없어져도 해결사는 다음날이면 사무소 문을 열 것이다. 드물게 손님이 오면 평소대로 나른한 얼굴로 적당한 응대를 하고, 거리 어디선가 지붕을 고치고, 호객 행위를 하고, 길 잃은 아이를 등에 태워 부모를 찾아주고,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 그러고 보면 전에 자주 술값을 내 주던 놈이 있었지, 분명히 오오구시 군이었나, 하고 어렴풋이 떠올려나 주면 다행이다. 해결사가 자신을 찾아 우주를 건너 올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하물며 이토록 절박하게 팔을 붙잡고, 무척 소중한 사람을 칭하듯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고, 상관 없잖아, 라는 말에 더없이 상처받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릴 것이라고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얼굴로 해결사가 말했다.
5.
고지식하고 딱딱하고 입은 험하고 미각은 험악하고 사는 방식은 더더욱 살벌한 놈.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미남이고, 머리카락도 짜증나게 찰랑찰랑하고, 여기저기서 멋지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열 받고. 처음 만났을 때의 히지카타 토시로는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뭐든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매운 센베를 먹으며 혼자 울음을 삭히는 뒷모습이, 요검에 홀려도 제자리를 찾고 마는 영혼이, 영영 닿지 못할 편지를 품고 부하를 다독이는 옆얼굴이--몹시 아름답고, 찬란하고, 기어코는 사랑스럽게까지 보여서, 언젠가부터 긴토키는 자신에게 있어 저 남자가 대단히 특별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오래 전 잃어버린 무언가를 히지카타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서투르고 투박하고 순수한 신념을 함께 지켜낼 때마다 과거의 자신도 함께 구원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히지카타는 앞으로도 그 자리에 있어 줬으면 했다. 마주칠 때마다 술렁거리는 마음을, 싸움을 걸면서도 은근하게 얽히는 시선을,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일수록 온화해지는 공기를 애써 모른 척 했다. 관계를 바꿔버리는 것이, 뭐든 망쳐버리는 것이, 다시 잃어버리는 것이 무서워서 자신에게서도, 히지카타에게서도 도망친 빌어먹을 겁쟁이였다.
"해결사."
그러니까 그 날의 히지카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긴토키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긴토키를 부른 히지카타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붐비는 선술집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고,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듯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고, 놀라서 고개를 들면 긴장한 것이 역력한 얼굴의 히지카타 토시로가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쳐 왔다. 좋아해. 부정할 수도 착각할 수도 없는 스트레이트한 고백이 쏟아져 들어오면 처음 느낀 것은 환희였고, 그 다음으로 느낀 것은 공포였다.
"...너무 취한 거 아냐?"
비열하기 짝이 없는 말에 히지카타는 일순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시선을 피했다. 닿아 있던 온기가 멀어진 손은 대단히 쓸쓸하고, 잠시 보인 히지카타의 얼굴이 너무 낯설고 비참해서 긴토키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히지카타는 곧 몸을 일으키고, 등을 돌리고,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비겁한 자식, 이라고 말한 뒤 가게를 뒤로 했다. 거기에는 돌려줄 말이 없었다.
이걸로 된 거다. 옳은 일을 했다. 소중한 사람의 미래를 내 욕심으로 망치지 않았다. 히지카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알아줄 것이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쫓아가면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유혹을 애써 억누르며 긴토키는 혼자서 술잔을 비웠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는, 좋아하는 사람의 상처입은 얼굴을 애써 뇌리에서 지웠다.
바로 며칠 뒤 그것을 죽을만큼 후회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연락이 올 만한 사이는 아니다. 그럴 사이가 될 수 있었던 모처럼의 기회는 얼마 전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그러니까 긴토키는 다만 열화된 TV 화면 속 요란한 뉴스 자막으로 그 소식을 처음 접했다. 신센구미 둔소에 과격파 양이 조직 폭탄 테러, 사상자 다수 발생.
다치는 일 따위 비일비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비슷한 뉴스를 본 기억도 몇 번이고 있다. 그러나 그 날만큼은 뭔가 달랐다. 입을 꾹 다물고 부상자를 옮기는 검은 대복들의 얼굴에서 무언가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평소였다면 가장 먼저 카메라가 달라붙었을--아무튼 히지카타는 그림이 된다--부장 대신 평소 이상으로 뚱한 얼굴의 오키타가 전두지휘를 하고 있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들이 채 각막에 비치기도 전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창자가 뒤틀리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나쁜 예감에 긴토키는 다급히 목검을 쥐고 현관을 나섰다.
"죄송합니다. 지금 둔소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여서요."
"나 정도면 관계자라고 못 할것도 없지 않아? 고릴라의 관계자의 관계자의 관계자 정도의 느낌으로다가."
"응. 그런 걸 세간에서는 생판 남이라고 하죠."
문 너머로는 아직도 매캐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대사, 팔이 너덜너덜해진 대사, 구급차로 이송되는 대사. 다채로이 뒤숭숭한 분위기의 신센구미 둔소 앞에서 긴토키는 당연하게도 입장을 거부당했다. 어떻게든 아는 얼굴을 찾아 필사적으로 말을 붙였지만 겉으로는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태도의 야마자키가 묘하게 벽을 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퀭한 얼굴에 눈빛은 차갑고 말투는 날이 서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 프라이드 높은 히지카타가 일련의 일들을 입에 담았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이 의외로 유능한 감찰이 말 못할 상사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고릴라나, 소이치로 군이나... 그 V자 앞머리나, 아무튼 잠깐 만나서 얘기하는 정도면 되니까."
"그러니까 다들 그럴 상황이 아니라니까요."
"잠깐 얼굴만 보면 된다니까? 그 정도도 안 될만큼 바빠?"
"네. 그 정도도 안 될만큼 바빠요."
"이쪽은 꼬박꼬박 소비세 내고 있어! 경찰이 시민의 말도 안 들어줘도 된다고 생각해?!"
