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나절

너의 S

녀석은 자신을 T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모바일 게임 《마피아 42》 기반

마피아×스파이, 도둑×영매, 건달×기자


인게임 세게관을 반영하였으나 스토리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C)떨리고설레다 2020

너의 S

T. 녀석은 자신을 T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뻔한 네이밍 센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직업이 직업인 그녀는 물론이고, 조금만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금세 무엇의 머리글자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뭐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으나, 제 소개를 기다리는 녀석의 눈이 마치 강아지의 것마냥 반짝거리길래. 어울리지 않게도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차마 모진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녀도 결국 저를 S라고 소개했다. 녀석의 이름이 정해진 방식을 차용해서였다.

"S?"

녀석은 그 글자에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그녀가 저를 따라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흔한 이름인가 봐요, 녀석이 말했다. 고등학생 때 알던 애도 같은 이름이었거든요. 그 바보 같은 학교에도 쓸 만한 놈은 있었던 모양이지?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으며, 그녀는 새어나오는 헛웃음을 애써 밀어넣었다. 대신,

"그 S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순간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녀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였다. 경외, 감탄, 찬사… 그리고 숭배. 동료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단어들로 점철된 것만 같은 얼굴.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그가 저를 향해 똑같은 미소를 짓는 모습을 그려 보다가 그녀는 머리를 살짝 흔들어 지워 버렸다. 녀석이 망설이다가 천천히 표현했다.

"걔는… 완벽한 애에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더니, 녀석의 S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부족한 어휘력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가늘고 숱 적은 생머리는 허리께까지 길렀는데, 보기 드물게 밝고 예쁜 주황색이며(여기서 녀석은 숨을 잠시 멈추면서, 그렇게 홍당무 색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털어놓았다.), 살짝 눈꼬리가 처진 큰 눈동자는 토끼마냥 온순한 열아홉 살짜리 소녀. 전체적으로 살이 없는 체형으로, 매사에 차분하고 나서는 편도 아니지만 할 말은 또박또박 할 줄 아는, 와이셔츠 소매 밑으로 얼핏 드러나는 손목이 얇고 나긋나긋한-

 거기까지 듣다가 그녀는 푸흐,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녀석은 답지 않게 수줍은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소리질렀다. 아니, 비웃은 게 아니라. 그녀는 낮게 변명하면서, 그럼 왜 그러시는데요, 하는 녀석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너 말고 내가 한심해서 그래, 하는 진심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숭배라고밖에 이름붙일 수 없을 녀석의 지극히 순수한 감정을, 어울리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대어 보면서 잠시나마 설레인 제가 그녀는 역겨웠다. 한순간의 열정에만 눈이 멀어 제가 바라는 것에만 목매는, 철도 덜 든 열몇 살짜리 사춘기 계집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녀석의 의아한 얼굴에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손톱으로 손바닥 안쪽을 찍어눌렀다. 큰 실례였다. 그에게도, 녀석에게도, 녀석의 S에게도.

 그녀가 그렇게 계속 대답을 미루자 녀석이 투덜거렸다.

"아니, 진짜 왜 그러시는데요… 사람 부끄럽게."

"진짜 너 비웃은 거 아니야."

 그녀는 머리끈을 잡아빼어 팔에 끼우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흔들자 고정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흘러내려 옆얼굴을 커텐처럼 가렸다. 고무줄이 손목을 조이는 느낌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녀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만 보스한테나 가자."

"그러죠, 뭐."

 당연하리라고 예상했던 몇 마디의 불평불만조차 없이, 녀석은 입술을 비죽이더니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왔다. T라는 이름답게 소리 하나 없는 발걸음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녀석이 정말 거기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세 번 정도 반복되자 녀석이 툴툴거렸다. 저 애 아니에요, 잘 따라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녀는 그냥 앞만 보고 걷기로 했다, 지금까지 늘상 그래 왔듯,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흔적을 향해서.

 당신을 위해 정보를 훔치겠어요.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 혹여나 놓칠새라 더욱 단단히 붙든 그녀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의아함일 뿐 당황이나 황당의 불편한 쪽이 아니라. 그녀는 용기를 갖고 다음 말을 짜낼 수 있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어요. 나를 위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신을 위해서. 그 대답이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고양이마냥 날카로운 눈을 접으며 가르랑대었다. 그래. 쓸모 없지는 않을 것 같네. 제 귀로 듣고서도 그녀는 믿기지가 않아, 제 허벅지를 몇 번이고 꼬집었다. 그가 말했다. 같이 나가자. 구원이었다.

 하지만 쓸모 없지 않다는 말이 삶에 꼭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었던 듯,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내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와 가장 오래 공간을 공유하는 이였고, 때문에 남들은 그녀를 그의 오른팔이라 불렀다. 하지만 항상 함께 있었기에 오히려 더 잘 알았다. 그녀에게 그는 언제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남자였다. 발 맞춰 걷기는커녕 한참을 앞서 간 탓에 뒷모습만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 처음에는 조금 서러웠지만, 지금은 그저 더 멀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었다.

 녀석이 여전히 조용한 탓에 그녀의 구두 소리만 혼자 또각또각 울렸다. 높은 건 불편하고, 너무 낮으면 무시당할까 봐 고심 끝에 고른 3cm짜리 굽이었다. 뻘쭘해진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제 발걸음에만 집중하며, 그녀는 종종 하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졌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한때는 답이 알고 싶어 로맨스 소설만 주구장창 읽었는데, 제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잘 와닿지 않는 데다 소설마다 표현 방법이 다 달라 금세 그만두었다. 어떤 책에서 사랑이란 함께 있으면 설레는, 달콤하고 두근거리는 감정이랬다. 다른 저자는 심장이라도 도려내어 바칠 만큼 충성스러운 것이랬다. 어디에서는 그의 밟고 지나간 자리까지 귀하게 여기는 숭배, 어디에서는 소유욕, 성애, 가족애….

 각자의 기준에서 사랑은 전부 다른 의미이므로, 타인의 기록에서 정답을 찾는 게 부질없단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저만의 방법으로 감정을 정의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였다. 그녀의 구원자, 충성을 맹세한 자, 세상이 정의하는 빌런, 누군가에게는 둘도 없을 개새끼지만 그녀에게는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T라고 불러 달라는 녀석의 소개에 깔깔 웃으면서, 그럼 나는 M이라고 해, 정도의 똑똑한 농담도 던질 줄 아는 남자, 그리고 제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단지 한 명의 파트너로만 보는 못되어먹은 인간.

 그게 그녀의 빌어먹을 사랑이었다.

-

"아…."

