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나절

최후의 [-].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진실이 필요한 법입니다.

모바일 게임 《마피아 42》 기반

공식 카페 '퇴폐'님 주최 합작


인게임 세게관을 반영하였으나 스토리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C)떨리고설레다 2021


의 [-].

그녀는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꺼내진다. 큰 창문이 달린 복도는 환하고 난방이 잘 되었는지 따뜻하다. 오랜만에 해를 보니 눈이 부시다. 그녀는 추위에 곱은 손가락을 들어 눈가에 그늘을 만든다. 신이여, 당신의 종에게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문을 입속말로 작게 읊조리며 앞선 사람을 따라 종종 걷는다.

반 걸음 앞에서 그녀를 인도하는 남자는 군복 차림이다. 이 도시의 군대마저 놈의 손에 들어갔다는 선명한 증거다. 그녀는 낡은 가죽 줄 끝에 매달린 목걸이의 펜던트를 매만진다. 내가 여기 있음을 기억하시고, 이 악마의 소굴에서 나를 보호하소서. 이건 나 혼자의 힘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걷는다. 침묵은 조금 어색하지만 오히려 그쪽이 더 편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목을 보호하려는지, 대리석 바닥 위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다. 그게 그녀는 마음에 든다.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만 밟다가 부드러운 카펫 위에 서니 지친 발에 닿는 느낌이 좋다.

아니, 좋지 않다. 그녀는 방금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경악한다. 아, 신이여. 펜던트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아프게 움켜쥐며 그녀가 탄식한다. 내가 연약한 인간임을 기억하시고 부디 방금의 죄를 용서하소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있는 이곳은 악마의 저택이다.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든 결코 편안함을 느껴서는 안 되는 장소다.

“들어가십시오.”

복도 끝 방에 다다르자 군인이 정중하게 앞을 가리킨다. 크지만 그닥 보안에 유리해 보이지는 않는 우아한 생김새의 문이다. 그녀는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인다. 재촉하는 듯한 고갯짓을 몇 번 받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돌려 연다. 신이여, 신이여…. 복도의 불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이는 군인의 눈동자를 뒤로 하고 그녀는 방 안으로 성큼 발을 들인다. 목걸이를 내려놓고 소매 아래로 주먹을 꽉 쥔다. 바라건대 내게 용기를.

방은 소박하고 단정하고 따뜻하다. 새하얀 꽃무늬 접시 위에 쿠키와 과일이 정갈하게도 놓여 있다. 그 옆의 찻주전자에서 모락거리며 올라오는 것은 심지어 김이라. 그녀에게 주어질 리 없는 대접에 기분이 얼떨떨하다. 누구를 위한 것이지,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인기척도, 그녀가 내내 마음을 준비해 왔던 고문 기구들도 없다.

소파 옆에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고 섰다가 딸기 사이에 꽂힌 종이쪽지를 발견한다. 한 줄의 짧은 문장이, 하도 예전부터 보아 온 탓에 익히 잘 아는 글씨로 적혀 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부디 즐기시기를. 친절을 가정한 명령이다. 뒷면에 강조하듯 덧붙은 말로 더욱 확실해진다. 정성을 다해 채비하였으니 마음에, 드시길. 당신의 가족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 산양의 부드러운 혀 아래 숨은 뱀 같은 화법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도시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 중 하나에 속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쪽지를 쥔 손을 움켜쥔다. 종잇조각이 파스락, 가냘픈 소리를 내며 어그러진다. 형편없이 구겨진 종이 뭉치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선 윗옷의 단추부터 잡아뜯듯 푼다. 예상대로 욕실에는 더운 물이 가득 준비되어 있다. 바라는 대로 해 주마.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마른 수건 위에 정리하면서 그녀가 으르렁거린다. 그러나 절대 굴복하지는 않을 테다. 발가락부터 담근 욕조의 물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온기에 온몸의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다. 그게 그녀는 싫다.

.

.

.

"보고 싶었어요, 고모!"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걸어나오는데, 익숙하게 발랄한 목소리가 소파에서 그녀를 반긴다. 어려서부터 늘 그녀가 지적해 온 것을 기억했기 때문일까. 쿠션에 폭 기대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그녀의 어린 조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고친다. 다른 신을 선택한 순간부터 다시는 엮일 수 없는 사이, 이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려다가 그녀는 그만둔다.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거에요?"