"소비세가 아닌 세금은 안 내는 건가요?! 그리고 경찰인 제가 듣고 있잖아요, 시민의 말."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한가로이 이어지는 선문답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은 긴토키 쪽이었다. 품고 있는 위화감이 자라면 자랄수록 평소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끔찍하게 어려워졌다. 가벼운 대답과는 달리 야마자키의 표정은 줄곧 냉랭하기 짝이 없고, 두 팔을 벌려 문을 막고 선 동작은 절대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결연하다. 억지로 제압하고 들어간다거나, 몰래 담을 넘는다거나, 생각나는 방법은 여럿 있지만 애초에 히지카타가 지금 둔소 안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무사한지만, 알려줘."
애써 가장하고 있던 평정도, 일부러 꾸민 가벼운 말투도 전부 내려놓고 막연히 물으면 야마자키는 과연 주어 따위는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고,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거야말로 제일 알려드릴 수 없는 정보인데요. 특히 형씨한테는요."
마지막 말에는 가시가 있었고, 그대로 돌아서는 등을 붙잡을 수 없게 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상을 입은 대사들이, 오열하며 그들을 부축하는 가족들이, 심각한 얼굴을 한 의료진들이 쉴새없이 곁을 스쳐지나갔다. 화약과 재와 피 냄새가 가득한 재난의 공기 속에서 긴토키는 홀로 애통해할 자격도 없는 외부인인 채였다.
6.
히지카타의 사망 소식은 사흘 뒤 공식화되었다.
장례식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정도는 배웅하라며 화를 낼 줄 알았던 아이들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참에 사무소를 닫고 푹 쉬라며 드물게 신경을 써 주었다. 밀린 월세를 받으러 올라왔을 오토세는 긴토키의 얼굴을 보더니 가볍게 어깨를 떨어트리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가게에서 남은 반찬 따위를 잔뜩 가져다 주었다. 무슨 일이야, 드디어 노망이라도 났어? 가볍게 건넨 농담에도 그녀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무척 이상했다.
오토세가 가져다 준 것 중에는 달콤한 콩고물을 묻힌 떡도 있었다. 당분 섭취는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통째로 입에 넣고 씹었다. 위화감이 들었다. 떡이란 거 원래 이런 느낌이었던가. 달콤함도, 고소함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저 할멈 진짜로 노망이라도 난 거야? 콩고물이 아니라 모래라도 묻힌 것 같잖아. 아래층에 돌진해서 불평해줄까 생각한 순간 위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쏟아져 나오는 것은 희멀건 위액 뿐으로, 그러고 보면 한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문득 실감했다.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향해 입을 헹구고 문득 거울을 보았을때 긴토키는 아이들이, 오토세가 왜 그런 태도였는지 단박에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정 많고 상냥한 사람들이다. 산 송장 같은 얼굴을 한 놈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신기했다. 숨이 쉬어지고, 밥이 먹어지고, 몸이 움직여진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음식의 맛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고, 덕분에 일이 준 만큼 식비도 줄어들었다. 이거 누님이랑 내가 같이 만들었다 해. 긴 쨩이 먹어줬으면 해서 만들었네. 울 것 같은 얼굴로 카구라가 내민 도시락은 어설픈 모양새의 후리카케 주먹밥과 다크 매터가 반씩 채워져 있어서, 사라진 미각의 도움을 받아 모처럼 깨끗하게 비웠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밤에는 빠짐없이 악몽을 꿨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비겁한 자식, 을 반복하는 히지카타가 나오는 꿈도 있었다. 폭발로 피투성이가 된 히지카타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꿈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꿈은 일어난 적도 없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너무 취한 거 아냐, 대신 나도 너를 좋아해, 라고 말하고, 히지카타는 빨갛게 된 얼굴을 더 빨갛게 붉히고, 일방적으로 얽혀 있던 손을 제대로 고쳐 잡는 꿈.
돌이킬 수 있다면. 목숨을 깎아서라도, 생명을 바쳐서라도 돌이킬 수 있는 것이라면.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아래가 아팠다. 뼈저린 후회에 폐가 짓눌려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에 못 이겨 눈을 감으면 바로 히지카타의 얼굴이 떠오르고 만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데도 신기할 정도로 눈물은 나지 않았다.
차라리 따라갈까.
자신답지 않은 바보같은 충동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스트레스로 사고가 극단에 치달아 있는 것이라고도 퍽 냉정히 진단할 수 있었다.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잔뜩 있다. 주변의 모두를 슬프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목숨을 함부로 진창에 내버리는 짓 따위 히지카타 자신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뒈지려면 소중한 걸 지키다가 뒈지라고 말한 건 어디의 누구였냐, 멱살을 잡으며 윽박질러 올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녀석을 실망시키는 일을 다시 할 까 보냐. 신파치와 카구라를, 오토세를, 오타에와 가부키쵸의 모두를 차례로 떠올리며 멍청한 생각을 털어내려던 찰나였다. 많은 얼굴들 사이로 고글을 쓴 괴짜 영감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면 긴토키는 그대로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겐가이 영감...!"
목검을 그러쥐고 현관을 나서며 그러고 보면 바로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어딘가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나쁜 예감이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돌파구를, 새끼 손톱만큼의 빛을, 구덩이에 드리워진 단 하나의 동아줄을 발견한 듯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가슴이 들썩거렸다.
7.
"결론부터 말하면 무리일세. 지금부터 개발을 시작한다고 해도 대체 몇 년이 걸릴지, 애초에 타임 머신이라는 게 가능하기는 할 지도 알 수 없어. 세상이 끝장나는 정도의 재앙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야."
"몇 년이 걸려도 상관 없어. 뭐든지 할게. 돈이라면 얼마 걸려서라도 갚을테니까..."