 그녀가 신음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 만큼 무거운 어둠에 짓눌린 채였다. 꿈이란 걸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떨쳐낼 수가 없는 무력감이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일 분도 견디지 못했을 감각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 버텨내고 있었다. 암흑에 휩쓸려 저마저 놓쳐 버리지 않도록 희미해지는 정신을 전부 끌어모아 호흡에만 집중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과거와 그날 이후로 종종 꾸는 수많은 악몽에서 늘 그랬듯 머지않아 찾아올 구원자를 믿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발소리가 들릴 테다. 뭐라뭐라 얘기하는 두어 사람의 말소리와, 친절하게도 사람 수를 세어 주는 몇 발의 총성. 이어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 복도의 형광등, 그러니까 그녀를 억누른 어둠을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던져 버릴 눈부신 빛을 들이겠…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그녀는 퍼뜩 깨어났다. 절정으로 치솟기도 전에 허무하게 나와 버린 결말. 뒷페이지가 뜯겨져 나간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은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당황스러움과 이유 모를 불안감이 어둠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끝나기 전까진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옆자리를 짚었지만, 식어 버린 지 오래인 마른 이불만 잡혔다. 어젯밤, 적어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가 머물렀던 곳이었다. 멍청하기도 하지. 반대편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그녀가 생각했다. 아침에 일찍 볼 일이 있으니까, 먼저 나가 보겠다고 했었잖아…. 하지만 약간의 따스함마저도 없는 건 조금 아쉬웠다. 빈 이불이 마치 저의 처지를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아서, 어쩐지 우울해졌다.

 그녀는 대충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발치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실내 가운을 주워 걸쳤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에 늦은 봄인 지금도 여전히 극세사 재질이었다. 앞섶을 여미고 허리끈을 묶자, 맨 가슴과 배에 닿는 천의 온기가 부족하게나마 공허한 부분을 채웠다. 그녀는 침대에서 굴러나와 맨바닥에 발을 대었다. 먼지 하나 굴러다니지 않는 대리석 바닥은 딱딱하고 차갑고 시려웠다. 도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는 슬리퍼에 발을 밀어넣었다. 그녀의 취향은 절대 아닌 연분홍의 양털이 발등을 간질이자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기분이라도 내 보고 싶어서 커플용으로 샀던 건데 역시나 신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운동을 하며 밤을 반쯤 새운 데다 악몽까지 꿨으니. 정신 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조금만 미루기로 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제법 너그러운 편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그의 침대에서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방은 넓기만 하지, 가구라고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쓸쓸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그처럼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곳에서 잠시라도 혼자 있었다가는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차라리 한 층 올라가야 하더라도 아늑한 제 방이 나았다. 그렇게 결정하고 방문을 열면서, 무심코 손을 올려 문지른 목덜미와 쇄골 부분이 살짝 따끔거렸다. 목걸이의 은빛 체인에 쓸렸다고 짐작하면서도, 정말 그게 맞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씻고 싶었다. 데일 듯 뜨거운 물로 몸을 데우고 숨막히는 열기를 폐에 가득 들이붓고 싶었다. 그러려면 복도의 욕실로 가야 했다. 그의 방에 있는 욕실에는 칫솔과 치약 정도의, 간단한 세안 도구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뒤늦게 그 선택을 후회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

"아직도야?"

 하필이면 코너를 돌자마자, 가장 만나기 싫은 동료를 마주친 건 또 뭐란 말인가. 도대체 언제쯤 포기할 거야. 동료가 언제나처럼 진한 아이라인이 그려진 눈으로 물었다. 뷰러로 한껏 찝어 올린 속눈썹이 인형처럼 화려했다. 한없이 가벼운 평소 언행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땅딸막한 동료의 단발머리는 소나무를 닮은 진녹색이었다. 수수한 어두움이 전신을 휘감은 값비싼 옷과 대비되어 묘한 어색함을 자아냈다. 동료는 대답을 재촉하듯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드롭 귀걸이가 찰랑이면서 무수히 박힌 보석들이 복도의 불빛에 반짝였다. 동료가 가게에 달아 놓은 큼지막한 샹들리에를 작게 줄여 놓은 것 같았다.

 동료의 이름은 또 다른 M이었다. 동명이인의 등장에 녀석, 그러니까 T가 감탄하면서 여자 M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물었던. 동료는 묘하게 웃으면서 M 누님이라고 불러, 하고 답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여자 M 쪽으로 기운 후였다. 그녀는 풀메이크업 상태인 여자 M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손을 올려 제 뺨을 매만졌다. 스킨케어도 하지 않은 민낯은 밋밋하고 푸석푸석했다.

"무슨 상관이야."

 막 깨어나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쏘아붙였다.

"네 일에나 신경 쓰지 그래?"

 왜 그렇게 예민해, 동료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걱정해 주는 건데. 끝을 둥글게 만 머리카락이 요염하게 흔들릴 때마다, 마스카라를 두껍게 발라 가닥진 속눈썹을 잡아뜯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겨우 억눌러야 했다. 언니도 알잖아, 그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거. 그래서 더 불안한 거 아니야? 특유의 예리함으로 정곡을 찌른 여자 M의 질문에, 동요하는 대신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쩌라는 거야. 네가 요즘 잘 나가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술과 계절을 파는 동료의 정보상이, 최근 들어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비아냥이었다. 늘어난 매출을 증명이라도 하듯 평소보다 한참은 붉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동료가 후후 웃었다. 생각은 언니 맘이지. 그녀는 가운 앞자락을 꾹 여미며 빠른 발걸음으로 동료를 지나쳐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동료가 뭐라고 생각할지 알 수 없어서 더 기분이 나빴다.