영매의 눈에 서린 금빛 이채는 낯설다. 그녀는 괴이하게 반짝이는 홍채 앞에서 한없이 침통해지는 기분을 삼킨다. 그녀가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짓는다.

"고모도 저와 그분과 함께 이곳에 남으신다니 기뻐요."

잘못된 정보를 굳이 고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다른 쪽에 초점을 맞춘다. '그 분'. 조카는 그 남자를 그렇게 다정한 호칭으로 부른다. 한때는 그녀의 친우였고 일종의 가족이었으며 이제는 찢어 죽여야 할 원수가 되어 버린 그 남자를. 그 이름이 그녀는 거슬린다. 조금 추하더라도 두 사이를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너의 새로운 신이, 나를 지하 감옥에 처박았단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설령 말하더라도 단단히 세뇌된 귓가에 제대로 전해질 리가 없다. 참으로 치졸하기도 하지. 그녀는 이런 계산까지 하게 된 제 상황이 부끄럽다.

"무슨 생각 하세요?"

"미안하구나. 뭐라고 했니?"

"하나 드셔 보시라고요. 요즘 딸기가 맛있거든요."

여전히 불편함을 입 안에 간직한 채, 그녀는 내밀어지는 딸기를 받아든다. 기대 어린 눈빛을 못 이기고 베어 물자 새콤한 맛이 찌릿거리며 퍼진다. 잊고 있었는데, 딸기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최악의 적이 된 남자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철인가 봐요."

"…벌써 그렇게 됐네."

"아, 맞아."

무엇을 떠올렸는지 영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통통 튀는 움직임이 어색하면서도 굉장히 자연스럽다. 성격이 바뀐 건가? 그녀는 훌쩍 높아진 눈높이를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십수 년간 길러 온 그녀의 조카는 조용하고 사근사근하고 차분한 소녀였다. 그 빌어먹을 놈은 사람을 바꿔 놓을 수 있는 능력도 가진 건가. 아니면…. 그녀는 너무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제가 딸기를 하나 더 집고 있는 줄도 모른다. 원래, 저 애가, 저런 성격이었던가?

"머리가 다 마르면 얼른 모셔 오라고 했는데."

젖으면 날이 추워서 감기 걸린댔어요, 영매가 덧붙였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머리카락 끝을 잡는다. 방 안 공기가 더워서 그런지 금세 말랐다. 

"가요, 고모. 많이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이곳에 존재하는 목적을 떠올리자 뒤늦게 숨이 막힌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할 것 같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에 밀어넣은 두 번째 딸기를 삼키고, 가슴께로 손을 뻗어 펜던트를 움킨다. 가야만 한다. 두렵고 상상만 해도 몸이 떨리게 치욕스럽더라도 맞서야만 한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태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소서, 고난이 나를 삼키려 주둥이를 벌리고 기다리나이다. 펜던트의 뾰족한 끝이 손바닥을 찌르는 느낌을 위안 삼아 기도문을 속으로 읊는다. 사자의 아가리에서, 신이여, 나를 지키소서.

그녀는 고급진 문 앞으로 인도된다. 검고 결이 고운 나무로 짜여졌고 손잡이에는 금이 도금된 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비범한 이의 공간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영매는 두어 번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그녀는 반 발짝 뒤로 물러나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대리석 바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에는 검은색 러그, 그 위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네 개의 은색 소파가 놓여 있다.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며 몸을 돌린다. 눈동자는 여태껏 본 누구보다도 형형한 노란색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힌다. 남자와 마주치자마자 화색을 띄는 영매의 것과 비교되어 제법 이질적이지만 역시 눈치채지 못한다.

“고맙습니다.”

“뭘요.”

그녀의 어린 조카를 보며 교주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띠운다. 하지만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다. 언뜻 봐서는 쉬이 구분하기 어려운 표정을 해석하는 것이 빌어먹게도 그녀에게는 쉽다. 떨쳐내기 어려운 과거의 흔적 탓이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비릿한 향이 감돌도록 입술을 악문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앗, 네네!"