무리한 부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바꾸고 싶은 과거는 이것 말고도 몇 개나 있다. 친구를, 동료를, 스승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심장이 욱신거리는 실패를 전부 없던 것으로 하는 등의 편리한 개작이 가능하다면 이 세계는 진작에 재난도 재앙도 존재하지 않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 되었겠지. 그랬다면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만나지조차 못 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
"바꾸는 게 안 된다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아. 말을 거는 정도라도 좋으니까..."
그 날은 미안했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나도 네가 좋다고, 그런 뻔한 말이라도 좋아.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못해도, 내 마음만 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짓이어도,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남자가 마지막에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았을까. 간절히 고개를 조아리는 긴토키를 심란한 듯 보던 겐가이는 어쩔 수 없지, 하고 한숨을 쉬며 열쇠로 잠겨있던 철제 서랍을 열더니 손바닥만한 크기의 새하얀 기계를 꺼냈다.
"이건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발명하게 된 차원 타공기라는 건데..."
차원 타공기는 우주에 작은 구멍을 뚫어 "통로"를 만들고, 그 통로에 다시 구멍을 뚫어 평행 우주와 연결할 수 있다는, 듣기만 해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계였다.
평행 우주는 우리 우주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같은 얼굴, 같은 이름의 같은 사람이 살고 있더라도 좋아하는 색깔이 다르거나, 그 탓에 월요일에 먹은 점심이 다르거나, 그로 인해 이미 죽었을 사람이 아직 살아있거나 하는 사소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거울 너머의 상 같은 것이라고 겐가이는 설명했지만 솔직히 긴토키로서는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이 세계의 히지카타 군과는 역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무엇을 대가로 지불해도 절대로 지킬 수도 사과할 수도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우주와 이어져 있지 않은 별개의 히지카타 군이라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얼굴을 볼 수는 있다는 것.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해도, 평생 이대로 후회하며 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져 마땅한 형벌이라고 해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 남자를 볼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삶이 견딜만 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통로에 도착해 "타공" 버튼을 누른 순간 눈앞에 작은 틈이 생겼다. 펜촉으로 흰 종이를 가볍게 스친 것 같은 크기의 점 하나. 저 쪽에서는 아직 보이지도 않을 사소한 균열이지만 이 쪽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니만큼 작은 차이도 눈에 띄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전해졌다.
"...매 번 얻어먹으면서 양심에 찔리지도 않냐? 조금은 사회에 공헌해라, 니트."
"공헌하고 있어! 오늘도 실컷 일 했으니까 니트 같은 게 아니야! 돈도 벌었는데 파칭코에서 다 썼을 뿐이야!"
"변명이 되고 있지 않아, 이 멍청아!"
오랜만에 듣는 나직한 음성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줄곧 타박하는 말만 하고 있지만 히지카타의 어조는 몹시 다정해서, 상대의 목소리 역시 어딘지 익숙하다고 느끼면서도 얼른 후보가 추려지지 않았다. 저렇게 친근한 태도라면 상대는 역시 신센구미 대사일까. 고릴라나 소이치로 군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놈이야 아무래도 좋으니까 히지카타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
"누가 뭐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알아? 난 술 값만 아니면 너 같은 거 필요 없걸랑?"
직접 구멍을 찢어볼까, 동야호를 비집어 넣으면 어떻게든, 같은 말도 안 되는 걸 생각하고 있던 찰나 들려 온 가시돋힌 말에 긴토키가 멈칫했다. 뭐야 저 자식? 이 세계의 히지카타는 저런 싫은 놈한테도 다정한 목소리를 하는 거야?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찰나 드디어 눈앞의 틈이 조금 벌어졌다. 바늘구멍보다 조금 커진 구멍에 황급히 눈을 가져다 대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히지카타 군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활짝 웃음짓던 긴토키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그런 건 나도 알아."
울 것 같은, 웃을 것 같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저 온 몸이 프라이드로 되어 있는 남자가 상처입었다는 사실을 채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상처입었을 때 짓는 표정. 긴토키는 그런 얼굴을 한 히지카타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살면서 절대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을 두 번째로 마주하고, 그 앞에서 할 말도 찾지 못하고 선 구름 무늬 유카타의 남자까지 눈에 담으며 긴토키가 느낀 것은 생경할 정도로 강렬한 분노와 익숙하고 지독한 자기혐오였다.
"필요 없으면 나한테 줘."
충동적으로 튀어나간 목소리에 건너편의 자신들만큼이나 긴토키도 놀랐다. 그러나 한순간 표정을 바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드는 히지카타를 눈에 새기며 다시금 납득했다. 저기에 있는 것은 분명히 히지카타다. 내가 아는 것과 똑같은 고고하고 긍지 높은 히지카타 군이다.
"...히지카타."
세로로 길게 벌어진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면 모르는 우주의 쌀쌀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붙잡은 손목은 그만큼 따뜻하고, 이 남자가 살아있다는 황홀감에 긴토키는 저도 모르게 보고 싶었어, 하고 내뱉고 말았다. 해결사, 작은 입술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자신이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리는 것이 시야에 들자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는 고양감과 우월감이 전신을 감쌌다. 바보 자식,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거라고 우쭐댔겠지.
팔을 당기는 순간 저 쪽에서도 히지카타를 붙잡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달간의 폐인 생활로 체력이 잔뜩 떨어진 자신이 언제나의 태평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힘으로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당기는 것 자체는 이쪽이 빨랐고, 히지카타 군은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간절함이라면 이쪽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무엇을 바쳐서라도 다시 잡고 싶었던 것을 이제와서 놓칠 수 있을 리 없다.
한동안 팽팽했던 장력은 뎅그랑 소리와 함께 끝내 이 쪽으로 무너졌다. 끌려들어온 히지카타 군이 대기실 안으로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긴토키는 타공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오무라드는 차원의 틈새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스스로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도 아직 깨닫지 못한 멍청이의 얼굴이었다.