 녀석과 동료가 호칭으로 한참 말싸움하다가, 결국 M 누나로 합의를 본 이후였다. 녀석을 방까지 데려다 주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그녀가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너의 S와 나도 이름이 똑같지 않니, 여기서는 조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녀석의 말은 의외였다. 누나와 그 애는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거잖아요. 게다가 저는 그 애 이름을 이미 아니까요? 그렇다면 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 그녀가 다시 묻자 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도 모르겠냐는 듯,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그 애가 제게 그렇게밖에 소개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가운을 벗어던졌다. 수도꼭지를 가장 왼쪽으로 돌리고 데일 듯 뜨겁게 쏟아지는 열기를 맞자, 몸이 노곤해지며 쌓였던 스트레스가 모조리 씻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와 느낄 만큼 좋아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의 방에서 옮아 온 차가움이 사라질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물을 잠갔다. 샴푸를 짜내어 두피를 마사지하는 귓가에 그날 했던 녀석의 마지막 말이 왕왕 울렸다. 그 애가 그렇게밖에 소개하지 않았으니까요. S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지 않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사람들이 툭 내던지는 말에 몇 번 맞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 그의 손을 잡은 지 얼마 안 된 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면역이 되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지만 그때는 아니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혼자 남는 새벽에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그에게 들켰었는데, 그는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달래 주는 대신 강하게 돌려세웠다.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그녀는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했기에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녀석의 말은 S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듯한 어조였다. 다시 생각이 그쪽으로 흐르자 그녀는 양 손을 들어 뺨을 때렸다. 짝, 보다는 조금 가벼운 소리가 나며 얼굴에 샴푸 거품이 그대로 묻었다. 병신 같으니까 제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제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씹어뱉으면서 그녀는 물을 틀어 머리카락과 얼굴을 씻어냈다. 샤워로 달래 보려고 했던 기분은 결국 더 나빠진 상태에서 끝났다.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그녀는 침대로 기어가 던져 두었던 잠옷을 주워 입었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그대로 이불 속에 파고들고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건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였다. 암막 커튼 탓에 방이 어두워 시계는 잘 안 보였지만, 대충 이른 오후쯤 되는 것 같았다. 저녁 시간은 아직 아니고,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늦은. 잠이 덜 깬 그녀가 멍하니 있자 노크 소리가 재촉하듯 다시 울렸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가 그녀는 깜짝 놀랐다.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건 녀석이었다. 지난 몇 개월 간 단 한 번도 방까지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흘긋 내려다 본 녀석의 손톱은 주변에 엷게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M… 보스가 여자애를 데려왔어요."

 녀석이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콕 찌르면 눈물이 터질 것처럼 무겁게 젖은 목소리였다. 여자를 데려왔다고? 이성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던 그였다. 그 점을 위안 삼아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온도를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그런데 그의 여자랑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데?"

"…제가 아는 애에요."

 S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럼 왜 네가 가 보지 않고."

 그러려고 했는데요…. 녀석이 웅얼거렸다. M이 제가 거기 있는 걸,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어요. 납득 불가능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제 치부를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리는 편이었다. 그 애를 데려온 데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점이 있었다면, 녀석에게 사나워진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리라. 아무래도 녀석은 합류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으니만큼 그와의 친밀도도 낮을 테니까. 생각을 잇느라 그녀가 잠시 선택한 침묵을 불편하게 받아들였는지 녀석이 머뭇거리며 변명했다.

"그래서 누나가 가 주셨으면 좋겠어서…"

"그래."

 누나는 저보다 M을 잘 아니까요, 녀석이 덧붙였고 그녀는 단번에 수락했다. 녀석은 무언가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보였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머쓱한 얼굴로 그녀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아…. 살짝 비치는 얇은 슬립이 제가 걸친 전부임을 그제서야 인식한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닫았다.

"미안."

 그녀가 봐 줄 만한 옷으로 대충 갈아입고 나왔을 때 녀석은 문 앞에 없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걱정에 불안해하는 꼴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게 강아지마냥 그녀를 따르는 녀석이라고 할지라도. 혹시라도 동료를 만나면 또 비웃음당할까 봐, 그녀는 평소같아 보이려고 애쓰며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다행히 M은 방에 있었다. 손잡이에 걸린 '업무 중' 표지로 알 수 있었다(동업자 W가 선물한 것으로, 개구리로 변신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에 그는 탐탁지 않아하면서도 얌전히 말을 들었다). 그녀가 노크하자 태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야? 

"저에요."

 그녀는 문을 열고 반 걸음 방에 들었다.

"여자를… 데려오셨다면서요."

 노란색 전등이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암막 커튼을 쳐 놓고 굳이 스탠드 불빛으로 생활하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전기세 아깝다고 그녀도 몇 번 잔소리를 했었지만, 어차피 제가 내는 것 아니냐는 반박에 입을 다물었었다. 그는 의자에 푹 기대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너 부르려고 했어. 가서 좀 봐 줘."

 당신이 데려온 여자잖아요, 그런데 제가 왜요? 날카로운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올라왔지만 애써 밀어넣었다. 대신 그녀는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T한테 못되게 구셨다면서요. 사실은 그의 시선 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뜻대로 되어, 두 개의 핏빛 홍채가 저를 바라보자 그녀는 입고 있던 검은 니트 집업의 소매를 꾹 움켜쥐었다. 바라던 결과에 기분은 좋았으나 어딘가 불편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관심을 얻어내 보려는 제가 그녀는 싫었다. 유치했다.

"내가 언제?"

"저한테 와서 일러바치던걸요."

 그가 부인했다.

"난 그런 적 없어."

"조금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아직 어리잖아요."

"흠."

 그가 못마땅하게 웅얼거렸다.

"고려는 해 볼게."

"때로는 실천도 좀 할 필요가 있어요."

"난 충분히 실천적인 사람이야."

"착각은 자유니까요."

 그녀는 옷의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뾰족한 제 손톱 끝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붉은 매니큐어는 며칠 전에 동료가 다듬고 친절하게도 입혀 준 것이었다. 다른 손가락으로 살짝 훑자 부스러진 조각 몇 개가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손을 살짝 흔들어 가루를 털어내었다. 품고 있는 뜨거운 정열, 불꽃, 열정, 생명. 빨강과 그 색깔이 가진 의미는 분명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일 텐데. 그 정보가 틀린 건지, 아님 관심이 없는 건지 그는 그녀의 변화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그녀가 말을 돌렸다. 그 전에, 데려왔다는 그 여자 말이에요.

"무슨 일인지부터 설명해주실래요?"

 설마 납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손사래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 목소리에서 거짓말의 흔적도, 이유도 찾지 못한 그녀는 결국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평범한 대학생 신분으로 살고 있는 그는 꽤나 법을 잘 지키는 편에 속했다. 적어도 낮에는.

"내 차에 그쪽이 뛰어들었단 말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가 변명했다. 별로 빠르게 달리지도 않았는데, 살짝 부딪히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리더라고. 그렇게 당황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니까! 그의 과장하는 말투는 언제 들어도 아이 같이, 순수하고 귀여웠다. 어디 병원 근처에 놓고 오려고 했는데, 계속 보니까 익숙한 얼굴이잖아. 그래서 데려와 버렸어. 그가 말했다. 일단 스쿨 존이라 크게 다치진 않았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M이 아는 의사를 불러 주기로 했어."

"네."

"그건 그렇고,"

 그녀의 간결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가 바로 다른 질문을 던져서 그녀는 조금 놀랐다.

"T는 왜 갑자기 신경을 써?"

 원래 주변에 그렇게 예민한 애 아니었잖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그냥 아는 애래요."

"그렇구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T한테 걱정 말라고 전해 줘, 난 내 거 말고는 안 건드리니까."

"남의 목숨은 잘 건드리시면서."

"그건 별개지."