그럼 두 분 편하게 말씀 나누셔요, 영매가 물러간 자리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남는다. 굳이 부술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문다. 예상대로 저쪽에서 먼저 적막을 깬다.

"평안하셨습니까?"

염소의 뿔을 달고 뱀의 혀를 가진 악마는 양의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순한 가축마냥 살고 있다. 온갖 거짓을 동원해 사람들을 세뇌시켰음에도 여전히 뻔뻔하게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그녀는 눈만 굴려,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미간을 찡그린다. 해사하게 미소짓는 낯짝이 어찌나 두꺼운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질문 같지도 않은 걸 묻는군."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그딴 방식으로 날 부르지 마라."

제 공간이니 제 마음대로 하려 합니다, 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대답한다. 반박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빠득, 이를 간다.

"네놈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는 양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당신을 만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어랍니까?"

더 이상 에둘러 말할 생각은 없다. 시간 끌기를 그만두고 그녀가 묻는다.

“나를 왜 꺼낸 거지?”

그냥 갇혀서 썩어 가게 내버려 두지 그랬나. 뼛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말은 억지로 잡아당겨 목구멍에 감춘다. 지하에도 한 마리의 악마가 살았지만 그녀가 감히 장담하건대 여기보다는 낫다. 적어도 그 놈은 그녀의 신에게 반기를 든 죄인은 아니다.

“당신에게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앞에 내밀어진 손이 무엇을 쥐고 있든 뿌리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그가 알고 있음을 그녀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향해 제안을 건네리라는 사실도 안다.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다. 교주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는다. 늘 그랬듯, 언제나와 같이.

“제 손을 잡으세요. 누구보다 신 앞에 신실하던 당신이 함께라면 도시는 빠르게 회복될 것입니다.”

함께 이 진실을 세상에 알립시다, 덧붙는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그녀가 혀를 찬다.

“진실 같은 소리를 하는군!”

그의 ‘진실’ 또한 주인을 닮아서, 설탕 옷을 입었으나 속은 독사과다. 시작은 달콤해 보이나 실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저 역겨운 입술과 뱀 같은 혀로 속여먹은 시민들이 얼마나 될지 그녀는 감히 어림조차 할 수 없다.

“내, 앞에서, 꺼져라.”

그녀가 한 글자씩 꼭꼭 씹어 내뱉는다. 묻어나는 역겨움은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주는 웃는다. 비열한 눈웃음을 띠우며 마치 기도하듯 양 손을 가볍게 모은다. 과장된 동작이 그녀를 자극한다. 쯧, 그녀는 혀를 찬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숨이 뜨겁다. 

“인정하세요.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진실이 필요한 법이죠.”

“애초에 진실이 아닌 것을 가져와 새로운 진실이라고 들이미는데, 내가 그것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면 또 어떻답니까.”

교주가 어깨를 으쓱인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어디까지가 검증된 이야기이고 얼마나 거짓이 섞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진실이 되는 법이랍니다? 그녀는 이를 악문다. 신이여, 보소서. 빌어먹을, 저 빌어먹을 악마의 자식이 감히 당신을 두고 뭐라고 지껄이는지-. 당신도 그걸 알고 있었잖아요, 덧붙는 말이 신경을 온통 긁어 헤집어 놓는다. 사실은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도시는 안쪽부터 썩어 문드러졌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부패해 가고 있었다. 신의 이름을 등에 업은 자들이, 부끄럽게도, 가장 앞에서 이를 자행했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다. 그것은, 아무리 지독한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더라도 오로지 진실에 의해서만 고쳐져야 한다. 진실의 탈을 쓴 저급한 거짓부렁 따위에게 도시의 생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녀가 으르렁거린다.

“내 믿음을, 그리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지 마라.”

“물론 당신이야 그러시겠지만.”

그녀는 답하기를 그만두고 남자를 본다. 하도 교만하고 또 교만하여서 제 주제도 모르고 미친 듯이 날뛰는 짐승을, 경멸하듯 본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저를 들여다본댔던가. 그녀의 시선에 화답이라도 하듯, 짐승 또한 그녀를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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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는 여기 그의 방, 성직자의 앞에 서 있지만 그녀를 통해 그보다는 조금 더 과거의 장소를 본다.