8.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요검, 그야말로 검신일체네. 너한테 딱 맞는 검 아니야? 비방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건넸을 때의 히지카타를 떠올렸다. 쉽게 말하는군, 타박하듯 대답한 뒤 망설임 없이 멀어지는 꼿꼿한 등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작정 기뻤다. 어째서 기쁜지에 대해서는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일생의 역작, 이 차원 왕란 추적기를 베이스를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라도 이 기간에 만들어내는 건 힘들었을 거야. 평행 우주를 통틀어 가장 신선한 왕란을 찾아내 가져올 수 있는 혁신적인 발명품인데, 이번에는 왕란 대신 귀신 부장님을 타겟으로 설정했지."
딴죽 걸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아니 오히려 딴죽 걸 곳 뿐이지만--그런 걸 신경 쓸 여력 따위 없다. 겐가이가 내민 손바닥만한 크기의 새카만 기계를 낚아채듯 받아들면 과연 "왕란" 버튼에 흰 펜으로 X자를 치고 "귀신 부장"이라고 적어두었다. 잠깐만, 이런 머리 나쁜 사양으로 정말 괜찮아? 내 신변 괜찮은 거야? 긴토키가 아연해하고 있으면 겐가이는 긴노지, 하고 자뭇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운을 뗐다.
"워낙 시간이 없었으니까 안정성은 보증할 수 없어. 며칠만 더 확인할 시간을 준다면--"
"못 기다려."
불쑥 튀어나오고 만 진심에 겐가이는 순간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여기서까지 여유를 가장하고 썩을 인연이니 의뢰비 따위의 핑계를 만들어 낼 인내심 따위 긴토키이게 이미 남아있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왕란 추적용 기계를 억지로 사람을 옮기도록 개조한 물건이야. 자네 몸이 멀쩡히 전송될 지도 알 수 없고, 귀신 부장을 만나도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상관 없어. 평생 못 보게 되는 것보다는 나아."
"평생? 데려간 건 다른 우주의 자네라면서? 귀신 부장에게 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네만..."
"데려간 게 나니까 문제인 거야. 나는 독점욕이 강하니까."
혹시 이대로 못 돌아오면 우리 애들이랑 밀린 월세 좀 부탁할게. 허리춤의 목검 옆에 무라마샤를 끼워넣으며 긴토키가 말하자 겐가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틈을 타서 늙은이한테 뭘 떠넘기려고. 월세도 외상값도 자네가 확실히 갚아. 둘이 갚는다면 혼자보다는 변제가 빠르겠지."
그렇게 말한 겐가이는 미련없이 등을 돌려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 저 영감님은 내가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긴토키는 생각했다. 그 믿음이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것인지, 긴토키의 악운의 강함에 기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동의하는 바다. 겐가이와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겨 정처없이 돌아보는 가부키쵸는 어느새 어젯밤 히지카타가 사라졌을 때와 비슷한 정도로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 시간에도 호객꾼과 취객들로 가득한 골목 사이사이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긴 상, 좋은 술이 들어왔으니까 한잔 하고 가! 해결사 형씨, 오늘이야말로 외상 정리해줘야겠어! 어머 파코, 외상값이 부족하니? 마침 오늘 일손이 부족한데 시간 좀 어때? 가볍거나 집요하거나 무시무시한 권유들을 뿌리치고 나아가 가로등도 없는 거리 끝에 도달하면 긴토키는 어둠에 몸을 숨기듯 녹아들고 맥이 풀린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저 품위없고 천박하고 시끄러운 거리야말로 자신이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이다.
히지카타가 들으면 분명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러니까 절대로 들키지 않도록 매일 노력하고 있지만, 긴토키가 지키고 싶은 거리에는 히지카타 토시로의 자리도 있다. 마주치면 싸우고, 일부러 험한 말을 하고,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말은 절대로 전할 수 없고, 그러나 그 한심하고 사소한 순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용기를 낼 수 있다. 남에게 지켜질 정도라면 스스로 배를 가를 남자가 언제까지나 저 거리의 고고한 수호자로 있을 수 있도록.
사랑해 마지않는 거리 위로 반한 남자의 그림자를 겹쳐보며 사카타 긴토키는 "귀신 부장" 버튼을 눌렀다.
9.
이야기가 끝난 통로에는 한동안 적막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히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낸 남자와 그 정보값을 아직 처리하지 못한 남자의 니즈가 일치한 셈이다. 어느 쪽도 쉽게 깨지 못하던 침묵을 마침내 끝낸 것은 그래서, 하고 운을 뗀 히지카타였다.
"나를 이런 곳에 데려와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거야?"
"...별로 데려오려던 건 아닌데, 그 자식이 너한테 열 받는 말을 하니까."
"그러니까 그 자식이 너잖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리는 히지카타를 멍하니 보며 긴토키도 따라 웃었다. 웃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기라도 하다는 듯 입꼬리가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거기에 맞는 표정을 찾지 못해 일순 굳어버린 히지카타에게 긴토키는 무너지듯 고백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 그것 뿐이다. 맹세컨데 긴토키에게는 히지카타를 데려올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제게 그럴 자격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다만 한번 더 얼굴을 보고, 그가 아는 "해결사"인 척 말을 걸고, 어쩌면 여기서도 일어날지 모를 폭탄 테러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고, 그런 정도면 충분했다. 그것이 한없이 기만에 가까운 가짜 위로라고 해도.
"너를 보면, 앞으로는 좀 더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네가 보고 싶은 건 내가 아니잖아."
익숙하게 쓴웃음을 짓는 얼굴을 보면 긴토키는 아직 묻지도 못한 질문의 대답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보고 싶다, 가 가지고 싶다, 로 변한 것은 히지카타가 히지카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지카타가 히지카타인 이상 긴토키는 절대로 그를 가질 수 없다. 어느 세계에서도 히지카타 토시로는 사카타 긴토키 따위를 위해 대장을, 이상을, 신념을 배반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1순위로는 할 수 없는, 그런 남자니까 반했다. 지금 와서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쪽 신센구미는 네가 없어서 큰일이야. 업무 마비 상태라더라."