 난 내 거 말고는 안 건드려, 아마도 별 뜻 없이 던졌을 그의 말이 괜히 심장을 움켜잡고 놓아 주지 않아서. 그녀는 기분이 언짢았다.

-

 그가 S를 옮겨 놓은 곳은 빈 방이었다. 가끔 W나, MS라고 불리는 또 다른 동업자가 찾아오면 내어 주곤 하는. 습관처럼 문을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아직 S가 깨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녀는 조금 머쓱해졌다.

 S는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워 있었다. 무책임하게 던져 놓고 이불 한 장 덮어 주지 않은 보스의 인성이 정말이지 감탄스러웠다. 그나마 침대에라도 올려 두었으니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는 침대 밑 서랍에 손을 넣어 담요를 찾으면서 S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점 그을림도 없이 새하얀 얼굴 주변에 넓게 흩어진 머리카락은 녀석의 표현대로 노을의 주황색이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얼굴 선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제법 예쁘장한 모습이었으나, 잡히는 살 하나 없이 비쩍 마른 몸이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녀렸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M은 얼굴보다는 몸매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 그녀가 그러는 것처럼. 그러므로 녀석의 S는 M의 취향과는 맞지 않는 보통 여자애였다. 그에 안심이 되어 그녀는 괜히 더 꼼꼼히 담요를 덮었다.

"누나."

 T가 찾아온 게 그 때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틀을 반쯤 밟고 서서 녀석이 어색해했다. 바람이라도 쐬고 왔는지 빳빳한 면 자켓 차림이었다. 속에 받쳐 입은 티셔츠의 목 시보리를 만지작거리며 녀석이 물었다. 입을 열 때마다 턱에 걸친 검은 마스크가 함께 달싹였다.

"들어가도 되나요?"

"그럼."

 녀석이 반색하며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바스락바스락, 주머니에서 꺼낸 걸 하나 건넸다. 금빛 포장지에 빨간 글씨가 새겨진 초콜릿 바였다. 마트의 가판대에서 많이 봤지만, 그도 그녀도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한 번도 고른 적이 없었던. 녀석이 헤헤 웃었다. 누나 초콜릿 안 드시는 거 아는데, 그냥 갖고라도 계세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안 먹는데 이걸 뭐 어쩌라는 건지…. 여자 M한테나 버려야겠다, 하고 받아 드는데. 얼핏 넘겨다 본 녀석의 주머니에 비슷한 제품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녀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녀석이 황급히 변명했다.

"산 거에요."

"누가 뭐래?"

"M 카드니까, 마음대로 긁고 있다구요."

"좋아."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S가 저런 걸 좋아하는구나, 먹는 사람도 없는 간식거리를 잔뜩 사 온 녀석의 의도를 눈치채서였다. 녀석은 미소로 반응을 대신했다. 더 급한 일이 눈 앞에 있단 걸 잘 알았기에, 그녀도 굳이 트집 잡지는 않았다. 녀석은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두 손을 얌전히 모아 침대에 얹었다. 귀중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 경건한 모양새였다. 

"교복 말고는 처음 봐."

 녀석이 감탄했다.

"예뻐요…"

 S의 손등을 반쯤 덮은 연보라색 가디건을, 녀석은 손을 뻗어 잡으려다가 거두었다. 확실히 어려서 그런지 순수했다. 그녀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마음껏 어루만졌을 테다. 맨정신인 그에게 손을 대는 일엔 여전히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아무리 그가 그녀와의 접촉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불편한 건 불편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냥 성격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망상을 그만두었다. 대신 떠오르는 질문을 바로 입 밖에 내었다. 설마,

"데이트 한 번 안 해 본 거야? 좋아한다면서."

"네?"

 도대체 누가 그래요,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열과 성을 다해 부인했다. 절대 아니거든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쩍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지, 더 놀리려다가 녀석의 표정에 그만두었다. 별의별 농담을 해도 실실 웃으며 넘기던 녀석이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었던 당황한 얼굴로, 뺨을 붉히며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반쯤 숙였다.

"그럼 뭔데?"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녀석이 답했다.

"그냥 아는 친구라니까요!"

"아, 그러세요?"

 그녀는 팔을 뻗어, 침대 옆으로 살짝 흘러내린 S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관리는 잘 하는지 결 좋고 부드러웠다. 몇 가닥씩 천천히 집어서 침대 위에 올려놓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줄곧 잠든 S의 얼굴에만 눈길을 고정하던 녀석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나 돌아올 때까지, 잠시만 대신 여기 있을래?"

 녀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돼요?"

"그럼."

 대답하고는 그녀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갓 성인이 된 탓에 아직 소녀 티도 채 벗지 못한 녀석의 S에 대해 짐작 가는 점이 있어서였다. 익숙한 얼굴이어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는 그의 말…. 예전에 보고했던 정보에 비슷한 내용이 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책상 서랍과 책꽂이를 재빠르게 훑다가, 목적하던 것을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주황색이라 하기에는 너무 붉고 빨강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노란, 애매한 색의 스티커가 붙은 검은 파일이었다. 한 번 맡은 일은 완수하더라도 잘 정리해 놓는 습관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

 볼 일을 모조리 끝마치고 왔는데도 녀석은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개마냥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그 끈기에 혀를 내두르며, 그만하면 됐으니까 밥이라도 먹으러 가라고 녀석을 보내었다.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주춤거리는 녀석을 밀어내고 반쯤 열린 방문을 닫을 때 으음, 옅은 신음이 들렸다. 문의 삐그덕거림과 헷갈릴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잘 단련된 그녀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S가 여전히 누운 채로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다가, 겨우 초점을 맞춰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살아 있나요?"

 그리고 던져진 질문은, 그녀가 예측할 수 있던 범위가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하다 못해 당신은 누구인가요, 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단순한 확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걱정스러워 보였으며, 약간 기대에 찬 것 같기도 한 물음이었다. 순간 제가 뭘 들었는지조차도 이해하지 못해 그녀는 멍청하게 잠시 굳어 있었다. S가 이불 위에 늘어뜨린 손가락을 재촉하듯 몇 번 까닥이고 나서야,

"…당연하지."

"아."

 S가 한숨지었다.

"왜 살리셨, 어요."

"살리다니."

 그녀가 대답했다.

"네가 죽지 않았을 뿐이야."

 애초에 스쿨존에서, 그것도 제한 속도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달리는 차에 죽을 확률이 그렇게 높을 리가 없잖아. 그녀의 말에 S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묻고 싶은 것이 조금 있었지만 감히 꺼내지 못했다. 잠시 이어진 어색한 침묵이 불편해서, 그녀는 집업 소매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S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이불을 몇 번 쥐었다 놓았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그녀가 잠시 가졌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S는 허공에 손을 올리더니 살 어루만졌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거기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주황색 스티커가 붙은 파일의 내용을 떠올렸다. 대대로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던 가문에서 귀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얘기, 알고 계셨습니까? 하는, 동업자 W의 지인 D의 증언이었다.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극히 드물다고 하더군요…. 여전히 허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S가 말했다. 놀라지 마요,

"당신도 내가 누군지 알잖아요."

