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나절

화화

너는 모두를 구했어. 그럼 너는 누가 구해 줘?

모바일 게임 《마피아 42》 기반

공식 카페 '도운'님 주최 합작


인게임 세게관을 반영하였으나 스토리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C)떨리고설레다 2020

火化


구원자

“축하해.”

마피아가 비아냥거렸다. 잔뜩 쉰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나왔다. 제가 듣기에도 상당히 거슬리는 음성이었다. 그 소리를 가지고, 마피아는 웃었다. 하하, 하, 하하…. 깊은 허탈함과 좌절감에 휩싸여서, 쇳덩이와 쇳덩이가 맞부딪치듯 처연하게. 입 안은 바싹 말라서 혀가 천장에 달라붙을 지경이었고,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목구멍은 타들어가는 듯 쓰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하하하….

그가 다시 말했다.

“축하해.”

체중이 실린 발에 꾸욱, 뒤통수가 밟혔다. 조금은 무뎌졌지만 여전히 단단한 군홧바닥이었다. 그는 형편없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입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흙모래 속에서 호흡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썼다. 코와 입술이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짓눌려 아팠다. 혀에 닿는 알갱이가 까끌거렸다. 

“잠시.”

낮은 명령과 함께 가해지던 압력이 멈추었다.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힘 탓에 머리가 억지로 들어올려졌다. 그제야 숨통이 트여 마피아는 기침을 몇 번 했다. 고개를 돌리고 입에 들어온 것들을 거칠게 뱉어내었다. 피와 침, 흙가루가 섞인 끈적한 액체였다.

마피아는 제 머리, 정수리와 뒷목 사이의 적당한 곳에 대어진 AK47 소총의 주둥이를 느꼈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허리께에 걸리는 돌멩이의 크기만큼이나, 뺨에 남은 땅의 온도만큼이나.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두껍고 단단한 장갑에 감싸인 손끝을 마피아의 위치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어쩐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마피아는 눈동자를 위를 향해 굴렸다. 반대로 저를 내려다보는 무감각한 얼굴을 마주했다. 새하얀 후드로 머리카락을, 검은 마스크로 하관을 가려 생김새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충분했다. 곧은 눈썹은 어떠한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러웠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피아를 마주 쏘아보았다. 살아온 삶도, 인연도, 미래도 모조리 가져다 버린 눈이었다. 신념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은 혁명가의 눈이었다.

마피아는 그런 표정을 한 여자를 딱 하나 알았다. 

“네가 이겼어.”

테러리스트의 시선에는 여전히 한 줌의 변화조차 없었다.

-

영웅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끝나가는 세계, 절망, 그리고 각성의 계기를 제공할 악당만 있으면 된다. 테러리스트는 운이 좋게도 그 모든 것이 갖춰진 시기에 살았다. 거기에 더불어 목숨을 걸 만한 신념과 그걸 지킬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는 완벽하게 모두를 구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테러리스트는 그저 손을 뻗어 영웅의 자리만을 움켜잡으면 되었다. 마왕의 목을 꺾은 용사, 지상을 덮은 악 앞에 홀로 서서 대적한 신화의 주인공. 가장 영광스런 이름이 그녀만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녀가 세상에 구원이라면 마피아는 멸망이었다. 세계, 종말. 그보다 그 단어를 완벽하게 정의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피아는 평생에 걸쳐 끝을 그리고, 또 꿈꿔 왔다. 나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악마와 손을 잡을 정도로 절박하게. 전염병이 돌고, 괴수들이 몰려든다. 인간은 분열하고, 불신하여 뿔뿔히 흩어진다. 결국 지구상에 남을 것은 피, 살육, 피, 진득하니 달콤한 광기의 현장. 이를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부를 수 있을까!

“아쉽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마피아는 나오는 대로 주절거렸다. 아쉽다…. 눈가에 달린 속눈썹마저 무거웠다. 사실 온 몸이 전부 그랬다. 근육 세포 하나하나가 불꽃에 녹은 향초라도 되는 양 흘러내렸다. 이러다 물이 되어 바닥에 고이는 건 아닐까. 마피아가 웃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토할 것 같이 어지러웠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영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상이 어려워지고 악이 활개치면 누군가는 반드시 총대를 매기 마련이다. 이번 또한 그러하였다. 가장 강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모여 악마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예(精銳). 엘리트라고 불렀다.