그럼에도 매달리고 마는 것은 태반이 아집과 미련,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다는 초조함의 발로고, 히지카타는 그런 것쯤 전부 궤뚫어보았다는 듯 무척 어른스러운 얼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곤도 씨만 무사하면 신센구미는 괜찮아. 것보다 내가 거기로 가면 이번엔 이쪽이 업무 마비가 될 뿐이잖아."
"그 고릴라가 장난 아니게 슬퍼하고 있어. 소이치로 군도, 지미 군도, 네 보좌인 그 체리도."
"네놈은 적당히 사람 이름을 좀 외워라. 그 녀석들은 바보인 만큼 회복도 빠르니까 괜찮아. 내가 없어도 할 일은 할 거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해?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듯 그대로 자리에 무너진 긴토키가 히지카타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이길 수 없는 벽 같았던 남자가, 자신이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남자가 꼭 길 잃은 아이처럼 연약한 표정을 하고 있다. 히지카타는 잠시 숨을 멈췄다. 머뭇거리며 뻗은 손 끝에 그 푹신푹신한 머리카락이 닿자 긴토키는 들어본 적 없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없으니까 파르페에서도 단 맛이 안 나."
"그거 잘 됐네. 이 기회에 혈당치를 관리해라."
"일할 의욕도 안 생겨서 매일 누워서 점프만 보고 있어."
"그건 원래 그렇잖아?! 뭐든지 남 탓을 하지 마."
"...너한테 말하고 싶었던 거 하나도 말 못했어."
온통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전하는 생경한 진심이 무척 여리고 애틋해서 히지카타는 망연해졌다. '내'가 없다는 것 뿐으로 '너'는 이렇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 건가. 사고가 그런 생각에 도달했을 때 가슴을 채우는 것은 실망감도 죄책감도 아닌 약간의 황홀감으로, 그 참람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에서 눈을 돌리려 히지카타는 한동안 보풀 같은 머리카락을 헤집고만 있었다.
"나는 네가 빌어먹을 겁쟁이에 멍청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어."
담담하게 운을 떼면 눈앞의 보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의욕없는 적색 눈동자와 마주하면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정확히 절반씩 차올라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의몽스럽고 구름같은 남자가 여기까지 속내를 뱉어준 것이다. 자신도 조금은 보답하지 않으면 사무라이라 칭할 자격도 없다.
"그러니까, 네가 사과 같은 거 안 해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쪽의 나도."
답지 않은 다정한 말에 긴토키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했다가 이내 응, 하고 힘없이 웃었다. 아, 더 이상은 견딜 재간이 없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히지카타가 조금 망설이다 천천히 팔을 벌렸다. 믿을 수 없는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 새빨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는 시선이 수치스러워 살짝 멈칫하면 긴토키는 다급하게 히지카타를 잡아당겨 와락 품에 넣었다.
"따뜻하다..."
"네가 차가운 거야."
몸 관리도 제대로 못 하고 사무라이가 한심하기는. 밉살맞게 말한 히지카타가 뻗었던 팔을 천천히 긴토키의 등에 감았다. 옷 사이로 전해지는 열감이 황홀하다는 듯 긴토키가 히지카타의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천파가 간지러워 웃으며 상체를 뒤로 물리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체중을 싣고 밀어오는 탓에 히지카타는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덩치의 남자를 온 몸으로 지탱하는 꼴이 되었다.
"무겁잖아 이 멍청아!"
"응. 그래도 조금만 이대로 있게 해 줘."
"...내일 절대로 근육통이 생길 거야, 젠장."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히 허리를 다시 곧추세워 체중을 지탱해준다. 귀신 부장이란 호칭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넘어오고 만다, 이 애는. 그런 부분이 귀엽다고 말하면 누가 쉽냐며 칼을 뽑겠지. 응, 역시 귀여워.
"...히지카타 군, 가기 전에 엉덩이 한 번만 만져도 돼?"
"할복해라, 망할 천파."
"하하, 그거 오랜만에 들었어."
그러면 여기는 괜찮아? 안고 있던 팔을 한쪽 풀어 엄지 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훑으면 히지카타는 삽시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눈동자를 방황시키다가 닳는 것도 아니니까, 하고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여워.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진심에 죽고 싶냐고 눈을 부라리면서도 가까워지는 얼굴을 피하지는 않는 점도 무척 귀엽다.
"아니, 그거 닳으니까!"
앞으로 조금이면 입술이 닿는다고 생각하면 형형하게 번뜩이는 검 끝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빨리도 왔네. 긴토키가 혀를 차면 히지카타는 어안이 벙벙한 듯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른 무라마샤와 그것이 날아들어온 세로로 긴 차원의 틈새를 번갈아 살폈다.
"간단히 가짜한테 넘어가는 게 아니야, 이 바보 부장이!"
아직 충분히 커지지 않은 틈새에 억지로 두 팔을 밀어넣은 누군가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틈은 가장자리가 사방으로 찢어지듯 갈라지고, 그 사이로 익숙한 은발을 들이밀어 비집고 들어온 것은--
"해결사."
자신을 향하는 것이 확실한 호칭에 사카타 긴토키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안도감에 휩싸여 응, 하고 대답했다.
10.
"히지카타, 일단 그 가짜한테서 떨어져. 천파균이 옮는다."
"누가 가짜야? 긴 상의 천파는 세련된 파마니까. 네 건 안쓰러운 천파지만!"
"아니, 네가 더 안쓰러워! 프리저가 무서워서 눈물을 흘리던 베지터 정도로 안쓰러워!"
"어이, 베지터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니야! 네가 2배 더 안쓰럽걸랑?!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이틀을 보내고도 셀한테 한방에 뻗은 베지터 정도로 안쓰럽걸랑?!"