 D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파일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훔쳐본 모양이었다. 텅 빈 줄만 알았던 방에 사실은 다른 것들과 함께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런 것까지도 알 수 있나. 생각보다 더 위험한 능력이었다. 또 어떤 것이 가능할지 몰라 살짝 긴장하며 그녀는 S의 동공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것보다 밝고 녹색 빛이 엷게 감도는, 청아하게 파란 눈동자였다.

"T는 어디 갔나요."

 잠시 망설이다가 S가 물었다.

"T?"

 그녀가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여기 있었잖아요."

"…불러 줘?"

"아니요."

 대답은 빠르고 단호하게 나왔다.

"저는 그 애를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라?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이 짐작했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녀석이 하는 짓으로만 봐서는 S 또한 마음이 있거나, 적어도 싫어하진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혹시, 일부러 저러는 건가? 그녀는 S의 눈동자에서 뜻을 읽어내려고 애썼지만 텅 빈 무표정은 아무런 단서도 내어 주지 않았다. S가 눈을 살풋 감았다 뜨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러면 저는 언제 나갈 수 있나요."

 그러더니 잠잠히 물었다. 그 페이스에 꼼짝없이 압도되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단 물어 보지."

"다녀오세요."

 당장 나갈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S의 말에 그녀는 방에서 밀려나왔다. 저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요. 확신에 찬 말투로 S가 덧붙였다. 느릿하고 침착한, 담장 위를 사뿐 걸어다니는 고양이를 닮은 어조였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을 그녀는 몇 알았다. 여자 M이든, 말 몇 번 섞어 보지 않은 성당의 고결한 P든.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정의로운 P의 곁에 늘상 붙어 있는 이름 모를 놈도 하나 있었다. 매사에 태연하고, 어떤 짓을 해도 감정이 격해지거나 노하지 않을 것 같아 하나같이 기분 나쁜 인간들이었다. 재수 없이. 목록의 마지막에 S까지 추가하며 그녀는 목적지에 섰다. M의 방문 앞이었다.

 이거 왠지, 물어보면 화낼 것 같은데. 손을 들어올려 노크를 하려다가 그녀는 생각했다. S가 깨어났어요, 돌아가고 싶다고 묻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연습 삼아 입안에서 읊조린 말들 중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았다. 역시 그냥 갈까, 하지만 지금도 혹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옆에 있진 않을까…. 보기가 잘못된 오지선다 문제를 푸는 것마냥 머리가 아팠다. 그녀가 그렇게 한참을 갈등할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M이 등장했다.

"뭐야."

 하마터면 그와 부딪힐 뻔했던 그녀에 그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무슨 일이야?"

"여자가, 깨어났어요."

 아직까지 답을 고르지 못한 그녀는, 그냥 눈을 딱 감고 아무런 선택지나 내뱉었다.

"그렇군."

 다행히도 정답에 꽤나 근접했던 듯 그는 순순히 답했다.

"나가고 싶다고 하던가?"

 심지어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까지. 지옥 문턱을 밟았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그녀가 천천히 미소지었다.

"잘 아시네요."

"음."

 그가 웅얼거렸다.

"아쉽겠지만 안 되겠다고 전해."

 그 애에게는 너무 큰 발언권이 있어, 그가 덧붙였고 납득 가능한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본 이상 절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일단 데려온 건 나니까 안타깝게 됐긴 한데…. 그가 말했다. 굳이 나가겠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그러고는 명령했다.

"돌아가서 잘 지켜 봐, 절대 혼자 있지 않게 해. 그리고,"

"네."

"혹시나 죽으려 든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

  평소의 직설적인 화법과는 조금 다른, 두루뭉실하고 빙 돌아간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

 S에게는 아쉽게 된 소식을 들고 그녀가 방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손님이 찾아왔다. 덕분에 그녀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방문을 살짝 두드리고, 상체만 빼꼼 내민 건 녀석이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녀석이 소심하게 물었고, 그녀는 어느새 벽 쪽으로 돌아누운 S의 주황색 뒤통수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대신 답했다.

"…그래."

 녀석이 들어오자 S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벽을 향한 채였다. 녀석은 특유의 조용한 발걸음으로 들어와,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를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에 잠시 나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 걸 그녀는 눈치챘지만, 녀석의 바람보다야 함께 있으라는 그의 명령이 먼저인지라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S."

 그러면 이제는 아예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이라도 하려는지,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녀석이 속삭였다. 잠시 편의점에 다녀오는 일마저도 저나 그에게 허락을 받던 어제와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만큼 녀석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오로지 S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늘을 그대로 잘라 놓은 것 같은 S의 눈동자가 잠시 초점 없이 흔들리다가 녀석에게로 고정되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녀석과는 대비되게 무서우리만치 차분한 무표정이었다.

"T."

 반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S가 입을 열었다. 불리우는 제 이름에 녀석이 번쩍 고갤 들었다. 그녀에게 이야기할 때의 무심함에 약간의 싸늘함이 가미된 S와는 정반대의, 살짝 수줍음이 묻어난 얼굴이었다.

"나가, 보고 싶지 않아."

 S는 그걸 잔인하게도 즈려밟았다. 녀석은 당황한 듯 살짝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깊은 바다 같다고 그녀가 늘 생각했던 눈에 보일락말락 눈물방울이 비쳤고, S의 얼굴에 순간 스쳐가나 싶던 미묘한 동정은 그녀가 눈을 깜박이는 그새 사라졌다. 명백한 혐오와 진심이 아니라는 듯한 애처로움이라.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어 그녀는 애꿎은 소맷자락만 쥐어뜯었다. 어려웠다.

"T."

 대신 그녀는 녀석을 돕기로 했다. 분명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일 테니.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쥐어짜서 그녀가 불렀다. T, 잠시만,

"S에게 따로 할 말이 있어."

 녀석은 잠시 고개를 돌려 촉촉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의외였다. 평소대로라면 눈치 없이(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괜히 모르는 척 하는 건지 그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남아 있겠다고 고집부렸을 텐데. S의 반응에 충격이 컸나,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졌다. 녀석이 나간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T가 충분히 멀리 떨어졌음을 알려 준 게 아닐까 그녀는 추측했다) S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가요."