마피아의 인생을 건 계획을 무너뜨린 것이, 고작 그 몇 사람이었다.

마피아는 눈을 감았다.

“넌 모두를 구했어.”

멸망은 끝났다. 세상은 절망에서 구해졌다. 그걸 해낸 이가 그의 눈 앞의 여자, 악에게 가차 없고 때로는 그보다 더 무자비하며 신념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버릴 정도로 악착같은, 엘리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엘리트.

그녀는 세계를 너무 사랑하여 제물로 저를 바쳤다.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생들의 행복을 지켜내기 위하여 제 것을 버렸다. 가족, 동료, 희망…. 마피아는 테러리스트가 잃은 모든 것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아름다움이 보장되었던 미래, 제 손에 하나씩 산산조각난 유리구슬들. 굴러떨어져 바닥과 충돌할 때 빛은 반짝임을 잃고 보잘것없는 폐품으로 전락했다. 

이제 모두가 테러리스트를 영웅으로 추앙할 것이다. 마왕의 목을 꺾은 용사, 지상을 뒤덮은 악 앞에 홀로 서서 대적한 신화의 주인공이라 높이어 부를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마피아만은 알았다. 꼭대기는 한 사람만을 위한 자리다. 높고 영예롭지만 단 한 명도 온전히 발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아슬한 공간. 

마피아는 번쩍 눈을 밀어 떴다. 곁은커녕 주변에 남을 사람도 더는 없을 것이다. 그곳, 가장 높고 아름다운 세상의 중심에서 그녀는 평생 지독한 외로움 위를 뒹굴어야 할 것이다!

“네가 모두를 구했다고….”

아하하, 마피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쩌면 너는 모두를 구했다. 오로지 너만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두를. 그는, 가장 비참한 순간, 어이없게도 저를 나락까지 끌어내린 이를 동정했다.

마피아가 물었다.

“근데 너는 누가 구해 줘?”

방아쇠에 걸쳐진 손가락의, 그 주인인 군인의 동요를 느꼈다. 머리카락을 잡아 지탱하던 손은 놓인 지 한참이었기에, 마피아는 있는 힘을 모조리 짜내어 고개를 빳빳이 고정했다. 뒤통수를 미는 소총의 주둥이에 지지 않으려 버티며. 지친 목뼈가 바들거렸지만 굴복하지는 않았다.

테러리스트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길, 군인의 1할만큼이라도 마음이 흔들려 회의를 느끼게 되길. 이 순간 마피아는 무엇보다 간절히 바랐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흐르는 시간이 억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테러리스트가 입을 열었다.

“글쎄?”

고집스러운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마스크를 턱까지 끌어내렸다. 매끈한 뺨과 코, 턱과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이 드러났다. 비릿한 웃음이 아슬하게 입꼬리에 걸쳐졌다.

테러리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불구덩이

“선생님.”

그는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온갖 도구들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든다.

“무슨 일이니?”

“며칠 전에 들려 주신 이야기 말이에요,”

내가 우물거린다.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는 내 침대 곁에서 옛이야기를 해 준다. 그것이 그의 기나긴 하루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이었다. 보통은 시시한 공주나 요정 동화였지만 가끔씩 들을 만한 것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오늘의 것 같은, 나를 며칠 동안이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든 이야기.

노련한 노장에게 승산 없는 싸움을 덤빈, 어느 작고 약한 나라의 소년 병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왜 그 사람을 칭찬하는지, 이렇게 이야기로까지 만들어서 기억해야 할 이유가 그 사람의 무엇에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서요.”

그는 대답하기 곤란한 듯 보인다. 잠시 왼쪽 위로 눈을 굴리며, 답하기 어려운 질문(살 날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환자들의, 제게 얼마의 시간이 남았나요, 같은)을 받을 때면 늘 짓는 특유의 애매모호한 미소를 띠었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려놓는다.

내가 다시 말한다.

“제가 보기에 그 병사는 그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한걸요….”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가 웃는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진심이어서, 눈가가 존재감을 또렷이 드러내며 서글서글하게 접힌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보다 한참은 젊을 때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는 새치 한 가닥 없다.

“아가.”