뭐랄까, 이 자식들 싸우는 레벨이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데. 것보다 둘 다 베지터를 마음껏 얕보고 있잖아. 어쩐지 열 받는다고 생각한 히지카타가 몸을 뒤로 빼면 아까부터 히지카타를 위에서 덮고 있던 긴토키가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반동으로 끌려올라간 히지카타의 뺨이 긴토키의 어깨에 밀착되면 보고 있던 긴토키가 빠직 하고 이마에 혈관을 띄웠다.
"이거 놔 이 망할 천파, 아프잖아!"
"야, 망할 천파는 나야! 아니, 누굴 보고 망할 천파래!"
"흥! 안 됐지만 히지카타 군한테 망할 천파라고 불리는 건 긴 상이니까!"
"웃기지 마! 망할 천파는 나야! 너 같은 놈한테는 양보 못해!
"시끄러워 이 망할 천파들아! 뭘 그딴 걸 두고 싸우고 있어?!"
어이가 없다못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바보 싸움에 말려들어 팔 힘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서운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워 손을 잡아 일으켜주면 이번엔 잔뜩 안도하고 있던 긴토키 쪽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세상에서 제일 보람없는 밸런스 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비어 있는 오른손을 내밀면 긴토키 쪽도 냉큼 왼손을 연결해 온다. 그러니까 뭐냐고 이 머리 나쁜 기차놀이는.
"해결사."
오른손을 붙잡은 긴토키는 자신 외의 누군가가 그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왼손을 붙잡은 긴토키는 다음에 올 말이 예상된다는 듯 조금 쓸쓸하게 웃는다. 생각해보면 이건 꽤 귀중한 경험이라고 상황에 맞지 않는 느긋한 것을 생각하며 히지카타가 피식 웃었다.
"나는 네놈이랑은 갈 수 없어."
"…응."
“내가 지켜야 할 건 그쪽 세계가 아니니까.”
“…응.”
"그래도, 만나러 와 준건 기뻤다."
“….”
“가, 갖고 싶다고 해준 것도…나쁜 기분은 아니었어.”
가감없이 마음을 전하는 일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은 피차일반이다. 히지카타의 뺨이 붉어질수록 오른손을 잡는 압력에 점점 힘이 가해졌다. 아프잖아, 항의할 셈으로 쳐다본 긴토키의 얼굴이 너무 필사적이라 히지카타는 화내는 것도 잊고 말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얘는 내 거야. 너한테는 못 줘.”
귀중한 사냥감을 빼앗긴 사냥꾼처럼 으르렁거리며 긴토키가 말하면 긴토키는 네 거라니, 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냐?”
“그…그건 그거야. 그냥 흐름이랄까, 그 상황의 조명이나 온도나 습도가….”
틀렸어. 이 자식 변명이 너무 지리멸렬해. 도저히 사회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언변에 히지카타가 눈을 가늘게 뜨면 긴토키는 에잇, 하고 숨을 몰아쉰 후 두 손으로 히지카타의 팔을 붙잡고 제 쪽으로 힘껏 당겼다.
“으악…!”
긴토키를 붙잡고 있던 왼손이 떨어져 나가고, 반동으로 비틀거리는 히지카타를 긴토키가 받아냈다. 너는 네가 얼마나 무식하게 센 줄 알고 전력을 다하는 거야? 어깨가 빠질 뻔 했잖아! 이번에야말로 거세게 항의하려고 입을 연 찰나 히지카타의 아래로 기울어진 시야에 긴토키의 오른손이 보였다. 치덕치덕 감은 붕대 사이로 검붉은 피가 잔뜩 베어나와 있었다.
“어이, 너 손이—”
“아, 이거? 이건 그거야. 점프를 읽다가 종이에 손이 베였어.”
“그런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점프는 면도날에라도 인쇄하게 된 건가.”
“뭐 그런 거야. 매거진도 정도의 혁신이 없으면 이 험난한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분발하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는 남자가 어젯밤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을 붙잡았는지, 저주로 뗄래야 뗄 수 없게 된 무라마샤를 어째서 이 남자가 가지고 있었는지, 애초에 어떤 각오로 여기까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인지, 혼란으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머릿속에서 뒤늦게 퍼즐이 맞춰지면 히지카타는 긴토키와 긴토키가 정말로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짜증나게 강하고 바보처럼 서투르고 죽을만큼 솔직하지 못하고—-
“해결사,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왜 그러는데?”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 네놈이 거기서 움직이면 나는 저 녀석과 함께 갈 거다.”
“….”
노골적으로 불만 가득한 얼굴의 긴토키를 등지고 히지카타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긴토키 에게로 발길을 옮겼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아마도, 아니 분명히 국중법도 위반이다. 법도를 정한 것이 히지카타 자신이니만큼 우선 틀림없다. 그렇지만 주인을 기다리는 대형견처럼 쓸쓸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는 저 세계의 부장은 아니니까, 같은 비겁한 자기합리화가 먼저 떠오르고 만다.
눈앞에 보이는 옷깃을 잡아끌면 긴토키가 휘청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지. 이쪽으로 기울어진 오른쪽 귀에 한 손을 받치고 귓속말을 하는 사이 긴토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서히 눈을 커다랗게 떴고, 긴토키는 그 자리에 못박힌 채 맹렬히 분개하기 시작했다.
“—뭐, 그런 얘기다. 그 쪽에서도 같다고는 보장할 수 없지만 확인할 가치는 있겠지.”
“어이, 너네 뭐 하는 거야! 당장 안 떨어져?”
“…그거 나한테 말해줘도 괜찮았던 거야?”
“나는 히지카타 군을 외간남자랑 귓속말이나 하는 음란한 아이로 키운 적 없습니다!”
“뭐 네놈이라면 괜찮겠지. 한때의 동료들에게 흘리거나 한다면 뒤에서 날뛰는 저 바보를 베고 나도 할복하면 끝나는 얘기다.”
“야, 그거 내 얘기야?! 뭐야 그 바이올런스한 결말?! 왜 내가 베어져야 하는데?!”