 쓸데 없는 서론 따윈 집어치우고,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너를 내보내 줄 수 없어. 순간 S의 평정이 설핏 흔들리는 걸 그녀는 포착했다. 그러나 노련한 S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차분한 눈동자가 그녀의 움직임을 쫒으며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그가 덧붙였던 말들을 떠올렸다. 발언력,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 그의 은신처를 알아 버린 S라는 위험인물을 바깥으로 절대 돌려보낼 수 없다는 합리적인 변명. 그걸 꺼내는 대신 그녀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럼에도 굳이 나가겠다면, 네 친구들과 같은 모습이 된 이후가 될 거야."

"음."

 S가 웅얼거렸다.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그녀는 조금 놀랐다가, 첫마디를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제가 살아 있나요, 살짝 기대에 찬 것만 같던 그 말투. 그녀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뭐야, 얘…. 그녀를 등지고 누운 S는 아무리 잘 쳐 주려 해도 녀석이 뺨을 붉혀 가며 침이 마르게 설명했던, 매사에 긍정적이고 잔잔한 생기가 도는 소녀와는 달랐다. 어째서일지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다가, 그녀는 두어 달 전에 들은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그 애는 거룩한 P랑 같은 집에서 사는 모양이야, 하고 소식을 전하던 동업자 W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쟁쟁 울렸다. W의 것이 대부분 그렇듯 확실성이 떨어져서 아직 파일에 첨가하지는 않은 정보였다. 거룩한 P가 보기 드물게 큰 소리를 내었어. 망자의 목소리? 뭐 그런 비슷한 단어도 쓰던데…. 아마도 그 때가 2월, 녀석과 S가 막 졸업한 직후일 테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겼다면 녀석의 증언과 다른 것도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으려나. 

 그녀가 말하는 걸 잠시 잊은 동안 S가 얌전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 담담함에 그녀는 솔직히 약간 실망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호숫물처럼 조용하던 평정이 와장창 깨져서, 엉엉 울거나 고함치거나 물건을 던지며 히스테리를 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에 비슷한 눈빛인 녀석들을 하나씩 투영해 보면서 다들 안은 똑같은 거라고 위안 삼고 싶었다. 그녀도 그런 제가 추악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S 같은 인간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기분을 무엇이라 정의하면 좋을지도. 그랬기에 딱히 변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생을 갈구했지만 아직까지도 얻지 못한 평정심과 느긋함. 항상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사는 듯,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나른함. 저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전부 발 아래 둔 것마냥 지독히도 오만한 그들의 눈동자가 뽑아내고 싶을 만큼 역겹고 또 부러웠으므로.

"이제 T에게 가 보세요."

 그런 기분이 얼굴에까지 묻어났는지, S가 몸을 웅트리고 이불 자락에 고개를 파묻으며 말했다. 걱정되시잖아요, 여린 애니까. 걱정될 정도까지는 아닌데, 부인하려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S가 내뱉은 말에서 자그마한 모순을 찾아낸 탓도 약간은 있었다. 같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S의 당근 색 머리카락이 약간 경직되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지."

 더 이상의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눈 감아 주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집업 자락을 정리하고, S가 헛된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뒤 나와 근처에 있을 녀석을 찾아나섰다. 그 길은 멀지 않았다. 방을 나오자마자 그녀는 계단 옆 창문에 반쯤 몸을 내밀고 선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에, 그녀와 원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녀석의 체구가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소리 내어 부르기가 뭣해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걸 그녀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옆 난간에 기대며 곁눈질로 살짝 녀석을 보았다. 텅 빈 하늘을 응시하는 녀석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내려갔다. 가느다란 선, 길다란 속눈썹. 객관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아직 소년 티를 덜 벗은 얼굴이 보기 싫은 편은 아니었다. 고양이마냥 눈매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으면서, 하는 짓은 강아지와 다름이 없는 게 나름 귀엽기도 하고. 물론 그녀에게 있어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지만. 선선하게 불어오는 늦은 봄 바람이 바닷빛 머리카락을 살살 흩트렸다. 녀석은 손을 올려 걷어내며 숨을 내쉬었다.

"많이 바뀌었더라구요,"

 녀석이 변명하듯 말했다. 예전에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어요. 몇 개월 전만 해도(무슨 얘긴가 하다가, 그녀는 녀석이 학교를 졸업한 지 아직 서너 달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냈다) 조금 더 밝고, 수줍지만 잘 웃던 애였는데. 그러면서 내리까는 눈동자가 서글펐다. 위로라도 해 줄까 하다가 결국 그녀가 던진 건 서늘하게 날 선 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도 정의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굳이 답을 찾자면, 그녀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S의 태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홀하다는 녀석의 시선이려나. 그래서 어때, 그녀가 물었다. 실망했어, 별로야?

"마음이 좀 접혔나?"

 그제서야 너석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깜짝 놀라 고조된 목소리가 어떻게 그런 걸 물을 수 있냐는 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조용히 울렸다. 그럴 리가요. 녀석은 창 밖으로 시선을 되돌렸지만, 그녀는 뒷말을 더 들은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감히 제가 어떻게요?

 감히, 제가, 어떻게요?

-

 그가 다소 거칠게 정장 자켓을 벗었다. 그녀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날아오는 넥타이를 잡아챘다.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자 남성용 향수의 선선한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저번에 업무 차 백화점에 들렀다 생각나서 사다 준 것이었다. 그는 어쩌다 그걸 제가 쓰고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저번에 그녀가 향 좋네요, 하고 넌지시 던졌을 때 아무런 말도 없었던 것을 보면.

 원래대로라면 그녀도 제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시간이었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한동안 그의 부탁으로 S를 지켜보느라 일자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빈자리는 여자 M과 동업자 W가 각자 대체할 수 있는 부분을 나누어 채웠다. 조금 부족하기는 하나 나쁘지 않다고 그가 칭찬하는 소리를 그녀는 몇 번 들었다. 제가 없더라도 그의 세상은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것 같아 그녀는 조금 울적해졌다. 

 그가 와이셔츠의 단추를 푸는 동안 그녀는 넥타이로 손장난을 쳤다. 뒷면의 깔끔한 봉제선과 상표, 목을 휘감는 부드러운 줄까지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문득 그를 올려다보았다. 속에 받쳐 입었던 면 티를 머리 위로 당겨 벗느라 드러난 복근. 바깥 활동이 잦은 편이 아닌지라 그을림 없이 새하얬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팔을 둘렀을 때의 감촉을 떠올리다가, 마주친 눈에 민망해져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물었다. 그녀가 집업 아래 걸친 얇은 슬립이 두꺼운 셔츠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요즘은 특별한 일 없나?"