그의 눈꺼풀 안에는 20년 전쯤까지 존재했던, 아직은 깨끗한 도시가 있다. 하나의 신을 섬기는 신실한 가문이 있고 그 신의 신자들을 위한 수도원이 있다. 성직자가 되어 가문을 이끌어 갈 촉망받는 장래의 소녀가 살았고 훗날 신을 자처할 소년이 그를 만난 하얗고 깨끗한 건물을 그는, 성직자의 탁한 청회색 눈동자를 통해 본다.

세상은 차갑고 잔인하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이에게는 한 터럭의 쉴 곳도 내어 주지 않는다. 그 사실을 그는 너무 일찍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 이를 가르쳐준 것은, 공교롭게도 처음으로 온정을 베풀었던 이들.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랑해 마지않는 신의 충실한 종이었다.

그 날 그 빗속에서 그는 물었다. 신을 믿는다고 외치는 인간들의 가려진 진실은 얼마나 추악한가. 그 날 그 진눈깨비를 맞으며 그는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원래의 것은 이 빗물에 씻어 흘려 버리고 빈 공간에 새로운 진실을 빚어 넣어야겠다.

진실이 무엇인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지극히 진심이었다. 이 도시의 어디에서도 진실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한 줌의 진정도 찾아낼 수 없다면 만들어서 뒤집어씌우면 그만 아닌가?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교주는 성직자의 손목을 잡는다. 그녀는 소스라치며 그의 손을 뿌리친다. 알알하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교주는 매만지고, 자국이 남을 때까지 손톱 끝으로 꾹 누른다. 그러고는 성직자의 눈을, 그녀의 조카와 비슷하지만 더 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공을 내려다본다. 울고 싶어져 입맛을 다신다. 일그러진 표정은 지독히도 올곧고 깨뜨리고 싶게끔 고집세다.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굽어지지는 않는 사람이다.

당신은 항상 이러했으므로. 이런 상황까지 치달을 것 정도야 진작 알고 있었다. 그녀마저 제 발밑에 두고 손끝만으로 휘두르는 모습을 바랐다. 도시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를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기분은 어떨까! 실패는 늘 아쉽지만 새로운 놀이 또한 그의 마음에는 든다. 고결한 목덜미를 잡아 똑 부러뜨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때가 되면 당신은, 어떤 비명을 지를까.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가 웃는다. 웃으면서, 축객령을 내린다. 다음에 뵐 때는 좋은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녀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단호하게 홱 돌아선다.

“기다려 봤자 바뀔 것은 없을 텐데.”

“영매 양이 방까지 모셔다 드릴 겁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졌고 형편없이 비뚤어졌다. 그래서 그는 웃음짓는다. 이것이야말로 거짓된 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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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하얀 대리석 복도 위에 깔린 카펫을 밟는다. 얇은 슬리퍼 바닥을 넘어 폭신한 감촉이 그대로 전해진다.

“모두들 친절하세요. 하나같이 신실하고 다정하세요. 고모도 분명 좋아하실 분들이에요.”

그녀는 무심코 창밖을 본다. 땅거미가 내린 길거리는 어둡고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속에서 풀어진 분위기를 인지한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발걸음은 가벼워 보인다. 이전에는 어느 때에도 찾아볼 수 없던 감정이다.

“내일은 저랑 같이 옥상에 가 보면 어때요? 온실이 있는데, 친해진 언니가 거기 정원을 가꿔요. 꽃이 많이 피어서 정말 예쁘더라고요.”

말 없고 사람에게 정 주기를 힘들어하던 조카가 이제는 살갑게 말을 건다. 대답 대신 그녀는 눈을 감는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진실이 필요한 법이란다. 지극히도 우스운 소리다. 진실은 애초에 하나뿐인 것,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가 주장하는 진실 또한 가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뜬다. 창 밖을 거니는 사람들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소복히 눈이 쌓이고 똑같은 빨간 목도리를 두른 연인이 눈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이 도시에 필요한 건 진실보다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신이여, 부디 대답하소서. 여기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그녀는 펜던트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준다. 모서리와 손바닥 사이로 찬 공기 한 가닥 새어들 틈조차 없이 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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