그가 부른다. 흑요석을 닮아 까만 눈동자가 빛을 받아 확신으로 반짝인다. 나는 바닥을 툭툭 걷어차던 신발코를 가만히 둔다. 구부정하던 자세를 똑바로 하고, 괜히 긴장하여 그의 눈을 마주본다.

그가 설명한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고 실제로 그를 위해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그것만으로도 그 병사는 충분히 위대하고, 우리에게 기억될 만한 자격을 얻은 거야.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나의 하나뿐인 보호자, 암흑뿐인 세상에서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나의 사랑스러운 의사 선생님이 굳이 희망 범벅의 동화만을 들려주지 않은 이유를,

그리고 왜 달콤한 설탕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어리석고 한심스러워 보이는 한 소년의 이야기만이 나를 이토록 매료시켰는지를.

이는 그것이 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같은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나를 과거에서 거칠게 끄집어낸다.

“네가 이겼어.”

피와 모래가 섞인 침을 뱉어내고선 놈이 말한다. 아쉽네,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지껄일 힘은 남았는지. 지치지도 않고 한참을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핏방울을 굳혀 놓은 것 같은 눈알에는 더는 한 줌의 생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려나, 안개가 낀 듯 흐리멍텅한 시선을 마주보다가 문득 궁금해한다.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어, 그 뱀 같은 혀로 내 머릿속을 꼬여낼 시간을 놈에게 주지는 않는다.

지친 목소리로 놈이 되읊는다.

“넌 모두를 구했어.”

나는 움찔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그를 마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모두를 구했다. 멸망을 끝냈다. 세상에서 끝없는 밤을 몰아내고 빈 자리에 해를 띄웠다. 대가로 모든 것을 지불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삶, 나의 신념, 존재의 목적, 내가 아등바등 평생을 버텨 온 이유였으므로.

나는 세계를 너무 사랑하여 내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바쳤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생들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내어주었다. 가족, 동료, 희망… 나의 전부, 놈이 친절하게도 부수어뜨린 나의 모든 것.

이제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네가 모두를 구했다고….”

놈이 웅얼대다가 이내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린다. 죽을 때가 되었는가, 마침내 미쳐 버렸구나…. 소름 끼치는 소리에 섬짓 돋아오르는 소름을 무시하려 나는 입속으로 비아냥거린다.

한참을 괴기한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그 동안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마침내 광기가 지나가고, 마피아가 묻는다.

“근데 너는 누가 구해 줘?”

놈의 뒤통수를 여전히 겨눈 것은 내 동료의 총구 끝이다. 내가 걸어온 길만큼이나 길고, 거기서 밟았던 쇳조각만큼이나 차가운 금속 덩어리. 방아쇠에 걸쳐진 손가락의 동요를 나는 느낀다. 애써 담담한 척 내 지시를 기다리는 그의 눈동자가, 지금까지 겪었던 다른 어떤 상황보다 나를 울고 싶게 만든다.

고개를 빳빳이 든 놈의 얼굴에는 어쩐지 의기양양한 표정이 서린다. 나는 대답하기를 조금 밍기적거린다. 사실 딱히 고민할 것도 없는 물음이었음에도, 놈이 마지막의 희락을 최대한 오래 즐길 수 있도록.

동료가 울상을 짓는다. 배제해 두었던 감정이 뒤늦게 몰려든 듯한, 그보다는 그의 친구에게 조금 더 어울릴 법한 슬픈 입매로. 너는 또 왜 그래, 알면서도 시작한 일 아니었니. 그를 보다가 나는 웃는다. 우리 이 정도는 각오하고 여기까지 걸어왔잖아? 마스크로 가려져 눈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함을 나는 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놈에게로 눈을 돌린다. 철사를 눌러 코끝을 꼼꼼히 막았던 마스크를 턱까지 끌어내린다. 악마를 보며 다시 한 번 미소지어 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하게, 승리자만이 지을 수 있는 아름다운 웃음을.

“글쎄?”

내가 대답한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군화에 묻은 더러운 피를, 대신하여 정성껏 닦아 주며 내가 속삭인다. 내 친애하는 동료는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신념의 대가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나는 놈에게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한 말을 입 안에서 굴린다. 세상을 구한 것이 나인데, 그럼 나를 구할 이는 누구냐는 질문에.