 집업이 허벅지를 반 이상 덮을 정도로 큰데다,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까지 있어서 뭘 입었는지 몰랐을 테다. 애써 합리화하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가 S를 주워 온 지 거의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건만, 저택의 상황에는 변한 것 하나 없었다. 심지어 곧 터지리라고 그녀가 예상했던 녀석과 S 사이의 아슬한 감정 줄다리기까지도. 그래, 그가 중얼거리며 편하게 입는 져지에 팔을 끼웠다. 뒷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명 높은 M의, 편안한 츄리닝 차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매번 하는 생각에 괜히 즐거워져서 그녀는 옆에 놓인 그의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단식 투쟁은 끝난 건가?"

 그가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문득 물었다. 닿은 부위에서부터 퍼져나간 열기에 숨이 턱 하고 막혔지만, 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그렇다네요.

 단식 투쟁이라 함은, 처음 눈을 뜬 다음날부터 S가 일말의 식사를 거부한 1주일간을 말했다. 그 동안 S가 입에 댄 것이라고는 억지로 들이붓다시피 한 약간의 물과 처음 며칠 간의 초콜릿 바 두어 개가 전부, 그것도 녀석이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손 대지 않았다. 혹시나 죽으려 든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 그녀는 그의 명령을 기억했기에 말리지 않았지만 녀석은 아니었다. 손대면 바스라져 사라지기라도 할 줄 아는지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를 썼다.

 헛되어 보였지만 S의 고집을 꺾은 것 또한 녀석의 집념이었다. 정확하게는 하도 안절부절못하길래 차라리 협박을 해 보라고, 그녀가 살짝 조언 삼아 던져 준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녀석은 영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살살 구슬리자 금세 말을 들었다. 물론 그녀가 그렸던 그림만큼 만족스러운 장면은 아니었지만. S가 언제나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신경 꺼, 무슨 상관이야…. 하고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나는… 너의 직업을 훔칠 거야."

 괜찮은 말을 생각해 온다더니. 녀석이 망설임에 망설임을 반복해 가며 협박이랍시고 내뱉은 것은 고작 그따구였다. 어이가 없어져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짚었다. 어느 정도 봐 줄 만 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좀 심각하잖아…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S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백한 눈동자를 녀석에게 고정했다. 그러면서 매사에 무관심하던 곧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꽤나 눈썰미가 좋은 편일 텐데, 긴장한 나머지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못했는지 녀석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 주변에 떠도는 영혼들을 모조리 성불할 거야."

 그러면 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겠지. 그 영혼들이 불쌍하다면, 그들이 그런 모습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게 하고 싶다면…. 녀석이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두었던 쟁반을 들어올렸다. 며칠을 굶은 몸 상태를 고려해서 적당히 데운 죽이었다. 거기에 따라온 말은, 협박이라는 원래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다정스러웠다. 뭐라도 좀 먹어.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받아드는 S는 여전히 창백한 무표정이었지만, 달달 떨리는 손가락이 기분을 대신 드러내 주고 있었다. 녀석의 손을 따라 숟가락을 죽 그릇에 반쯤 담그는가 싶더니, S는 그대로 손을 놓아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은백색 금속이 바닥에 닿는 댕강 소리에 녀석도, 그녀도 당황했을 때, S가 큼지막한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쟁반을 탁자에 돌려 놓고선 어쩔 줄 몰라 했다. 도움을 구하는 듯 저를 쳐다보는 눈빛에, 그녀는 어깨만 으쓱임으로 답했다. 그녀에게서도 답을 찾지 못하자 녀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팔을 뻗어 S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예상 외로 S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당기는 힘에 자연스레 S가 녀석에게 기대었고 녀석은 기꺼이 제 옷자락을 내어주었다. 녀석의 체구에도 폭 담길 만큼 가녀린 S의 몸이, 토해내는 흐느낌에 맞춰 달달 떨렸다. 미안해, 녀석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를 그녀는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지 않을 거야.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반쯤 울음이 담긴 어투는 퍽 애절했다. 그러니까 울지 마… 거기까지 듣다가 방을 나와 자리를 피해 버린 바람에, 그녀는 이후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울지 마,

 나의 S.

"무슨 생각 해?"

 뺨을 지분대는 손가락에 그녀는 퍼뜩 감았던 눈을 떴다. 제가 또 다른 쪽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핏빛 달을 닮은 동그란 홍채 두 개에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바라던 감정 따윈 없었다.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가 천천히 눈을 굴려 그녀와 맞추자, 그녀는 재빨리 먼 곳을 보았다. 죄송해요,

"무슨 말 하셨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의 손가락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입술 언저리에까지 닿았다. 터질 듯 아슬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긴장을 알기는 하는지, 아이가 한낱 평범한 장난감을 다루듯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묻는 말 또한 원한다면 그만 업무로 복귀해도 좋아, 하는 얘기라. 그녀는 뜨거운 기분을 애써 감추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갑자기요?"

 아니, 요즘에 녀석이 계속 신경을 쓰니까. 그가 대답했다. 동시에 그녀는 녀석과 S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분위기를 떠올렸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불안한 관계, 그러니까 한쪽의 열정과 반대쪽의 혐오(맞는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가 조금 신경이 쓰였으나 이어진 말에 그러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네가 있는 쪽이, 조금 더 수월하더군. 그녀는 흐트러진 그의 옷깃을 정리하려다가 손을 거둬들였다. W나 M은 조금 못 미더워서 말이지. 그가 덧붙였고 그녀가 픽 웃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럴게요."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까. 복도를 걸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감정을 떠보기 위해, 녀석에게 바로 가서 말하겠다고 일어섰던 건데. 정말 한 줌의 미련조차 없는지 그는 순순히 그녀를 내보냈다. 우선 녀석만 따로 불러낼까. 통보하지는 말고, 던지듯 물어봐야겠다. 내가 다시 일로 복귀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그래서 M이, 네가 S를 좀 챙겨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반쯤 열린 문을 완전히 열고 들어가려다가, 문틈으로 보이는 장면에 그녀는 멈추어 섰다. S가 침대에서 거의 몸을 일으키고, 녀석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자세로 애원하고 있었다. 죽여, T. 차라리 나를 죽여 줘…. 처절한 S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나를 성불해. 그녀는 뒤로 반 걸음 물러났다. 네가 내 능력을 빌려 쓸 수 있단 거 알아, 체중을 실어 녀석의 팔을 붙잡은 S에게서는 이유 모를 광기마저 느껴졌다. 난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어진 말은 처음 것과는 제법 다른 모양을 취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S가 말했다. 제발 살려 줘, T.

 녀석이 뭐라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계단 곁으로 가서 녀석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살짝 붉어진 눈가로 녀석이 복도를 돌아나올 때에야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녀석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몇 번 깜박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게요.

