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자캐커플 다이스 합작(1)
기회
쓸쓸한 계절이다. 끄무레한 구름으로 들어찬 하늘은 한 점 여명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마 먼 황야라면 조용히 삭아 마른 풀이 굴러다니는 몰골이겠지. 조이스는 저택 바깥세상을 알고 있으므로, 들판의 정경을 이렇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딜런 버킨에게 바깥이란 데이지의 말에 따라, 끝도 없이 위험하고 야생성 험한 곳으로 여겨졌다. 마치 피가 파랗지 않은 사람은 모두 마구간에서나 자고 개똥을 씹으며 일한다는 듯이. 데이지의 경멸 어린 시혜는 조이스에게 삶의 기회를 주었으나, 그 친자식인 딜런이 보이는 비슷한 태도를 보며 소년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딜런이 ‘왜 형의 피는 빨개’ 하고 물었을 때……
그때 조이스는 풀잎에 베인 손가락을 숨기기만 했다. 데이지가 조이스에게 바라는 동생에 대한 양육은 목욕과 끼니 챙기기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기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길 이틀 전에야 들은 참이었다. 학교 이름에 관해서는 입학 서류를 통해 주워섬겼다.
정원사가 거멓게 죽은 장미 넝쿨을 자른 지 일 주쯤 되었다. 떨떠름하고 푸른 냄새에 소년이 창문을 닫았다.
여행 가방 위에 오른 아이가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조이스의 시선은 말갛게 씻긴 무릎에 머물다가 천천히 올라갔다. 딜런은 한참 전부터 이쪽만 빤히 바라보았다. 기다림이 지루한 모양이었다.
조이스가 말했다.
“다 괜찮을 거야.”
“뭐가?”
대답이 곧장 돌아올 줄은 몰랐다. 조이스는 머뭇거리다가, 현관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데이지는 이른 새벽의 전송을 다녀오라는 한마디로 끝내고 자러 간 참이었다. 마치 한나절 소풍에 아이를 보내는 유모처럼.
크림색 자동차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이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기사가 차 뒤에 가방을 실어 주는 걸 기다렸다. 조이스의 짐은 가죽 가방에 홀쭉하게 담겼고, 딜런의 것은 캐리어에 단단히 잠겨 도착하자마자 풀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조이스는 차에 탄 뒤 시트에 몸을 묻자마자 눈을 감았다.
낯선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았다. 하지만 물기 어린 새벽과 희끄무레한 하늘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이스는 자동차를 좋아했다. 기억도 안 나는 시절 데이지가 그를 데려올 때, 모터음이 들리는 차가운 시트를 만지고, 데이지의 품을 만졌던 기분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남은 채로 조이스의 성장통 밑단을 구성했다.
딜런이 옷깃을 쥐는 느낌이 났다. 한 벌 뿐인 털코트로 동생의 무릎을 덮어준 조이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잠들지 못한 밤의 후희가 밀려들고 있었다.
조이스는 같은 학년 아이 중에서도 키가 불쑥 컸다.
그도 그럴 게, 세 살 차이나 나니까. 그는 맨 뒷줄에 서서 아직 마른 소년티를 내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딜런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찾을 때면 웃어 주었고.
교정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학생이 되고자 하는 두근거림은 억누른 채였다. 이제 정말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여태까지는 데이지였다면, 이제는 오로지 딜런을… 이 이야기는 조이스의 마음에 밍숭맹숭한 파문을 일으켰다. 어머니를 뒤로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동생에게 애정을 퍼부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멀미를 한 건지, 아니면 입학식 전 제공된 찬물과 마른 빵이 얹힌 건지. 숙사로 들어서는 소년의 얼굴이 창백했다.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 딜런이 손가락을 붙잡아 와도, 짐을 대신 들어줄 뿐 묵묵부답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고풍스럽게 단장된 교내의 기물이나, 침대 커버가 말갛고 깨끗한 숙사를 보았을 때도 무언가 밍밍하게 상해버린 음식을 입에 댄 듯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아직 대낮이었다. 조이스는 결국 딜런을 홀로 식당에 내려보내고, 아무도 쓰지 않는 욕실에 틀어박혔다. 수도꼭지 밑에서 머리에 물을 붓고 고개를 들자 묘하게 뿌연 빛의 거울이 보였다. ‘거울이’ ‘보였다’. 조이스는 자기 얼굴 대신 그 연약한 표면을 빤히 들여보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대신 피를 흘리고 싶었다.
그 순간, 우윳빛 진주에 떨어지는 핏방울. 소년은 옛 시절을 떠올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장소가 자꾸 불길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데이지의 진주 귀고리를 만지다가 손끝이 찢어져, 그 보얀 보석에 피를 흘렸던 사건이라거나……. 몸에 물이 묻으니 으슬으슬한 한기까지 들어, 그는 얄팍한 수건을 목에 걸치고 돌아섰다.
딜런이 있었다. 거울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조이스가 흠칫 놀라며 물러서자, 딜런이 손을 뻗어왔다. 조이스는 얼결에 그 작고 마른 손가락을 마주 얽었다. 같은 걸 먹고 비슷한 잠자리를 누렸으나, 어쩐지 조이스의 손가락은 마디가 두툼하고 흠집이 많았다.
딜런이 물었다.
“무서워?”
“……조금.”
“형도 무서운 게 있어?”
그렇다, 지금, 이 주제 같은 것, 이라고 말하기엔 조이스는 그래선 안 되는 처지였다―라고 그는 생각한다―덕분에 대답은 이렇게 나왔다.
“교정이 너무 쓸쓸했잖아. 점점 추워질 텐데.”
고작 그게 문제냐는 듯이 딜런이 웃었다. 가슴팍에 폭 안겨 오는 어린아이를 조이스의 손이 감싸 쥐었다. 미적지근한 손바닥에 땀이 맺혀 있는 게 느껴졌다. 두려웠다, 무척.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꾸해 줄 수는 없지만. 딜런이 말했다.
조이스의 품에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형, 방학 때 장미 보러 가자.”
“응.”
“크리스마스에는 장미가 보고 싶어…….”
크리스마스트리에 장미 코사주를 다는 건, 데이지의 유별난 취향이었다. 조이스는 전부 기억했다. 딜런이 태어난 뒤로 챙기기 시작한 축제와 명절들. 그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때문에, 목멘 소리를 꾹 참고 옅은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들이 한겨울에 장미 한 송이를 꽂게 된 사연은, 이곳으로부터 조금 더 가야 한다. 입학 후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딜런과 조이스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무언가 욕실 창에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푸드덕하며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 마치 길 잃은 철새 한 마리 같기도 했다.
어깨에 얹은 빳빳한 셔츠 위로 한두 방울씩,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딜런이 손을 뻗어 옷깃이 바스락거리게 문질러도, 조이스는 가만히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더는 소년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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