아무도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땅바닥에 고정된 사랑하는 동료의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잠시 망설이던 그의 눈동자가 마주 굴러 나를 향한다. 그러니 부디 그런 표정 짓지 말자, 내가 웃는다. 예정된 파멸을 애도하는 일은 우리 조금만 나중으로 미루자.

이 길을 선택한 이상, 우리에게 남은 구원이란 없다. 너도, 나도 그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었니?

나는 마스크를 도로 코까지 올린다.

“이만 돌아가자.”

한때 세상을 덮은 악이었던 것은 이리도 보잘것없다. 죽은 남자를 뒤로하고 나는 자리를 뜬다. 뒤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따른다.

그러니 너는 선택을 후회하지 말아라. 신념을 짊어지고 뛰어든 곳이라면, 그곳이 끝없이 타오르는 불못일지라도 어찌 아름답지 않겠니.


파트너

 “네가 모두를 구했다고….”

악마가 웃었다.

“그런데 너는 누가 구해 줘?”

그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군인은 제 얼굴이 놈에게 보이지 않음을, 그래서 마지막까지 비웃음당하지 않음을 뼈저리게 감사했다. 뒤통수에 댄 총구 끝이 흔들렸다. 혹시라도 총알이 엇나가지 않도록 힘을 주어 꾹 받치고,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동료의 눈을 바라보며 떨어질 지시를 기다렸다.

정신이 아득했다. 여우 같이 비상한 머리와 뱀 같이 교활한 혀로 머릿속을 헤집어 함락시키는 것이 놈의 특기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절대 넘어가지 말자고 수백 번 다짐했던 것을 상기했음에도 불안을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사실은 여전히 조금 무서웠다. 처음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그를 위해 예정된 운명이 두려웠다.

그를 달랜 것은 언제나 그랬듯 동료의 담담한 표정이었다. 반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굳센 고집을 담고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테러리스트가 웃었다. 마스크에 하관이 가려져 눈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고픈 말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군인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속 안의 모든 것을 태워내고 이젠 바깥으로 번지려는 열기, 모든 악을 까맣게 그을려서 정결케 하는 성스러움이자 결국에는 두 사람마저 영원토록 집어삼킬 화염.

테러리스트가 마스크를 벗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한 글자씩 씹어 내뱉었다.

"글쎄?"

그녀가 말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겨우겨우 눈을 붙이더라도 몇 시간 채 쉬지 못하고 금세 눈을 떠야만 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탓이었다.

군인은 진즉에 테러리스트를 따라 모든 것을 버렸으므로 무엇에도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빼면. 의미하는 바 또한 하나였다. 그 한 요인, 사소하고 무가치해 보이나 사실 그의 전부였던 어떠한 것. 그 작은 얼룩이 그를 꽁꽁 가두어 덮어 잠시도 평안할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눈꺼풀 안쪽에서 한 장면만이 쉴새없이 반복하였다.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릿하면서도 나른하게 흘렀다.

단 한 명의 관객만을 위해 상영되는 낡은 필름에서, 군인은 연인의 손을 놓았다. 혹은 그녀가 그의 손을 놓았다. 어느 쪽인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날 연인은 울었다. 모든 것을 껴안고 가고자 하는 그녀의 깊은 마음에는, 그의 큰 손에 겨우 한 줌 가벼이 쥐어지는 여린 어깨에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위하여 작은 희생을 묵인해야 하는 그의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뛰어내렸다.

오늘같이 달이 구름에 가린 밤이면 아직도 군인은 종종 그때의 꿈을 꾸었다. 그 날 그녀는 울었다. 처음으로 진짜 어린 아이같이, 크게 소리내어 엉엉 울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이 또한 그랬다. 그가 어린 연인을 잃은 날이었다. 아직까지도 눈꺼풀 안쪽에서 선명하게 재생하는 달 없는 밤의 악몽이었다.