-

 그녀가 일로 복귀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S는 더 이상 침대에만 머물러 있는 비참하고 연약한 계집애가 아니었다.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으며, 복도를 돌아다니다 M을 만나면 짧게나마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주 일이 그녀가 아는 마지막이었다. 원래 지병이 있나? 하고 그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물었던. S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왜 쓰러진 거지? 첫날의 일을 생각하는지 그가 물었고 S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게…. S가 조곤조곤 말했다. 사실은 며칠, 굶어서요. 그 말에 그녀는 추측으로만 남겼던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들에 확신을 부여할 수 있었다.

 S의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녀석과 S는 가장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마스크와 모자를 철저히 쓴다는 조건 하에 몇 번 나갔다 오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초콜릿 바를 입에 물고 설핏 미소짓는 S는 녀석이 찬양하던 노을을 닮은 여신의 이미지에 거의 부합했다. 하지만 S의 목소리, 그러니까 녀석에게 매달려 죽음을 부르짖던 가냘프고 처절한 갈망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생했다. 같은 장면을 떠올리지는 않았겠지만, M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낀 듯 싶었다. 어쩌면 활기를 되찾아 가는 S라는 여자가, 저에게 어떤 위협이 될 수 있는지 뒤늦게 기억했으리라.

 그래서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는 녀석의 발치에 총을 던져놓았다. 쟁강, 둔탁한 소리를 울리며 떨어진 그것을 녀석은 허리를 굽혀 주워들었다. 손을 타 방아쇠 부분이 맨질맨질한 권총은 녀석의 손 안에 딱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녀석의 의아한 눈동자가 그와 그의 뒤에 선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살짝 눈을 피했다. 선택은 너의 몫이야. 그가 꼰 다리를 풀지 않으며 말했다. 네? 녀석이 되물었다. 하지만 방 안에 녀석이 그의 말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거룩한 P가 사람을 찾고 있어. 말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살짝 턱짓했고, 그녀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당의 고결한 P가 S를 찾고 있다. S의 사진을 들고 P가 찾아왔을 때 문을 열어 준 게 바로 그녀였다. 혹시 이 아이를 보신 적이 있나요? P가 들이밀던 종이 안에서 S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걱정거리 하나 찾을 수 없단 것처럼. 직전까지 그녀가 보았던 생기 없는 눈동자와 대비되어 조금, 소름이 끼쳤다.

"어렴풋이 눈치를 챈 것 같아."

 비로소 녀석과 눈을 맞추며 그녀가 말했다. 어렴풋하다, 라는 표현은 조금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고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저를 똑바로 쳐다보던 P의 시선을 기억했다. S의 것과 닮았지만 조금 탁한, 동 트기 직전의 이른 새벽 같은 색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확신 직전의 감정. 수도 없이 보아 와 그녀에게는 익숙했다. 살짝 긴가민가 하면서도 P는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다. S가 어디 있는지 P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아,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선택은 너의 몫이고 우린 항상 너를 존중해. 녀석은 잠자코 제가 든 총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에 따른 결과까지도, 원한다면 기꺼이 책임져 주지. 그런 그의 삶의 방식을 그녀는 사랑했다.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오기로 선택한 것은 무엇이든 가족, 운명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포용. 녀석은 그냥 선택만 하면 되었다. 대가는 기꺼이 그와 그녀가 함께 짊어지고 갈 테니. 하지만 책임이 따르지 않는 선택이 가장 어렵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죽여, 나를 죽여 줘, T. 들릴락 말락, 애처롭게 속삭이던 S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리고 그건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바로 앞에서 들었으니 더 그럴 테지.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총에 고정되어 있었다. 망설임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져 조마조마했다.

"생각해, 볼게요."

 한참을 그러고 있다 녀석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이제 나가 봐도 될까요. 그가 고양이마냥 나른하게 눈매를 접으며 싱긋 웃었다. 좋을 대로 하렴, 푹 쉬어.

 이후 그녀가 녀석을 본 것은, 동업자 W의 부탁을 가장한 (개구리로 변신시키겠다는)협박으로 S를 찾아갔을 때였다. 도대체 무엇이 저를 그런 타이밍에만 S에게로 이끄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언짢음과 혼란스러움이 반반씩 섞인 감정으로 눈 앞의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녀석이 S에게 입맞추고 있었다. 걸터앉았다가 그대로 몸을 젖힌 듯, S는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침대에 가로로 누웠고 그 위를 녀석이 점령하고 있었다. 녀석은 한 손을 S와 맞잡았고 반대편으로는 침대에 넓게 흩어진 S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한참을 지속되던 키스가 마침내 끝났을 때, 녀석이 입술을 떼고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S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속삭이는 소리는 작았지만 철저히 훈련받은 그녀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지 마. 몇 주 전 S가 했던 것과 비슷했지만 조금은 다른, 상처받은 애원이었다. 제발 가지 마, S. 애처롭게 몸을 떨면서 녀석이 울먹였다. 나랑 여기 있어…. S가 맑은 눈을 굴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S가 아니야. S가 살풋, 예쁜 눈웃음을 웃었다. …이라고 불러. 그녀는 듣지 못했지만, 이어지는 녀석의 반응으로 그것이 S의 진짜 이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이나 S 둘 다, 아니면 둘 중 하나라도 저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멍하니 서서 바보마냥 어버버거리다가 황급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피했다.

 T가 선택을 했어요. 그날 자정 그녀의 보고에 그는 오늘 구두를 뭘 신었어요, 하는 잡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답했다. 그렇군.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녀가 물었고 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 녀석과 S의 관계를 설명하려다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을 감고, 제 옆에 누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녀석이 S에게 키스했어요. 녀석은 S를 사랑하고 S도 그렇대요. 사람마다 사랑의 정의가 다르다는 제 결론조차 그녀는 더 이상 신뢰하지 못했다. 저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시선으로 그 애를 쳐다봤는데, 도대체 저것 외에 무엇이 사랑이죠? 

"당신에게 나는 뭐에요?"

 다음 순간 그녀가 입을 연 건 오로지 충동이었다. 한 번 터진 질문은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제 이름이 뭔지는 아세요? 아니, 알고 싶기는 해요?

 음, 그가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물었다. 그런 게 중요한가? 그러면서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가락이 야했다. 달싹이는 그의 입술이, 그녀가 사랑하는 샤워기의 온도보다 몇 배는 뜨겁게 귓바퀴에 닿았다. 너는 S야. 그가 대답했다. 누구의? 그 순간이 너무나도 진득해, 꿀 단지에라도 빠진 것처럼 끝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대답이, 당장의 곤란함을 피하려고 둘러대는 말이라도 상관없다고 그녀는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나의. 나의 S.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다. 그가 속삭였다.

 너는 나의 S야, 그런데 무엇이 더 필요하지?

 무엇이 더 필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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