“…좋아해, 히지카타 군.”
“그러니까 말할 사람이 틀렸다고 했잖아.”
“또 보자.”
히지카타로서는 전부 헤아릴 수 없는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는 여전히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지만, 거기에 뭐든 포기한 탈력감 대신 성급한 희망 같은 것이 섞여있다는 사실이 히지카타는 못내 달가웠다. 저 녀석은 언제까지나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망할 천파로 있어주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다. 대답 대신 살짝 입꼬리를 올린 히지카타가 등을 돌림과 동시에 긴토키는 새하얀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11.
아, 이건 아마 죽는다.
그러나 혹시 살아남는다면, 이용할 수 있다.
폭발에 휘말려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때 히지카타는 생각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순가 살아온 궤적의 주마등이나 대신 작전 전략을 짜내고 마는 것이 무척 자신답다고도. 그러나 그 직후 떠오른 것이 목숨을 맡긴 대장도, 등을 맞대고 싸워 온 동료들도, 그리운 이들의 얼굴도 아닌— 그 겁쟁이 자식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충격이었다. 도저히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지만.
수 일만에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을때 히지카타는 감격에 울먹이는 곤도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장례식을 제안했다. 폭탄이 터진 위치나 타이밍을 생각하면 적은 고위 간부, 그 중에서도 히지카타를 노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또 비슷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게 두고 시간을 벌어 역습을 준비해야 한다고 히지카타는 떨떠름해하는 곤도를 침착하게 설득했다.
폭탄은 둔소의 중추에서 터졌다. 분한 일이지만 시마루의 감시망마저 빠져나간 첩자가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다른 대사들의 눈을 피해 폭탄을 반입하고, 설치하고, 터트리는 일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단독범이 아닐 확률도 상당하다. 정보 누출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생존 사실은 극히 일부의 인원들에게만 전해졌다. 야마자키가 차트를 조작해 사망 사실을 꾸미고 소고의 주도 하에—모처럼 대단히 의욕적으로 일했다고 들었다—떠들썩한 공개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히지카타는 이런 상황을 상정해 마련된 안전가옥에 머물고 있었다.
별다른 가구도, 장식도 없이 썰렁한 집은 인적이 드물고 눈에 띄지 않으며 알려진 양이 조직들의 세력권에서 떨어져 있다는 조건을 모두 만족했다. 아무렴 히지카타 본인이 몇 단계를 거쳐 마련한 에도 외곽의 집이다. 떨어진 곳의 접선 장소에 주기적으로 편지를 남기는 것으로 작전 근황을 보고하고 있지만 야마자키도, 소고도, 곤도조차도 이 집의 정확한 주소는 모른다. 안전가옥의 위치를 발설해 조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자는 할복, 이라고 국중법도에 적어넣은 것 역시 히지카타 자신이니 당연한 일이다. 작전에 문제는 없다. 아니, 문제가 딱 하나 있기는 하지.
지루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더럽게.
다시 말하지만 이 집에는 별다른 가구나 장식이 없다. TV는 물론 책도 잡지도 없다. 대화할 사람도 없으면 서류 작업조차도 할 수 없다. 생필품을 사러 갈때는 변장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바깥에 오래 머물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근처에 편의점도 없는 오지라 매거진조차 살 수 없고, 그나마 있는 동네 슈퍼에서 마요네즈를 대량으로 사거나 담배 자판기를 후드려패는 것도 금지라고 몇 번이고 잔소리를 하던 야마자키를 떠올리며 히지카타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젠장, 그 망할 테러리스트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잡히기만 하면 내 손으로 전부 조진다. 고문실에서 조우할 날이 기대되는걸. 어느 뼈의 어느 관절부터 꺾어주면 좋을까.
마루에 누워 마요와 마요보로 금단 증상에 시달리며 즐겁고 험악한 상상을 하고 있으면 때때로 하나도 그립지 않은 것들이 생각나고 만다. 너무 취한 거 아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던 말과 잔뜩 흔들리던 동공. 단팥과 커다란 개의 냄새. 보송보송한 은발 같은 것들.
히지카타는 해결사에게 반했다. 그리고 해결사도 자신을 좋아한다. 그 인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다만 히지카타가 믿었던 것보다 해결사의 감정은 훨씬 얕았다. 현상유지라는 알량한 틀 안에 관계를 가두고 싶어할 만큼,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저번의 보고서에 따르면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죄책감의 발로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것도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사카타 긴토키에게 히지카타 토시로는 고작 그런 정도의 존재다.
달칵—
현관 쪽에서 나는 소리에 히지카타가 다급히 돌아섰다. 언뜻 일본풍의 낡은 주택이지만 명색이 안전가옥이다. 철제 현관문과 방탄 유리창을 달았고, 현관문에는 열려면 다이아몬드 드릴이 필요하다는 최신식 자물쇠가 설치되어 있다. 대단히 운이 나쁜 도둑일까, 그러나 도저히 우연히 지나갈 수 있을만한 위치가 아니다.
끼이익—
현관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히지카타는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몸과 별개로 뇌는 패닉 상태에 가깝다. 저 문이 열리다니 있을 수 없다. 자물쇠를 떠나 애초에 주소를 아는 사람이 자신 뿐인 집이다. 하나 뿐인 보조 열쇠는 부장실 벽장 안 마요링 인형의 배 안에 넣어 두었다. 위치가 새고 말고 할 여지 자체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정보를 흘렸다면 모를까.
“히지카타 군.”
문이 열리자마가 검을 내리친 히지카타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가장 보고 싶고,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잔뜩 초췌해진 채 눈앞에 있었다. 오히려 그 쪽이 타당할지도 모른다는 사고의 연쇄를 막은 것은 뺨에 와 닿는 따뜻하고 축축한 감각으로, 멍하니 위를 올려보면 매섭게 내리꽂히는 칼을 그대로 쥐어 막은 남자의 왼손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이…. 피, 피가 나잖아.”