양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고 머리를 식히다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군인은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만 머물러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거의 구르다시피 하여 겨우 침대에서 내려왔다. 몸은 물에 담근 솜처럼 무거웠고 차가운 슬리퍼에 밀어넣는 발바닥에는 감각이 없었다. 정수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모든 피로의 무게를 무시한 채 군인은 베란다로 향했다. 창문을 활짝 밀어 열자 한겨울의 얼어붙은 공기가 가득 밀려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거기서 군인은 난간 너머 1층에 선 테러리스트를 보았다. 오로지 두 개의 가로등 불빛에만 의지하여, 놀랍도록 우아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듯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날로 허공을 가르고, 길게 뻗은 다리를 번쩍 들어올려 내지르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가볍게 도약하며 걷어찼다. 그녀는 아직도 싸우는 중이었다. 한없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저를 에워싸고 숨막히게 조여드는 과거의 망령에 끊임없이 칼을 들어 맞서는 중이었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기꺼이 포기한 수백의 삶.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치사(致詞)와 지나치게 빠른 포기였다는 비난, 상충되는 두 평가 중에 살아남은 것은 여느 인간이라면 전부 그렇듯 후자였던 탓에. 모조리 태워 버린 죄책감이 재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날이면 그녀는 밖에 나갔다. 달 아래 홀로 서서 모든 원망을 대적하여 싸웠다.

군인은 테러리스트의 현란한 움직임을, 가늘고 탄탄한 팔다리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궤적을 지켜보았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2층의 난간을 타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잠시 비틀대는 발걸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 그녀 앞의 빈 공간에 제 몸을 끼워넣었다. 테러리스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이내 매끄럽게 군인의 공격을 흘려넘겼다. 그렇게 수 합이 오갔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머물렀던 달이 서쪽 하늘 모퉁이에 겨우 걸려 있을 때까지.

두 사람은 몸과 마음을 온통 녹여 가며 싸웠다.

-

"받아."

바닥에 주저앉아 이마를 훔치는 테러리스트에게 군인은 갓 떠온 물컵을 건넸다. 고마워, 건네지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 평정을 방패 삼아 군인은 늘 품어 왔던 질문 하나를 감히 던져 보기로 했다.

"우리가 세상을 구했지?"

당신은 세상을 구한다고 했잖아요, 절규하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했다. 어린 연인이 울부짖었다. 오늘 당신이 죽인 그 사람들, 당신이 끌어올리길 포기한 벼랑 끝에 매달린 그 사람들은 세상이 아닌가요? 군인은 그녀를 이해했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도 같군."

테러리스트가 인정했다.

"그래, 우리는 세상을 구했다."

하지만 모두를 구한 건 아니지. 테러리스트는 빈 잔을 돌려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회는 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내가 고른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몇 번을 기회를 받는대도 결코 다른 길을 걷지는 않을 거야.

"누군가에게는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겠지. 그 대가는 기꺼이 내가 짊어지고 가겠어."

군인은 테러리스트를 존경했다. 그리고 동경했다. 그녀는 그의 파트너, 이 불신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그가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동료였다. 동시에 테러리스트는 군인이 아는 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녀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감히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대 평생을 살면서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곧은 신념은 확고했고 그 앞에 버티고 선 다리는 강인했다.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서도 일말의 후회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를 뭐라고 부르든 우리는 세상을 구했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니, 덧붙이며 홱 몸을 돌려 걷는 테러리스트의 뒤통수가 한 걸음씩 당당하게 멀어져 갔다. 여느 때처럼 턱은 빳빳이 세웠고 자세는 올곧았지만 군인은 어깨에 드리워진 서늘한 그림자를 얼핏 본 것도 같았다. 그는 문득 악마의 말을 떠올렸다. 마디마디를 산산히 씹어뱉을 때 놈이 지은 표정과, 그 눈동자의 섬뜩함을. 그러자 다음 말이 꺼내고 싶어졌다.

“…그러면 우리는 누가 구해 주지?”

“글쎄.”

“우리는 지옥에 갈 거야.”

군인은 도로 먼지를 뒤집어쓴 부츠로 동료의 뒤를 따랐다. 두어 걸음쯤 앞서 가던 테러리스트가 걷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무심한 눈빛에서 군인은 제 어린 연인을 떠올렸다. 티 묻지 않아 깨끗하던 옥색 눈동자가 세상에 찌들어 가맣게 빛을 잃어 가던 과정을 기억했다. 세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눈 감아 외면해야 했던 수많은 비명들이 뇌리에 울렸다.

“그래, 같이 가야지.”

테러리스트가 웃었다. 여태껏 보인 중 가장 환하고 미련 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 어딘가에 감추인 고통을 군인은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순간 군인은 제 동료 또한 저와 같은 것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테러리스트가 말했다.

"거기서 놈을 만나서 인사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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