다른 할 말이 전부 압도되는 끔찍한 광경에 히지카타가 무라마샤를 떨어트렸다. 싸구려 자기질 타일과 부딪힌 칼 끝에서 챙, 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없는 집이지만 구급 상자는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안방 벽장 안쪽에. 거기까지 떠올리고 황급히 돌아서려는 히지카타를 긴토키가 왼팔로 붙잡아 당겼다. 크게 벌어진 손바닥 상처 따위 아랑곳않는다는 듯 그대로 자신을 품에 넣은 남자에게서는 익숙하고 다정한 냄새가 났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
“그야 열쇠로 열었지.”
“그러니까 그 열쇠가 어디서 났는데?”
“새벽에 네 방에 몰래 들어가서 그 기분 나쁜 인형 배를 뜯었어.”
“…한정판 20주년 마요링이다. 할복할 준비는 되어 있나?”
“화내는 거 거기?! 아니, 허락은 받았으니까!”
“누구 허락을 받았다는 거야 이 망할 천파가! 애초에 여기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알려줬어.”
드디어 폭발해 버둥거리는 히지카타와 잔뜩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맞추고 영문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긴토키는 본 적도 없이 환하게 웃었다. 다시는 자신을 상처주지 않을 것처럼 무해하고 상냥한 얼굴이 히지카타는 조금 두려워졌다. 살짝 몸을 뒤로 빼면 긴토키는 삽시간에 시무룩해져서, 차마 다시 붙잡지도 못하는 처량한 손에서 핏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젠장, 그러고 보니까 한벌 뿐인 실내복이 이 자식 때문에 온통 피로 물들었잖아. 뭐, 피를 보게 한 건 나지만.
“히지카타….”
내가 싫어졌어, 라던가, 얼굴도 보기 싫어, 라던가, 묻고 싶은 것이 전부 답을 듣기 두려운 것이라 긴토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판결을 기다리는 심판대 위의 죄인처럼 얌전하고 비장한 광경에 히지카타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 이 겁쟁이 자식에게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지붕 위의 그 승부 때부터 지금까지, 히지카타 토시로는 사카타 긴토키를 이길 수 있었던 적이 없다.
“해결사.”
12.
왕란 추…귀신 부장 추적기는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다. 다시 열린 세계의 틈새를 빠져나온 뒤 사지가 제대로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긴장이 탁 풀린 듯한 탈력감에 눈앞의 공원 벤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였는데? 구해준 나도 알 권리는 있다는 닦달에 딱히 네가 안 왔어도 아마 무사히 돌아왔을 거라고는 천하의 귀신 부장도 말할 수 없다. 스스로 이야기하기는 다소 부끄러운 대목까지 전달하고 나면 긴토키는 으으, 하고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히지카타 군, 너 내가 갈 때까지 진짜로 아무 일도 안 당했어?”
“무슨 일을 당한다는 거야? 애초에 그 놈은 너잖아.”
“그러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긴 상은 그런 천파놈보다 훨씬 멋쟁이 파마고 꽃미남이야!”
“그거 너 스스로 말하면서 비참해지지 않냐?”
"흥, 아무튼 기껏 우주까지 넘어와 놓고 겁쟁이 자식이었네. 나였으면 엉덩이 정도는 만지게 해달라고 했을 텐데."
자기객관화가 확실한 놈은 무섭다.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긴토키가 같은 말을 했다는 걸 알면 이 자식은 분명 또 주제넘게 언짢아 할 것이라고 히지카타는 짐작했다. 주제넘는다고 하면 아까 그 발언도 그렇지.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 네 거였냐?”
히지카타가 비꼬듯 물으면 긴토키는 내내 부루퉁하던 표정을 굳힌 뒤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조금의 침묵 뒤에 긴토키가 내놓은 말은 너무나도 이 남자와 동떨어진 것이라 히지카타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미안했다. 그런 말 해서.”
“…별로 사과하라고 한 말이 아니잖아.”
“네가 술 값 안 내도, 나는 너랑 마시는 게 좋아”
“어…?”
“필요 없다고 한 거,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냥 쑥스러웠으니까….”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겨 시무룩해진 어린애처럼 긴토키가 말했다. 사과가, 진심이, 거절이 두려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초조하게 손 끝을 움직이면서. 큭. 히지카타가 무심코 코로 웃었다.
“사, 사람이 모처럼 얘기하는데 비웃는 게 아냐, 요 녀석아! 고릴라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쳐줬냐?!”
벌개진 얼굴로 왁왁거리던 긴토키의 시야에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는 히지카타가 가득 담겼다. 한 번도 자신에게서 상처받은 적 없다는 듯 무구한 얼굴에 긴토키는 문득 울컥했다. 젠장,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진짜로 꼴사납잖아. 애초에 오늘 내내 꼴사나웠지만. 내친 김에 이 녀석과 있을 때는 대부분 꼴사나웠던 것도 같지만.
“해결사…?”
그렇게 비웃으려던 건 아닌데, 화 났냐? 조심스럽게 가늠하는 얼굴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아, 역시 안 된다. 이케다야의 복도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카타 긴토키는 히지카타 토시로에게 내내 꾸준히 패배해왔다. 짓무른 연애 경험이라면 나름대로 수라장을 거쳐왔다 자부하지만 이런 상대를 만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더 곤란한 것은 이 녀석에게 지는 것이 실은 그다지 싫지도 않다는 것이다.
“히지카타 군.”
13.
사과해야 할 일도, 고백해야 할 일도 아직 산처럼 있다. 메우지 못할 간극이, 채우지 못할 불안이 매 순간 태어나고 사라진다.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의 온도가, 색깔이, 좌우가 어떻든 내가 나고 네가 너인 이상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거울 너머의 우리가 그랬듯이.
“나는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한테 반했어.”
쑥스럽기 짝이 없는 고백을 황급히 숨기듯, 히지카타는 긴토키를 끌어안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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